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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명상의 세계
사념처 명상의 세계는 그간 발표한 대념처경 주석서 1권 2권 3권과, 12연기 1권 2권의 방대한 내용을 새롭게 간추린 글입니다. 대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내용도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연재를 합니다.
- 묘원 상좌불교원장
2) 마음의 분류
(1) 태어날 때의 네 가지 마음
누구나 태어날 때 네 가지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태어납니다. 네 가지 마음은 선심(善心), 불선심(不善心), 과보심(果報心), 작용심(作用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네 가지의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마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어리석음과 지혜가 결정됩니다.
첫째, 선심(善心)입니다. 선한 마음은 기본적으로 탐욕 없음[無貪], 성냄 없음[無瞋], 어리석음 없음[無癡]으로 결합되었습니다. 탐욕 없음은 관용(寬容)이고, 성냄 없음은 자애(慈愛)고, 어리석음 없음은 지혜(智慧)입니다. 선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의 반대입니다. 선한 마음은 선한 조건이 성숙되면 일어납니다. 선심이 있을 때는 불선심이 없습니다. 선심이 있을 때는 선심이 있어서 이익이 있고 불선심이 없어서 이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심이 있어서 선한 행위를 하면 선과보가 생겨 다시 선심이 생기도록 합니다. 이처럼 선심 하나에 몇 가지의 이익이 있습니다. 이것이 선심의 가속도입니다.
탐욕 없음은 스스로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부리지 않아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용이 있을 때 탐욕이 없습니다. 성냄 없음은 화를 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애를 일으킬 때 성냄이 없습니다. 어리석음 없음은 지혜를 가진 마음입니다. 지혜는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서 아는 마음입니다. 지혜가 있을 때 어리석음이 없습니다. 이때의 선심은 완전한 선심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불선심으로 바뀔 수 있는 선심입니다. 선심과 불선심이 함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불선심(不善心)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기본적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세 가지 마음으로 결합되었습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한 마음의 반대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조건이 성숙되면 일어납니다. 불선심이 있을 때는 선심이 없습니다. 불선심이 있을 때는 선심이 없어서 불이익이 있고 불선심이 있어서 불이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선심이 있어서 불선행을 하여 불선과보가 생겨 다시 불선심이 생기도록 합니다. 이처럼 불선심 하나에 몇 가지의 불이익이 있습니다. 이것이 불선심의 가속도입니다.
탐욕은 많은 것을 얻으려 하고 대상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 마음입니다. 성냄은 화를 내는 잔인한 마음입니다. 화는 스스로를 불태웁니다. 어리석음은 미혹하여 사물의 본성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무명과 같은 마음이며 모든 해로운 마음의 근원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이므로 이 두 가지 마음은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일어납니다. 매순간 우리의 마음이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변하는 것은 원래 이런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선한 조건에서는 선한 마음이 일어나고 선하지 못한 조건에서는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불선심은 완전한 불선심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선심으로 바뀔 수 있는 불선심입니다. 선심과 불선심이 함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과보심(果報心)입니다. 인간은 선하고 선하지 못한 마음만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과거에 행한 결과의 마음을 함께 가지고 삽니다. 과보란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줄인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원인과 결과의 마음이라고도 하고 조건 지어진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과보심은 과거에 행한 업의 결과로 생긴 마음입니다. 과거에 선한 일을 했으면 선한 일을 한 과보의 마음이 있습니다. 과거에 선하지 못한 일을 했으면 선하지 못한 일을 한 과보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항상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선한 행위를 많이 했으면 선한 과보가 와서 현재의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선과보가 자신을 지배합니다. 과거에 선하지 못한 행위를 많이 했으면 현재 선하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불선과보가 자신을 지배합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이 지배받고 있는 것이 과보심입니다. 현재 선한 마음을 먹고 싶어도 과거에 만든 불선과보심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불선심이 일어납니다. 현재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도 과거에 만든 선과보심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선심이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의지로 선한 마음을 일으키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과보에 의해 떠밀려가면서 삽니다. 만약 과보심으로 떠밀려서 살면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선과보의 영향으로 수행할 수도 있고, 현재 스스로가 선한 마음을 일으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넷째, 작용심(作用心)입니다. 작용심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앞선 세 가지 마음인 선심, 불선심, 과보심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은 최고의 성자인 붓다와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붓다와 아라한은 모든 갈애가 소멸하여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궁극의 목표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져서 새로운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완전한 해탈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작용만 하는 마음은 대상을 아는 마음만 있지 대상을 즐기거나 혐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용만 하는 마음은 업을 생성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은 어리석은 마음이 없고 지혜가 있는 마음이며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무명과 갈애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이상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마음입니다. 네 가지 마음 중에 선심, 불선심, 과보심은 업의 영향을 받습니다. 업은 의도가 있는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용만하는 마음은 업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작용만 하는 마음은 자기가 한 행위에 욕망이 없기 때문에 다시 받을 것이 없어 업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태어남이 없는 것입니다.
선심과 선과보심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선심은 선과보심과 어울립니다. 현재 자신이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선한 행위를 하여 선한 과보심이 생깁니다. 그러면 선과보심의 영향이 커집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마음을 먹는 것이 선과보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현재 선하지 못한 마음을 일으키면 불선행위를 하여 불선과보심이 생깁니다. 그러면 불선과보심의 영향이 커집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현재 선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도 불선과보심이 일어나서 선한 마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과보심으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조종되지 않습니다. 현재 선한 마음이나 선하지 못한 마음은 이런 과보심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의지대로 일으키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나 현재의 마음을 자기 마음먹은 대로 갖고 싶어도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과보심의 영향 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만들어놓은 과보심에 의해 조종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윤회의 실상입니다.
이 세상은 동류는 따르고 동류가 아닌 것은 배척합니다. 이것이 끼리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을 싫어하고 착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을 싫어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동일하게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선심과 불선심과 과보심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심과 불선심과 자신이 일으킨 과보심이 결합하여 작용을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아닌 상대의 선심과 불선심과 과보심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누구나 선한 사람과 만나면 선한 마음을 갖고 선한 과보심을 만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불선심을 갖고 불선과보심을 만듭 니다. 이런 과정을 모두 원인과 결과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조건 지어진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의지대로 살고 싶어도 이처럼 자신이 만든 선과보와 불선과보심의 영향 하에 있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자신의 과보심의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과보심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이때 자신이 일으킨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고, 상대의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유발된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친구를 잘못 만나서 나쁜 영향을 받으면 상대에 의해 불선과보심이 유발되어 불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훌륭한 친구를 만나면 상대의 선과보심이 유발되어 선한 행위를 하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수행을 하면 자신이 스스로 선한 마음을 내어 자발적인 상황을 만듭니다.
수행을 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만듭니다. 자신의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 자신의 행복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결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는 오직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항상 과보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 자신의 불선과보심도 선심으로 만들 수 있으며, 상대의 불선과보심도 선심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선심을 만들면 자신도 선하고 더불어 남에게도 선심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네 번째 마음인 작용심이 생깁니다. 누구나 이상의 네 가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네 번째 마음인 작용심은 아직 완전하게 계발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궁극의 목표는 완전하게 계발되지 않은 작용심을 완전하게 계발하여 항상 청정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하다고 할 때는 그 이면에 불선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작용심은 선과 불선을 떠난 완전한 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작용심은 선심이나 불선심이 모두 사라진 단지 작용만 하는 성자의 마음입니다. 누구나 아라한이나 붓다의 마음인 작용심을 갖기 전까지는 선심과 불선심과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으로 인해 매순간 끊임없이 바뀌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이중인격이 아니고 다중인격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서 이제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에 대하여 비난할 것이 아니고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마음이 그런 것처럼 똑같이 남에 대해서도 이해와 관용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도 상대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선심과 불선심과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과 작용심은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의 몸과 마음이 경험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서 괴로워할 것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거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현재 새로운 작용심을 갖는 것이 수행자의 사명입니다.
행복은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 옵니다. 이 마음이 과거의 불행을 사라지게 하고 현재의 행복을 만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까지 만듭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으로 미룰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계발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마음일 때만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모르는 마음은 괴로움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아는 마음은 즐거움이고 지혜입니다.
(2) 마음의 세 가지 기능
마음을 기능에 따라 심(心), 의(意), 식(識)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모두 같은 마음인데 기능에 따라 다르게 표현합니다.
첫 번째, 심(心)은 마음입니다. 심을 빨리어로 찌따(citta)라고 합니다. 이때의 심(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心所]을 구별해서 말할 때 사용합니다. 마음에는 마음이 있고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찌따’는 회화, 잡색, 여러 가지의 그림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인 수상행이 여러 가지 색을 칠하면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그림과 같다고 말합 니다.
두 번째, 의(意)는 생각입니다. 의를 빨리어로는 마노(mano)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안, 이, 비, 설, 신, 의’라고 하는데 이때 의가 마노입니다. 마노는 감각기관의 하나로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법이라는 대상을 보는데 이것이 바로 의의 감지대상입니다. 이때의 의는 심이 정신적인 것의 본질을 뜻하는 것일 때 그것과 다른 미세한 느낌의 사유와 관계합니다.
세 번째, 식(識)은 아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을 빨리어로 윈냐나(viññāṇa)라 고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식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이 없으면 수, 상, 행도 없고, 색이라고 하는 몸도 없습니다.
이상 심, 의, 식 세 가지는 하나의 마음이지만 단지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습니다.
(3) 네 가지 존재계의 마음
존재계의 마음은 그 마음이 일어나는 곳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네 가지의 마음은 욕계의 마음, 색계의 마음, 무색계의 마음, 출세간계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느 세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는 욕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수행을 해서 출세간을 경험할 때는 출세간의 마음을 갖습니다.
생명이 사는 세계는 모두 31개로 욕계, 색계, 무색계입니다. 그리고 출세간계가 있는데 출세간계는 도과를 성취한 성인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만을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31세계의 마음들을 모두 포함해서 분류한 것은 모든 생명이 똑같이 윤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인간이지만 죽으면 어디서 재생할지 모릅니다. 이처럼 생명은 31개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만 따로 떼어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건 모두 태어나고 늙고 죽음을 반복하면서 떠돈다는 것을 이해하면 존재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음의 종류에 대해서 말씀드리기에 앞서 각각의 존재하는 세계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종류가 많아서 복잡해 보입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마음을 크게 나누어 선심은 관용, 자애, 지혜고 불선심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고 알면 됩니다.
마음은 세간의 마음과 출세간의 마음이 있는데, 세간의 마음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마음으로 모두 81가지입니다. 그리고 출세간의 마음은 나누기에 따라 8가지 혹은 40가지입니다. 그래서 세간의 마음은 모두 89가지 또는 121가지가 됩니다. 그러면 욕계, 색계, 무색계의 마음과 출세간의 마음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욕계(欲界)의 마음입니다. 욕계의 마음은 생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11개의 세상에 사는 생명들의 마음입니다. 욕계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사천왕천, 삼십삼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으로 분류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욕계입니다. 이들 세계에 사는 생명들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부딪혀서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감각적 욕망을 일으켜 이것을 즐깁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의 영역이라는 뜻으로 욕계라고 합니다. 욕계의 마음은 사악도를 뜻하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 개의 천상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욕계의 중앙에 있어서 사악도의 마음과 천상의 마음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모든 존재들의 마음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잔인하여 가장 큰 불선심을 가질 수도 있고, 가장 선하고 가장 큰 선심을 일으켜 해탈을 할 수도 있습니다.
31개의 세계에서 인간만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현재의 삶에서 지옥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도 지옥에서 사는 것이며 죽어서도 지옥에 태어납니다. 또한 인간은 천인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도 천상계에 사는 것이며 죽으면 천상계에 태어납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마음 이 미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해서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은 존재계의 마음 중에서 오직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욕계에 사는 생명들의 마음은 모두 54가지입니다. 이들 54가지의 마음은 해로운 마음, 유익한 마음, 과보의 마음,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에 욕계의 해로운 마음들은 모두 12가지입니다. 욕계의 해로운 마음들 중에서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 8가지,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 2가지, 어리석음에 뿌리 박은 마음 두 가지입니다. 다음에 욕계의 원인 없는 마음들도 18가지입니다. 욕계의 원인 없는 마음들 중에 해로운 과보의 마음 7가지, 유익한 과보의 마음 8가지, 원인 없이 작용만 하는 마음 3가지입니다. 다음에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들은 24가지입니다. 욕계의 유익한 마음 8가지, 욕계의 과보의 마음 8가지, 욕계의 작용만 하는 마음 8가지입니다.
둘째, 색계(色界)의 마음입니다. 색계의 마음은 색계 선정수행을 해서 그 과보로 색계천상에 태어난 마음입니다. 모두 16개의 색계 천상이 있습니다. 선정수행을 사마타 수행이라고 합니다. 선정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본집중을 해서 번뇌를 억눌러 고요함을 얻습니다. 인간이 사마타 수행을 해서 1선정의 상태가 되면 현재 1선정의 마음을 갖게 되며 죽어서는 1선정의 과보를 받아 1선정의 세계에 재생합니다. 이래서 고요한 마음을 색계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2선정과 3선정과 4선정에 따라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마음도 다릅니다. 색계의 마음들은 모두 15가지입니다. 색계의 마음 중에 색계 유익한 마음 다섯 가지, 색계 과보의 마음 다섯 가지, 색계 작용만 하는 마음 다섯 가지입니다.
셋째, 무색계(無色界)의 마음입니다. 무색계는 존재계의 제일 높은 곳에 있으며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으로 모두 네 개의 세계가 있습니다. 무색계의 마음은 무색계 선정수행을 해서 그 과보로 무색계천상에 태어난 중생의 마음입니다. 무색계는 몸이 없고 마음만 있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무색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색계 수행의 대상은 물질을 벗어난 비물질을 대상으로 선정수행을 해서 얻습니다. 무색계의 마음들은 모두 열두 가지입니다. 무색계 마음 중에 무색계 유익한 마음 네 가지, 무색계 과보의 마음 네 가지, 무색계 작용만 하는 마음 네 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간의 마음인 욕계, 색계, 무색계 마음이 모두 81가지입니다.
여기서 인간만은 이런 마음을 모두 경험할 수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사는 생명들은 오직 자기 세계의 마음밖에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 태어난 특권이자 하나의 기회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감은 윤회를 끝내고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아니면 바라밀 공덕을 쌓거나 수행을 해서 좀 더 나은 삶을 기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모든 생명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악도에 떨어지는 마음도 함께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태어나기 어려운 인간으로 태어난 소중한 기회를 살려서 각자의 마음을 고양시켜야 하겠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자신에게 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괴로움뿐인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이런 바람이 없다면 차선책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향상된 삶을 살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궁극의 목표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괴로움뿐인 존재의 세계에서 벗어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선업이 부족하여 지혜가 성숙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상이 세간의 마음들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에 사는 생명들의 마음입니다.
수행자가 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해서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라서 알아차릴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식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재하는 것에서만 대상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단 마음은 추론적이지만, 느낌과 지각과 의도를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서 실재이고 증명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분류는 단지 모든 생명을 전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서 분류한 것이 지,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절대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이런 세계에서 살려고 하기보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존재의 세계를 밝히는 목적입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통보다는 행복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여러 가지 마음을 분석한 것입니다.
윤회하는 생명은 가장 높은 천상세계에서도 역시 우리가 겪는 똑같은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도 수명이 있으며 죽은 뒤에 어디로 갈지 모르 는 윤회를 거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서 궁극의 지혜를 얻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가장 절실합니다.
넷째, 출세간(出世間)의 마음입니다. 출세간이란 이름 그대로 세간을 벗어난 마음입니다. 세간보다는 더 높은 정신세계를 출세간계라고 합니다. 빨리어로 세간을 로카(loka)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상세계, 유정세간, 세간, 세속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갈애가 있어서 윤회하는 세계를 통틀어서 세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색계, 무색계라는 천상계도 세간에 속합니다. 물론 욕계도 세간입니다. 출세간은 빨리어로 로꾸따라(lokuttara)라고 합니다. 이것은 초세속적인 세계를 말하며, 초월적인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계를 출세간이라고 부릅니다. 주석서에서는 세간에 대한 정의를 ‘파괴하는 것,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것이나 항상 하지 않고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파괴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세간입니다. 내가 세간에 살고 있다면 모두 파괴되는 것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하는 출세간은 이러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러한 세상을 건넌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피안으로 간 것을 의미합니 다. 열반을 성취하여 갈애로부터 벗어나서 윤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의 세계에서는 상속이 있지만 무위법(無爲法)의 세계에서는 상속이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가 끊어집니다. 이러한 출세간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몸과 마음의 고유한 특성인 느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에는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압니다. 이때 집착이 끊어지면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렇게 열반을 성취하면 수다원의 도와 과를 체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출세간입니다. 이때 수다원의 마음이 출세간의 마음입니다.
출세간의 마음은 8가지로 분류하기도 하고 40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유익한 마음, 그리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과보의 마음, 이렇게 해서 여덟 가지로 분류합니다. 또는 1선정에서부터 5선정의 상태에서 도과를 얻은 경우 여덟에 다섯을 곱하여 40가지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출세간의 마음은 세속을 건너뛰는 마음이라서 세속적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출세간의 마음은 모두 열반을 성취한 마음입니다. 열반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번뇌가 불타서 의식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반의 상태에서는 의식이 있지만, 단지 지각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마음이 열반을 대상으로 합니다. 열반을 성취할 때는 도(道)의 마음과 과(果)의 마음이 있습니다. 출세간의 마음은 열반이 대상이지만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은 서로 역할이 다릅니다. 도는 지향하는 마음이고, 과는 지향한 결과로 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그리고 지향한 그 결과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도과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을 성취하기 전에 앞서서 일어나는 도의 마음은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려서 집착이 끊어진 상태의 마음입니다. 이때 유신견이 있으면 도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청정한 상태에서 아무런 번뇌가 없어야 비로소 도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도의 마음은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도의 마음 뒤에 오는 과의 마음은 도에 의해서 생긴 해탈의 마음을 경험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도의 마음은 유익한 마음이고, 과의 마음은 도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마음이기 때문에 과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출세간의 마음을 분류할 때 수다원의 유익한 마음, 수다원의 과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다원의 도의 마음, 수다원의 과의 마음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출세간의 마음을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은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유익한 마음인 도의 마음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과보의 마음인 과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익한 마음은 도의 마음이고, 과보의 마음은 과의 마음입니다. 수행을 하고자 열망하는 마음은 선한 마음이라서 유익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과보의 마음은 선한 행위로 인해서 생긴 결과라서 과보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도와 과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의 상태와 과의 상태를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도의 마음은 한 번이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도모할 때마 다 매순간 목표를 되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도는 한 번밖에 지향하지 않습니다. 사실 한번 마음먹으면 다음 마음에 앞선 마음의 종자가 전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열반을 체험하면 과의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때 과의 마음은 짧은 순간에 몇 번이고 경험합니다. 마음은 매순간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이처럼 과에 충만한 마음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도 느낌을 느낄 때 기쁨을 느끼는 순간의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충만한 기쁨일 때는 연이어서 기쁜 마음이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빠르게 일어나는 마음을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닙 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이러한 도과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이 통찰지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때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대상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때 무상과 고와 무아의 법을 알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집착이 사라집니다. 이 상태에서 최상의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 그 결과로 도의 마음이 일어나서 또다시 도의 마음을 원인으로 과의 마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집착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유신견이 남아서 열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이 조금만 있어도 마음이 청정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으로 아직 번뇌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를 알 수 있는 수행이 아니면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를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열반은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만 있지 다른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반에 이르는 자는 있어도 들어가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열반을 체험하는 과정 은 처음에 도로 지향해서 도가 충족되면 열반에 이릅니다. 그런 뒤에 의식은 살아 있지만 색, 수, 상, 행의 기능이 정지됩니다. 그래서 느낄 수 없고, 지각할 수 없고,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때 의식은 다만 열반을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깨어나면 과를 경험합니다. 이때 경험하는 과(果)는 의식이 색, 수, 상, 행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지각이 없는 상태에서 지각이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果)의 상태입니다.
(4) 네 가지 성인의 도과의 마음
첫 번째로 수다원의 도과(道果)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성인의 첫 번째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성인의 반열에 듭니다. 수다원이란 말은 빨리어로 소따빠나(Sotāpana)라고 하는데, 이는 흐름에 들어 갔다는 말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가 끝납니다. 그러므로 해탈을 예약했다고 해서 예류과(豫流果)라고 합니다. 수다원에 도가 붙으면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고, 과가 붙으면 열반을 경험하고 깨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도는 반드시 과를 경험합니다. 이는 들어 갔으면 나와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정도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팔정도를 중도라고도 하고,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수다원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 때 일곱 가지 청정과 열여섯 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사람마다 빠르거나 늦는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지혜가 나지 않고서는 결코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열 가지 족쇄 중에서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악도에 태어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 수다원이란 자격증이 있어서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어디로 보내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행한 대로 받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천상에 가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사람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불선과보보다는 선과보를 많이 축적해서 그 선과보의 영향으로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날 때 끊게 되는 열 가지 족쇄가 있습니다. 이 족쇄가 중생을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맵니다. 이 열 가지 족쇄를 오하분결(五下分結)과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합니다. 분결은 붙들어 맨다는 것입니다.
오하분결은 다섯 가지가 있는데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집착, 감각적 욕망, 악의입니다. 여기서 악의는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그다음 오상분결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오상분결은 미세한 물질세계인 색계와 정신세계인 무색계에 중생을 붙들어 매는 족쇄입니다. 오상분결은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아만, 들뜸, 어리석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면 이상의 족쇄가 하나씩 벗겨집니다. 도과의 단계에 따라 오하분결에서부터 오상분결까지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갑니다.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를 얻으면 열 가지 족쇄로부터 다 벗어납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성인의 두 번째가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사다함의 도과는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오는 도과의 마음입니다. 사다함을 빨리어로 사까다가미(Sakadāgāmi)라고 합니다. 이는 한 번 더 돌아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래자(一來者)라고 합니다. 사다함이 되면 인간으로 한 번 더 태어나서 아라한이 됩니다.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다원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 수행자는 수다원의 도과에 이를 때와 똑같은 수행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과거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할 때 나타난 망상과 몸의 통증, 졸림 등도 역시 똑같이 경험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아라한이 될 때까지 누구나 겪어야 합니다.
다음 단계인 아나함, 그다음에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단계에서도 이처럼 수다원이 사다함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매 단계마다 똑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같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같은 지혜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다함이라고 해서 색다른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똑같은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다함이 되면 수다원에서 알게 되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보다는 더 깊은 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사다함이 되면 열 가지 족쇄 중에서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고,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가 조금 약해집니다.
세 번째로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성인의 세 번째 단계가 아나 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아나함의 마음은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아나함을 빨리어로 아나가미(Anāgāmi)라고 합니다.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환자(不還者)라고 합니다. 아나함이 되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색계 4선천인 정거천에 태어납 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됩니다.
인간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악도나 천상이나 모두 지은 업대로 살다가 다음 생을 받습니다. 그러나 색계 4선 천인 정거천에서만 유일하게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아나함이 되면 오하분결인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의 집착, 감각적 욕망, 악의가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리고 성냄에 뿌리박은 두 가지 마음이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러나 색계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아직도 오상분결인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네 번째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성인의 마지막 단계가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아라한을 빨리어로 아라핫따(Arahatta)라고 합니다. 이는 아라한이 됨이라는 말입니다. 아라한을 또 다른 말로 응공(應供)이라고 하는 데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라한은 성인의 마지막 단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최고의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의 열 가지 족쇄를 완전하게 부수고 해탈을 이룬 성자입니다. 이러한 아라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정신적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아라한 자격증을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있어도 아라한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원래 오온은 무상하고 자아가 없기 때문에 아라한을 관념적인 인격체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상 수다원의 도과, 사다함의 도과, 아나함의 도과, 아라한 의 도과를 4쌍 8배라고 합니다. 네 가지 도의 경지와 여덟 가지 도과가 있어서 이렇게 부릅니다. 이상이 출세간의 여덟 가지 도과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세간의 마음 81가지에 출세간의 마음 8가지를 합쳐서 89가지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상의 마음으로 세간의 마음과 출세간의 마음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마음을 40가지로 분류하는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출세간의 마음을 40가지로 다르게 분류하면 121가지의 마음이 됩니다.
출세간의 마음을 왜 40가지로 분류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사마타 수행을 선정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지혜 수행이라고 합니다. 선정수행을 하지 않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를 건관자(乾觀者) 라고 합니다. 건관자는 마른 위빠사나 수행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빨리어로 는 수카위빠사카(Sukkha-vipassaka)입니다. 여기서 수카(Sukkha)는 마른이라는 뜻이 있으며, 위빠사카(vipassaka)는 위빠사나 수행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수카위빠사카라는 말은 선정수행을 하지 않고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마른이라는 뜻은 감성적인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바로 통찰지혜 수행으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므로 부정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선정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근본집중을 하기 때문에 선정의 고요함이 있어서 풍요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선정수행은 대상을 억눌러서 고요함을 얻기 때문에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정수행에 비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지혜 수행이라서 매우 신속하다는 특성이 있지만 지혜수행이라서 수행을 해도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지혜는 선정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근기에 따라서 선정 수행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근기가 좋아서 선정수행을 거치지 않고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선정수행을 하지 않고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을 순수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합니다.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빨리어로는 숟다위빠사나(Suddha-vipassnā)라고 합니다. 빨리어 숟다(Suddha)는 ‘청정한, 깨끗한, 순수한, 혼합되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선정수행과 통찰지혜 수행은 수행이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방법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서로 다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선정수행은 세간적 수행입니다. 그러나 통찰지혜 수행은 출세간적 수행입니다. 세간적 수행 이란 것은 윤회가 있고, 출세간적 수행이란 것은 윤회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선정수행은 고요함이 목표고, 통찰지혜 수행은 지혜가 목표입니다.
수행자가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 거친 번뇌가 많으면 우선 그 번뇌를 해결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선정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통찰지혜 수행은 지혜가 목표라서 거친 번뇌를 대상으로 통찰해서 말려버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선정수행은 관념적인 대상을 선택하여 하나가 되는 근본집중을 하지만, 통찰지혜 수행은 실재를 대상으로 하여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찰나집중을 합니 다. 그래서 선정수행은 번뇌를 억눌러서 계속해서 잠재적인 성향이 남아 있지만, 통찰지혜 수행은 번뇌를 말려서 소멸시킵니다. 이처럼 선정수행과 통찰지혜 수행은 그 목표와 결과가 다릅니다.
이상이 사마타 수행인 선정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인 통찰지혜 수행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선정수행의 고요함이나 위빠사나 수행의 도과를 성취하는 지혜나 모두 선(禪)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와 과를 얻을 때 기초가 된 선정 상태에 따라 사쌍팔배의 성인의 마음을 분류하면 모두 40가지 도과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간의 마음 81가지와 출세간의 마음 40가지를 합치면 마음은 모두 121가지가 됩니다. 이상이 욕계, 색계, 무색계, 출세간계의 121가지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분류한 마음의 숫자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분류로 여러 가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쳐도 됩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매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하나이지만 태어난 곳, 마음의 상태와 마음의 경지에 따라 다양한 마음이 있습니다. 한 순간의 마음이 이런 조건에 의해서 변한다는 사실 어느 마음도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매순간 조건에 의해 변하는 마음만 있지 사실은 내가 소유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조건에 의해 무수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 마음의 작용 >
< 마음의 작용 >
| 마 음 의 분 류 | 마 음 의 작 용 | ||
| 다른 것과 연관된 마음의 작용 13가지 | 모든 마음과 연관된 마음의 작용 7가지 | 1. 접촉 [觸. phassa, contact] | |
| 2. 느낌 [受. vedanā, feeling] | |||
| 3. 인식[想. saññā, perception] | |||
| 4. 의도[思. cetanā, volition] | |||
| 5. 집중[一境性. ekaggatā, one-pointedness] | |||
| 6. 생명력[命根. jivitindriya, life faculty] | |||
| 7. 숙고(熟考. manasikāra, attention) | |||
| 다양하게 결합하는 마음의 작용 6가지 | 8. 겨냥[尋. vitakka, initial application] | ||
| 9. 고찰[伺. vicāra, sustained application] | |||
| 10. 결심[勝解. adhimokkha, resolution] | |||
| 11. 정진(精進. viriya, effort) | |||
| 12. 희열(喜悅. pīti, zest) | |||
| 13. 열의[欲. chanda, desire] | |||
|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14가지 | 항상 함께 일어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4가지 | 1. 어리석음[痴. moha] | |
| 2. 양심 없음[無慚. ahirika] | |||
| 3. 수치심 없음[無愧. anottappa] | |||
| 4. 들뜸[悼擧. uddhacca] | |||
| 다양하게 결합하는 선하지 못한 마음의 작용 10가지 | 탐욕에 관한 것 | 5. 탐욕[貪. lobha] | |
| 6. 사견[見. diṭṭhi] | |||
| 7. 자만[慢. māna] | |||
| 성냄에 관한 것 | 8. 성냄[瞋. dosa] | ||
| 9. 질투[嫉. lssā] | |||
| 10. 인색[慳. macchariya] | |||
| 11. 후회[惡作. kukucca] | |||
| 게으름에 관한 것 | 12. 해태(懈怠. thīna) | ||
| 13. 혼침(昏沈. middha) | |||
| 기타 | 14. 의심[疑. vicikicchā] | ||
| 깨끗한 마음의 작용 25가지 | 깨끗한 마음과 연관된 마음의 작용 19가지 | 1. 믿음[信. saddhā] | |
| 2. 알아차림[念. sati] | |||
| 3. 양심[慚. hiri] | |||
| 4. 수치심[愧. ottappa] | |||
| 5. 탐욕 없음[無貪. alobha] | |||
| 6. 성냄 없음[無瞋. adosa] | |||
| 7. 중립[捨. tatramajjhattatā] | |||
| 8. 감관의 평온[身輕安. kāya passaddhi] | |||
| 9. 마음의 평온[心輕安. citta passaddhi] | |||
| 10. 감관의 경쾌함[身輕性. kāya lahutā] | |||
| 11. 마음의 경쾌함[心輕性. citta lahutā] | |||
| 12. 감관의 부드러움[身柔軟性. kāya mudutā] | |||
| 13. 마음의 부드러움[心柔軟性. citta mudutā] | |||
| 14. 감관의 일의 적당함[身適應性. kāya kammaññatā] | |||
| 15. 마음의 일의 적당함[心適應性. citta kammaññatā] | |||
| 16. 감관의 능숙함[身能熱性. kāya pāguññatā] | |||
| 17.마음의 능숙함[心能熱性. citta pāguññatā] | |||
| 18. 감관의 바름[身律儀. kāya ujukatā] | |||
| 19. 마음의 바름[心律儀. citta ujukatā] | |||
| 절제 [離. virati] 3가지 | 20. 정어(正語. sammā vācā) | ||
| 21. 정업(正業. sammā kammanta) | |||
| 22. 정명(正命. sammā ājīva) | |||
| 무량 (無量.appamaññā) 2가지 | 23. 연민[悲. karuṇa] | ||
| 24. 기뻐함[喜. muditā] | |||
| 어리석음 없음 [不妄. amoha] 1가지 | 25. 지혜의 능력[慧根. paññindriya] | ||
* 팔정도(八正道) : 지혜의 능력[正見], 겨냥[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진[正精進], 알아차림[正念], 집중[正定].
* 오개(五蓋) : 탐욕[貪], 성냄[瞋], 해태와 혼침[懈怠/昏沈], 들뜸과 후회[悼擧/惡作], 의심[疑].
* 오근(五根)/오력(五力) : 믿음[信], 정진(精進), 알아차림[念], 집중[定], 지혜의 능력[慧].
* 사무량심(四無量心) : 성냄 없음[慈,] 연민[悲], 같이 기뻐함[喜], 중립[捨].
* 칠각지(七覺支) : 알아차림[念覺支], 지혜의 능력[擇法覺支], 정진[精進覺支], 희열[喜覺支],
몸의 경안과 마음의 경안[輕安覺支], 집중[定覺支], 중립[捨覺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