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모세의 노래
2024. 9. 29(주일낮예배) 신명기 32:43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 하는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이 있다.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는 소년 마놀린과 함께 고기 잡는 일을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84일동안 산티아고가 한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였을 때 사람들은 수근거렸고, 마놀린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하여 다른 배를 타게 되었다. 그래서 산티아고는 혼자를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간다. 그렇게 혼자 망망대해로 나간 산티아고는 혼자서 청새치를 잡았는데, 얼마나 크고 힘이 좋았는지 무려 3일동안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 결국 산티아고는 힘이 빠진 청새치를 작살을 찔러서 잡았다. 청새치를 잡은 산티아고는 그 청새치를 파는 것을 꿈을 꾼다. 그런데 피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나타나서 청새치에 달려들었다. 그때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지키기 위하여 상어에 물려가면서 사투를 벌렸지만, 결국 청새치의 살은 상어가 다 뜯어 먹었고, 머리와 뼈만 남았다. 산티아고는 머리와 뼈만 남은 청새치를 끌고 항구로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수글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은 산티아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꿈에서 아프리카 해변에서 본 사자를 본다.
이것이 노인과 바다이다. 84일동안 한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한 산티아고는 바다에 나가 청새치를 잡지만 항구로 돌아올 때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티아고는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티아고가 빈털털이고 항구에 들어올 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빈털털이가 되는 것이다. 나의 수고와 노력이 헛된 것이 되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또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수근거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산티아고는 그러한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도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욥기를 보면 욥은 까닭없는 고난을 당한다. 그래서 자녀와 재산을 한 순간에 다 잃었고, 또 욥은 온 몸에 욕창이 나게 하여서 기왓장으로 가려운 곳을 긁는 고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 1:21)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런데 욥의 고통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얼마나 크고 힘들었던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 아니 태어나서 죽지 아니한 것을 후회한다. 그때 엘리바스가 입을 열면서 친구들과 논쟁이 시작되는데,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의 말은 모두 욥에게 죄를 인정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친구들의 말에 욥은 아무런 위로와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음(6장)에 위로를 가진다. 그리고 욥은 종이 저녁을 기다림같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위로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욥은 7장에서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폭풍질문을 한다.
왜 나를 대단하게 여기시며, 왜 나를 마음 두시는지? 왜 아침마다 찾아와서 나를 시험하는지? 왜 한 순간도 나를 놓지 아니하는지?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주께 무슨 해가 되는지?
그리고 욥은 빌닷의 말에 대하여 하나님의 행하심과 말씀 앞에 반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 위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바란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다. 욥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두려운 상황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녀와 재산을 다 잃은 빈털털이가 되었고, 몸에는 욕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는 비참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거기에 이제 친구들의 비난까지 듣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두려움을 가진 욥은 벌벌 떨지 않고 있다.
어떻게 욥은 그 두려운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영표 선수가 토트넘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였다. 최고의 선수들과 하고 싶은 축구를 더 잘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던 이영표 선수는 경기장으로 가다가 버스가 굴러 팔의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때 이영표 선수는 자신도 모르게 2달만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가 좋아서 최고의 리그로 갔는데, 이영표 선수는 경기장에서 뛰는 것이 두렵고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왜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선수와 경기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고, 두렵고 힘든가? 하는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이영표 선수는 자신이 축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축구 선수는 공차는 것을 즐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영표 선수는 이런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의 비난에서 자유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
축구선수는 공을 차는 것이 제일 중요해야 한다. 그런데 공을 차는 것보다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해져 버리는 순간에 축구선수의 기쁨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이영표 선수가 가지는 혼란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A형, B형, O형, AB형이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AB형이 밥을 먹다가 성질이 나서 숟가락을 놓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오지랖 넓은 O형은 AB형이 왜 성질이 나서 왜 나갔는지 궁금해서 따라나갔다. 그런데 B형은 AB형과 O형이 왜 밥을 먹다가 나갔는지?에 대하여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밥을 먹는다. 그런데 소심한 A형은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밥을 먹고 있는 B형에게 이렇게 묻는다
혹시 AB형 나 때문에 삐쳐서 나간 것은 아니지요
사람들은 모두 제 각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혼란이 사람들의 말 한마디 아닌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본문인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하여 광야 40년을 걸어서 모압평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백성에게 한 3편의 설교이다.
1-4장 첫번째 설교, 5-28장 두번째 설교, 29-30장 마지막 설교를 모세는 32장에서 모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모세의 노래 중에 10-12절을 함께 읽기 바란다.
(신 32:10-12)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11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모세는 하나님이 광야 40년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서 호위하시며 보호하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그냥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실 물 한방울이 없는 메마른 광야를 걷고 있는데, 여기저기에서 사나운 맹수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해병대 1282수료식 영상을 먼저 보기 바란다. 해병대 훈련소 연병장에 6주 훈련받은 수료생들이 서 있다. 그리고 부모님들이 자녀를 찾아가면 수료생은 부모님께 경례를 하고 부모님을 안는 것이다. 그런데 영상을 보면 부모님은 물론이고 해병대 수료생의 거의 대부분이 다 눈물을 흘린다.
왜 귀신 잡는 해병이 눈물을 흘렸겠는가? 그런데 15절을 보면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라고 모세는 노래한다. 여기서 여수룬은 올바른 자. 곧은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는 애칭이다. 요즘 젊는 남녀가 사랑하는 연인을 부를 때 허니 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여서 여수룬아 라고 부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발로 찼다는 것이다. 마치 고집센 짐승이 뒷발질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대적한 이스라엘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그렇게 이스라엘이 고통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번쩍이는 칼로 대적을 복수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보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진노로 심판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신다.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오늘 본문을 읽기 바란다.
(신 32:43)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진노로 모든 것을 심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진노를 멈추시고,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열방의 민족들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세의 노래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것을 노래로 부르게 하였다.
왜 모세가 노래로 불렀겠는가? 성경목록가라는 노래가 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라고 성경목록을 노래로 부르는 이유는 성경목록을 외우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3편의 설교를 한 모세는 이제 그 설교내용의 핵심을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메마른 광야에서 우리를 만나서 풍성함으로 인도하여 주었는데, 우리 선조는 그 하나님을 배반하여 고통하였고, 그 고통 안에 있는 우리 선조를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여 주심으로 온 열방과 함께 주를 노래하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꼭 기억해야 할 노래가 없는가?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그러한 용서와 사랑을 받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실패와 낙심을 반복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러한 나를 예수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실패와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온 열방의 민족과 함께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주로 인하여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