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 이야기
표덕문
경주에는 신라 천년이 그대로 녹아 있다. 고려시대 경주의 모습, 조선시대 흔적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되고 있는 동학, 천도교의 발상지 또한 경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동학은 우리나라 근대사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되어야 할 일이지만 발상지 경주에서조차 신라 천년에 묻혀 천도교도들에 의해 근근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최제우 생가 복원 등으로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역사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주 현곡면지역에는 최제우가 태어난 생가, 그의 주검이 묻힌 태묘와 득도에 이르도록 공부했던 장소로 전해지는 용담정이 있다. 경주시는 최제우 유적지를 성역화사업으로 역사문화자원을 조성하면서 둘레길을 만들어 관광자원화 사업으로 전개하고 있다.
경주시가지에서 최제우 생가로 가는 길목에 우렁쉥이쌈밥 식당과 JJ갤러리 등의 특이한 먹거리와 즐길거리가 힐링 명소로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최제우동상
◆농민들의 궐기 동학
조선시대 말기 세도정치로 사회가 혼란하던 1860년 경주의 최제우가 민간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한 동학을 창시했다. 외래종교 천주교의 세력 서학에 반대하는 개념으로 동학이라 불리었다. 동학은 천도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반대개념인 천주교와 혼돈해서는 곤란하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라 해석하기보다 어지러운 정치와 타락한 사회를 바로잡고, 어렵게 살고 있는 민중들의 생활을 구제하려는 반봉건운동이자 서양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반외세 운동의 성격이 크다.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이념으로 기능했다.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고 있던 성리학과 다르게 사회의 구조와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다.
욤담정 가는 길
동학의 교리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사상이 핵심이다. 모든 사람이 하늘처럼 귀중한 존재라는 의식 때문에 조선 정부는 이단으로 취급하고 탄압했다. 양반 중심의 신분제를 부정하는 동학이 경주와 영덕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전국으로 유포되자 정부는 사회의 근본질서 붕괴를 우려했던 것이다. 조정은 동학의 교조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사람이라 단정하고 체포해 죽이고 동학을 탄압했다.
동학은 농민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894년 전봉준이 일으킨 농민항쟁을 동학혁명, 동학운동, 농민전쟁 등으로 표현하는 것도 동학이 농민들의 의식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농민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거세게 일어나 정부기관을 점령하는 사태까지 발전하자 정부는 청나라와 일본군대의 힘을 빌어 농민군을 진압했다.
동학은 최시형과 손병희로 2대, 3대 교주로 이어지면서 종교적 논리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농민운동으로 확산돼 대정부 투쟁을 벌이는 정신적인 기둥으로 작용했다. 동학은 1894년 농민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고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했다.
◆최제우 생가와 태묘
최제우 태묘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1824년 12월18일 경주 가정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최진립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여 병조판서로 추서되었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지 못해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도 영남지방에서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문사였지만 과거에 낙방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는 최옥이 63세 때에 곡산 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3년상을 마친 뒤 1844년부터 1854년까지 각지를 유랑하며 공부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854년 고향으로 돌아와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裕谷)으로 거처를 옮겼다. 1855년 승려에게 을묘천서라는 비서를 얻었다. 1856년 양산의 천성산 내원암에서 입산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중단했다가 이듬해 천성산 적멸굴에서 다시 49일간 도를 닦았다. 1859년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했다. 그러다 1860년 음력 4월5일 득도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했다.
최제우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용담가’, ‘안심가’ 등의 한글 가사를 지어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울산, 부산, 은적암 등으로 옮겨다니면서 ‘포덕문’, ‘논학문’ 등을 저술해 교리와 사상을 체계화했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성장해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자 1863년 8월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으로 임명해 도통을 잇게 했다. 자신은 포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1864년 1월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4월15일에 대구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는 포교를 위해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몽중노소문답가’, ‘도수사’, ‘권학가’, ‘도덕가’, ‘흥비가’, ‘검결’ 등의 한글 가사를 지었고,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등 한문으로 된 글들을 남겼다. 그의 한문 저술들은 1880년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으로 편찬되었다. 한글 가사들은 이듬해 ‘용담유사’로 묶여 간행되었다.
용추각
나라에서 동학을 ‘이단지도’라 하여 ‘좌도난정’이라는 죄명으로 그를 참형에 처했다.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거두어 구미산 기슭에 안장했지만 역적의 연고지로 지명돼 상당기간 황폐하게 방치되었다.
경주 현곡면 가정리에 그의 유허비와 생가가 복원돼 있다. 생가는 사랑방과 안채, 곳간, 화장실 등으로 옛날 양반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구성돼 있다. 생가 맞은편 구미산에 태묘가 있다. 태묘는 남사지 저수지와 가깝다. 태묘는 저수지 옆 영천으로 이어지는 도로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만날 수 있는 구미산 발뿌리에 위치해 있다. 석물로 호석을 세운 분묘와 묘비, 석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햇살을 받고 있다. 사학가들의 방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다.
용담정 입구
◆용담정
용담정은 최제우가 고심하며 오랜 수도 끝에 깨달음을 얻어 동학을 창시한 곳에 세워진 정자다. 현곡에서 용담정으로 찾아가는 길은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도열해 가을이면 장관을 이뤄 찾는 발길이 줄을 잇는다. 넓은 주차장은 조경수들이 공원처럼 꾸며져 곳곳에서 자리를 깔고 소풍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포덕문을 지나면서 최제우 동상과 오솔길처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는 일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다시 성화문을 들어서면 측백나무숲이 우거져 용담정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온몸이 피톤치드 목욕을 하는 상쾌함을 맞볼 수 있다.
용담교 건너편에 높은 누각으로 앉은 용담정은 주변 단풍과 함께 한폭의 산수화로 자연스럽게 포토존이 된다. 용담정 앞의 계곡은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맑은 물이 마르지 않아 선경과 같은 풍경에 방문객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담하게 지어진 용추각 정자는 도인들이 시조를 읊는 소리가 새소리와 장단을 맞춰 구미산에 울려퍼질 듯하다.
용담정 진입로
용담에서 난 최제우는 장년이 되어 도를 찾고자 10여 년간 전국을 순회하다가 가산만 탕진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용담정으로 돌아와 각도에 전념해 1860년 ‘오심즉여심’이라는 한울님의 계시를 받아 무극대도를 이루었다 한다. 그는 용담가를 지어 이 득도의 과정과 내용을 서술했다. 용담가라는 가사의 명칭은 용담정의 이름을 딴 것으로 해석된다.
용담정은 1968년 4월 현지에 있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정화되기 시작했다. 1974년 구미산 일대가 경주국립공원권에 편입됨에 따라 본격적인 성역화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천도교는 1975년 2월 구미용담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용담정, 포덕문, 용담정사, 성화문 등을 건립했다. 용담정 일대가 하나의 천도교 성지이자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JJ갤러리
김정자화백
JJ갤러리는 경주 디자인고등학교 뒤편, 가정리의 용담정과 최제우 생가와 삼각점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갤러리가 마을과 살짝 떨어진 들판 가운데 위치해 꽃나무들에 둘러싸여 하나의 작품이 되고 있다. 갤러리는 디자인고와 용담정 국립공원 입구 두 곳에서 진입할 수 있고 마을안길과 농로로 순환된다.
JJ갤러리는 단순한 갤러리로만 운영되지 않는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구상에서 비구상을 접목해 접은 그림을 창안한 김정자(57) 작가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 갤러리에 카페를 같이 운영해 현대인들의 쉼터로 제공한다.
김정자 작가는 지역작가들에게도 전시공간을 제공하면서 창작활동을 간접 지원한다. 갤러리 한편에 작업실을 마련해 방문객들에게 공개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공유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예술의 한 단면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김 작가는 예술인으로 차분한 성격을 가지기도 하지만 외향적인 활달한 성격으로 갤러리를 공격적으로 운영해 지역작가들은 물론 방문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전시하는 작품들을 빠르게 전환시킨다. 지난해 11월 오픈해 이제 1년을 맞았지만 벌써 10여 차례의 전시회를 열고 있다. 김정자 작가 본인을 포함해 지역작가 5명을 초대한 ‘육하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오픈전을 가진 이래 이철진 작가 초대전을 시작으로 기동규, 오승민, 양희린, 최지훈, 김장곤, 이옥희, 서지연 등등 경주와 포항지역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전을 열어 예술인들의 공동전시공간이 되고 있다.
김정자 작가는 “지역작가들이 편안하게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시민들이 즐겁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전시를 관람하면서 쉴 수 있는 카페갤러리로 꾸몄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또 JJ갤러리에서 아카데미를 운영해 예술에 목마른 지역예술인들의 창작공간으로도 운영해 갤러리는 다목적 힐링공간이 되고 있다. 전통한방차와 다양한 유기농꽃차, 아메리카노의 은은한 향이 퍼지는 갤러리에 웃음꽃이 피고 있다.
최제우 생가
최제우 생가에서 나오면 영천으로 가는 길목 도로변에 ‘웰빙황토우렁이쌈밥’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많은 차량들이 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다. 손님들을 끄는 무언가 있는 집이다. 제육철판과 우렁무침회, 우렁쌈밥이 세트메뉴로 구성되어 있다. 우렁쌈밥 정식부터 오리훈제 세트메뉴까지 취향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제육과 우렁은 추가할 수 있고 야채는 대부분 직접 재배하는 신선도 높은데다 셀프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연중무휴라 어렵게 찾아가서 휴무일이라 돌아서는 일은 없다. 보기 드문 웰빙식단으로 인기다.
첫댓글 어릴적 아버지 무릎에 앉혀. 최제우. 손병희 분들의 사진이 걸려져있는 포교당에서 염주를 돌리면서 외워졌던 그 주문들이 지금도 낭랑하네요.
정화수 맑은 물로 늘 기도하시던 엄마도 그립네요.
동학의 시발지 경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라운 고장입니다. 경주가 고향이시군요 보리살타님
선조들의 얼이 담긴 발자취
유독 최제우 선생의 혁혁한 공이 묻히고 있어 안타깝다.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