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트(Wit)를 보고
송지나
영화는 저명한 문학 교수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이 난소암 4기를 진단받으며 시작된다. 그녀의 주치의인 켈리키언 박사는 새롭게 개발 중인 독한 약을 항상 ‘full-dose’로 투여할 것을 권한다. 치료 과정은 가혹했지만, 베어링은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말에 치료받기 시작한다.
이후 병원에서 그녀는 인간이 아닌, 연구 대상 ‘물건 1’처럼 취급받는다. 심지어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담당 의사가 되어 골반 검사를 하게 되는데, 베어링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모멸감’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잃지 않기 위함일까, 기억 속 과거로 끊임없이 돌아간다. 대학원 조교 시절, 존 던의 시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로 논문을 작성했을 당시, 담당 교수는 논문에 대한 지적과 함께 따스한 조언을 해줬다.
“One short sleep past, w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교수는 이 존 던의 ‘죽음이여 뽐내지 마라’의 마지막 연을 보고, 존 던이 죽음을 두려운 장벽으로 보지 않고, 단순한 쉼표처럼 받아들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논문보다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이니, 도서관에 틀어박히지 말고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라고도 했다. 하지만 베어링은 연구를 택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때의 선택을 떠올리며 자신을 책망한다. 단순한 인간적인 진실과 타협 없는 학문의 기준이 결국 서로 연결되어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녀의 기억은 더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 그녀가 글을 사랑하게 된 순간. 어린 시절 soporific(잠 오게 하는)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려주던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병원에서는 그녀가 아프든 말든 연구를 위해 full-dose 투여를 강요할 뿐이다. 이곳에서 베어링을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사람은 간호사 수지였다.
”제가 가끔 올게요. 필요하면 부르세요.“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수지는 베어링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이런 작은 관심과 따뜻한 행동이 고통에 신음하던 베어링에게 작은 숨통을 틔워주었다. 베어링의 상태가 악화하던 어느 날, 수지는 조용히 묻는다. ‘심장이 멈추면 살릴까요, 말까요?’ 베어링은 담담히 대답한다.
”살리지 마.“
그러나 곧 죽음의 두려움에 떨며 깊은 잠에 빠진다.
그날 밤, 그녀의 오래전 담당 교수 그녀를 찾아왔다. 교수는 조심스레 힘없이 엉엉 우는 그녀를 안으며 존 던의 시를 들려주려 하지만, 베어링은 싫다며 듣기를 거부한다. 대신 교수는 ‘도망치는 토끼’라는 동화책을 읽어준다. 그 책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기 토끼가 거듭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엔 사랑이 가득한 엄마 토끼 곁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
교수가 떠난 후, 베어링은 고요한 병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이 순간에도 담당 의사는 그녀를 연구 사례로 남기려 회생 절차를 밟지만, 수지는 단호하게 막아선다. 덕분에 베어링은 마치 soporific(최면제)을 먹은 듯, 연구 사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어린 토끼처럼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
두려운 죽음과 안식의 죽음 사이
나는 이 영화에서 뿌연 노란색 필터를 씌워 아름다웠던 과거 회상보다 차가운 파란색 필터를 쓰던 현재의 장면이 인상 깊다. 베어링이 수지와 심장이 멈추면 그대로 두라고 담담하게 얘기하고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도망치듯 이불 속으로 숨었던 장면이다. 이때 죽음의 비참한 장면을 부정하지 않은 부분이 좋았다. 더 자세히 말하면, 죽음 앞에서 당연히 두려운 우리를 부정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죽음의 이후를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반면에 영화는 계속 반복되었던 존 던 시의 마지막 연과 동화책의 내용으로부터 쉼표로서의 죽음, 사랑으로 귀의하는 죽음과 같이 죽음을 평온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이 장면들이 죽음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것처럼 보여서 이해 가지 않았다.
이처럼 나는 영화가 두렵고 아픈 죽음과 두려워할 필요 없는, 안식으로서의 죽음 사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영화는 존 던의 시와 동화책, 베어링의 죽음을 통해 후자의 죽음을 강조하며 막을 내렸다.
나도 이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아름답게, 두려워할 필요 없는 곳으로 보낸 적이 있다.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의 말을 기반으로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짧은 소설을 썼다. 할아버지의 언어 속 할머니는 거의 성인군자였다. 한평생 남을 돌보고 하느님
을 섬기다가, 하느님의 부름으로 심한 암에 걸려 스르르 잠이 든 것처럼 죽은 사람. 할아버지의 언어 속 평온함과 신성함과는 다르게 나의 머릿속에선 할머니가 인생이 너무 병적으로 느껴지며 그의 인생 속 엄청난 억압과 고통이 그려졌다. 또, 이런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말씀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2차 고통을 느꼈다. 그땐 이게 너무 아파 할머니의 삶을 직시하지 않고 할아버지의 언어를 빌렸다. 그래서 소설에 할머니의 죽음을 하느님에게 귀의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순간으로 적었다. 소설을 다 쓰고나서 아픔들이 씻은 듯 사라지길 기대했지만, 더한 죄의식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초자아의 강력한 시선 속에 끌려다녔던 할머니의 진짜 욕망과 응어리들을 찾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할머니를 그 시선 속에 혼자 외로이 가두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어 힘겨웠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오히려 가벼워지는 이 마음은 뭘까? 마음 한쪽에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던 할머니를 이제야 마주하려고 했다. 어떤 고통과 진통이 찾아와도 맞으리! 비장하게 마주 봤는데, 이때까지의 고통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 이후로 누군가의 삶을 의미하는 죽음은 꾸미지 않으려 한다. 이 부분은 용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암의 고통에서 해방하는 죽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엄마 토끼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죽음은 아직 이해할 수 없다. 누구나 아름다운 죽음, 안식의 죽음을 희망하지만, 나는 비참하고 더러운 죽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대상으로서의 죽음과 인간으로서의 죽음 사이
나는 앞으로 간호사가 되어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이 영화를 발제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도 간호사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연하지만,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한 가지를 상기시킨다.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든 노동이든, 모든 것의 본질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에서 이러한 태도를 지닌 수지는 작은 말과 공감, 행동으로 베어링을 단순한 연구 사례이자 하나의 '대상'에서 인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덕분에 그녀는 연구 사례로서의 죽음과 한 인간으로서 죽음 사이에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이 인간임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점수나 돈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수능을 망쳤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는 친구, 자기보다 내신 성적이 높은 친구들을 죽이고 싶다는 친구, 성적으로 급을 나누며 우월감을 느끼는 친구들(나도 솔직히 그랬다). 대학 수시 6개 대학 모두에서 떨어지니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이 느끼기도 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와 기회가 충분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이런 모습들이 더욱 빈번해지는 것 같다.
사실 간호사는 의사를 보조하고 힘든 일을 도맡기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위트 영화를 보고 그런 힘들고 거친 간호사의 일 안에서 내가 이뤄낼 수 있는 작은 바람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회 속에서 더욱 많아져가는 인간임을 잊고 사는 사람들 또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인간으로 대하고 싶다는 거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걸 곁에서 지켜봐 주고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엄청나게 착함에 찌들어 사는 사람처럼 거창하게 써버렸는데, 나 되게 이기적이고 인내심도 적다. 수지처럼 작은 말과 행동으로 할 거고, 하고 싶다.
언젠가 간호사가 되어 죽음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될 때,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다시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들의 죽음을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첫댓글 죽음은 누구나 맞이하는 것이지만, 죽음을 들여다 보는 일은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능 끝나고 맘고생이 많았지요? 진로 문제에 대해 고민도 많았을텐데 할머니 죽음과 함께 진로 문제까지 연결하여 작성한 발제문 훌륭합니다. 영화에 대한 소감, 단어선택, 표현등이 예사롭지가 않네요. 부럽습니다.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