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으로 비전을 이루는 교회
2023. 9. 10(주일낮예배) 사도행전 13:1-3
김병삼 목사님이 가장 힘들게 사역할 때가 아버지를 담임으로 모시고 있을 때 였다.아버지는 큰 집회에서 부흥강사도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다. 그런데 김병삼 목사님은 그러한 아버지의 목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분당 한가운데서 이렇게 목회를 하면 안됩니다 하고 자주 의의를 제기하면서 아버지와 많은 말을 했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다가 아버지 목사님이 좀 힘들어지면 김목사 내가 담임목사야 하고 말씀하신다. 그때 김병삼 목사님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아버지 목사님과 목회에 대한 생각이 너무 달랐던 김병삼 목사님은 교회에 사표를 쓰고 한동대 교수로 갈 계획을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져서 분당만나교회 설교목사를 하다가 담임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회복되어서 교회로에 오셨는데, 김목사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느냐?고 화를 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목사님이 큰 교회당을 건축했는데, 김병삼 목사님이 담임이 된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강단을 낮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목사님은 강단을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서 말씀의 권위를 표현하려 하였다. 그런데 김병삼 목사님은 강단을 낮추어서 성도와 소통하는 목회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논쟁이 벌어졌다. 그렇게 논쟁을 벌리다가 김병삼 목사님이 아버지 제가 담임이거든요. 하는 말 한마디에 아버지는 그래 김목사가 담임이니 알아서 해라! 고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다고 한다.
높은 강단에서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는 교회가 옳은 교회이겠는가? 낮은 강단으로 소통을 강조하는 교회가 옳은 교회인가? 이것은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목사와 교회에 주신 비전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이 높은 교회나, 낮은 교회나 모든 교회가 가져야 하는 비전이 있다.
그 비전이 무엇이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들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때 어떤 형제들은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주의 도를 전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파송한다. 그때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가서 말씀을 가르쳤다. 그렇게 말씀을 가르쳤을 때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의 도를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안디옥교회의 특징이다. 안디옥교회는 말씀을 배우고 그래 맞아! 하고 감동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안디옥교회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고 순종하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비웃음을 당할 수 있는 교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안디옥교회의 또 다른 특징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이제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3장 1절을 읽기 바란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부요한 레위인이다. 그리고 시므온은 북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었다. 당시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에 흑인은 거의 대부분이 노예였다. 그러므로 시므온 역시 노예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루기오는 북아프리카 북부지역인 지금의 리비아인 구레네 출신이었고, 마나엔은 예수님을 죽인 헤롯왕의 젖동생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또 귀족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죽인 집안이 사람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인이요 열심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옥에 가두는데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이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와 교사가 되어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다.
만약 이런 분들이 우리 자여교회의 강단에 설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성도를 온전케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선지자와 교사로 이들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자기 팔아 밭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두었고, 또 많은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이었다. 또 구레네 시므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과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헬라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증거한 사람이 사도행전 11장 20절에 나오는데, 그 사람이 시므온과 루기오로 예측한다. 이들은 인종과 문화와 신분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헌신과 순종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특징이 멋있지 않는가? 자신을 쥐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래서 고양이가 나타날 것이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던 이 청년은 결국 정신과 의사선생님을 찾았다. 그래서 치료를 받던 중 의사선생님이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이 청년은 나는 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다. 평상시와 달리 자신이 사람이다는 것을 말하자 의사는 기뻐하며 청년에게 퇴원을 말하였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가던 이 청년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고양이도 제가 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까요?
이 청년이 다 나은 것이 맞는가? 지금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으로 순종한 지도자들과 함께 더욱 온전해 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안디옥교회를 하나님은 첫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부르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순종하는 교회를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부르셨겠는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의 차이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가장 명확한 것은 초점이다. 성경공부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라면, 제자훈련은 성경을 통하여 삶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고 깨닫게 된 은혜를 삶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를 훈련하는 것이 제자훈련이다.
그러면 이 제자훈련의 마지막 과정이 무엇인지 아는가? 제자훈련의 처음은 내가 어떻게 예수를 만났느냐? 하는 구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성경에 대하여 배우고, 또 기도와 봉사에 대하여 배운다.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으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또 기도와 봉사에 대하여 배운 후 제일 마지막에 배우는 과정이 전도와 선교이다.
왜 전도와 선교가 제자훈련의 마지막 과정이겠는가?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라고 하시며 사도적대헌장을 말씀하였다. 아니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인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새백성이 되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 백성된 자들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이 증인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명은 예수님이 승천할 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민족이 되게 하시고, 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또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신 이유는 그 복을 열국에 나누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그 복으로 열국에 흘려보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민족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출애굽기 19장 5-6절을 읽기 바란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애굽에 종살이하던 오합지졸의 그 백성을 하나님은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제사장 나라는 열방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데 쓰임받는 나라가 될 것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에게 똑같은 사명을 주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벧전 2:9)고 말씀한다. 이 말은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사명이 교회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명을 처음으로 받은 교회가 안디옥교회이다.
왜 하나님은 안디옥교회를 부르셨는가? 오늘 본문을 다시 읽기 바란다.
(행 13:2-3)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주를 섬겨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때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고 또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었다.
너무 간단하지 않는가? 안디옥교회는 성도가 몇 명이었는지? 또 사회적으로 얼마나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명확한 것은 안디옥교회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교회였고, 또 성령께서 감동을 줄 때 순종할 수 있는 교회였다. 그러한 안디옥교회는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쓰임받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교회로 자라나고 있는가? 옳고 그름을 많이 아는 교회가 아니라, 또 해야 하는데~ 하는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제 순종하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사용할 수 있는 자여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