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 수 24:14-18, 엡 5:22-33
오늘은 창조절 두 번째 주일이며,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있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람일 것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짝지어 주시면서 둘이 한 몸을 이루어 부부관계로 살게 하신 것이다. 초대 교회 로마의 카타콤배에서 있었던 사랑이 일화이다. 한 청년이 지극히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잠 못이루는 밤에 그는 애인의이 방문을 두드렸다. 애인의 음성이 들렸다. ‘당신은 누구지요?’ 이 청년은 ‘나요(It's I)’ 하고 대답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여기 들어올 수 없어요. 이곳은 한 사람 밖에 살 수 없어요.’ 거절당한 이 청년은 온 밤을 헤매다가 섬광처럼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시지요?’ 할 때 청년은 ‘당신입니다.(It's you)’ 그때 방문이 열리고 애인이 얼싸안을 때 나도 너도 없는 창조의 신비를 담은 사랑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오늘 엡 5장은 기독교인들의 가정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말하는 부분인데, 여기서도 혁명적인 새로움이 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주께 하듯 하라.’ 하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규율하고 있는 이 본문은 많은 설교자들이 가정주일에나 결혼식 등의 경우에 인용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서가 여성 해방을 돕기보다는 여성을 억압하고 예속하는데 뒷받침한다고 하여 성서를 덮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이 한구절 때문이다. 여기서 두 극단적 입장을 본다. 곧 먼저 입장을 본문에서 권면하고 있는대로 아내들은 주님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고, 다른 입장은 이 구절은 1세기 시대와 그 사회의 문화와 사회풍속에 관련된 것으로서 오늘날 20세기 후반의 세계에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호소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는 것은 하필 아내와 남편의 관계 문제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생활의 전 영역, 기독교 윤리의 전 분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지적해야 하는 것은 어느 한 편에서, 특히 남성측에서 이 본문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입장을 취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교회 설교자들에게는(모두 남성임) ‘아내들아, 주님께 대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여 아내들에게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만 강조했지 남편들이 아내에게 대한 본문의 권면은 언급조차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해석과 입장이 잘못된 것임은 우리가 전문적인 주석이나 해석을 하지 않고 본문을 외형대로만 관찰하더라도 금방 알 수 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의무를 말한 후에 이어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에 관한 규정이 나오고 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를 동등하게, 공정하게 성서는 규정하고 있다. 곧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또는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라고 했다. 그리고 아내는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이 말은 그리 쉬운 말이 아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극단적인 사랑을 요구했다. 복종하는 것이 더 어려운가,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려운가? 복종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사랑하기란 더 어렵지 않은가? 만약 복종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두가지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고 한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이 기독교 윤리는 일반적인 가정 윤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 윤리는 주어진 시대와 지역의 문화, 풍속, 당시의 인도주의 정신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가정 윤리는 우리 그리스도에게 근거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주목할 수 있다. 아내들이 주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든지, 남편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이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난 윤리, 일반적으로, 사회적으로 또는 타종교에서 규정하는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나 윤리와 그리스도적 부부 윤리를 구별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사실 기독교의 부부 윤리를 피상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에베소서의 이 교훈을 동양의 여필종부(女必從夫), 유교의 삼종지의(三從之義) 등과 혼동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독교의 부부윤리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일반적인 부부윤리와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의 부부윤리의 특징은 무엇인가? 본문을 통해서 볼 때 기독교 부부윤리는 세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21절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것이다.
보통 성서의 내용을 구분할 때 이 21절은 부부간의 윤리에 관한 부분에서 떼어내는 경우가 있다. 21절 말씀은 부부간의 윤리를 규율하는 첫째 원칙이다. 남편과 아내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정신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부부권계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새로운 부부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배해 오던 부부윤리는 가부장적, 남성지배의 부부윤리로서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 얘속당하고 심지어는 남편의 노예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부관계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2.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정신으로 부부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부부가 수평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에서의 부부관계는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자발적인 상호존경으로 맺어지는 인격적 관계이다. 한편 기독교 부부윤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30-31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 부부는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들로서 그리스도라는 나무둥지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아내와 남편이 동등하게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가지들이라는 수평적 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일체라는 것도 그리스도를 매개로 할 때만 부부의 일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같이 부부일체를 말하지만 차이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부부일체의 내용은 아내가 그의 인격, 개성, 포부, 의지, 자유 등 모두를 포기하고 남편에게 그대로 무조건 종속되고 예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부부일체는 서로가 자유하고 자주하는 인격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느 인격의 자주성과 자유를 세상의 권력이나 개인 또는 어떤 제도로써도 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부는 어디까지나 대등하고 그들 위에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계시다는 것, 그리스도는 부부를 중재하고 하나로 만드는 중개자가 될 뿐아니라 그들의 주님, 가정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3.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대가로 치르시고 교회를 샀다고 하는 그러한 자기희생적인 사랑, 생명을 내어 주는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도외시하고서 주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고 주님이 되시는 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교회의 머리이고 주인이다’라는 것을 남편의 지위에 적용하려면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과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남편에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남편도 그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아내에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란 것을 남편이 아내의 머리란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그러면 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비유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문이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비유한 것은 남편의 권력, 권위를 말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보기를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지만 교회를 그렇게 폭군적으로, 독재적으로 지배하고 못살게 굴고 남용하고 때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 것이고, 어디까지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를 부인하면서까지, 자기의 생명을 내주기까지 사랑하는 관계에 부부의 관계를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할 때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지만, 전제 군주나 폭군처럼, 노예로 부리는 그러한 관계에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머리가 된 것이 아니다. 크리소스톰이란 교부는 이 구절에서 ‘여러분은 여기서 복종의 정도를 보는 만큼 동시에 사랑의 정도를 또한 보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만약 복종하라고 강조했다면 그 강조한 것만큼, 아니 더 사랑을 강조한 것 아닌가?
여기서 바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적용한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와 교회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부부도 또한 이런 관계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도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발적이고 진지하며 순수하게 봉사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남편들은 아내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사랑하고 봉사하라는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그러한 섬기는 도로써 교회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봉사를 수반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복종을 낳을 때 그 복종이 참다운 것이지 강제에 의해서, 힘에 이해서 낳는 복종은 복종이 아니다. 아내를 지배하는 남편은 가장 무력한 남편이고, 존경받지 못하는 남편이고, 사랑받지 못하는 남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자가 되어 제자들과 강론에 열중하느라 살림을 소홀히 하니 부인은 항상 가난에 쪼들려 화가 났다. 하루는 부인이 방문을 열고 남편에게 바가지 물을 쏟아 부어 물벼락을 맞았다. 이때 소크라티스가 툭툭 털명서 하는 말이 ‘뇌성벽력이 대단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는군’ 하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제자들이 하도 어이가 없어 선생님에게 묻기를 ‘우리도 앞으로 결혼을 해야 합니까?’ 할 때 ‘암, 결혼해야지. 걱정말고 결혼해. 만일 어진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고, 나처럼 저런 아내를 만나면 적어도 찰학자가 될 걸세.‘ 하였다고 한다. 언제나 자기 아내를 하나님께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벧전 3:7절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