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관(金命寬) 고택
정읍시 산외면 오공길 72-10(오공리 814)
조선 영조 때 경기도 양주의 광산김씨 중서(중진, 증 병조참판)는 사도세자의 죽음 등, 권력의 무상함을 보면서 후손들은 좋은 터에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손자 명관에게 명당 찾아 집을 짓고 살라고 하였다.
이때가 1770년대였다. 명당을 찾아 1773년 한 고승과 함께 태인군 오봉리 청석골(淸石谷, 千石谷)에 찾아온 명관은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강아지가 뒤를 보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이곳은 강 씨들의 터이겠구나 생각하고 물러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옹동의 옻 밭골이었는데, 이번에는 멧돼지들이 주둥이로 땅을 헤집고 다니더라는 것이었다. 아! 이곳은 권 씨들의 터이구나 하고 다시 물러나, 이곳 산외면 오공리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는데, 숲속에서 북이 둥둥둥 세 번 울리더니, 도깨비들이 한 되, 두되 세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북이 울리는 것은 부자가 난다는 것이요, 도깨비는 김 씨를 의미하니, 이곳이로구나 생각하고 여장을 풀었단다. 집을 짓기 시작해서 10여 년 걸려 1784년(정조 8년)에 완공한 이 집이 김명관 고택이다. 전라도 지방의 후기 99칸 양반가 한옥의 원형이 잘 보존된 명가이다.
넓은 터에 유교의 예에 따라 남, 여가 유별하게 사랑채와 안채가 안 행랑채로 분리되어 서로의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존중하는 구조로 잘 되어 있다, 김부식이 옛 백제 왕궁을 이야기할 때 사용했던 고사와 같이 검이불루 화이부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다)로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김명관이 이 집을 지으면서 안채 대청 중앙 마루 밑에 표석을 해 놓고, 후손들에게 이 집의 기운이 12대는 갈 터이니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떠나지 말고 이 표석을 찾아 움막이라도 짓고 살면 곧 회복될 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 집은 풍수지리적으로 지명이 오공(蜈蚣)이니 지네터이다. 창하산(倉霞山)을 진산으로 도원천(桃源川)을 임수로 하고, 창하산은 지네산으로 그 혈이 이 집 사당에 뭉쳐있다고 생각해 명당으로 생각하였다.
1971년 이 집이 김동수가옥으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이 될 때까지 8대가 살았다.
2017년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김명관 고택으로 바꾸고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 명칭도 바뀌었다.
들어가는 길을 시작으로 바깥 행랑채와 솟을대문이 있고 들어서면 청지기가 사는 공간 행랑 마당이 나온다. 헛담을 쳐서 사랑채, 안채를 가렸다. 이곳엔 가마를 보관했던 칸이 있고 청지가 사는 2 칸 장방과 1칸 대청마루(?), 문간방, 부엌, 초가로 된 2간 외양간이 있다. 청지기는 노비들의 우두머리이다. 오른쪽 협문을 들어서면 5칸의 사랑채가 있는데. 4칸 대청마루가 있고 주인 방과 아들 방, 사랑방, 복지기 방, 함실부억, 헛간이 있다. 사랑채 앞에는 ㄷ자 형태의 바깥 행랑채가 있다. 250석이 들어가는 3간 곳간과 2칸의 마칸이 있고 그 한 마칸엔 살창이 있어 밖을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옆으로 2칸 대청마루와 사랑방이 2칸, 함실부엌이 있다. 사랑채에서 보았을 때 왼쪽 끝에 바깥 화장실이 한 칸 규모로 별도 건물로 되어 있으며, 주인과 남자들의 생활공간이다.
사랑채 뒤로 안 행랑채가 ㄷ자 형태로 있고, 가운데에 중문이 있어 들어서면 ㄷ자 형태의 안채가 정면에 나타난다. 안채의 정면에서 볼 때 중앙에는 육간대청이 있고 오른편 동쪽에는 며느리의 방과 부엌이, 왼쪽에는 시어머니 방과 부엌이 있다. 대청을 가운데 두고 좌, 우 공간 배치가 서로의 사생활을 배려하듯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안 행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자 노비의 방과 부엌, 디딜방아 칸, 여자 화장실, 2칸 창고와 방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맷돌 칸, 쌀 20가마를 담을 수 있는 큰 뒤지와 풍고가 있는 칸, 2칸의 장류 창고, 3간의 창고, 공부방 겸 초빈방이 있다. 안채 뒤에는 장독대와 큰 우물이 있고 그 뒤로 너른 텃밭이 있다.
안채 동쪽에는 사당채가 담으로 둘러 있고, 서쪽에는 6칸 반의 별당(안 사랑채)이 있다.
별당은 명관이 처음 내려와 집을 짓고 목수들과 기거하면서 본채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별당으로 시집간 딸 등이 몸을 풀거나 쉬어가는 곳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별당 앞에는 연자방아 칸과 노비들의 화장실이 있었다고 하나, 복원되지는 않았고 빈터로 남아 있다.
외각에는 호지집(외거노비 집)이 8채가 있었다 하나 현제는 입구에 3칸 한채, 사당 뒤에 4칸 한채, 총 2채가 복원되어 있다.
18~19세기에는 도참설이 부활해 사람들이 명당 찾아 살기 시작했는데 이곳 산외면도 풍수지리로 평사낙안의 길지였고, 오공리도 뒤에는 창하산(蒼霞山)이 앞에는 도원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이다. 창하산이 지네를 닮아 지네 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혈이 김명관의 사당에 뭉쳤다고 한다. 오공리(蜈蚣里)는 지네오 지네공 자를 싸서 지네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오공리(五公里)로 바뀌었다.
안산인 독계봉(獨鷄峯)과 화견산(火見山, 화경산, 해공산)이 있어, 비보 차원에서 연못을 파서 지네의 먹이인 지렁이가 번식할 수 있도록 옆으로 기다란 연못을 만들었고, 집 앞에는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만들었다고 한다. 김명관이 17세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240년~250년 이상 살아온 원형이 잘 보존된 편안한 집터라는 생각이 든다.
김명관을 시작으로 상홍(相洪), 기풍(基豊), 재기(在機), 옥현(玉鉉), 영석(永錫), 동수(東洙), 용선(容銑)까지 8대에 거쳐 이 집에 그 숨결이 스며있다.
이 집의 가계를 보면 명관의 조부 김중서(重珍, 영조시대)는 병조참판을 증 받았으며.
당파싸움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후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손자 명관에게 풍수지리상 명당을 찾아 터를 잡고 집을 지어 정착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태환이다,
*김명관(金命寬,1755~1822, 67세)의 시조(始祖)는 김흥관(金興光)으로 명관은 31세손이다.
파시조(派始祖)는 판교공(判校公) 경광(景光)으로 명관은 12세손이다.
17세(1773년 영조 49)에 내려와 집을 짓기 시작하여 10여 년 만에 완공(1784년 正組 8)하였다.
명관고택에서 볼 때 오른편 집은 둘째 아들 상하가 본집완공 후 30년 후에 착공하여 10여 년을 걸려서 지었다. [상량문:崇禎四甲午(1824년)]
26세이던 1794년(정조16)에 아들 상홍을 낳았다.
*김상홍(金相洪, 1794~1880 86세)
16세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20세에 기풍을 낳았다.
회방(回榜:급제하고 예순 돌이 되는 날)에도 참례하는 큰 수(壽)를 누리었다.
생원시에 급제한 후 60년 넘게 장수한 김상홍에게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제수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16년(1879) 3월 10일]
1년 추곡이 1,200석이었다.
20세인 1815년(순조 15)에 기풍을 낳았다.
*김기풍[金其豊(1815~1880) 65세]
41세(1855년, 철종 6)에 생원이 되었고, 김 씨 내 재력이 그의 대에 많이 줄었다.
-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을 위해 안간힘을 기울이던 때, 그에게도 원납전(願納錢:스스로 원하여 바치는 돈) 납부 의뢰가 있었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그는 관원이 내민 장부에 금액을 쓰는 일을 18세의 외손에게 미루었다. 그런데 외손은 조부가 매우 불쾌하게 여기던 것을 생각해 원납전(願納錢)의 원(願)을 원(怨)으로 써놓았다. 결국 이 사건을 무마시키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갔다.
29세인 1843년(헌종9)에 재기를 낳았다.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기 위해 결두전(結頭錢, 부가세), 원납전(願納錢), 당백전(當百錢)을 발행, 민생을 어렵게 만들었다.
-고택에서 볼 때 왼편에 기풍의 둘째 아들이 집을 지었다.(2006. 6. 사랑채가 경기도 파주시 아시아출판문화단지 내에 “서호정사”의 당호를 얻어 옮겨갔다. 안채는 박씨들 제각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광주에 있던 권번을 옮겨 지었고, 시 지원을 받아 문화행사를 매년 개최하였다.
현재는 개인이 임대하여 문화체험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김제기(金在箕, 1843~1885. 42세)
21세(1874년)에 소과에 입격하였으며 이로 하여 김 씨 내는 4대를 이어 생원이 되었다.
재기는 아들 옥현을 두었다.
*김옥현(金玉鉉, 1861~1912. 51세)
20세에 아들 영석을 두었다.
*김영석(金永錫, 1880~1944. 64세)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잘 유지관리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를 보냈다고 한다.
*김동수(金東洙, 1912~1987. 75세)
24세에 아들 용선을 두었다. 2남 2녀를 두었고, 2남은 모두 서울에 거주.
1980년 10월 이 집에는 김씨 내외만이 살고 있다. 부인은 1995년까지 살았다.
그는 정읍 인근에서는 혼인으로 인척을 맺을 만한 명문가가 없다고 생각하여, 맏딸은 임실(任實)로, 둘째 딸은 전주(全州)로 출가시켰고,
맏며느리는 전남 나주(羅州)에서, 둘째 며느리는 장성(長城)에서 맞아들였다.
*김용선(金容銑, 1935~2022. 87세)
고택에서 28세까지 살았고, 이후 서울 대치동에서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2022. 10. 2. 창하산(선산)에 묻혔다.
* 總 面 積 : 15,510㎡(4,691坪)
* 垈地面積 : 4,188㎡(1,269坪)
※ 1971. 05. 27(대한민국 중요민속문화재 제26호)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동수(東洙), 갑수(甲洙), 연수(寅洙), 을수(乙洙), 경수(京洙), 상수(相洙, 商勳), 병수(丙洙)가 함께 살았으나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각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정리 : 서양화가 문화관광해설사 김성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