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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 머리에
요즈음 양수경의 《갈석고(碣石考)》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호위(胡渭)가 쓴 《우공추지(禹貢錐指)》 중에서 몇 가지 기록 내용을 확인한 일이 있는데 필자의 눈에 퍼뜩 띄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명나라 풍방(豊坊)이 그가 위찬한 《고서세학(古書世學)》에서 말하기를, '자기의 증조부 경((慶)이 기자조선본 《상서(尙書)》를 구해서 얻었는데, 그 책은 신농《정전(政典)》으로부터 시작되고, 미자(微子)에서 끝이 나며, 맨 나중에는 부록으로 《홍범(洪範)》이 실려 있다……"라는 것이었다. (호위 저 · 추일린 정리, 《우공추지(禹貢錐指)》, 상해고적출판사, 본문 6쪽 참조)
주지하다시피, 《상서(尙書)》는 최초에는 그냥《서(書)》로만 불려졌다가 한대에는 《상서(尙書)》라 했고, 《공전(孔傳)》에서 상서를 해석하기를 "上古之書"라고 하였다. 《상서》가 유가의 경전이 된 뒤에는 《서경(書經)》으로도 불려졌다.
《상서(尙書)》의 내용은 모두 정사와 서로 관련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순자(荀子)·권학편(勸學篇)》에서 "《서(序)》란 정사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사기(史記)·태사공자서(太師公自序)》에는 "《서(書)》는 선왕의 일을 기록한 것이므로 정사에 특장이 있다"고 하였다.
《상서(尙書)》의 기본 내용은 군왕의 공문서와와 군신의 정사사료를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상서(尙書)》의 작자는 사관(史官)이다. 문헌을 기록한 사람은 중국 고대에 군왕의 언행을 전적으로 기록한 사관이었다. 《예기(禮記)·옥조(玉藻)》에 "군왕의 행동은 좌사(左史)가 이를 기록하고, 언행은 우사(右史)가 이를 기록한다"고 하였다. 사관은 군왕의 언행을 기록, 이를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서(書)》라고 할 수 있다.
현존 《상서(尙書)》는 모두 58편으로, 조대에 따라 편집되어, 각각 《우서(虞書)》·《하서(夏書)》· 《상서(商書)》와《주서(周書)》로 되어 있다. 《우서》는 5편, 《하서》는 4편, 《상서》는 17편, 《주서》는 32편으로 되어 있다.와 주서로 되어 있다. 위로는 요순으로부터 아래로는 동주에 이르기까지, 매우 진귀하면서도 풍부한 사료를 모아 놓은 것이다. 《상서서(尙書序)》는 전(典) · 모 (謀) · 훈(訓) · 고(高) · 서(誓) · 명(命) 6개의 체식으로 되어 있는데 당대 공영달은 10종으로 나누었으니 전(典) · 모(모) · 공(貢) · 가(歌) · 서(誓) · 고(誥) · 훈(訓) · 명(命) · 정(征) · 범(範)이다.(강호 등 역주 · 주병균 심교, 《금고문상서전역(今古文尙書全譯)》, 귀주인민출판사, 전언 참조)
필자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도저히 믿기지 않은 기자조선본 《상서(尙書)》의 차서가 《신농정전(神農政典)》으로부터 시작해서 《미자(微子)》로 끝이 난다는 점이다.
특히 이와같은 기사조선본의 출처는 후술하는 바와같이 작자의 선대 명나라의 관원으로 있을 때 가 조선사신 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었다는 데 있다.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기자에 관해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서(尙書)》가운데 《주서(周書)·홍범편(洪範篇)》 서(序)에서 겨우 "주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나서, 주왕을 죽이고 그 아들 무경을 세우고 기자를 데리고 호경으로 돌아왔다. 사관이 《홍범(洪範)》을 지었다.(武王勝殷, 殺受, 立武庚, 以箕子歸。作《洪範》。)"는 기록이 있고, 본문에 주무왕 2년에 왕이 기자에게 치국의 상리(常理)를 물었더니 그때 답변한 것이 《홍범(洪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서(商書)·미자편(微子篇)》에 보면, 미자가 주왕이 술과 황음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으므로 극간을 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와 더불어 자신의 거취문제를 논한 대목이 있고, 그 가운데 "각자(刻子)"라는 말이 나오는데 학자들은 이를 기자(箕子)로 보고 있을 뿐이다. 그외에는 그 어느 곳에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말이 없다.(강호 등 역주 주병균 심교, 전게서, 199쪽 주석 16참조)
중국 사서에 기자(箕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은말주초는 기원전 12세경이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말은 그뒤 1천여 년이 지난 뒤 기원전 2세기경에 전한의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 비로소 등장하고 그뒤 사마천의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등에 나온다.
어떻거나 풍방(豊坊)의 선대가 조선사신을 통해 입수했다는 기자조선본 《상서(尙書)》의 존재를 증언하는 《고서세학(古書世學)》이란 책은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2. 풍방(豊坊)은 어떤 인물인가.
인터넷에서 파악한 그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풍방(豊坊)(1402~1563?) 명나라의 서법가 · 전각가 · 장서가이다. 다른 이름을 도생(道生)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현재의 이름으로 고쳤다. 자는 존례(存禮), 다른 자는 인옹(人翁), 호는 남우외사(南禺外史)라 하였으며, 근현(鄞縣)(지금의 절강 영파) 사람이었다.
풍방은 가정 2년(1523) 진사출신으로, 남경의 이부(吏部) 고공주사(考功主事)를 거쳐 벼슬은 예부주사(禮部主事)에 이르렀다. 서법이론에 밝고 오체(五體)에 모두 능했으며, 서학(書學)에 해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전대의 서법 모사에 뛰어났으며 거의 가짜가 진짜를 뺨칠 정도였다고 한다. 서법 중에서도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완력이 대단했고, 전각(篆刻)을 잘해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집안은 근현의 대부호로서 대대로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매우 많았으며 집안형편이 유복했다. 풍방 그 자신은 매우 높은 문학예술 소양을 가지고 있었고, 문장을 잘 짓고 서법에 능통했다. 그의 집에 도서관을 두고 있었는데 이름하여 만권루(萬卷樓)라 하였으며, 장서가 수만여 권에 달해 당시 동남에서 가장 유명한 도서관이었다. 부곽전(負郭田: 도시에서 가까운 양전, 문전옥답과 같은 말) 1천여 묘가 있었는데 법서(法書) · 명첩(名帖)을 사느라고 다 팔아먹었다. 풍방은 나중에 집안이 중도에 몰락하여 만권루(萬卷樓)의 장서를 지탱하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 그 장서 중에서는 송판본(宋版本)과 사본이 있었는데 제자들과 집안 사람들이 몰래 가져가거나 가로채 간 것이 태반이었다. 장서루(藏書樓: 옛날에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는 나중에 또 불이나서 장서 중의 가본(佳本)이라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풍방의 만권루(萬卷樓)는 천일각(天一閣)과 연원이 매우 깊다. 풍방과 대장서가 범흠(范欽)은 사적인 교왕이 매우 좋았다. 일찍이 풍방의 만권루에 가서 책을 베껴갔다. 풍방은 범흠을 위해 《장서기(藏書記)》 일문을 써준 적도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만권루에 소장된 장서는 나중에 천일각(天一閣)에 죄다 팔려나갔다고 한다.
풍방은 책을 수집한 뒤에 또 자신이 적지 않은 소위 고문 · 고서를 위조하였는데 《하도(河圖)》 석본 ·《노시(魯詩)》 석본 ·《대학(大學)》 석본 · 조선《상서(尙書)》· 일본《상서(尙書)》 등이 있다고 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해남출판사에서 만든 《사고전서총목제요》 전자책에 의해 검색을 한 바, 풍방의 저서로, 《고역세학(古易世學)》·《역변(易辨)》·《노시세학(魯詩世學)》·《춘추세학(春秋世學)》·《금석유서(金石遺書)》 등이 확인된다.
3. 《고서세학(古書世學)》이란 과연 어떤 책인가
어떤 자료에는 그가 위조한 책 중에는 전술한 《고서세학(古書世學)》이라는 책도 들어 있는데 조선《상서(尙書)》와 어떻게 다른지 알 수가 없다.
《고서세학(古書世學)》과 관련하여, 중국국가도서관 장서목록을 확인한 바, 등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인테넷상으로 이 책을 판매하는 사이트도 있어, 목하 주문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확인한 그는 대단한 필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의 유묵의 일부 사진이다. 맨 끝부분에 그의 이름인 도생(道生)이 쓰여 있고 낙관이 찍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풍방이 쓴 《자서시권(自序詩卷)》이다]
[풍방이 쓴 《소요유(逍遙遊)》 일부이다]
4. 《사고전서총목제요(史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고서세학(古書世學)》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우선 《사고전서총목제요(史庫全書總目提要)》란 어떤 것인지 알아 보기로 하자. 《사해(辭海)》에는 표제어로 《사고전서총목(史庫全書總目)》이 올려 있고, 이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다.
"《사고전서총목제요(史庫全書總目提要)》라고도 부른다. 서목(書目)의 이름이다. 청나라 영용(永瑢) · 기윤(紀昀)이 주편하였다. 200권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찬수할 때 일찍이 초록(草錄)을 입고한다거나 겨우 책 제목만 수록했던 도서에 대하여 전부 제요(提要)를 써서, 건륭 46년(1781)에 편집하여 간행한 것이다. 정식 입고한 서적 3,470종, 존목(存目)한 책은 6,819종이었다. 이듬해 또 따로 《사고전서간명목록(四庫全書簡明目錄)》을 엮었는데, 문장을 줄이고, 존목을 빼는 등 간편본을 만들었다."(하정농 주편, 《사해(辭海)》(축인본), 상해사서출판사, 1589쪽 참조)
말이 나온 김에, 존목(存目)이란 개념에 대해 더 설명하고자 한다. 존목이란 책 제목만 남기는 것을 말한다. 청나라에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수하면서 경(經) · 사(史) · 자(子) · 집(集)으로 편차를 분류하였는데1), 무릇 시휘(時諱: 일정 시대에 금지되는 글자나 말)에 위반하여 통치에 불리하고, 봉건전통사상에 맞지 않은 것이라든가 가치가 없다고 인정된 모든 서적에 대해서는 사고(四庫)에 다 넣지 않았다. 그 중 일부에 대해서는 제목만 남기되 제요(提要)를 대략 부기하여 《사고전서총목제요(史庫全書總目提要)》 집어 넣은 것을 존목(存目)이라고 칭했는데 6천여 종이었다고 한다.
이제 《사고전서총목제요(史庫全書總目提要)》에 적혀 있는 《고서세학(古書世學)》에 대한 서지(書志)는 다음과 같다. 이 자료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중국 호남출판사에서 만든 《사고전서(四庫全書)》 전자책 00561번 자료이다.
위 자료의 글자가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으므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글자의 포인트를 좀 확대하고 포토샵을 이용하여 두 면에 분리된 것을 한 면에 통합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위 자료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고서세학(古書世學)》 6권. 양회염정사(兩淮鹽政司)2)에서 수집하여 조정에 바친 책이다.
명나라 풍방(豊坊)이 지었다. 풍방이 쓴 책으로 《고역세학(古易世學)》이 있는데 이미 책 이름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올라 있다.
이 책은 금문(今文) · 고문석경(古文石經)이 맨 앞쪽에 배열되어 있고, 맨 뒤에 해서(楷書)로 이를 풀이하였다. 게다가 조선(朝鮮)과 왜국(倭國)에서 수집한 두 권의 책을 고본(古本)에 합쳤기 때문에 책 이름에 "고서(古書)"가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또 풍씨(豊氏)는 송(宋)나라 때로부터 명(明)나라 때까지 자기 집안 대대로 배워 왔던 《고서(古書)》에 관해서, 풍직(豊稷)은 《정음(正音)》이라 했고, 풍경(豊慶)은 《속음(續音)》이라 했고, 풍희(豊熙)는 《집설(集說)》이라 하였으며, 그 자신 도생(道生)(즉 풍방)은 《고보(考補)》라고 하였기 때문에, 책 이름에 세학(世學)이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3)
그 책 서문에 이르기를, "명나라 정통 6년(1441)에, 그의 증조 풍경(豊慶)이 북경에서 관직에 있을 때, 조선에서 사신으로 왔던 규문경(媯文卿)과 일본에서 사신으로 왔던 서예(徐睿)가 조공을 하러 들어왔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독서인으로, 문사에 능하거니와 《육경(六經)》을 의논함에 있어 예상을 뛰어 넘는지라, 당장 이들에게 《상서(尙書)》에 관해서 물어 보았다. 그러자 조선사신 규문경(媯文卿)은 "우리 선왕 기자(箕子) 때부터 전해 왔던 것으로, 《신농정전(神農政典)》으로부터 시작해서 《홍범(洪範)》에서 끝이 납니다"고 하였고, 일본사신 서예(徐睿)는 "우리 선왕 서불(徐市) 때부터 전해 왔던 것으로, 《우서(虞書)·제전(帝典)》으로부터 시작해서 《진서(秦誓)》에서 끝이 납니다"고 말했으며, 또 웃으면서 말하기를 "관본(官本) 《상서(尙書)》에는 착오가 매우 많아서, 공안국의 위조한 《서(序)》는 모두 고경(古經) 그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4) 《우서(虞書)·제고(帝告)》에 기록된 요임금과 순임금 둘 사이에 나라를 주고 받고 한 일이라든가, 《골작(汨作)》5)에 기록된 사흉지과(四凶之過)라든가, 《구공(九共)》6)에 기록된 4악(四岳) · 9관(九官) · 12목(十二牧)의 공적을 평정한 일이라든가, 《고어(槀飫)》7)에 기록된 후직종식지법(后稷種植之法)과 같은 것에 대해서, 《서(序)》를 통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왜국)의 법에 고경에 전해 오는 것을 글자 한자라도 중국으로 들어가게 한 자는 구족(九族)을 멸하게 되어 있습니다.8) 사신이 출발할 즈음에는 재삼 몸수색을 하고, 군사를 보내 사신을 호위해서 국경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러한 즉, 육일옹(六一翁)9)이 중국에 전해지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그래서 억지로 잘못된 곳이 어는 부분인지 고쳐 달라고 청하였더니 겨우 1《전(典)》· 2《모(謨)》(《상서·우하서》에는 대우모(大禹謨)와 고요모(皐陶模)가 있음, 필자주) ·《우공(禹貢)》·《반경(盤庚)》·《태서(泰誓)》·《무성(武成)》·《주고(酒誥)》·《낙고(洛誥)》·《고명(顧命)》에서 잘못된 곳을 써서 보여 주더니, 겨우 나의 선조 청민공(淸敏公)의 《정음(正音)》 고서 아래에 '이 경을 읽는 자로 하여금 아직도 인각몽모(麟角鳳毛: 기린의 뿔과 봉황의 털로, 매우 드물고 진귀한 인재나 사물)를 위해 글씨를 남겼음을 생각키운다"라는 내용의 글을 덧붙여 적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런 말도 하였다. "양나라 요방흥(姚方興)10)은 망령되이 《요전(堯典)》·《순전(舜典)》으로 갈라서 두 편으로 만들되, 복생(伏生)의 금문(今文) · 공안국(孔安國)의 고문(古文) · 《홍도석경(鴻都石經)》11) ·《위삼체석경(魏三體石經)》12)을 합쳐 1편으로 만들면서 단지 《요전(堯典)》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기자조선본(箕子朝鮮本)과 서불왜국본(徐市倭國本)은 전부 《제전(帝典)》이라 하였는데, 자사(子思)의 《대학(大學)》13)과 부합됩니다. 왕노재(王魯齋) · 왕심녕(王深寧)은 모두 가장 옳다고 했으므로 이제 이런 견해를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풍흥의 《고보(考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요방흥(姚方興)은 원래 제(齊)의 찬탈한 군주 소도성(蕭道成)14)의 신하로서, '若稽古帝舜曰' 7자를 '重華'의 위에 더 조작하여 더 늘리고, 원래의 문장을 문란시켜 2《전(典)》, 즉 《요전(堯典)》 · 《순전(舜典)》으로 만들어서, 남조 제명제 건무 2년(494)에, 이를 나라에 바쳤는데 나중에 찬주(篡主) 소연(簫衍)15)를 섬기다가 죄를 지고 주살을 당했다. 조선에 봉해진 기자가 전했다는 《상서(尙書)》고문은 《제전(帝典)》에서 시작하여 《미자(微子)》에서 끝이 나며, 맨 뒤에는 《홍범(洪範)》 1편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서불(徐市)는 진(秦)나라의 박사(博士)로서, 이사(李斯)가 유생들을 생매장하여 죽이는 기회를 틈타, 바다로 들어가 구선(求仙: 선인을 두루 찾다)하겠다는 것은 한낫 핑계꺼리였고, 모든 고서에 기록되기로는 섬으로 가서 왜국(倭國)을 세웠다고 하였는 바, 오늘날의 일본이 이것이다. 이 두 나라에서 해석한 《서경(書經)》은 돌아가신 증조께서 봉부군(奉府君)과 양문의공(楊文懿公)을 통해서 일찍이 이를 기록해서 얻어 우리 집안에 소장하게 되었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志錄)》에 이르기를16), "송나라 구양영숙(歐陽永叔)의 《일본도가(日本刀歌)》에 의하면, '徐福行時書未焚, 逸書百篇今尙存。'라고 하였으니 대개 옛날에 이러한 말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저 시인(詩人)이 그저 제멋에 겨워서 한 말이 어찌 꼭 그런 일이 참으로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중국에 직공(職貢)을 닦아 온 것은 당(唐)나라 때로 오래 되었다. 당(唐)에서 송(宋)에 이르기까지 역대로 중국에서 없어진 책이 혹시 일본에 있으면 보내달라는 황제의 글을 보내어 요청하였으나 허사였거늘 2천여 년이나 지나 우리 증조이신 풍경(豊慶)께서 마침내 이를 얻으셨다. 그것을 얻었으면서도 또 조정에 바치지 않고 집안에 보관하게 되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겠는가? 기자가 전한 《상서(尙書)》 고문, 《제전(帝典)》부터 《미자(微子)》까지인 즉, 《일서(逸書)》17)와 어느 한 편이라도 다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모두가 복생(伏生) · 공안국(孔安國)이 전(傳)한 것과 또 같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맨 뒤에 《홍범(洪範)》 1편을 덧붙였다는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대개 《좌씨전(左氏傳)》에서 《홍범(洪範)》을 3번 인용한 것만 보면 되는데, 모두 《상서(尙書)》라고 하였다. 게다가 "王"이란 것을 모르고, 주(周)나라 사람이 말하는 "十有三"이란 주(周)나라 사관의 기록이지 상(商)나라 사람의 사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공(禹貢)》은 도산도수(導山導水)하여 구주(九州)로 옮기기 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인들의 선경후위(先經後緯)18)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오자지가(五子之歌)》의 '爲人上者奈何不敬', 以其不協, 이라 하였는데 이 부분을 고쳐서 '可不敬乎'로 고친 것은 홍도(鴻都)의 《석경(石經)》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하였다.
《정의(正義)》에서 한 말에 근거하면, 채옹(蔡邕)이 쓴 《석경상서(石經尙書)》19)는 금문 34편에 그쳐, 《오자지가(五子之歌)》가 없는데, 풍희(豊熙)가 어찌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이 같이 터무니 없는 말을 하겠는가? 그가 변론한 것은 가히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명나라 《명영종실록(明英宗實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정통 6년(1441)에, 이들 두 나라(조선과 왜국) 사신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거늘 그가 한 거짓말은 이미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또 조선이 지금은 외번(外藩)이라지만 그들의 서적이라는 것은 중국과 다른 것이 없어 기자본(箕子本)이란 주장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일본에서 판각한 《칠경맹자고문(七經孟子考文)》20)은 이미 중국에서 없어진 책으로, 단지 공안국(孔安國)의 《효경전(孝經傳)》· 황간(黃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 와 《효경전(孝經傳)》에 대해서, 일본 사람 산정정(山井鼎) 등은 또 그것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상서(尙書)》에 관해서는 중국의 주소본(注疏本)과 똑같으나 자구가 어쩌다가 틀릴 뿐이다. 그러한 즉, 조선본(朝鮮本) · 왜국본(倭國本)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이는 또 편장의 자구를 증명할 필요도 없이 나중에는 그것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끝>
5. 《고서세학(古書世學)》은 위서(僞書)인가
《사고전서총목제요》의 작자가 풍방의 《고서세학(古書世學)》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그것이 위서임을 밝혀낸 결정적 증거는 그 책에 들어 있다는 기자조선본과 왜국본 상서에 대한 출처에서 자신의 증조인 풍경(豊慶)이 북경에서 관원으로 있을 때 명나라 정통 6년에 중국에 조공사신으로 온 조선사신 규문경(媯文卿)과 일본사신 서예(徐睿)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는 것인데 정작 당해 명나라 《영종실록(英宗實錄)》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풍경이 왜국사신으로부터 자국의 고경(古經)의 내용을 외국으로 발설할 경우에는 9족을 멸한다는 말을 듣고서 자신의 서술에 왜국사신의 실명을 폭로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왜국사신이나 조선사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명과 사신으로 왔던 연도를 달리 적어 놓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한 연도를 기재해 두었다면 해당 연도를 사신으로 갔던 사람을 추적해 보면 당장 들통날 일을 적어두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점은 재고 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생각 나는 것으로는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조선에서 잘 쓰지 않은 성씨를 가진 조선 사람의 이름으로 규문경(媯文卿)을 꾸며내고 역시 왜국 사신의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는 서예(徐睿)란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으로 규씨(媯氏)라는 성씨로부터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의 성씨의 성관 및 득성 경위 및 각 지역별 토성 · 내성 · 귀화성 등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라든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문헌비고(文獻備考)》라든가 일제 때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명씨족에 관한 연구조사》를 통해 희성과 관련된 자료가 이미 파악이 되어 있는데, 규씨(媯氏)란 성씨가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중국 관리를 만났던 사신이라고 한다면, 그의 신분은 과거급제자임이 분명할테고 그렇다면 《국조방목(國朝榜目)》에도 이름이 올려 있을 법한데, 명단을 확인해 본바 규씨성을 가진 사람이 과거급제자로 올려있지도 않다. 또 일본인 사진으로 서예(徐睿)라는 사람이 거론되는데 일본인은 성씨가 2만여 가지가 넘는 줄 알지만 그들의 성명이라는 게 4자 이상으로 된 것이 대부분인지라, 서예라는 이름이 일본을 세웠다고 하는 서불(徐市)의 후손을 연상시키는 것은 몰라도 일본 사람의 이름에도 썩 어울리지 않는다. 풍방은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시켜 자기가 폭로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실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서예(徐睿)라는 일본 사람이 말했다는 대목은 우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고경(古經)에 나오는 것을 일본사람이 중국에 글자 하나라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9족을 멸한다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은 군인들로 하여금 몸수색을 다해서 국경 밖으로 내보낸다는 내용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신빙성을 더할 만하다. 또 그가 말했다는 중국에서 일본에 없어진 책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도 사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를 읽어 보면 송나라 황제가 중국에서 이미 없어진 도서 목록 수백 가지를 고려로 가는 사신편에 보내어 고려에서 보관된 책을 베껴올 수 있도록 협조를 해달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를 쓴 사람은 기윤(紀昀)과 또 한 사람인 영용(永瑢)이란 사람이다. 기윤에 대해서는 필자가 《만주원류고》를 번역할 때 이 책의 제요를 작성한 인물 정도로만 알았다. 이제 그의 이력을 알아본바, 건륭 진사출신으로 관력은 이부사서 협판대학사를 역임하였고, 사고전서관총찬관으로 《사고전서총목제요》를 찬정한 시와 문에 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전자책에 의하면 모두 10,254건에 대한 제요를 작성하였다. 그야 물론 본인 뿐만 아니라 데리고 있는 직원들이 작성하였을 것이다. 좌우간 수많은 자료를 다 읽고 그에 관해서 요약본을 써 낸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요 중에 풍방의 저술이 위서일 것임을 추단케 하는 것은 그의 《춘추세학(春秋世學)》에 대한 제요에는 이렇게 써 있다.
"이 책은 명나라의 풍방(豊方)이 쓴 책이다. 풍방이 쓴 책으로 《고역세학(古易世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미 《사고전서》에 올라 있다. 이에 대해 자신의 말로, "이 책은 자기의 선대로서 송나라 어사중승을 역임한 풍직(豊稷)이 쓴 《안단(案斷)》이란 책을 해석한 것이므로 "세학(世學)"이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단(案斷)》이란 이름은 송인의 서목 및 《송사(宋史)·예문지(藝文志)》에 모두 올라 있지 않았다. 이제껏 "春秋"라고 한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가 말한 것은 아마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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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經) · 사(史) · 자(子) · 집(集)은 한적의 전통적 분류법으로, 경서 · 역사서 · 제자 · 시문집을 일컫는다.
2) 양회염정사(兩淮鹽政司)의 양회(兩淮)는 회남(淮南)과 회북(淮北)을 가리키고, 염정사(鹽政司)는 명나라 때 염무(鹽務)를 관장하던 기관인 염운사(鹽運司)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풍방의 선대에 관해서 이 자료 및 《중국역대인명대사전(中國歷大人名大飼典)》에 의하여 재구성해 보면, 선대인 풍직(豊稷(1033~1107)은 송 명주 견현인으로, 자는 상지(相之)며, 인종 가우 4년 진사였다. 곡성령으로 봉직하면 청렴으로 이름이 났다. 감찰어사 · 국자줴주 · 이부시랑 등의 직을 역임했다고 한다. 풍경(豊慶)은 풍방의 증조부로 명나라 정통 4년(1439) 진사였다. 병과급사중에 제수되었다. 경제(景帝)의 남성(南城)(영종 복위음모사건이 아닌가 한다) 및 역저(易儲: 저는 세자를 말하니 세자를 바꾸자는 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7년간 옥살이를 하였으며 영종(英宗)이 복위하면서 복직하였다. 여러번 승진하여 하남포정사(河南布政司)에 이르렀으며 청렴결백하다가 조정에 소문이 자자했다. 풍희(豊熙)(1470~1537)는 풍방의 부로 홍치 12년(1499) 진사출신이다. 편수(編修)로 제수되어 시강(侍康)으로 승진되었다가 우유덕(右諭德)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근(劉瑾)에게 아부하지 않아 외직으로 쫓겨나 남경한림원사를 역임했다. 가정 때 대례의(大禮儀)가 일자 여러번 다투었다. 예가 정해진 뒤 다시 상소를 올려 간하고, 좌순문(左順門)에 엎드려 통곡을 하다가 황제의 진노를 사서 하옥되어 고문을 당했고 정장(廷杖: 황제의 명으로 신하가 조정에서 곤장을 맞는 것)을 맞고 수자리로 귀양보냈다. 10여년 뒤 수자리에서 죽었다. 풍방은 바로 풍직의 15세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지혜가 많았으며 정덕 15년 25세 나이로 향시에 단 한번으로 합격하고, 가정 2년(1524) 그의 나이 30세 때 진사로 급제하였으니 부자가 같은 조정에서 관리를 한 셈이다. 이부주사로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통주동지로 좌천되었다가 사면되어 돌아와 오중(吳中)에 살다가 간난과 병고로 죽었다. 성격이 오만하고 방탄하며 익살로 세상을 업신여겼다. 그는 기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별난 사람이었으며 그가 가진 별호만도 서교농장(西郊農長) · 남우병사(南禺病史) · 벽옥당하리(璧玉堂下吏) · 천관고공대부(天官考功大夫) 등이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4) 서진의 영가지란(永嘉之亂)(기원 311) 이후에 금 · 고문상서가 잇달아서 실전이 되었다. 동진 초기에, 예장내사 매책(梅赜)이 조정에 공안국(孔安國)의 《공전고문상서(孔傳古文尙書)》를 바쳤는데 46권으로 나뉘었고, 모두 58편이었다. 그 중 33편의 내용은 복생(伏生)이 전수한 《금문상서(今文尙書)》 28편과 똑같은데 25편이 더 들어 있었다. 더 들어간 25편을 나중에 만서(晩書)로 불렸다. 공전고문상서가 출현한 뒤 얼마 안 있다가 학관이 설립되었으며, 동진에서 수 · 당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것이 공벽본(孔壁本) 고문상서요, 한나라 공안국이 전(傳)을 썼던 것이라 굳게 믿었다. 당초에 공열달(孔穎達)은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상서정의(尙書正義)를 썼으며, 관방이 정본이 되어 공개적으로 간행되었다. 나중에 송나라 사람이 이를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집어 넣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었다. 나중에 송나라의 오역(吳역)에 의해 "만서(晩書)"는 위작으로 의심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주희(朱熹)가 오역의 견해를 찬성하여 《주자전서(朱子全書)》·《주자어류(朱子語類)》 등에 진일보한 논술을 전개하였다.(강호 등 역주 · 주병균 심교, 《금고문상서전역(今古文尙書全譯)》, 귀주인민출판사, 5~6쪽 참초)
5) 6) 7) 현전 《금고문상서(今古文尙書)》중 《우하서(虞夏書)·순전(舜典)》의 편명이다. 《상서(尙書)》의 어느 편이든지 《서(序)》가 있다. 일종의 그 편명의 요지를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서(序)만 있고 본문은 없다. 따라서 일본 사신이 말했다는 내용이 일본에 소장 중인 고경(古經)에 들어 있다면 이는 중국에서 없어진 자료가 일본에 보존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8) 구족(九族)이란 9대의 가족을 말한다. 고조 · 증조 · 조 · 부 · 자신 · 자 · 손 · 증손 · 현손이다. 《좌전(左傳)·환공(桓公)6년》 주석에 의하면, 9족이라 함은 외조부 · 외조모 · 종모자 · 처부 · 처모 · 고지자 · 자매지자 · 자지자 및 자기의 동족이라고 하였다.
9) 육일옹(六一翁)이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修)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자호가 육일거사(六一居士)였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고적 1천권 · 서 1만 책 · 거문고 하나 · 바둑 한 판 · 술 한 병 ·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이 늙다리(老頭子) 한 사람 이렇게 해서 육일거사(六一居士)로 하였다고 한다.
10) 원문은 양나라 요방흥(姚方興)으로 되어 있으나 그는 원래 원래 남제의 학자였다가 나중에 소연이 양나라를 개국할 때 참여했으니 양나라 사람이기도 하다. 명제 건무 4년(497)에 대항두(大航頭)라는 곳에서 한나라 공안국이 전주를 한 《고문상서(古文尙書)》가 발견되었는데, 요방흥이 그 책 《순전(舜典)》 1편에 "曰若稽古帝舜曰重華協于帝"라는 12자를 집어 넣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것은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들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重華" 위에 7자를 더 집었다고 하는데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11) 《홍도석경(鴻都石經)》. 홍도(鴻都)란 동한 시대 황실 가문의 장서를 보관한 곳을 말하며 거기에 있던 《석경(石經)》을 뜻한다. 석경이란 돌에 새긴 유교경전을 말하며, 한나라 이후 석경의 종류가 다양하다.
12) 《위삼체석경(魏三體石經)》이란 《삼체석경(三體石經)》 또는 《정시석경(正始石經)》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삼국 조위 제왕(齊王) 조방(曹方) 정시 2년에 건립되었으며, 《상서(尙書)》·《춘추(春秋)》와 일부 《좌전(左傳)》 등 도합 28개의 비가 하남 낙양에 건립되어 중국에서 동한의 《희평석경(熹平石經)》에 이어 그 뒤에 건립된 두번째 석경이다. 이 비는 고문 · 전서 · 예서 등 4종류의 각이한 서체로 각서하였다. 이로 인해서 중국의 서법사와 한자의 변화발전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삼체석경(三體石經)》이란 이름도 바로 여기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13) 자사(子士)는 전국시대 초기의 철학자이다. 성은 공(孔)이요 이름은 급(伋)이다. 공자의 손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찍이 증자(曾子)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현존하는 《예기(禮記)》 중의 《중용(中庸)》이 자사의 작품이라고 전해 지고 있으나 《대학(大學)》이 그의 작품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대학(大學)》은 《예기(禮記)》 중의 한 편명으로, 아마 전국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작자 불상이다.
14) 소도성(蕭道成)(427~482)은 곧 제(齊)의 고제(高帝)이다. 남조 제의 건립자이다. 재위는 479~482이다. 자는 소백(紹伯), 어릴 때 자는 두장(斗將)이었다. 동해 난릉인으로 남난릉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원래 유송의 금위군 장령으로 송나라 황족의 내란을 틈타, 군정대권을 장악, 황후를 죽이고 황제를 폐하여, 순제(順帝)를 세워 제공(齊公)에 봉해졌다. 순제 승명 3년(479) 송을 대신해 자립하여 건원(建元)으로 개원하였는데 역사에는 남제(南帝)라고 한다.
15) 곧 양무제(梁武帝)(464~549)이다. 소연(蕭衍)은 남조 양나라의 건립자이다. 재위는 502~549년이다. 자는 숙달, 어릴 때 자는 연아(연아)로, 남난릉 사람이다. 일찍이 남제 옹주자사로 임명되어 양양(襄陽)을 진수했다. 남제의 내란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제위를 탈취했다. 《백가보(百家譜)》를 개정, 사족을 중용하였으며, 불교를 크게 진흥시키고 사원을 건립하였으며, 3차레나 동태사(東泰寺)에 사신(舍身)했다. 중대동 2년(547)에 동위의 대장 후경(侯景)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2년 뒤, 후경이 양자강을 건너 도성을 공파, 그는 굶주리다 병사했다. 문학에 능하였고, 악률에 정통하여 일찍이 회음기(淮音器) 4개를 새로 만들었다.
16) 고염무의 《일지록(日志錄)》 권2 《풍희위상서편(豊熙僞尙書篇)》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풍희의 증조부의 풍경(豊慶)의 관력이 하남포정사(河南布政使)로 확인된다. 포정사(布政司)란 관명으로, 번사(藩司) · 번대(藩台)로 간칭되며, 명홍무 9년(1376)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로 개칭했다. 선덕 후에 전국의 주 · 부 · 현을 양경(兩京)과 13주포정사로 나누어 통속시키고, 매 사(司)마다 좌 · 우 포정사 각 1명씩을 둔 일개 성의 최고행정장관이었다. 나중에 통치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총독(總督) · 순무(巡撫) 등을 전설(專設)하면서 포정사의 권한은 점차 약해졌다.
17) 특별히 고문《상서(尙書)》를 가리켜서 일서(逸書)라고 한다. 서한 때 공자님이 옛날에 살던 벽 속에서 나왔으나, 박사(博士)를 세우기 전에 전해진 것이므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8) 선경후위(先經後緯)란 사자성어는 참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동양삼국의 내로라하는 사전을 다 들추어 보아도 이 말을 표제어로 실은 사전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인터넷에서도 이 말을 쓰는 경우가 발견되는데 그 의미가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속담에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우문과 같은 것으로 경서(經書)가 먼저고 위서(緯書)가 그 다음이다는 뜻 같은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19) 《희평석경(熹平石經)》격이라고도 한다. 후한 희평 4년(175)에 경적이 성인들이 살았던 시대와 아주 동떨어져 문자가 잘못된 것이 많자, 채옹(蔡邕)는 드디어 오관중랑장 당계전(堂溪典) · 광록대부 양사(楊賜) 등과 더불어 6경의 문자를 바르게 확정시켜야 한다고 주청을 하여 영제(靈帝)로부터 윤허를 받게 되었다. 채옹이 비석에 글을 쓰고 석공으로 하여금 전각을 하게 해서 대학문 밖에 세웠는데 세칭 《희평석경(熹平石經)》이라 하는 것이다. 비가 처음으로 세워졌을 때 관람자와 글씨를 베껴쓰려는 자들이 매일 수레로 1천여 량이 거리를 가득 매웠다고 한다.
20) 정식 명칭은 《칠경맹자고문보유(七經孟子考文補遺)》이다. 일본 사람 산정정(山井鼎)(1690~1728)이 찬한 것으로,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 권 33 경부(經部) 오경총류(五經總類)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청나라가 망한 뒤 조선 사람들은 소중화를 자처하면서 중화를 이엇다고 자부심이 대단하더니만 조선 시대 저작으로 《사고전서》에 올려 있다는 것이 기껏해야 《기전고(箕田攷)》 1권 뿐으로 알고 있는 필자에게 일본인이 쓴 이 책이 《사고전서》에 올려 있다니 당시 조선유학이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만도 하여 충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