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친 글] 길에서 맞는 설렘 / 정희연
울산에서 고성 통일 전망대까지의 거리는 429km다. 그 거리의 끝에 닿으려면 자동차로 쉼 없이 달려도 다섯 시간 40분이 걸린다. 광주에서 서울, 광주에서 울산보다 훨씬 먼 거리다. 국도 7호선을 몇 번 갈아 타야 하고, 마을 앞에 다다르면 60km/h의 속도 제한이 기다리고 있다. 시속 100km로 빠르게 바람을 가르던 속도감은 이내 고요한 물결처럼 잔잔해졌다.
그동안 거리가 멀어 가 보지 못했던 해파랑 길의 종착지인 강원도 고성 통일 전망대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을 여행하려고 금요일 저녁, 자정이 가까운 무렵 울산에서 출발했다. 전망대에 이른 시간은 다음 날 오전 11시였다. 오는 길에 인제 교육 도서관에 잠시 들러 시간이 늦어졌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명파 해변과 대진항, 회진포, 아야진항, 해풍 공원을 지나 늦은 밤 속초 동명항에서 하루를 보내고, 대포항과 정암 해변에 잠시 머문 뒤 오죽헌으로 향했다. 설악 해변을 조금 지나니 낙산사 이정표가 보인다. 불현듯 스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20년 전의 일이다. 강원도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천년 고찰인 낙산사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이 티브이(TV)로 전해졌다. 2005년 4월, 양양 산불로 원통보전을 포함한 전각 21채가 한순간 불길에 삼켜져 재로 흩어져 버렸다. 산불은 ‘양간지풍(襄杆之風)’이라는 자연의 힘이 더해져 낙산사에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왔다. 전라도 끝자락에서 살아온 나는 강원도의 낙산사를 그저 멀고도 낯선 곳으로만 여겼다. 삼일절 연휴라 한층 여유가 있다.
“그래, 가 보자!”
낙산사는 국도 7호선과 동해를 서로 접하고 있다. 해발 78m의 아주 낮은 산으로 낙산 정상 아래로 동쪽과 남쪽에 자리했다. 일주문이 보이는 가까운 곳에 차를 세웠다. 산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림이 울창했다. 절의 면적은 92,000㎡(약 28,000평)에 달하며,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 중 하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빈일루 2층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원통보전으로 향했다. 일반적인 절과 달리 대웅전이 없으며, 원통보전이 절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원통보전에는 건칠관음보살좌상(나무, 종이, 천으로 만들어 옻칠한 후 도금한 것, 보물 제1362호)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전통적인 건칠법으로 제작되어 오랜 세월 동안 불자와 함께해온 만큼 그 의미가 크다. 원통보전 오른편에는 해수관음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데, ‘꿈이 시작되는 길’이라 부른다.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꿈이 무엇이었는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길 끝에 닿으면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잇는 듯한 해수관음상이 우뚝 솟아 있다. 높이 15m, 둘레 3m로, 마치 백두대간의 중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다. 관음상 앞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은 별도로 관세음보살을 모시지 않고 해수관음상이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보통은 그냥 지나쳤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일까. 어느새 나는 문을 열고 있었다. 스님은 염불을 외우고 있었고, 스님 뒤 양옆으로 두 명의 여자 보살이 함께 불경을 낭송하고 있다. 왼편에는 중년의 부부가 절을 하며 소원을 빌고 나는 스님 뒤 그리고 두 여자 보살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 생각이 없다. 내면의 고요를 찾고 싶었으나 스님의 불경은 외국어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염불에서 목탁으로 귀를 옮겼다. 우렁찬 목탁 소리는 관음전 안을 가득 채우고 남은 것은 외부로 흩어졌다.
불법의 위력이 커서 기도하면 잘 이루게 해 준다고 알려진 홍련암 앞에는 수험생의 부모를 비롯해 기도하려는 사람과 구경꾼이 뒤섞여 암자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의상대는 ‘양양 10경’중 하나로 손꼽히는 최고의 일출 명소다. 동해의 푸른 파도와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며,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자연과 하나 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울산에 온 지 벌써 6개월째 접어든다. 이제 거의 경상도 사람이 다 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좋아하고 아끼게 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그만한 매력과 이유가 있다. 신라 천년 역사를 간직한 경주, 선비의 고장 안동, 석유화학·조선업·자동차·철강 산업으로 일찍이 산업 도시가 된 울산과 포항, 피난 수도가 되었던 부산 등 역사, 문화, 산업이 지리적 환경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잘 어우러져 나를 설레게 하는 곳이 되었다.
신라시대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꿈속에 나타난 부처의 뜻에 따라 세운 낙산사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꿈이 이루어지는 길, 마음이 행복해지는 길,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 그리고 설렘이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에서 2025년 설레는 새로운 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