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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여행자의 독서2
저- 이희인
출-북노마드(문학동네 계열사) 2014.12.31.427쪽
독정-2019년 2월 23일
· 여행에 대한 단상
·영화 <버킷 리스트>속 주인공이 그랬듯이 사람들은 문득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식했을 때 그동안 오래 미뤄둔 여행을 간다. 왜 좀더 일찍 생이 꽃이 만랗할 때 떠나지 않을까?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치를 만큼 여행이란 그토록 가치 있는 것일까? 지구 끝까지 가고 싶었던 여행도 더러 있었지만, 어디에서 끝은 없었다. 대신 외로움의 끝, 고독의 끝을 맛본 여행은 종종 있었다. 방조차 잡지 못해 기차역 벤치에 고단한 몸을 누이던 젊은 날의 여행들, 아, 그 많던 여행들
·십 수 년 전 한 여행자가 건넸던 사진에 앉아있던 그 부처님
·여행자는 모름지기 곧잘 감격하고 곧잘 우는 사람이어야 할 터, 기꺼이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맞잡아주는 사람이어야 할 터. 바다를 만나면 바다로 뛰어들고 산을 만나면 산을 넘는 사람이어야 할 터. 비린내와 땀내를 사랑하고 소낙비에 모처럼 얼굴을 씻는 자여야 할 터. 내 이름은 여행자다. 검은 손등위로 어시장의 은빛 비늘이 반짝 빛난다.
여행 자율화 이후 미지의 새상을 향한 셀렘이 분출하던 때의 이야기겠지만 그게 꼭 당대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근래 쓰인 책들부터 먼 옛날 기록에 이르기까지 머나먼 세상을 구경하고 왔다는 사람들의 얘기와 기록이란 온갖 과장과 허풍이 난무하는 픽션 이상의 픽션이기 십상이다. 따분한 일상을 벗어난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은 새로운 이야기를 공급하거나 지지부진한 시대의 상상력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발원지이기도 했으리라. 그렇듯 여행이란 어쩌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다. 젊어 여행하지 않으면 늙어 손자에게 해줄 얘기가 없다던 속담도 그런 맥락이다. 기행 혹은 여행 문학이란 본질적으로 허풍과 과장을 일심는 문학이다 .남들은 경험하지 못한 세상 얘기를 들려주거나 상상력에 새로움을 불어넣는 발원지.
·여행, 그 하찮은 쓸쓸함을 위해서라도 언제든 기꺼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키우던 화초가 여전히 싱싱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다면 문득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 물을 챙겨줬을 테지만 죽지 않고 살아 ‘어서 오시게나’하며 반기는 키 작은 화초가 잘 자라고 있다면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침대에서 자 고 싶기도 하고 텐드에서 자고 싶기도 하는
· 여행에서 늘상 가장 큰 문제는 똥 마려움이 아니던가. 기차는 느렸고 바다는 비렸고 아침 시장에는 땀냄새가 진동했으며 이발소에선 익숙한 비누 냄새가 가득했다,. 느림과 비릿함, 낯설거나 익숙한 것들이 버무러져 여행이 된다. 스리스리랑
· 여행 반대말은? 일상, 권태, 집. 거실 소파. 왜 신은 인간에게 여행을 하게 했을까? 자신의 위대한 작품인 새상을 자랑하기 위해? 경외감을 갖게 하기 위해? 바벨탑으로 흩어놓은 세상을 다시 만나게 하기 위해? 미망에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에게 니르바나를 찾는 연습을 시키기 위해? 여행하지 않고 한곳에 붙박아둔 채 살도록 내버려두었으면 인간을 관리하기가 얼마나 쉬웠을까? 대관절 저의가 뭘까? 특히나 어떤 인간들을 여행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도록 만든 신의 저의가. 물론 여행은 쓸 없는 짓이다 .그러나 여행에는 진정 의미가 있다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고 했던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여행 역시 쓸모없는 여행이어야 마땅하다. 쓸모없음이야말로 여행을 떠나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래서 자유와 부자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일상의 질서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생각이 기차를 타고 생각이 물건 값을 깎고 생각이 사진을 찍고 생각이 사람들의 땀내를 믿는다. 여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생각이다.
· 집이란 잠시 들러 신발 끈을 묶고 오는 곳이라고 소설가 은희경은 말했다. 내게 집은 여행에서 읽은 책을 반납하고 새 책을 빌려오는 이동도서관? 여행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겐 집의 서재로 달려가는 길. 서재에서 교환한 책을 들고 다시 길 위로 돌아온다. 서둘러라. 기차를 놓칠 것이다. 이따금 기차를 놓치고 천사를 만날 수도 있을 테지만.
· 인간의 불행의 유일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여행의 기술>엣 위험과 고생, 두려움을 감수하는 여행, 시골의 완만한 풍광과 예술작품, 작가들의 생각을 쫓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현지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섞이고 그들의 시장, 극장, 삶으로 들어가는 여행들,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무덤까지 가져갈 이야기로 가득 차 돌아오는 그런 여행들, 여행의 기술은 좁혀지지 않는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나 장그르니에의 <일상적 삶>에 기록된 사색들이 더 값진 통찰력을 준다.
· 천천히 여행했다. 낡고 불편한 버스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시골 풍경이 따뜻하게 안겨왔다 일찌감치 시골에 터를 잡고 농사를 시작한 선배가 가다가 똥 누고 싶은 맘이 드는 땅이 내땅이라고
· 여행이란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일, 사람이든 풍광이든 관념이든 결국 아무 것도 찾지 못하는 게 어쩌면 더욱 여행다운 것 아니겠는가?
-꽃을 보고 오는 게 여행이지. 다른 게 여행일까. 아직 피지 않은 꽃나무들에 만발한 봄꽃을 상상하는 것이 그 꽃나무 이파리 지는 걸 나비로 착각하는 것이 여행이지 바다보다 더 넓게 드러나며 마음을 사로잡았던 세상 어느 곳, 비밀의 화원.
-여행자의 풍광과 풍물을 소개하는 텔레비전이나 책, 넘치는 정보들은 여행자가 품을 환상을 퇴색시키는 듯.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축복받은 환경은, 여행이 힘들고 고단하며 고곡과 모험을 즐기는 행위라는 생각을 비웃는 듯.18,19세기에 누렸던 <80일간의 세계 일주> 그때의 기록들에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 자신을 과감히 내던지는 용기, 새로운 것을 순전하게 맞닥뜨리는 즐거움과 놀라움이 가득해보인다. 별을 보고 가야할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하는 평론가의 탄식은 지금 어디들 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여행 시대에 가슴 절절하게 울려온다. 여행의 빛이 바랜 이유가 그 ‘아우라(분위기)가 사라져버렸기 때문 아닐까? 땅을 읽는 여행은 저절로 땅의 슬픔을 읽는 일이 되곤 한다. 우리가 어떤 여행지에서 모자를 벗을지언정 머리를 비우며 여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땅의 내력이 담긴 책을 가져가야 마땅할 듯. 길 위에서 틈틈이 읽는 책들 속에 또 다른 여행의 길이 있다. 쩝.
-여행과 책은 대개 세 지점에서 만난다. 여행 전과 여행 중, 여행 후. 일상에서 만난 어떤 영감에 가득 찬 책은 독서가를 여행으로 내몬다. 길 위에서 책은 여행자의 고달픈 길에 길돔무, 여행 뒤 만나는 책은 다녀온 땅에 대한 지식과 감상을 완성시킨다. 어느 지점에서도 책은 요긴하고 그만큼 여행을 풍부해진다. <둔황>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여행과 맞물린 책이다.
·여행이 아쉽고 젊음이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어떤 경험은 너무 아름다워 상흔이 되기도 한다.
·도수 높은 안경의 사서 선생이 도서관이나 서점 사람들은 손에 쥐어지는 책들이 어떤 가치를 갖는지 알기나 한단 말인가. <누란>을 발견한 것은 평생 산을 헤맨 심마니에게 마침내 하사된 천년 묵은 산삼 같다고나 할까?
-주위에는 항상 나처럼 낯선 길에 난감해하거나 당황해 하던 외로운 행성 같은 여행자들이 친구가 되어주었고,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준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길 위의 가족이었다. 내 손에 쥐어진 책,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인물들도 여행을 쓸쓸하지 않게 해준 친구가 되어주었다.
-외로우니까 여행이다.
-우리 땅에 오래전부터 오지라 이름 붙인 땅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인 듯. 세상의 오지를 하나하나 없애는 인간의 마음속에 오히려 오지가 더 넓어지는 건 아닐까?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지금은 사라진 오지들을 찾아서.
-살갗은 거칠지만 미소는 깊었다. 세상 어디에도 삶은 지속된다. 눈물겹게.
-사라하는 사람과 걷는 길이 가장 쉽고 아름다운 길이다. 텐먼 산의 그 아찔한 하늘 길을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걸었다 하늘 위에 사랑이 가득했다.
-한번쯤 가본 여행지라도 카메라를 바꿔 다시 가본다면 다른 눈의 여행이 가능하다. 가져가는 책을 달리하면 다른 생각의 여행이 가능하고 계절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체온의 여행을 경험하게 된다. 그럴진대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르면 온 우주가 새롭게 보이는 여행이 된다. 올해 칠순이 된 어머니에게 조금 다른 세상을 보여드리고 싶어 계획한 여행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 옛날에는 어머니가 나를 야단쳤는데 이젠 내가 어머니를 야단치고 있다.
-아주 낡아 종이가 바숴져버릴 것 같은 문학전집
일본의 겨울은 어딘지 우리네 겨울과 가까워 보인다. 이른 아침 동치미를 한 사발 담아 오기 위해 털신에 잔설을 묻혀가며 뽀드득뽀드득 장독대로 걸어가시던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가 그 풍경 어딘가에 있을 듯하다.
-오무라진 입술은 거머리의 몸처럼 늘어났다가 오므라든 것이 매끈해서 잠자코 있을 때에는 고물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소파에 누워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었다.
책 이야기
·<둔황>은 내게 단순한 소설 이상이다. 둔황으로 인해 실크로드를 간절히 꿈꾸었고 마침내 그곳으로 갔다. 읽고 난후 세세한 줄거리는 금세 잊어버렸지만 책을 읽는 느낌만은 강렬하게 살아남아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언제 읽어도 즐거움이 줄거나 변하지 않는 드문 소설이다.
·<아큐정전>막노동군 아큐는 가장 비천한 동네 무지렁이들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존재다. 그 만의 독특한 정신 승리법을 통해 ‘내가 자식 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절말 되먹지 않았어.’라고 자족함으로 패배의 기분을 승리로 전환시키는 흥미로운 캐릭터다. 두드려 맞고 봉변당하던 아큐는 성안에서 불기 시작한 신해혁명이 바람에 휩쓸려 아무것도 모른 채 혁명! 반란!을 외치고 다닌다. 혁명과 반혁명의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아큐는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처음 쥐는 붓으로 낯선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 뒤 이튿날 수레에 실려 어딘가로 보내진다.“ 그는 퍼뜩 깨달았다. 이것은 목을 ‘싹둑’하러 가는 것이 아니가? 그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귀속에서 윙하는 소리가 나면서 얼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때로는 조금해지기도 했으나 때로는 도리어 태연해졌다. 그의 생각으로는 사람이 천지지간에 태어나서 아마도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목이 잘리는 수도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이큐정전에서. 바보 아큐는 서양의 돈키호테와 닮았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에 등장하는 ‘백치(유로쥐비)’의 사상, 즉 바보들이 오히려 신에 더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과는 어딘지 멀어 보인다. 그는 단지 중국 현대사에 가장 먼저 희생당한 민초를 상징할 뿐이다. 이처럼 루쉰의 소설에는 잔존하는 봉건사회의 희생자인 하층민과 몰락한 지방 선비 등의 캐릭터가 하나씩 소개된다. 리얼리즘 문학에 입각한 아큐 같은 캐릭터는 그 뒤에도 창조되어 중국 현대시의 비극을 고발해왔다. 라오서의 <낙타상자> 주인공 시앙쯔, 작가 류전원의 >닭털 같은 나날>의 임 등에서 아큐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 문학이 고골리의 <외투>에서 나왔듯이 중국 문학은 아큐라는 캐릭터에 빚기고 있다.
·김산의 <아리랑>. 1931년 베이징에서 검거되어 조선으로 압송되기 전 한국 여성과 경혼한 일본 형사가 김산을 암송하면서 나눈 대화
“오늘 같은 날에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게 뭔가요?”
“조선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음과 패배의 노래입니다. <아리랑>이지요.”
나는 이 노래의 의미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황량한 갈색 벌판을 바라보고 광둥코뮌과 하이루펑을 생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감동하여 이제껏 들은 노래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칭송했다.
·<남쪽으로 튀어>는 술술 읽히는 책이다. 도쿄 초등학생 지로의 눈으로 서술되는 이상한 가족. 이상한 아버지에 돡한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 중학생 깡패에게 시달리는 초 6년인 지로의 난감한 학교생활과 차츰 밝혀지는 부모의 어마한 과거가 흥미롭게 전개되는 1편과 도쿄를 떠나 오키나와 영웅의 후예로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아이들에게 학교에 가지 않아도 좋다 권하며 국가 따윈 필요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왕년의 과격 운동권 출신 아버지. 갑부 딸로 과격 운동권의 일원이던 아버지의 오랜 종지인 어머니 그 부모의 피를 물러 뱓은 듯 당차고 유쾌한 지로네 삼 남매 이야기는 곰곰이 보면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이다. 한시도 분노와 슬픔. 따분함의 겨를을 주지 않으며 유쾌한 난장을 펼친다. 우익과 좌익 모두 환멸을 느낀 아버지가 오키나에 이리오모테 섬으로 튀어서 낙원을 건설하고자 하나 리조트를 건설하려는 건설회사와 결탁한 정치인에 의해 좌절된다.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보다 훨씬 남쪽 전설의 섬 파이 파티로마를 찾아 떠나는 부모. 그 괴짜 부모를 바라보며 소년 지로는 이제 무능하고 한심하게 보였던 아버지의 유쾌한 사상과 꿈을 이해해간다. 1권을 마쳤을 때 나 역시 책 속의 가족을 따라 따뜻한 남쪽 섬 오키나와로 가고 싶었고 내 아이에게 학교 따윈 가지 말라고 이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책은 일본 좌파운동에 대한 후일담 문학 성격도 있다. 선배 운동가들은 그들이 순수하다면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 같은 낭만적 아나키스트가 되었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단다.
“모모코, 국가 교육이라는 건 애초에 잘못되었어. 미국을 좀 봐라.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여 죄 없는 민중을 죽여., 그러면서도 자기들만이 정의라고 하잖아. 그거야말로 국가적 사상 교육의 결과야. 일본은 그런 미국 앞잡이 격이라고.”
“그 섬은 어느 누구의 통치도 받지 않아. 자급자족으로 살아가고 전쟁도 없고 모두가 자유야. 아니 국가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냥 커뮤니티야. 사람들의 모임,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지도에 실리는 것도 거부한 거야. 혼자 살더라도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들면 정치경제가 발생해.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가도 자본가도 필요 없는 거야.” 오쿠다 히데요 저<남쪽으로 튀어>에서
-<프라하의 소녀시대> 요네하라 마리 저
요네하리 마리는 부친을 따라 체코 프라하에서 초등교육을 박고 훗날 일본의 러시아 전문 통역사로 일한 에세이스타. 다 2006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프라하 소녀시대 책은 성장소설. 기행문학, 추리소설 구성까지 곁들인 기록문학소설이다.
조숙하지만 공부에는 관심 없던 그리스 소녀 리차. 공산주의자인 척하지만 루마니아 상류층 집안 출신인 귀여운 거짓말쟁이 아냐, 똑똑한데다 솔직한 세르비아 소녀 아스나. 이들 세명은 1964년 일본으로 귀국한 마리가 프라하의 봄과 동구권 붕괴 소식에 그 시절 친구들 안부를 걱정. 급기야 친구를 찾아 나서 탐정처럼 친구들의 흔적을 쫓아 결국 만나는 감격스런 장면이다. ‘친구네 집에 가는 데 먼 길은 없다.’는 속담처럼 친구를 찾아가는 아슬아슬 위태로우면서 따뜻하고 눈물겹다. “우리 엄마는 자살 한 안네 카레니나야야 ” 입심도 좋다. 친구가 길이다.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이 가장 소중한 여행길이다.
“옛날옛날 어느 곳에, 그야말로 우애 좋은 형제가 있었거든. 고생도 기쁨도 함께 나누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데서 온 어느 남자가 형을 찾아가 귀엣말로 속닥거린 거야. 그다음엔 동생한테 가서 속닥속닥 . 사이좋았던 형제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지.”-<프라하의 소녀시대>
베오그라드에 도착해 값싸지만 괜찮은 점심을 먹은 뒤 <프라하의 소녀시대>에서 도시를 조망하기에 맞춤하며 극찬했던 칼레메그단 공원에 올랐다. 다뉴브 강과 사바 강이 합수하는 풍경. 한가로이 시간을 허비하는 세리비아 사람들이 평화로운 드라마 속 인물처럼 느리고 게으른 발걸음을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평화가 못내 당황스러웠다. 전쟁과 학살의 본거지였던 도시가 이처럼 평화롭다니. 사람들은 선량할까? 그들이 주도한 전쟁은 무엇이란 말인가?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던 손택 여사의 일 같은 여기. 이 땅에만 던지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유럽은 바로 그런 곳이다 .세르비아가 두브로브니크를 폭격했거나 사라에보를 3년 동안 포위하고 있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곳이 바로 유럽이다. 보스니아인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뒀던 곳. 그곳이 바로 유럽이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의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타인의 고통>에서
·유럽에 대한 인상
은 그다지 재미있고 기꺼운 여행지는 아니다 이 대륙의 문화가 그간 우리 교과서와 책, 지식 세계를 도저하게 점령해왔지만 조금 삐딱하게 말해 유럽 땅들은 거기서 거기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이따금 만나는 눈부신 햇살과 한가로운 전원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교과서를 장식한 예술가들의 자취를 쫓는 일도 흥미롭다. 하지만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경비는 너무도 비싼데다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 삶을 마주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낭만적 거리 공연이나 멋진 노천카페에서 맛보는 커피, 유럽식 요리도 근사하지만 그런 거라면 이제 다른 나라 여행지나 우리 고향 마을에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나라들이 번잡하고 지저분하지만 어쩐지 활기 넘쳐나는 시장통을 활보하는 기분이라면, 유럽은 조용하고 인적 드물며 경비가 삼엄한 부유 주택가를 산책하는 것만 같다. 좀 심하게 말해 어딘가 박제 되어버린 여행. 핏기 없는 여행을 하는 것만 같다.
·아고타 크리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그려진 헝가리는 여행자들이 만나게 되는 박물관과 성당, 카페의 나라만은 아닌, 그들만의 전쟁과 혁명을 겪으며 절망 속에서 끈적끈적한 삶을 일구어낸 사람들의 땅, 그들의 피와 땀이 어린 땅이었다. 나치 점령기와 전후 헝가리 변방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어디에도 말끔하게 포장된 지난 여행 느낌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유리관 안의 안경들, 의료기구들. 인형들. 신발들, 가방들, 망자들, 나치의 이 끔찍한 켈렉션들을 보라. 인간이 차마 저지르지 못할 짓은 없구나. 아아. 인간이란 사실이 부끄러웠다.<죽음의 수용소>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니체의 말 빅터 프랑클린<죽음의 수용소에서.
가이드에 따르면 시체를 수습하기 전이나 수용소에 도착한 유태인 포로들로부터 압수한 여행 가방, 아이들 손에 쥐어졌던 인형과 장안감까ㅣ 가발을 만들기 의해 모아둔 둔 포로들의 머리카락, 포로들의 반지와 금이빨, 머리카락을 먼저 수집했단다. 이런 건물과 시설을 설계한 사람. 학살공장을 만들도록 명령한 사람. 무시무시한 시설이 운영되고 있음을 알던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을까. 그들도 수용소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뒤 어리광부리는 자식에게 한없는 사람을 보내고 노부모를 공경하며 한가로운 저녁식사를 즐겼을까? 발코니에 꽃을 키우고 애완견의 띠뜻함을 사랑했을까? 문득 인간이라는 사실이 혐오스럽고 부끄러워진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포로 수용소에서 작가의 변
폴란드 아우슈비츠<생의 한가운데><죽음의 수용소에서>,양철북><쥐><카산드라><책 읽어주는 남자> <아우스터리츠>
· 펄벅의<대지>는 인간의 드라마라기 보다 차라리 땅의 드라마다 엄청난 가뭄과 홍수는 인간을 죽음과 도둑질로 내모는 가 하면 성실한 농부로 하여금 기생집을 기웃거리게 민든다. 처가난이 가족을 똘돌 뭉치게 하지만 막대한 부는 가족 간의 불화를 불러일으킨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눈에 비친 중국 근현대사는 내겐 너른 영토를 축적해온 중국의 야욕을 은유하는 양 느껴진다.
<길 위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미국 대륙을 섭렵한 비트 세대의 경전<길 위에서>가 무엇보다 가장 많이 겹친다. 미국 길과 도시에 대한 해박함에서는 <나를 부르는 숲>이 어떤 것들에 대한 단호함에서는 <월든>의 기개도 느껴진다. 과거의 자아를 찾거나 부정하는 치열함은 막스 프라시의 <거인 슈틸러>의 냄새를, 부자간의 황폐한 로드무비의 형식은 <로드>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어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스스로가 몹시 자랑스러워지는 위대한 책들이 있다. 어린 시절 익은 두꺼운 <삼국지. 청소년기의 <파우스트> 나, 이런 책 읽었어!하고 오만을 떨어도 괜찮을 책!
·소설은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카프카
·소설의 배경 날씨, 비의 역할
· 많은 독자를 거느린 소설 중에 특별 계절이나 날씨, 배경으로 빛을 발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도스토엡스키가 묘사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찾아간 순백의 설국, 황순원의 소나기가 데리고 간 어느 날 소나기 내리던 오후. 백년보다 긴 하루의 황량함, 생떡쥐베리의 사막 등은 줄거리 이전에 그 묘사된 날씨나 풍광만으로 독자를 매혹시킨다. 인간보다는 날씨가 주인공인 것 같은 소설에서 소설가는 자연의 대필가 정도의 미미한 역할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머싯 몸의 <비>는 읽을 때마다 마음이 면도날에 벤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했던 책으로 가장 매혹적인 비 교과서다. 거세어가는 열대의 빗줄기, 광기의 선교사가 독선으로 창녀를 구원하려고 기도하는 갈등과 충돌. 익히 아는 반전이나 국면이 어느 길목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인가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일은 술래잡기의 셀렘처럼 흥분되고 마뜩하다. 소설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여러 요소들, 열대 빗줄기의 묘사나 광적 목사 캐릭터.
·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읽을 때마다 마음이 면도날에 벤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했던 책 카버의 단편집<대성당>은 소설가들이 스승으로 삼는 소설이다. 통상 우리에게 익숙한 기승전결 작법이 그에게는 그닥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과 행동에 구구한 설명과 해석을 덧붙이지도 않는다. 그 낯섦이란 마치 면도날에 베이거나 뜨거운 냄비에 데었을 때 잠시 먼저 찾아오는 무감각 같은 것 아닐까. “발밑에 흐르는 강>은 한때 아내와 친하게 지낸 맹인이 자신의 집을 찾아와 불편하게 여기는 남편<대성당>, 생일날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동안 아이의 부모에게 끊임없이 걸려오는 괴전화의 정체<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한 요양소에서 새해를 맞는 사내의 고독<내가 전화하는 장소> 등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극단적이진 않지만 평범하지 않는 주인공과 사건으로 고통과 비의를 캐고 혼란과 갈등 미묘한 떨림의 실체를 곰곰 되씹어보게 된다.
·조지오웰의 <1984>오세아니아의 소시민 원트턴은 빈민가 고물상에서 옛 노트를 별견하고 일기를 쓰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개인 감상이 금지된 사회에서 일기를 쓰면서 사회 모순을 느끼고 반감을 품으며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쥴이아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줄리아와 함께 억압적 체제의 전복에 목숨을 바치려고 다짐한 원스턴은 줄리아와 고물상의 이층 방에서 사랑의 밤을 보낸 아침, 어머니를 떠올리며 인간 본연의 감정을 회복한다. 체포 전 그가 되찾은 희망 정넝“전 세계에 퍼져 있는 수십 억 사람들이 서로 존재를 모른 채 증오와 거짓 벽으로 유리되어 있디가 이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지만 저마다 가슴과 개와 근육에 언젠가 이 세계를 뒤집어엎을 힘을 기르고 있다. 평등이 있는 곳에 올바른 정신이 깃들 수 있다.”
고문으로 사람마저 배반하고 빅 브라더에게 전향하는 윈스텅.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희망 없는 미래보다 원스턴의 전향에서 비롯되는 절망감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경고로 다가오기 때문.
-<작은 것들의 신>
카타칼리는 오래전부터 위대한 이야기의 비밀은 그 이야기에 비밀이 전혀 없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위대한 이야기들은 전에 들었지만 또다시 듣고 싶은, 어디서든 들어가 편안하게 깃들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스릴과 의외 경멸로 우리를 속이지도 않고 예기치 못한 내용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인다. 마치 어느 날엔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사랑을 쟁취하고 누가 그러지를 못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다시 알고 싶어한다. 그것이 위대한 이야기의 신비한 매력이다.
· 로힌턴 미스트리의 <적절한 균형>
인디라 간디 정권이 남발한 무자비한 국가비상사태에 인도 도처에서 우연히 비좁은 아파트에 모여 살게 된 재봉사들과 학생, 노처녀 등 4명의 등장인물이 끌어가는 소외된 사람들 안에서는 따뜻하고도 흐뭇한 인간애를, 그들 밖에서는 부당하게 일그러진 현실을 대비해 보여준다. 뜻밖의 결말이라 할 후반부에서 학생 마넥이 사회를 향해 던지든, 이 갈은 인도 사회에 던지든 작가의 분노다. “이 세상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빌어먹을 멍청한 신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신은 공평함과 불공평함의 개념이 있는 걸까? 신은 간단한 대차 대조표조차도 읽지 못하는 걸까? 마넥이 만났던 하녀, 뉴델리에서 죽은 수천 명의 시키 교도들, 손목에서 빠지지 않는 카라를 차고 있던 불쌍한 택시 운전사에게 생긴 일들을 볼 때 신이 회사의 경영자였다면 오래전에 해고 됐을 거다.
<나를 부르는 숲> 캐나다 로키산맥이나 북미 대륙 산으로 떠날 때면 일순위로 가져갈 책이다. 여행 에세이. 산행기다. 저자는 20연간의 영국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 작은 마을로 이사와 우연히 마을 끝의 숲길을 발견하고 거기서 에팔래치아 트레일이란 표지판을 보고 충동으로 종주 산행에 도전한다. 책 속에 묘사된 숲이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그 안에 사람이 있고 사람과 자연의 문제가 있기 때문. 나무가 있고 숲과 산이 있으며 여행이 있고 친구가 있고 사람이 있다. 이런 착한 단어들이 여행의 길에 함께한다. 지구온난화로 대펴되는 작금의 환경파괴, 환경재앙의 시대에 어떻게 자연과 만날 것인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폭포로 태어났으면 이쯤 되야 하지 않겠나며 종일 으르렁거린다. 여행자로 태어났으면 이구아수 폭포쯤은 만나야지 하며 어렵게 찾아온 자 앞에서.
<나를 부르는 숲> 캐나다 로키산맥이나 북미 대륫 산으로 떠날 때면 일순위로 가져갈 책이다.
루이스 세풀베다가 아마존을 배경으로 쓴 <연애 소설 읽는 노인> 해변이 나오는 존업다이크의 <브라질> 사진집은 여행 전 몇 번씩 뒤적이며 눈과 마음의 배낭에 담아 왔다.
·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
<암흑의 핵심>을 브라질에 가져온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암흑의 핵심>은 서구 제국주의가 그들의 식민지에서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한 폭넓은 양심선언이자 고해성사이다.
조셉 콘라드 ·<암흑의 핵심>은 스토리 전개보다 순간순간 소설의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우리가 그 말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인가? 말을 할 줄 모르고 아마 귀까지 먹었음에 틀림없는 그 세계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하고 있었어. 그 세계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이 책은 땀과 피, 고뇌가 책장마다 눅진하게 묻어난다. 수년간 선원 생활을 경험한 콘리드의 이력과 필력은 허먼 벨빌이나 생떡쥐베리, 조지 오웰, 헤밍웨이 같은 실천 행동파들과 나란하다. 이 책은 정치,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한 작품으로 읽히지만 인간 심연에 내재된 공포와 불안 심리를 그리고 있다. 그 공포란 어둠 속에 살아야 했던 태초의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오늘도 누군가의 일상에 어김없이 재현되는 것이다. 무릇 공포란 모르는 것들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비롯되는 바,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모르는 것의 영역은 줄지 않는다. 어둠의 안쪽을 헤쳐 나가는 두렵고 짜릿한 경험을 넘어 어떤 이들은 길을 개척했고 마침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 시대다.
· 음식 냄새를 맡고 찾아온 하이에나를 만나거나 밤낮 없이 설치는 사자를 만날지도 몰라. 어쩌면 수백억 년 하늘에 붙어있던 까마득한 별들이 이 밤, 한 순간에 우박처럼 쏟아질지도 몰라. 내 마음에도 원시가 살고 있었구나. 고마워 아프리카.
· 완만한 밀림 숲을 오르며 흑인 헨리에게 이 산에 표범이 사냐고 물으니 표범은 없고 들개 배설물이 종종 발견될 뿐이라 했다. 소설<킬리만자로의 눈> 서문에 보면 “킬리만자로는 높이가 1만 9천 7밴 10피트나 되는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킬리만자로의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러로 ‘누가에 누가이.” 즉 신의 집으로 불린다. 서쪽 봉우리 가까운 곳에는 말라붙은 한 마리 표범 시체가 있다. 그런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다. 20섹 초반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얼어붙은 표범의 시신이 실제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서점 한쪽의 잡지에서 빛바랜 흑백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담요를 뒤집어 쓴 흑인들 발밑 얼음 위에 납작하게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그 무렵 산 정상에서 표범을 발견한 선교사, 짐꾼들이 기념으로 꼬리, 귀 들을 잘라가는 것을 필두로 이 표범의 시신을 조각조각 떼 내어 가서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고 다만 표범이 있던 자리를 ’레오퍼드 포인트‘라 부른다. 하지만 그 표범이 어떻게 해발 6천 미터에 가까운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라갔는지는 그 책조차 설명하지 못했다. 신비한 것은 그냥 신비로 남겨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추락>은 백인 정권 종식 뒤 넬슨 만델라의 흑인 정권이 탄생한 뒤까지 이어지는 남아공의 최근 현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새 남아공탄생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인종간의 해묵은 갈등과 폭력이 여 제자를 성폭행하다 고발되어 인생의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는 속물 백인 교수의 눈을 통해 그려진다. 시종 불편하면서도 묵직한 진실을 담고 있는 상황 설정과 심도 깊은 인물 묘사는 오 이 소설이 한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못하게 하는 부커 상의 원칙을 깨었다.
잔지바르는 아름다운 섬이다. 유럽인들에 의해 아프리카 최고의 휴양지로 각광받으며 <보혜미안 랩소디>의 머큐리 고향이다.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배어있는 비좁은 공간, 한 외국인 가이드가 자신의 고객에게 설명하는 내용을 무심한 척 엿 들었는데 그곳이 노예무역 시절 지하 감옥 자리였단다. 그런 지옥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만이 건강한 노예로 유럽 각지로 팔려나갔다는 장소가 지금은 관광객의 값싼 동정심을 부추기기 위해 공개되고 있았다. 은은히 배어 있던 지하 감옥 채취가 갑자기 역하게 끼쳐왔다. 역시나 아프리카 땅은 그 어디도 마냥 아름다울 수 없나보다. 아름다운 땅일수록 눈물이 많은 땅이다. 풍요의 땅일수록 굶주림이 많은 땅, 축복받은 땅일수록 저주받은 땅이다. 아프리카가 그렇고 아시아가 그렇고 라틴 아메리카의 수많은 땅들이 그러했다. 신들이 만들어놓은 축복과 풍요의 땅을 고통과 슬픔의 지옥으로 드라마틱하게 바꾸어 놓은 인간의 죄악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아는 만큼 베우기도 하거니와 모르는 만큼 배우기도 할 터
· 아프리카 케나에서 17년간 커피 농장을 운영하며 현지인들과 우정을 나누고 대자연의 모험을 경험한 덴마크의 여성작가 카렌 블리센은 아프리카로부터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라틴어 경구에서 따온<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썼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조각과 미술에서 자신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힌트를 얻었으며 슈바이처와 이태석 신부는 그곳에서 사랑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흔히 야만으로 치부되는 아프리카라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서구 문명에 그르침을 주고 막힌 문명의 숨통을 틔워주는 인류 시원 역할을 해왔다. 모든 종교 도덕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생명을 맨발로 맞닥뜨릴 것을 권유하는 지드는 이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했고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지상의 양식>에서
· 장 자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아프리카 53개국 중 37개국이 거의 순수한 농업국가다 .그들의 농업은 유럽 연합에 의해 쳬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 있는가? 희망은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에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이 처함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 퀸터 그라스 <양철북>
우화 형식. 젖먹이 때부터 정신적으로 이미 어른에 도달했지만 신체적으로는 어른이 되는 걸 거부하며 의도적인 낙상 사고로 성장을 멈춘 소년 오스카, 그는 생일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거나 톤이 높은 소리를 질러 물건을 부수는 초능력을 보이며 어른들 세계를 거부한다. 무지와 순응, 무관심으로 식료품 가게를 하는 아버지의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히틀러와 나치의 지지자와 동조자로 변해 가는지 어린 오스카 눈에 비친다.
·아트 슈피겔만 <쥐>
억압자 나치를 고양이, 나치 치하에서 끔찍했던 유태인과 민중을 쥐로 형상화. 아버지가 겪은 수용소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주는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