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가려 꺾어
남진원
정표(情表)는 간절한 정을 담아 주는 물건이다. 대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넨다. 최경창은 홍랑에게 난을 정표로 주었던 것이다.
홍랑의 뒷모습이 산굽이로 돌아갈 때까지 최경창의 눈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언제 또 만날 것인가.’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홍랑의 발자국 소리
산색은 말이 없고 천릿길 가뭇한 날
흠뻑 젖는 빗소리 구름 밟고 걸어가나
난초 잎 젖은 물방울 별빛보다 맑아라
이렇게 홍랑이 떠나가는 모습을 시조를 써 놓고 보니 홍랑의 눈물이 마치 방울방울 난초 잎에 내려앉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는 듯하였다.
최경창이 한양에 온 뒤 병이 더 심해졌다는 소문은 북방에 있는 홍랑의 귀에까지 날아들었다.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1575년 을해년이었다. 사랑하는 낭군 최경창이 몸이 아파, 봄부터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한다는 비보였다.
홍랑은 서둘러 행장을 갖추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산과 강을 몇 번이나 지났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최경창이 아파 누워있는 걸 생각하면 홍랑에겐 고생도 아니었다.
홍랑이 몇날 며칠을 걸어 한양에 당도하자, ‘양계지금(兩界之禁)’에 걸렸다. 당시 함경도에 사는 사람들은 함부로 한양으로 오지 못하는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홍랑은 개의치 않았다. 한양에 사는 최경창의 정적들은 신바람이 났다. 최경창을 홍랑이 범한 ‘양계지금’을 들먹이며 탄핵을 하기에 바빴다.
이후, 이 일로 결국 최경창은 파직을 당하였다.
최경창은 건강이 좀 좋아지자, 홍랑을 다시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최경창에게는 운이 좀 안 좋았다. 홍랑이 최경창을 찾아와 병간호를 할 때에는 불행하게도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국상이 끝나기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홍랑은 ‘양계의 금’을 어겼고, 최경창은 경성관아의 관비를 데리고 첩살림을 했다고 하며 간관들은 빗발같이 파직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왕은 이를 무마할 명분이 없어 성균관 전적 최경창을 파직하고 홍랑은 다시 함경도로 떠나가야 하는 운명을 맞았던 것이다.
애끓는 두 사람의 이별!
천리 먼 길 마다않고 찾아와 병구완을 하던 정인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오죽했을까. 최경창은 이별의 시 한수를 전한다. 이때 정표로 준 것이 난 화분이었다.
송별(送別)
- 이별 -
최경창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此去天涯畿日環(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손을 부여잡고 서로 바라보며 그대에게 난을 드리오
천리 만리 먼 길을,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볼 것인가
아, 그 옛날의 아름다움일랑 모두 잊어버리오.
지금의 비구름에도 청산은 이리 아득하기만 한데….
“부디 몸 조심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시오. 내 걱정은 말고…”
경창은 홍랑의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최경창과 홍랑은 아픔으로 이별을 맞았던 것이다.
나는 지금 이런 최경창과 홍랑, 신분을 뛰어 넘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랑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양반이며 선비였던 시인인 고죽 최경창은 우연히 홍랑을 만난다.
거센 불길은 물로 끌 수 있거니와 사랑의 불은 무엇으로 끌 수 있을 까. 차거운 얼음덩어리는 불로 녹일 수 있지만 잃어버린 사랑은 얼음보다 차가워 마음엔 동상(凍傷)만 남긴다고 하였다.
1 573년 최경창의 나이 서른다섯 살, 북도평사(병마절도사의 보좌관)의 관직을 받고 부임지인 경성으로 가는 도중에 홍원에 들렀다.
홍원군수는 절친한 사이라, 축하연을 베풀었다. 이때 관기 홍랑이 나와 수청을 든다.
축하잔치에 여흥이 넘치자. 최경창이 홍랑에게 묻는다.
“그대는 노래를 좋아하시오?” 최경창이 홍랑의 노래를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밖에 대답이 나왔다. “소첩은 노래 보다 시를 좋아하옵니다.” 이에 최경창이 대뜸 묻는다. “누구의 시가 마음에 드오?” “고죽 선생의 시이옵니다.”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홍원군수가 말했습니다. “바로 네 앞에 있는 분이 고죽 최경창 도평사이니라.”
그 말을 들은 홍랑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좋아하는 시를 쓴 시인을 눈앞에서 보고 있었으니까.
“꿈에 라도 한 번 뵈었으면 소원이 없다고 여겼사옵니다. 오늘 이렇게 나리를 뵙게 되니 설렘과 기쁨이 한량없사옵니다.”
이렇게 하여 최경창과 홍랑의 운명적 만남은 이어졌다.
최경창은 홍원에서 만난 홍랑을 경성까지 데리고 간다. 그곳에 지내는 동안 6개월여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웠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오기 마련! 세월이 흘러 흘러 두 사람 앞에 다가온 이별의 순간.
한 사람은 관청의 관기, 한사람은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사람.
사랑하였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절벽 같은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홍랑!
홍랑은 쌍성까지 따라와 함관령 고갯길에서 시조 한 수로 작별의 인사를 고한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고자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날인 줄로 여기소서
버들잎을 꺾어 님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시옵소서. 혹여 밤에 봄비가 내려 새 잎이 돋아나거든 그게 나의 모습인줄 여기어 달라는 애틋한 정을 담았다. 최경창은 후일 이 노래를 ‘함관의 노래’라고 하였다. 위의 시조를 한시로도 번역하여 ‘번방곡(飜方曲)’이라 할 정도로 홍랑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번방곡(飜方曲)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須知一夜新生葉(수지일야신생엽)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먼 곳에 계신 임에게 보내오니
시험 삼아 집의 뜰 앞에 심어놓으시고 보시옵소서
밤이 지난 연후에 새 잎이 나거든 마땅히 아시옵소서
임 생각에 초췌해지고 근심 어린 신첩일 것입니다.
고죽(孤竹) 최경창은 정이 깊고 감정에 민감하며 대쪽 같은 마음의 성격이었다. 당시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있었을 때 최경창은 그의 성품이 바르지 못한 것을 들어서 절교를 선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에겐 인정이 넘치었음을 알 수 있다. 허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손곡 이달이 어느 날 시를 전해왔는데 그 내용은 기생에게 치마를 사 줄 돈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시를 접한 최경창은 “손곡의 시는 글자 한자가 천금 씩이다” 라고 하며 글자 한자에 각각 세 필 씩의 값을 매겨 도움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멋들어진 모습이 아닌가.
최경창은 1576년 영광군수직을 제수 받았는데 사직하였다.
그 뒤 1577년엔 대동도찰방직을 제수 받았고 1582년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제수받았다. 그러자 간관들의 무고한 참소가 이어졌다. 대간의 간관들이 갑작스러운 승진을 또 문제 삼자,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다시 품계를 낮추어 발령을 내렸다. 이 발령을 받고 상경 도중에 객사하였다.
어느 날 최경창의 무덤 앞에 아주 못 생긴 한 여인이 찾아온다. 누가 봐도 옛날의 그 아름답던 얼굴은 간 데 없었다. 늙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다른 남정네의 관심을 끌까 봐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또 몇 년간을 그렇게 지내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녀는 최경창의 시와 유품을 고스란히 정리하여 해주최씨 가문에 전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홍랑이었다.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했던 기간은 불과 6개월 남짓이었다. 그러나 영원을 넘나드는 두 사람의 사랑! 한 남자를 위해 지킨 고귀한 홍랑의 그 사랑은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금빛처럼 반짝이고 있다.
최경창은 사후(死後) 숙종 때에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강진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송시열이 서문을 쓰고 남구만이 발문을 쓴 고죽유고(孤竹遺稿:1683, 숙종9년)가 있다.
- 최경창의 한시 ‘감흥(感興)’을 옮긴 시조
귀한 약초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데
한동안 고민하며 어찌할 바 몰랐지만
청풍 속 ‘西山一食薇’라, 그게 바로 불사약
感興(감흥):느낌이 일어나다 /최경창
採藥求長生 채약구장생
何如孤竹子 하여고죽자
一食西山薇 일식서산미
淸風猶不死 청풍유불사
약초를 캐어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서산에서 고사리 캐어먹고
맑은 바람 속에 사는 게 불사약이네.
- 최경창의 한시 ‘寄僧(기승)’을 옮긴 시조
몸 아픈 지내는 산사로 가을 길이 놓여 있다
산길 덮인 낙엽 따라 스님의 환한 모습
해질녘 풍경소리는 아득하게 멀어라
寄僧(기승): 스님에게 드리는 글
秋山人臥病(추산인와병) 병 들어 가을 산에 은거하는데
落葉覆行逕(낙엽복행경) 산길에 낙엽은 수북히 덮였네
忽憶西菴僧(홀억서암승) 홀연히 암자에 계시는 스님을 떠올리는데
遙聞日暮磬(요문일모경) 저물 무렵 풍경소리 아득하여라.
- 최경창의 한시 ‘고묘(古墓)’를 옮긴 시조
오래 된 무덤마다 돌보는 사람 이미 없고
소와 양들 지나가는 길이 된지 오래이다
해마다 불을 지르니 풀씨 하나 없는 묘
古墓(고묘)
古墓無人祭(고묘무인제)
牛羊踏成道(우양답성도)
年年野火燒(년년야화소)
墓上無餘草(묘상무여초)
오래된 무덤에 제사 지내는 사람 없고
소와 양이 밟아 길이 났다.
해마다 들판에 불을 지르니
무덤 위엔 풀 하나 없구나.
최경창(1539-1583)은 해주최씨로 경북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에는 고죽의 사당이 있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이란 송나라 풍의 시에서 벗어나 감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당나라 때 시정서인 서정성을 지향한 3명(최경창, 백광훈, 이달)의 시인을 일컫는 말이다.
문사들이 호(號)를 고(孤)자(字)를 넣어 지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외로움 속에 살다갔다. 신라 하대의 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이 그러했고 최경창 사후 4년 만에 태어난 고산(孤山) 윤선도가 또한 그러했다.
최경창은 조선 중기의 시인. 박순(朴淳)의 문인이다. 이율곡, 송익필 등과 교류하였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고 악기 연주도 잘 하였다.
최경창은 젊었을 때 퉁소를 잘 불었다. 17세 때에 을묘왜란이 일어나고 곧이어 왜구들이 쳐들어오자 사람들과 배를 타고 피난을 갔다. 그런데 그만 왜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때 최경창이 퉁소를 꺼내 불자, 그 음률이 얼마나 청아하고 고운지 왜적들이 감동받아 ‘신인(神人)’이라 칭송하며 물러갔다고 한다.
유가의 덕목으로 무장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난 최경창은 홍랑 앞에서 진실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개 관아의 기녀인 홍랑에게 인간적인 진실한 면모를 보여주고, 기녀 홍랑을 귀인으로 여기며 극진한 사랑을 보였다.
가문과 직위를 초탈하고 오직 한 인간의 진실한 내면을 사랑한 진정성 있는 사내, 그가 최경창이다. 많은 소인배들이 유가의 관습에 얽매여 있을 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