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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
여행 경비 1인당 239만원
공동경비랑 선택관광비 1인당 100만원 정도
두사람 경비 총 680먄원 정도
12월 13일 금요일 여행 경로
인천 공항에서 카이로
12월 14일 토요일
카이로-아스완
피라미드, 스핑크스
12월 15일 일요일
아스완
아스완 하이댐. 미완성 오밸리스크
12월 16일 월요일
아스완-크루즈로 아부 심벨- 람세스2세 대신전
콤옴보: 콤옴보신전
12월 17일 화요일 에드푸 룩소르
에드푸(호루스) 신전
룩소르에서-멜논의 ㅅ거상, 왕가의 계곡, 합세슈트 장제전, 카르낙신전 룩소르 신전(펠루카 탑승)
12월 18일 수요일
룩소르에 후루가다. 홍해해변 근처 사막 투어(사랑 마크 캠파이어)
12월 19일 목요일
후루가다 호텔 조식 후 5시간 이동해서 카이로로 석식
12월 20일 금요일 카이로-맴피스-카이로
멤피스 마을, 박물관안에 있는 람세스 2세 석상
이집트 원조 피라미드가 있는 시카라로 이동
계단식 피라미드인 사카라 피라미드
12월 21일 토요일 11시 1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
<이집트에서 찾아온 내 친구 모나미(Mon Ami)>
이집트 사람들은 한국산 볼펜을 좋아한다.
한국인이 보이면 무조건 달려와 연필 잡고 글 쓰는 흉내를 낸다. “볼펜 있냐?”는 말이다.
윗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었더니 이집트 아이 눈빛이 하늘 해를 담은 듯 환히 빛나며 다가온다. 볼펜을 건네었더니 “오, 모나미 브랜드!”하며 볼펜에 입을 맞춘다. 한국 모나미 볼펜을 브랜드로 여기다니. 모나미 볼펜을 새삼 살펴보았다.
모나미 볼펜은 까만 머리 밑 하얀 긴 몸통에 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 모나미(Mon Ami)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라는 뜻이며 1963년 5월 1일에 출시될 당시만 해도 고가의 만년필 외에는 필기구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저가의 가격으로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의도에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제작 당시 모나미 볼펜 한 개 값이 15원이이었고 모나미에서 개발한 3 번째 제품이라서 붙여진 153이라는 숫자가 쓰여져 있단다. 또 요한복음 21장에 베드로가 예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 153마리의 물고기가 낚였다는 의미를 가져와 예수님 말씀을 믿고 따르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상징적 숫자이기도 하다. 출시 초기 제품은 셔츠 앞주머니에 넣었다가 볼펜에서 잉크가 새어 나와 옷을 버리기도 했지만 기술 개발을 통해 오늘날 모나미 브랜드가 태어난 것 같다. 중국산 학용품 10여종이 납, 카드륨, 프탈레이트계 가소재 등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최대 수백개 초과 검출 되어 결함보상(리콜)조치 되었는데 모나미는 하나도 검출되지 않았다니 모나미의 브랜드성을 인정해도 좋으련만 우리는 브랜드 제품을 흔하게 쓰고 있어 브랜드인지조차 몰랐다. 누구는 153숫자 기원이 주식투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1+5+3=9인데 아홉은 갑오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란다. 그래서 옷을 사러갈 때도 29,900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고 식당에 음식을 사먹으러 갈 때도 13900원, 마트에 콩나물을 사러 갈 때도 1590원이라는 9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가? 9자를 좋아해서라기보다 9자가 10자보다 부담감을 적게 주기 때문일 것이다. 29,900원이라면 좀 헐한 가격 같아 마음이 끌리는데 3만원이라면 비싸게 생각되는 심리를 꿰뚫고 붙여둔 가격표일 것이다. 어쨌든 내친구 모나미는 이집트까지 데려갔다가 이집트 친구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전해준 선물이었다
이집트 오벨리스크에서부터 경북 가야면 오벨리스크까지
2019년 12월 13일~21일까지의 기록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모르코, 알제리, 리비아. 수단, 에디오피아, 잠비아, 앙골라, 탄지니아, 세네갈 가봉 등이 있는 아프리카 주에서 내가 관심가진 나라는 이집트이다. 이집트는 출애굽기(검은 땅, ㅌ카멧트), 엠에스 등으로도 불린다. 한국은 인구 4천 5백만명인데 이집트는 1억 300만 인구에 95%가 사막이라서 5%지역에 사람이 더 많이 모여 살고 있다. 고등학교 때 세계사를 배울 때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오벨리스크가 있는 나라 이집트는 아득한 지구 건너편 나라라서 호기심과 동경심만 키워왔다. 65세 정년퇴임을 한 올해 2019년 12월 13일, 나는 드디어 인천공항에서 열네 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로 날아갔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뒤 이튿날,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러 갔다. 피라미드를 보러오기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그 넓은 사막지대에 힘들게 피라미드랑 스핑크스를 왜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책에서는 나일강 범람기 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활할 여력이 없어지자 국가에서 공공사업으로 일을 시켰다는 설도 있고 왕이 사후에 하늘로 오르기 위한 계단으로 만들어두었다가 죽은 후 하늘로 올라 별이 되어 태양신과 함께 하늘을 순회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고도 한다. 제일 큰 피라미드는 높이가 150m였다. 우리는 원래 있는 큰피라미드 문을 두고 도굴꾼들이 파놓은 작은 문을 통해 1/3지점 무덤 속까지 들어가는데, 천장이 낮아 허리를 최대한 굽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입장료는 600유로 받으면서 안전모 하나 갖춰두지 않고 세계 관광객을 받고 있다니 우리나라 고수 동굴만 해도 안전모를 준비해두는 데 싶은 생각이 드니 이집트인은 옛 문화재를 팔아 쉽게 돈 버는 일에만 관심 두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덕에 우리는 백설공주 동화 속 난쟁이처럼 허리를 굽혀 기어들어가 쿠퍼왕의 석관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씩 찍고 나왔다. 옆으로 이동해 스핑크스를 보러 갔다. 스핑크스는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동체를 하고 왕자(王者)의 권력을 상징하는 모습인데 여기 기자에 있는 제4왕조(BC 2650년경) 카프레왕(王)의 피라미드에 딸린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란다. 자연암석으로 길이 70 m, 높이 20 m, 얼굴 너비는 4 m 거상(巨像)인데 카프레왕의 생전의 얼굴이라고 한다. 앞으로 뻗은 앞다리 사이에는 투트모세 4세의 석비(石碑)가 있다. 이 스핑크스는 ‘지평선상의 매’를 나타내는, 태양신의 상징이라고 한다.
스핑크스를 본 뒤 피라미드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할아버지 쿠푸왕 피라미드(147m), 아버지 카프레 왕 피라미드(137m), 손자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65m)가 나란히 있었다. 세 피라미드 앞에서 준비해간 형님네 홍옥혼식 기념 현수막과 남편의 69회 축하현수막을 펼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스라한 나라까지 와서 이런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득, 인터넷에서 2012년에 본 사진 한 장이 생각났다. 이 세 피라미드 위에 2737년 마다 금성, 토성, 수성이 떠있는 사진이었는데 그때 본 금성, 토성, 수성이 우리가 들고 있는 현수막 뒤 피라미드 위에도 떠 있는 것만 같았다. 황홀한 착각은 내 자유니까.
<미완성 오벨리스크>
이튿날, 아스완에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보러갈 예정으로 야간열차를 기다렸다. 김아란 가이드 말로는 먼지 뒤덮힌 열차라도 본국인들이 타는 열차보다는 시설이 잘되어 있으나 화장실이나 세면기에 물이 안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열차가 오기 전까지 우리 일행은 한쪽만 비닐이 쳐진 카페에 들어서서 의자에 엉덩이를 걸쳐놓은 값으로 차를 시켰다. 날씨가 춥고 저녁이라 커피나 망고쥬스도 먹을 것이 못 되었지만 차가운 망고쥬스를 시켜 가이드에게 선심 썼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려 야간열차를 탔는데 12시간 뒤에 아스완에 도착한단다. 막상 타보니 광희가 서울 와서 처음 얻었던 고시원 방보다도 적고 일본 오키나와 갔을 때 들었던 방보다도 작았지만 세면기도 안에 있고 수건도 두 장 걸려있고 앞면 벽 쪽에는 식판, 뒷면 벽쪽에는 침대판이 걸려 있고 사닥다리를 오르면 2층 침실이 되는 간편한 공간에 감탄했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밤에 누워 자다 눈을 뜨니 차창에 불빛이 비친다. 움직이는 불빛은 타는 것들이 이동하는 중이겠고 북 박힌 불빛들은 가로등들이겠다. 열차가 흔들리며 새 풍경속으로 들어가니 낭만과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만약, 흔들림 없는 사각상자 속에 내가 갇혀 있는 신세거나 요양원 벽속 같은 세상에 내가 갇혀 있다면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이 흔들림을 즐길 여력을 만들어가야 하겠다. 열차에서 주는 빵으로 아침을 먹고 내려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보러 갔다. 오벨리스크의 자소 (字素)원은 꼬챙이, 바늘이라는 뜻인데 왕의 업적이나 신을 찬양하기 위한 비문(碑文)을 새기는 거대한 돌덩이였다. 아스완에 버려진 오벨리스크는 청동기시대 하드셉수트 여왕의 비문을 만들려고 자르다가 돌덩이에 금이 나서 중단된 채 누워있었다. 미처 하드셉수트 여왕을 위한 칭송의 탑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금이 난 몸둥이로 오랜 세월동안 누워 있으면서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배짱은 뭐란 말인가? 그보다 더 궁금했던 것은 41m의 길이와 1150톤의 무게의 돌로 어떻게 잘라냈을까하는 점이었다. 아스완 시가 있는 남동부는 나일강의 급류지점으로 고대부터 화강암 채석장이었는데 그 채석장에서 단단한 화강암을 현무암으로 두드려 잘랐단다. 돌에 틈을 만들어 나무쐐기를 박은 다음 물을 부어 팽창력으로 잘랐다고도 한다. 여기 오밸리스크는 채석장에 편하게 누워있지만, 장제전이나 다른 곳에 세워진 거대한 돌덩이, 오벨리스크는 어떻게 이동시켰을까? 탈것도 없고, 사람이 어깨에 둘러멜 크기는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 그들에게 나일강 급류가 고속도로처럼 활용되었다고 한다. 급하게 흐르는 물살을 이용하여 옮겼단다. 배에 있는 닻을 던져 오벨리스크를 고정하고 밧줄과 물의 범람을 이용해 도량 형태로 만든 바닥 안쪽에 모래를 세우고 양쪽에 경사면을 만들어 한중간에서 안쪽으로 잡아 당겨 오벨리스크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은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벽화에 기록되어 있다. (투트므세스 1세와 하트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대표적이다.)
오벨리스크의 유래는 이집트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신 이시스의 남편 오시리스의 성기를 상징하기도 하고 태양신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고대 종교의 상징물로 이집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프랑스 제국주의 때 이집트 총독이 프랑스에 기증한 것은 파리 콩코드에 있고 영국과 로마 바디칸에도 있다. 바디칸 성당 앞마당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기초까지 합한 높이가 40m, 무게는 320톤이다. 이 오벨리스크를 감아올릴 때, 기계 45개, 말 180마리, 작업 대원 800명이 동원되어 1586년 9월 10일에 바디칸 성당 앞마다에 세워졌다. 이때 수 백 개의 종소리와 대포 함성, 군중이 환호성을 올렸단다. 왜 이렇게 열광했을까?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은 태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해왔다.(이집트 파라호도 태양신이고 잉카의 신도 태양신이었다) 그래서 석기시대 돌무지에서부터 탑까지, 지상에서 태양을 연결하고 싶은 마음에 하늘 계단을 오를 생각으로 상징적인 탑을 세웠단다. 오벨리스크 뿐이랴? 피라미드도 파라오가 하늘 계단을 오르고 싶어 평균 돌 230만개를 들어 올려 쌓은 것들이 아닌가?
태평양 건너있던 머나먼 나라까지 가서 보고 있자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내가 사는 고장, 경북 고령지방 가야면 운수 신간리에도 청동기시대의 입석인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신간리의 오벨리스크는 마을 수호신이기도 했고 이정표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입석은 남근석 형태로 윗부분은 직경이 30cm, 아랫부분은 50cm, 높이는 190cm이다. 이집트의 거대 석상과는 비교가 안 되지만, 이 작은 오벨리스크로도 우리는 청동기시대부터 여기에 자연 취락[聚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고대부터 사람 사는 곳에서는 누구나 하늘의 보호를 받고 싶은 마음과 하늘을 오르고 싶은 욕구가 돌에 의지하여 피라미드를 만들게 되고 오벨리스크를 세우게 되고 지금까지 돌탑을 세워오고 있는 것인가 보다. 이로서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의문, 즉 왜 프리미드와 스핑크스와 오벨리스크를 세웠는가에 대한 궁금증들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어 이집트 여행의 보람을 느꼈다.
<아스완 –아부 심벨 신전:심벨의 아버지 신전>
아스완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20분 달려 아부심벨로 갔다. 나세르 호수가 있는 하이댐은 3600미터라는데 너무 넓어서 밟고 서서 개미가 되어 사진 한 장 찍어 보았다. 이집트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 람세스 2세 대전을 보았다. 기원전 1320년에 장군 람세스가 즉위하여 11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처음 람세스 1세 아들 세티는 아시아로 원정 나갔고, 람세스 2세는 시리아에서 히타아트 왕과 카데시 전투를 일으켜 양국 사이에 평화가 조인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평화조인문이 람세스 2세 신전에 있다. 람세스 2세는 92세까지 살았고 자기를 신격화해 벽화에는 온통 자기 전적을 선전하는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 신에게 와인, 빵. 맥주를 바치는 벽화가 많다. 람세스 2세는 과시욕이 강해 이집트 내 신전을 만들어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이름을 파내고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또 자기 부인 네퍼레탈을 너무 사랑해서 아부신전 앞 라세르 호수(넓이 3600m-쿠퍼왕 신전이 100개 이상이 들어가는 넓이다)에 신전을 짓고 자기 무릎과 같은 높이에 묘를 지었다.(이 네퍼레탈은 클레오파트라와 이모 아낙수나뭄과 네페르티티가 세계 4대 미인이라 한다. 하지만 역사에 이름 한 줄 나오는 걸 가지고 이쁘다고 하니 그 무슨 근거인지 상당히 주관적이다.)
여기서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를 되돌아보았다.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직 자기만이 이집트어를 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16살 때 아빠가 사망하자 18살 되던 해 자기 남동생 열 살짜리와 결혼해서 자기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최고의 스승한테 배우며 도서관 책 70만권을 읽고 20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다. 정적 폼페우스가 이집트로 오고 있다는 소식에 남동생은 폼페우스의 목을 베어 카이사 앞에 내민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평범한 카펫을 준비해서 신하에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 카펫을 풀어보게 하라고 보낸다. 카이사가 그 카펫을 받아 풀자 알몸의 21살 클레오파트라가 나타난다. 애인사이가 되어 클레오파트라는 왕위를 되찾는다. 그러나 카이사가 심복 부르투스에게 살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와 사이에서 난 아들을 보호하려고 이집트에 2년간 있다가 7월에 돌아온다. 동생 토톨레미가 죽자 왕이 된다. 로마 안토니우스가 유언집행관인데 옥티비우스와 안토니우스 중 안토니우스가 우세하다는 소리를 듣고 이집트가 미적한 태도에 안토니우스가 오자 클레오파트라는 배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 사흘만에 치마폭에 이 남자를 또 녹인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11년간 살면서 아들을 낳고 로마의 본부인이랑 이혼한다. 옥티비우스가 배 400 척을 몰고 와보니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안토니오가 자살한다. 실은 그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시녀와 무덤에 숨어 살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자살한 뒤 옥티비우스에게 발각되어 옥티비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데려가 모욕을 주려고 자결하지 못하게 감시한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시녀 두 명에게 목욕 준비를 시키고 자기 배 위에 독사를 풀어 자살하며 옥타비우스에게 남긴 편지엔 “저는 안토니우스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고 적었다. 클레오파트라는 8개 국어를 했으니 그녀 혀는 여러 악기와 같다. 클레오파트라는 붉은색 황토를 입술에 바르고 아몬드를 갈아 아인새도우를 만들어 발랐고 우유와 꿀로 화장발을 뽐낸 메이컵의 달인이었다. 그래도 어쨋거나 그녀의 그런 노력이 왕권을 잡고 휘두르는데 한몫을 했으니 그것도 아주 중요한 실력이 되었겠다.
<콤옴보 신전>
점심을 먹고 오후 2시 크루스 승선. 콤옴보로 이동, 나일강가 고지대 사탕수수밭을 보았는데 이집트인들은 밭일을 하는데도 남자들이 긴드레스 같은 전통의상을 그대로 입고 기계로 밭을 갈고 있었다. 사탕수수 밭 가운데 있는 신전으로 갔다. 이 사원은 원래 악어 머리 형상을 한 소백(Sobek)신과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신에게 바쳐진 것이며, 이 두 사원을 콤옴보 사원이라고 한단다. 주요부분 전부가 이중구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건축되었는데, 장식에서 호루스 신전과 비슷하였다. 파손이 심한 편이나 파피루스 기둥 등이 매우 장식적이고 아름답다. 2개의 탑문을 들어서면 안뜰인데, 주벽을 따라 세워진 16개의 열주는 대좌 부분만이 남아 있고, 정면은 제1열주실인데, 왕의 이름을 새긴 카르투시가 새겨져 있다. 그 안쪽이 제2열주실인데, 벽면에는 호루스 신과 토트 신에게서 물려받는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그려져 있으며, 전실에 3개의 방이 있는데 보존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지성소를 둘러싼 회랑도 이중구조로 되어 있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 중 남쪽의 것이 소베크 신에게, 북쪽의 것이 하로에리스 신에게 바쳐진 것이란다.
2019년 12월 17일 화.에드푸(=호루스)신전
이집트 전체에서 가장 잘 보존된 신전이 호루스(매의) 신전이라고 한다. 호루스 신전은 180년이 지난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때 완성되었다. 신화에서 이 신전의 매는 이시스와 오시리우스 신의 아들인 호루스로 신을 믿는 이집트인을 위해 그리스 출신 왕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이 건축하였단다. 호루스는 새의 머리를 한 인간의 형상, 새로 표현되어 있다. 이 신전에는 아들 호루스 왕자 탄생의 방이 있었다. 뻥 뚫린 천장 위에서 이시스가 해로 떠서 아래에 서있는 관광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는 카(인격)조각상에 깃들어 있고 죽으면 바(영혼)에 깃들어 저승 세계를 오간다고 한다. 안쪽은 그 시대엔 제사장이나 파라오만 드나들 수 있었단다. 바깥쪽에는 날로미터라는 나일강 수위 측정 장치가 있어 그때에 맞추어 항상 세금을 걷었단다. 백화로 된 부조는 흙으로 그려진 사람의 피부가 살아있는 듯 볼륨과 탄력을 느끼게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었다. 신전의 주인인 호루스(매)신이 파라오에게 생명의 열쇠를 입에 대어 생명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하늘 계단 위에 있는 천지 창조주는 뭐라고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그것을 가지고 잘들 노는 군.’ 하는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멜론의 거상, 왕가의 계곡-투탕커맨, 람세스1세~4세 아멘호테프 2세>
하드쉡슈트 장제전은 최초 여왕이 만든 테라스식 신전이다. 팔뤁카를 타고 마차로 이동, 다시 버스로 룩소르까지 2시간 반 동안 보트를 타고 갔다.
<룩소르 신전>
룩소르 신전은 제 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건립. 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증축하여 나일강 북쪽으로 대답문, 람세스 2세 안마당, 제 2탑문, 아멘호테프 3세의 열주량과 안마당 다주실, 내진으로 이어져 있었다. 서부사막은 모래가 곱고 알갱이가 잘고 동부사막은 모래가 거칠고 알맹이가 굵은 특징이 있단다..
<호루스 신화>
1달러 뒷면의 파라미드 사진을 보면 13등분이 되어 있다. 위에는 호루스의 아빠가 13등분되어서 자기 아내 아시스가 남편을 찾았을 때 12조각은 찾았는데 성기 한 조각을 물고기가 먹어버려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고 저세상 왕으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아시스가 숨어서 아들 호루스를 키울 때 파피루스 갈대가 호루스를 보호하는데 삼촌 세트가 왕위에 올라 형수 아시스를 해치려하자 아시스가 마법을 이용해 호루스를 도우려하나 삼촌 세트가 마법을 못쓰게 왕에게 항의한다. 그러자 왕은 법정에 여자는 출입을 금지시킨다. 그러자 아시스는 빵바구니를 들고 뱃사공을 찾아가 배를 좀 태워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금반지를 빼어 뇌물로 주어 배를 타고 법정에 가보니 자기 아들 호루스에게 재판이 불리하게 되어갔다. 그 틈에 아시스는 자기 아들 호루스를 위해 마법을 이용해 새로 변신하여 양을 찾아가겠다고 하자 전쟁이 심해져 아시스의 남편이 저 세상을 다스리므로 아시스의 남편에게 결정을 물어보게 한다. 이때 호루스의 아빠였던 이시우스는 아들 편을 들어 아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아들께 왕위를 물려주라고 한다. 그래서 호루스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세트는 사막을 다스리게 된다. 그 후, 크놈신을 불러 우리를 섬길 인간을 만들어라하자 태양신을 본떠 돌림판에서 인간을 만들었는데 여자의 몸에 아기를 낳을 장치를 넣어 아기들이 많이 생겨났다. 신들은 죽지 않고 사람들은 죽지만 인간들은 자기네가 신이 되려하자 신들이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태양신 라를 부른다. 라는 자기 왼쪽 눈을 뽑아 저주를 담아 세상에 던졌다. 토트가 셀크메트를 속이려고 붉은 대추나무와 맥주를 뱀새도록 바르자 셀크메트는 세상천지가 붉어 돌아가고 그때 살아남은 인간들이 우리라는 것이 이집트의 신화였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 돌아다니며 본 것은 결국엔 이집트 신화 속을 걸어 다닌 것이었다.
2019년 12월 18일 수
해변이 아름다운 후루가다 디저트로즈 호텔에 머물며 점심을 먹고 오후에 모래사막으로 갔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사막투어를 했다. 내려와서 일몰을 기다리며 해가 지자 휘발유로 하트 모양의 불길을 내어 그 안에 들어가 사진 찍으며 캠프파이어 흉내를 냈다. 남편과 나는 하트 속에서 우리만의 또 하나의 하트를 만들어 사진에 담았다.
2019년 12월 19일 목
후루가다 아름다운 홍해에서 반 잠수함을 탔다. 처음에는 선상으로 올라가 흥겨운 이집트 음악에 맞추어 자유롭게 춤을 췄다. 선원들과 여행객이 섞여 흔들어대었다. 그러다가 쥬스 장수가 와서 쥬스를 시키라고 했다. 팔아주어야 하고 차가운 것을 먹기는 싫고 해서 망고를 시켜 가이드에게 드렸다. 바다를 반쯤 가로지르자 모두 지하로 내려가란다. 내러가니 배 창가에 한 사람씩 앉아서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의자가 놓여있다. 안에서 배창 밖으로 고기떼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컴퓨터 오락실에 들어가 등을 보이며 앉아있는 사람들 모습과 닮아있다. 배 창가의자에 앉아서도 마음은 바다 속을 헤험쳐 바다속 물고기들과 헤엄쳐 다녔다.
2019년 12월 20일 금
카이로에서 고대 이집트 청 수도 멤피스로 이동하여 멤피스 박물관에 안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 석상을 보았다. 프랑스, 영국 등이 다 훔쳐갔는데 이 람세스 동상만은 커서 옮길 수 없어서 이집트에 남아 있단다. 누워있는 람세스를 보고 최초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시카라 피라미드를 보러 갔다. 계단식으로 지어졌는데 조세로 왕이 신들에게로 가기 위해 밟으려고 계단식으로 지었단다. 깨어지고 무너져 복원 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칠해진 색을 지닌 채 있는 벽화들이 살아 움직이듯 했다. 특히, 스토리텔링식으로 그려져 벽에 붙어 있는 벽화라 영화 필름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네프리타리신전>
람세스 2세의 왕비 신전으로 “가장 사랑받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뜻으로 정면 조각들은 큰문으로 분리된 두 그룹의 석상이다. 동상 높이는 왕과 왕비로 10 미터 이상이다. 문 반대편에는 이집트의 상이집트 왕관과 이중왕관을 쓰고 있는 파라오 동상이 있다.
<카르낙 신전>
카르나크 신전은 크게 고대 이집트 신 아문, 무트, 멘투에게 바치는 세 개의 신전으로 나뉜다. 이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아문 대신전이다. 입구에서부터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스핑크스가 양쪽으로 20개씩 늘어서 있으며, 첫째 탑문을 지나면 광활한 광장이 나타난다. 중앙에는 큰 원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의 입구로 들어가면 신전이 하나 나타난다. 이것은 람세스 3세가 아문 신에게 바쳤던 신전이다. 카르나크 신전의 가장 안쪽에는 투트모시스 3세의 축제전이 있다. ‘신전의 식물원’이라 불린다. 축제전의 벽에는 각종 식물이 새겨져 있다. 나일강의 범람과 국가의 풍요를 기원하며 축제를 벌이던 장소라고 한다.
<룩소르 신전>
'스핑크스의 길'은 룩소르 신전에서 시작하여 북부의 카르낙 신전까지 3킬로미터가량 뻗어 있다. 높이가 24미터에 달하는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00년, 제19왕조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세운 것으로, 신전 입구 '스핑크스의 길'이 끝나는 곳에 서 있다. 원래는 두 개였으나, 하나는 1829년 프랑스의 왕 루이-필립에게 주어져 지금은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서 있다. 그 입구는 역시 람세스 2세가 건축한 열주식 안뜰로 이어진다. 안뜰과 오벨리스크는 신전의 나머지 부분과는 비스듬한 각도에 있다. 안뜰은 아멘호텝 3세가 지은 100미터로, 파피루스로 기둥머리를 올린 열네 개의 열주가 늘어서 있는 주랑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열주식 안뜰은 이 주랑 건너편에 있다. 신전 내부는 32개의 기둥이 서 있는 정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이 내부 성소는 이집트의 조각과 로마의 스투코(치장 벽토)로 장식한 전실을 포함하고 로마인들 역시 이곳에서 제의를 올렸다. 이 신전은 아문 신에게 바치는 성소인 동시에 아멘호텝 3세가 태어난 분만실이기도 하여, 파라오의 탄생을 묘사한 부조가 걸려 있다
<조각>선 시
산 사람은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게 조각하였고
죽은 사람들은 두 발을 가지런히 모우도록 조각하였다.
그래, 한 발을 움직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두발 가지런히 모우는 건 정지자세이며
죽은 후 관에 들어갈 때의 자세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서 부지런히 걸어 다니는 복을 누려야 한다.
호루스의 어린 시절
그가 태어난 방은 천장이 뻥 뚫린 채 그의 엄마 아시스가 천장 위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 했다.
호루스는 벽화 속에서 입에 손가락을 댄 어린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빨던 손가락을 아직도 빨고 있는 걸 보면 부모 정이 그리운 욕구불만에서 그 손가락에게 위안을 받으려는 모습처럼 다가와 우리 큰 아들이 자랄 때 모습 같아 애처롭고 가련하게 보였다.
스핑크스 코에 앙크(영혼)를 불어넣으면 생기가 돈다.
그런데 코를 없애면 스핑크스는 죽는다.
그래서 스핑크스를 죽이려고 코를 떼어낸 석상도 있다.
코를 떼어내어 죽어도 벽화 속에서는 살아서 누린 음식과 가구들이 새겨져 있다.
죽어서도 저 세상에서 똑같이 먹어야하고 누려야 할 안락에 필요한 물건들이라서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밸리스크 돌을 통해 돌에 담아 둔 갈망은
하늘을 오르려는 욕망의 계단들이었다.
죽어서도 살고 싶은 것은
죽은 인간이나
산 인간이나
고대 인간이나
현세 인간이나
다 같은 열망이요. 갈망일 뿐
세상 삶은 인살라다
신의 뜻대로 될 것이다.
<진정한 여행>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황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아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나짐 히크메트
여행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잘 얄려진 예방약이자 치료제이며 동시에 회복제다.-다니엘 드레잍크/미국의사,19세기
-오지만 디어스(그리스어로 람세스)람세스 2세와 나폴레옹이 오버랩 되어 쓴 시
역사의 땅에서 온
돌로 되어 거대하지만
모래 위 주름진 머리
죽어진 돌덩이 위로 잘 살아남아
내 이름도 오지만디어스
왕들의 왕
그리고 절박하라
외로운 모래의 지팡이의
다 자워버렸다.
람세스 2세 진흙 속에 쳐박힌 채 발견. 높이 15m 지금은 12m 80톤 인자한 불상 느낌 오른쪽 어깨(카르투신)3세가 람세스 2세 것을 파고 자기 이름을 새김
<멤피스의 스핑크스> 스핑크스 코에 앙크(영혼)를 불어넣으면 생기가 있다. 그런데 코를 없애면 스핑크스는 죽은 것이다. 여기 스핑크스는 코가 있다. 죽기 전에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사람이 행복해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