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萬愚節 아침에
전호준
천지가 온통 꽃으로 덮여가는 1980년대 초 4월의 첫날이자 주말이다.
오랜만에 좀 느긋한 마음으로 아내와 같이 인근 산을 찾았다. 진달래 꽃밭을 거닐며 산나물을 찾고 화사한 산 벚나무 아래서 신혼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허리춤에서 달갑잖은 삐~삐~삐~ 신호음이 울린다.
3838 8282(산불! 산불! 빨리빨리)라는 숫자가 떴다. 모처럼 비번인 주말 오후, 오늘은 오롯이 넘어갈까 했는데,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이 소태맛이다. 봄이 되면 으레 찾아오는 산불이라는 달갑잖은 손님 때문에 일선 공무원들은 항상 긴장과 압박 속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나날이었다. 일반 전화도 귀하던 때라 일명 삐삐라 불리는 무선호출기에 의존하던 시절이다. 작은 성냥갑 크기의 호출기 화면에 뜨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거나 협약된 숫자를 통해 상호 비상연락 수단으로 활용됐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완전군장(진화 복장)을 하고 사무실로 달려갔다.
예상외로 조용하다. 벌써 모두들 현장에 투입된 것일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당직자 K 군이 웬일이냐며 의아해 한다. ‘삐삐가 와서‚ “아! 오늘 만우절 아닙니까? 아마도 김 주사님이 호출한 것 같습니다„ 전 주사 오거든 00식당으로 보내라 했습니다. 아차! 그제야 정신 들었지만 싱긋 웃음만 나온다.
비상근무조들이 무료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 앞 식당에 한잔하려 갔다고 했다. 짓궂은 친구 K가 호출한 모양이다. 산불진화 복장으로 나타난 나을 보고 방안엔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집에 있으면 심심할 것 같아 한잔하라고 내가 호출했지„ 모처럼 나들이 길 산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나로선 일선 공무원의 치부가 신혼의 아내에 들킨 것 같은 미안함에 마음이 언짢았다.
“야 인마! 무슨 장난을 그렇게 해 놀랬잖아! „ 나의 짜증에 “oh, oh! All Fools’ Day „ 하며 웃는 그를 보자 멋쩍게 싱긋 웃고 말았다.
만우절 아침, 그 옛날 해프닝을 떠올리며 만우절의 유래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졌다. 프랑스의 왕 샤를 9세와 관련이 있다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옛 날 프랑스에서는 3월 25일부터 새해가 시작되어 그날부터 4월 1일까지 축제가 열렸다. 축제 마지막 날인 4월 1일에 지인들과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1564년 국왕 샤를 9세가 1월 1일부터 새해를 시작하도록 역법曆法을 바꾸었다. 갑자기 바꾸어진 절기를 까먹은 사람도 지키지 않고 4월 1일을 새해 첫날로 고집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놀리기 위해 가짜 선물이나 가짜 약속을 하게 되었고 그게 바로 만우절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다.
서양에서는 만우절을 All Fools’ Day 라 하며 만우절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에어프릴 폴 (April Fool:4월의 바보) 또는 포아송 다브릴(Poisson D′avrill: 4월의 고등어)이라 했다 한다. 4월에 유독 고등어가 많이 잡히기 때문이란 만우절에 걸맞은 이야기다.
만우절萬愚節의 한자 구성을 보면 일만 만萬 자字에 어리석을 우愚 자字로 만인이 어리석어지는 날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어리석음은 바보를 칭하는 게 아니다. 선하고 착함을 우회적으로 이르는 말인 것 같다. 옛날 격언에 바보와 성인聖人은 형제간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음미해 보게 된다.
남을 속여도 피해를 주지 않고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해프닝, 알면서도 속아주며 속고도 화내지 않는 사람은 성인이 아니면 정녕 바보가 아닐까?
훈민정음 서문에도 우민愚民 즉 어리석은 백성이란 말이 나온다. 어리석은 백성이란 착하고 순박한 백성이란 뜻이 담긴 것이다. 우리의 삶도 한 번쯤 바보가 아닌 우민愚民 같은 삶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해마다 만우절이면 119와 112상황실이 장난전화로 곤혹困惑을 치른다고 한다. 심지어 가짜 전화로 긴박한 실제 상황이 차질을 빚는 일이 있으니, 장난 전화를 삼가 달라는 뉴스를 심심찮게 접한다. 만우절이 이런 분별없고 몰지각한 사람들의 장난치는 날로 변질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다.
정치인들의 능청스러운 거짓말을 알면서도 표를 주고 얄팍한 상혼商魂에 속아 잠시 분개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간혹 보이스 피싱에 당해 알뜰살뜰 모은 돈을 한방에 날렸다는 사람들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며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흥분하기도 한다.
인간의 한 평생에 어찌 거짓말 없는 삶이 있을까? 남을 울리고 화나게 하는 거짓말보다 같이 웃어넘기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만우절이 아쉽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365일, 아니 한평생 만우절 같은 나날 속에 울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우절 아침에 만우절 같은 소리를 지껄이다 보니, 문득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혼자 빙그레 웃어본다. 2019. 4.1 만우절 아침에~
첫댓글 그때 그 시절의 만우절 풍경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속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 먹어도 어쩌지 못하는 허술함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해도 되는, 웃을 수 있는 그런 거짓말이어야 하겠습니다.
옛날을 회상하며 잘 읽었습니다.
만우절에 겪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만우절의 유래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속아도 웃어주고, 알고도 모르는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하는 것도 때론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짜임새 있고,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제법 크게 속으신 경험을 가지고 계십니다. 직장에서 그런 문자를 받으면 저라도 빨리 뛰어 나갈 것 같습니다. 만우절의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끝나서 그나마 다행이구요. 상대에게 쇼크를 줄 만큼 큰 거짓말이 아니라면 일년에 한번, 바보가 되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인 것 같긴 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짓궃은 친구의 장난에 좀 놀라셨겠습니다. 한편 친구 입장에서 보면 꿀잼이었을 것 같네요 ㅎㅎ.만우절 유래에 대한 제세한 내용도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먼 옛날이 아닌 만우절날 카톡을 받았다. 나의 성당 대녀가 한살차인 친구다.그런데 카톡 초머리에 대모님 그동안 감사했다면서 저는 모든걸 정리하고 남편도 떠나보낸 지금 절에 가기로 맘먹었다고 해서 왜 갑자기하고 끝마무리에 꼭 놀러한번 오시라면서 어느어느곳 절 이름이 만우절이라고 해서 잡깐동안 소식도 없이 왜이러지 하는 순간 하 하 웃었답니다.
만우절과 성인은 형제지간이란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속고도 화내지않고 웃어야하니 말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산불 출동으로 사모님께서 순수하고 착한 남편이라고 더 신뢰 하셨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속고도 웃으면서 오히려 친분이 돈독해질 수가 있었거든요. 그게 요즘이면 어떠했을까? 생각이 많아집니다. 각박한 세상인심을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침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요새 강원지역 산불로 장안 화재라서 공무원 시절 애환이 새롭게 떠 오르겠습니다. 장난이 인생사에 단 이슬일 수 있지만 지나치면 실례 일 수 있습니다. 장난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은 처지라면 좋은 관계지요. 만우절을 맞으며 너그러운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