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 없이 앉았다가 낭패를 불렀다
이 자리는 임산부를 위한
자리입니다
양보해 주세요
한글을 깨우친 아이가
또박또박 읽는다
저 할머니 배 속에 아기가 있나 봐요
경로와 임산부 자리를 확실히 알고 있는
저 아이 똘망한 눈 앞에서 나는
한참을 안절부절 못하다가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
다음 역에서 얼른 내렸다
고 녀석 참,
날 젊게 봐주어 고맙다만
내 나이도 일흔을 넘겼단다
-<착시>전문
수술 입원을 위해
이런저런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말문이 터진다
기도실이 있는데, 같이 가실까요?
가지, 뭐
천근만근 소통의 물길이 열린다
영동세브란스 병원
3층 기도실에서
하늘에 올리는 기도문이 축축하다
고오맙네
사위와 눈을 맞추고
어색하게 미소짓는
옹고집 장인의 하룻날
-<기도실 두 손> 전문
이름 모를 꽃
누군가가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냐고
산속에 그저 이름 모를 꽃으로
피고 싶다고 했다
무던하게 피어 바람결에 향기 주고
누군가 쳐다보면 눈길 건네고
그리워 몸부림치며 바라보는 이 있으면
다 그렇게 사는 거야, 위로해 주고
발에 밟혀도 다시 일어나
그렇게 해와 달 손 잡아
산에서 피는 꽃이고 싶어
-<이름 모를 꽃> 전문
수정약국
동네 어르신 쉼터로 소문난
건강 지킴이 그곳
엄마의 길 뒤를 이어받은 약국
오다가다 들리면
튼실한 목숨 돌보기 정보 한 움큼
귀에 담아 준다
어제도 떡 하나 오늘도 떡 하나
약봉지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빈손으로 안 보내는
사시사철 복사꽃 저 얼굴
약보담도 맘씨가 넉넉하고 향기로운
수정 씨
아침 햇살에 부시는 강남 대치동
수정약국 아시나요
-<수정약국> 전문
시인은 세속에 짓눌리거나 욕망에 짓눌리지 않는다. 자연과
교감하고 신과 교감하고, 혼탁하고 멀미 나는 이 세상을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흰 것을 희다 하고, 질문에 질
문을 거듭하며 정직하게 현실을 증언한다. 신순동은 늦게
만난 연인(시)과 불륜을 불사하는 강심장 요부의 몸짓으로
여생을 불태운다. 분신의 출현을 위해 시를 품고 시를 앓으며
서녘 노을을 붓질하는 순수서정이 아름답다.
안재찬(시인, 한국문협 편집위원) | <작품 해설> 중에서
|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