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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탕자 이야기 / 출 32:7-14, 눅 15:11-32
오즘 문제 두 가지, 명예퇴직과 무장공비 이야기.
이번 주에 추석이 있다. 명절이 되어 흩어져 살던 형재들이 같이 모일 수 있다는 것, 조상들에게 성묘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이로 인해 명절을 즐길 수 있는 명분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명절이 있기 때문에 형제애를 다시 나눌 수 있고 가족 사랑을 일깨워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추석을 맞이 했으니 우리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이다.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온 집안에 기쁨으로 가득 차도록 사랑을 풍성히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미국 버클리대학 심리학 교실에서 흰쥐 15마리를 이용해서 독특한 실험을 한 내용을 책을 통해서 보았다. 15마리 흰쥐를 5마리씩 세그룹으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육을 했다. 먼저 첫번째 그룹에 속한 5마리의 흰쥐를 큰 상자 안에 칸을 막아서 각 칸에 1마리씩 집어 넣었다. 먹이는 충분히 주었다. 그 다음 두 번째 그룹의 5마리는 큰 상자 안에 넣어서 함께 살도록 했다. 먹이를 주되 꼭 1마리분 먹이만 준다. 그러면 쥐들이 서로 그 먹이를 막으려고 머리가 터지도록 싸운다. 이렇게 1마리분 식량만 하루 5번을 준다. 결과적으로는 5마리가 다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양이지만 1마리분만 이렇게 시간 간격을 두고 주니까 그때마다 굶주렸던 5마리가 형투를 벌이며 하루 5번씩 싸운다. 싸우면서 자라도록 하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 그룹은 5마리를 한 상자 안에 넣고 5마리가 먹을 수 있는 5마리분 먹이를 넣어준 것이다. 먹이가 충분히 있으니까 5마리가 자기 것 먹으면서 서로 오손도손하게 지낸다. 이렇게 해서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서 사육을 해보니까 첫 번째 그룹, 1마리씩 칸막이에 들어가서 살고 있던 쥐들은 평균 한 500일 살고, 서로 싸우면서 산 쥐들은 평균 한 650일 정도 살고, 그리고 서로 오손도손하게 산 쥐들은 평균 900일 정도 살더라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 있다. 비록 서로 아웅다웅 싸울지라도 함께 어울려 사는 동물이 오래 산다는 것거이다. 그것보다도 서사로 오손도손 평화스럽게세 사랑하며 사는 동물들이 장정수한다는 것이다. 어디 동물 세계뿐인가? 우리 인간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고독하게 살기보다는 함께 사는 자, 또 함께 살 때는 서로 사랑을 나누고 사는 자가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장수하는 것 같다.
오늘 우리들은 탕자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봉독하였다. 탕자하면 누구나 다 둘째 아들을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아서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다음에 돼지같이 살다가 결국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온 둘째 아들이 탕자이다. 이런 둘째 아들에 비해서 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잘 보전하고, 집에서 착실하게 생활하고, 아버지를 잘 모시고 있다. 성실하게 살아왔다. 퍽 대조적이다.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탕자는 분명히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본문을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버지로부터 책망을 받는 아들은 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아니고, 집안에서 성실하게 생활했던 큰아들이다. 동생이 빈털터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형은 오히려 불평을 한다. 아버지는 너무 반가워서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금가락지를 끼워 준다.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데 형은 동생이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돌아온 것을 오히려 꾸중하고 화를 내고 불평을 하고 있다.
28-30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러한 큰아들의 불평을 보고 한가지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작은 아들은 물질을 낭비한 물질적 탕자라면 큰아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정신적 탕자이다. 그렇지 않나? 물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고 없다가도 생길 수 있다. 물질적 탕자보다도 사랑을 상실하고 사는 정신적 탕자가 더 문제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큰아들을 꾸중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 탕자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큰아들은 비록 몸은 이버지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아버지로부터 떠나 있었고, 동생으로부터 떠나 있었다. 자기 생각만 하고 살아간다. 남을 생각하지 못한다.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 그러니 그 큰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삭막하겠나? 그래서 아버지는 큰아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을 잃고 살면, 사랑을 상실하고 살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허전하다. 중심을 잃어버리고 허랑방탕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큰아들의 문제를 생각해보면서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아볼 수 있어야 되겠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란 가족끼리, 또 성도끼리, 이웃끼리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명절에 더 고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큰아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1. 용서하는 마음이 없었다.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이미 다 용서하고 기쁨으로 맞이한데 비해서 형은 동생의 과거를 들추어 내면서 화를 낸다. 이런 형의 모습을 우리들 가운데서도 많이 발견한다. 한 사람이 과거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주님의 품안에 돌아왔을 때 우리 주님께서 이미 그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사람을 용서해지 못해서 ‘저 사람 과거에 무슨 짓을 하던 사람인데’ 하며 과거를 들추어내고, 비난하고, 욕하고, 서로 헐뜯는 경우가 없지 않아 많이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해 주었는데 형된, 먼저 믿은 우리는,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에 있는 우리는 서로 용서하지 못해서 으르렁거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돌째 아들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집안적으로 볼 때는 큰아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다. 사랑의 첫단계는 용서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집안끼리, 동네 사람들끼리 혹시 서로 용서하지 못한 채 마음에 섭섭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기쁜 명절을 통해서 해소하기 바란다.
빅톨 위고가 쓴 소설 ‘레미제라블’을 우리가 잘 알지 않나? 장발장 이야기를 주제로 한 내용이다. 장발장이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생활을 20년 동안 했다. 20년 동안 감옥에서 처참한 고문도 당하고 온갖 고통을 다 겪었다. 그 동안에 그 마음 속에 남은 것은 ‘어떻게든 출옥해 나가면 나를 이렇게 고생시킨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야지’ 하는 불타는 복수심만 생겼다. 출옥해 나왔다. 20년 형을 마치고 출옥해 나왔지만 그의 주머니에는 빵 하나 사먹을 돈도 없었고, 의지할 곳도 없었다. 결룩 교회에 들어가서 은 식기 하나를 훔쳐 나왔다. 그것 가지고 빵 한 개라도 사먹으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골목길에서 순찰하던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경찰이 은 식기를 들여다보니까 교회 것이었다. 그래서 장발장을 끌고 교회당에 들어가서 사제를 만났다. 사제가 경찰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장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은 식기는 내가 준 것이 아니냐, 그러데 왜 함께 준 은촛대는 가지고 가지 않았어?’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하니까 경찰은 어리둥절한 채 그냥 장발장을 그 자리에 두고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발장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20년의 감옥의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 한 순간의 뜨거운 사랑과 용서를 경험할 때에 장발장의 마음에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그 순간 장발장은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출발을 하는 내용이 바로 ‘레미제라블’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20년 동안 고통을 주었지만 고통을 통해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한순간의 뜨거운 사랑과 용서가 해결했던 것이다. 장발장을 새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용서부터 하고 회개를 기다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 용서하신 주님게서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우라는 잘못 생각했다.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마’이다. 회개하는 정도를 보고 용서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이것이 아니고, 먼저 용서해 주고 그 다음에 회개를 기다리는 분이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와 같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는 먼저 탕자를 용서해 주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문 밖에 가 서 있다. 그러나 형은 돌아온 탕자마저, 회개한 탕자마저 용서해 주지 않고 있다. 우리들은 탕자의 형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교해 볼 수 있고, 점검해 볼 수 있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용서하고 회개를 기다리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고 탕자 아버지의 마음이다.
2. 포용하는 마음이 없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마련한 동생 환영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불만을 토로하면서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마음이 옹졸하다. 28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는 방탕한 작은 아들을 용서하고 포용한데 비해서 형은 동생을 포용하기는커녕 배타적으로 대한다. 그만큼 형은 마음이 좁고 옹졸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은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앞서고 원망과 불평이 앞선다. 그러나 마음이 넓은 사람은 비록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이해할 줄 알고, 존중히 여길 줄 알고, 받듣 줄을 알고, 섬길 줄 안다.
왕상 3장에 보면 솔로몬 왕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부귀나 영화 또는 건강 이런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구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너무나 아름답게 여기셔서 지혜와 총명을 아주 풍성하게 주셨다. 그래서 세계에서 뛰어난 지혜자가 되었다. 그런데 4장에 들어가서 보면 하나님께서 ‘한 가지 더 주겠다’ 하면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주었나? ‘넓은 마음을 주겠다’고 했다. 솔로몬이 넓은 마음을 가지면서부터 솔로몬의 지혜와 명철이 세계 각지에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났다 하는 말씀들이 있다. 만약 솔로몬왕이 머리만 뛰어나고, 지식이나 능력만 뛰어난 왕이라 생각해 보자. 그에게 넓은 마음, 곧 남을 포용하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의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겠나? 역사에 나타난 독재자들이 머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 하나 부족한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넓은 마음, 남을 존중히 여기고, 남을 사랑하고, 남을 받들줄 아는 넓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히틀러, 러시아의 스탈린, 또 북한의 김일성 다 그렇지 않나? 어떤 면에서는 머리만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넓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자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섭섭한 마음이 앞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미 다 용서해 주고 그 아들을 껴안고 포용한 것이다. 그러나 형은 이런 마음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모습을 항상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된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게 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면서 원수까지도 포용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된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가족끼리, 같은 형제끼리, 같은 부모 자식끼리, 같은 이웃끼리, 같은 성도들끼리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할 수 있나? 원수까지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키우기 바란다.
3. 희생하는 마음이 없었다.
12절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 둘에게 각각 재산을 물려준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곧 신명기에 나타난 상속법에 의하면 아들이 둘이 있으면 장남은 재산의 2/3를 물려받고, 그리고 차남은 1/3을 물려받도록 되어 있다. 이미 둘째 아들은 자기몫 1/3을 받아서 외국에 나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왔다. 지금 아버지 집에 있는 나머지 재산은 누구 것인가? 큰 아들 것이지 않나? 그런데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고 소를 잡고 금반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는 것은 누구 재산에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떤 면에서 보면 큰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을 아버지가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빈털터리가 된 둘째 아들이 집에 머물면 머물수록 큰 아들 재산, 큰 아들의 돈이 축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아까웠다. 그래서 아버지께 불평을 한다. 말로는 동생을 사랑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자기 손실, 자기 희생의 대가로써 이루어진다. 손해없는 사랑이 없고 희생없는 진정한 사랑이 없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것, 경제적으로 따져보면 굉장한 손해이다. 분명히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느끼지 아니하고 자식을 키우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지 않나? 그러나 무엇을 주고 ‘아 참 아까운데’ 하며 자기의 손실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이기적인 것이고 조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사랑하되 자기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된다. 자기 손실을 감수할 수 있어야 된다. 자기 손해, 자기 아픔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때에 아가페적인 거룩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벨기에 태생의 다미엔이 1893년도 태평양의 고도인 몰로카이섬에 선교하러 들어갔다. 그 섬은 나환자 수용소였다. 다미엔이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나병환자들이 살고 있는 몰로카이섬에 가서 전도를 했지만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십년을 보냈지만 한 사람도 믿지 않았다. 몰로카이섬 주민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건강을 축복받았으니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병들어 있으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겠느냐? 지옥갈 사람이 뭐 하나님 믿을 필요가 있겠느냐?’ 이렇게 불평을 하더라는 것이다. 다미엔은 몰로카이 나환자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한다. ‘오 하나님, 저에게도 나병을 허락해 주옵소서. 제가 건강한 것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장애물이 된다면 저에게도 나병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다. 일부러 나환자들과 피부 접촉을 가지기도 하고 심지어 나병환자들의 배설물까지 먹기도 했다. 1년 후에 나병이 걸리고 말았다. 피부가 썩어들어 간다. 그때 나병환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비록 나병에 걸렸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천국을 얘기하고 게십니다’라고 설교하자 많은 사람이 감명을 받아서 회개하고 돌아오더라는 것이다. 그가 남긴 책의 기도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오 하나님, 제 몸은 나병으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심령은 사랑으로 싱싱해 가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부패하지만 속사람은 새롭다는 말씀이다. 이런 정신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된다. 무엇을 위해서 나의 작은 부분 하나라도 희생해 가는 그런 정신이 있어야 된다. 이런 사람이라야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랑이다. 엡 5:2절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은 아들이 물질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재산을 낭비한 집 밖에 있는 탕자인데 비해서 큰 아들은 집안에 있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메말라 있다.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 그러니 아버지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집밖에 있는 탕자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집안에 있는 탕자는 사랑을 상실한채 오히려 꾸중을 듣고 있다. 이 모습에서 다시 한번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사회 어디서나 서로 용서하는 사랑, 포용하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을 키우면서 주님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따라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번 주에 있는 명절을 맞이하여 저의 가족들이 다시 모이게 됩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이웃끼리 다시 어울리게 됩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러할 때 주님의 사랑을 본받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겉으로는 자상한 체하지만 마음 속에는 시기와 분노와 다툼과 허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내 자신을 앞세우려 하는 어떤 교만으로 가득 채어져 있지 않습니까? 큰 아들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용서하는 사랑, 서로 이해하고, 존중히 여기고, 포용하는 사랑, 적은 것이라도 나의 희생 아래 이루려고 하는 그런 사랑의 뜨거운 마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할 때에 우리 가운데 작은 천국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함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날로 더 싱싱해 갈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996-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