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왔으니 / 이임순
30년 전에 쓰던 붓에 먹물을 묻힌다. 캘리그라피를 배우려는 것이다. 미세한 떨림이 있다. 하루 서너 시간을 녀석과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낯설다. 바닥에 화선지를 펼쳐 문진으로 눌러 놓고 방석에 앉아 쓰는 서예와 달리 캘리그라피는 팔이 종이에 닿아도 된다고 한다. 동작이 다르니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의자에 앉아 책상에서 기본 획을 연습한다.
서예는 한 획만 잘못 그어도 글씨체가 달라져 조용한 분위기에서 체본에 열중하여 썼는데 여기저기서 잡담이 들려온다. 산만하니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일 못하는 사람이 연장 탓을 한다더니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배우면서 핑계만 대는 것 같아 군소리 없이 한다.
선생님이 자리를 옮기면서 지도해 주신다. 같은 획을 반복하여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더니 바로 글자로 들어가도 된다고 한다. 서예 선생님은 한 획을 완전히 익히고 다른 획으로 넘어가야 글을 써도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하셨는데 지도 방법이 다르다. 기본 획을 손에 익도록 다지는 것이 좋지 않으냐 물으니 붓 잡은 경험이 많아 그냥 해도 된다고 한다. 오랫동안 쉬었다고 하니 처음은 서툴게 느껴져도 금방 익숙해질 것이란다.
사회복지기관에서 두 달 동안 실습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20년 동고동락하던 붓을 놓았던 것이 여태까지다. 그 사이 나이가 들고 손도 무디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전에는 취미 생활을 위주로 활동하였는데 지금은 문학이란 울타리 안에서 다방면으로 즐긴다. 서예와 사군자로 끈기와 인내를 익혀 문학에 불씨를 지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취미 생활에 다시 물꼬를 튼 것은 작은 울림이 있어서다.
광양문인협회에서 해마다 시화전을 한다. 그림이나 시화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의 옷을 입은 듯 거추장스럽고 정성이 부족해 보였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아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직접 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룬 것이 해가 거듭거듭 지나갔다.
며칠 전에 모 기관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입구에 시화가 전시되었다. 글씨는 모두가 캘리그라피며 프로 작가의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갓 솎아온 상추처럼 신선했다. 아마추어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내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 눈이 유난히 큰 회원이 다가와 자기네 단체를 소개하면서 직접 써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주저하지 않고 견본을 밑에 놓고 하얀 천을 올려 거기에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렸다. 참 예쁜 스카프가 된다. 어린이집 열매반 아이들에게 하나씩 주고 싶어 열 개를 더 해도 되느냐고 하니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에게 글씨 쓰기 지도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싶다니 두 시간 후면 행사를 마무리 지을 것이라며 흔쾌히 수락한다. 서로 마음에 드는 것을 차지하려고 다툴까 봐 같은 그림과 글씨를 써서 낙관까지 찍으니 그럴듯해 보였다.
새로운 분야에 풍덩 빠져들었다. 쓰면서 즐겨 보자는 생각에 헤실헤실 웃음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9월 말까지 시화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데 내가 제작하겠다고 한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지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캘리그라피를 하는데 배워 보자는 것이다.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오늘이 그 첫 수업이다. 한 달 남짓 부지런히 배워 시화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마음을 먹었으니 캘리그라피가 당분간은 내 연인이 될 것 같다. 그를 가까이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이런저런 작품도 나올 것이다. 내게 작은 문 한 쌍이 있다. 거기에 가을을 소재로 시를 지어 오늘부터 배운 필체로 글을 써서 시화를 만들려고 한다.
시는 아직 짓지 못했는데 그림은 무엇으로 그릴지 눈앞에 여러 장면이 펼쳐진다. 들국화가 소담스레 피어 있는 길과 불그스레 익어 가는 감이 어른거린다. 알밤이 밤송이에서 툭 떨어지는 것도 담고 싶다. 지면이라야 손바닥만 한 공간 둘뿐인데 고추를 햇볕에 말리는 시골 아낙도 넣고 싶은 욕심이 솟는다.
배삯도 없는 사람이 나룻배에 먼저 오른다더니 내가 그 격이다. 오늘 처음 캘리그라피와 마주한 주제가 꿈도 야무지다. 시작이 반이라 했으니 이미 작품도 반은 완성된 기분까지 든다. 나이 들수록 욕심은 버리라 했는데 이런 것이라면 욕심을 가져도 될 것 같다. 연습의 양에 비례해 실력도 는다고 서예 선생님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오늘 따라 고인이 되신 그분이 뵙고 싶다. ‘선생님 저 캘리그라피 배워요.' 하면 빙그레 웃으시며 부지런히 해 보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실 텐데…
기회는 왔을 때 붙잡고 살리라 했다. 이왕 시작했으니 올가을에는 취미 생활 하면서 작품도 만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이다. 서툴고 부족한 면이 있어도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이 될 것이다. 첫술에 어찌 배부르랴. 붓을 단단히 잡고 그 속에 내 끼를 옴팡지게 불어 넣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