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독서: 에세 S01E33 - 목숨 바쳐 속세의 쾌락을 피하다
몽테뉴가 살았을 당시에도 사는 것은 고단한 일이었나봅니다.
생명체인 이상 살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야 마땅하지만, 얼마나 힘들면 ‘이쯤에서 끝내자!’고 결단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자연의 섭리와 상반되는 현상으로, 생의 의욕보다 고통이 더 할 경우에 주로 발생합니다.
사는 것이 좋기보다는 힘들어질 때가 바로 죽을 때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과 불편함에 우리 생명을 매어 두는 것은,
오래된 격언들이 이야기하듯, 자연의 법칙 자체와 충돌한다는 것이다.
고통 없는 삶 아니면 행복한 죽음을
사는 것이 고통일 때는 죽는 것이 좋은 일이다.
비참 속에 사느니 그만 사는 것이 낫지.
-그리스 격언시-
하지만, 인간의 인생 자체가, 근본적으로 자기인식과 유한한 자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고통과 뒤얽혀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자각하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이란 지능과 더불어 늘어난 욕구의 불만족으로 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데, 거기다 동종간의 경쟁이 심화되면 타인을 죽이는 것 쯤은 쉽게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정상적인 사람은 트라우마로 남게 되며 본인의 남은 삶 또한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거기다, 그런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 또한 고통에 시달리며 여생을 힘겹게 살게 되죠. 결국, 인간이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서로를 괴롭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몽테뉴가 33장에서 언급한 내용은 쾌락, 사치, 권세 등을 피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자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마저 드네요. 몽테뉴가 세네카나 에피쿠로스 등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다음과 같은 사례는 너무나 극단적입니다. 몽테뉴는 아파티에 주교 일레르성인이라는 사람이 딸 아브라가 세상의 쾌락과 욕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죽는게 낫고 또한 실제로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것을 기뻐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3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몽테뉴도 후두염이 생기기 전까지 59세까지 살았으며, 인생의 성공을 이룬 후 성에 칩거하며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렇게 본인의 생을 원하는대로 알차게 살았던 사람은 극히 드물죠. 고통이란 피하면 좋지만, 인간의 삶, 특히나 요즘처럼 변화의 흐름이 큰 시대에는 고통을 적당히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회원이 실수로 제 차례인 33장 내용을 올리셨습니다.
제가 미리 준비해둔 글을 삭제하기가 아쉬워서 저도 올립니다.
참고로만 읽어주세요^^
오늘은 그럴만한 날이네요~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