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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통영 충렬사
* 학습 : 임진왜란의 전개
* 청천일칠산우회 등산 (2012.09.23. )-(3) * 촬영, 글 : 이재익
[학습목차] 임진왜란의 전개 (소답자한 47호/ 2012.9월호에 수록 내용)
▣ 1. 왜란의 징조는 어떠하였나? ▣ 2. 도요토미 히데요시 왜 조선을 침략하였나? ▣ 3. 조선의 대비책은? ▣ 4. 막상 왜란이 잃어나자 김성일(金誠一)은 어떻게 되었나? ▣ 5.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부산첨사 정발(鄭撥)장군은 어떻게 싸웠나? ▣ 6. 동래부산 송상현의 천곡결서와 戰死易 假道難 정신이란? ▣ 7. 왜군의 선봉장 小西行長은 어떤 인물인가? ▣ 8. 침략 왜군의 규모는? ▣ 9. 서울이 함락되기 까지는 어떤 전투가 있었나? ▣ 10. 전쟁초기 선조는 어떤 고난을 겼었나?
▣ 11. 평양성까지 함락한 왜군은 왜 한계에 부딪쳤나? ▣ 12.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어떠하였나? ▣ 13. 류성용과 이순신 장군 ▣ 14. 이순신 장군의 활약_임란 최초의 승리 옥포해전 ▣ 15. 이순신 장군의 2차 출전 : 사천, 당포, 당항포, 적진포 ▣ 16. 이순신 장군 제3차 출전 ; 한산대첩, 안골포 해전 ▣ 17. 이순신 장군의 제4차 출전 ; 부산포 승첩, 정운 장군 전사 ▣ 18. 이순신 장군 장군의 해전 승리가 갖는 전략적 의의는? ▣ 19. 한산도 제승당과 한산도가 ▣ 20. 거북선은 어떤 활약을 하였나?
▣ 21. 임진왜란 시에 조선의 함선에 대하여 ▣ 22. 무기 화기의 비교 ▣ 23. 전세의 역전 ▣ 24. 명군의 내원 ▣ 25. 강화 교습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 26. 제2차 진주성 전투 ▣ 27. 주논개(朱論介)가 순절한 것은 어느 시점이었나? ▣ 28.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 29.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활약은 어떠하였나?
▣ 30. 의병장 조헌 장군 ▣ 31.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 ▣ 32. 의병장 김천일 장군 ▣ 33. 승려 의병장 서산대사 휴정 ▣ 34. 승려 의병장 사명당 유정 ▣ 35.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반환되어 왔는데 무슨 비인가? ▣ 36. 李舜臣은 왜 백의종군을 하는 수난을 당했나? ▣ 37. 정유재란의 발발과 원균의 최후는 어떠하였나? ▣ 38. 명량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이 다시 재기하였다는데? ▣ 39. 진도 고군면 내동리에는 ‘왜덕산(倭德山)’에 얽힌 사연은?
[통영 세병관] 에서 계속됨.
ㅇ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1598년(선조 ) 일본의 2차례 침입이다. 1차는 임진왜란, 2차는 1597년 정유재란이며 이 둘을 합칭하여 임진왜란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ㅇ 일본은 <분로쿠(文祿) `게이초(慶長)의 役> 이라고 칭하고, 중국은 <萬曆의 역> 이라고 칭한다.
▣ 1. 왜란의 징조는 어떠하였나?
ㅇ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대마도주 종의조(宗義調)에게 조선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수호를 청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의도는 조선과 동맹하여 조선국을 앞세워 명을 침공하려는 것이었다. ㅇ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때 왜사는 교섭(交涉)이 불여의하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暗示)하였다.(1587, 선조 20년)
ㅇ 도요토미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1589년 (선조22) 6월,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신임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시 겪게 될 고통을 우려하여 직접 조선에 건너오기도 했다.
▣ 2. 도요토미 히데요시 왜 조선을 침략하였나?
ㅇ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민태생 어머니가 개가를 하자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16세에 가출하여 바늘 장사를 하였다. 직전신수라는 소왕국의 무장 수하가 되었다. 처음 신발 당번을 하며 겨울에 주인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데우는 정성을 보여 주인의 신임을 얻었다. 이복동생을 꾀어 부하로 만들고 무엇이든지 빠르게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여 오다(織田信長)의 눈에 들어 39세에 大名(諸侯)가 되었다. 포악하면서도 영악했다.
ㅇ 오다는 사람을 종처럼 부리고 모욕을 주는 버릇이 있어 부하 장수를 개처럼 짓밟기도 하였다. 부하 아케치의 원한을 싸서 부하의 배신으로 포위되어 자결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의 후계자가 되어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였다. ㅇ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웅심, 명의 무역제한. 조선의 일본 무시에 대한 분노, 사랑하는 아들 학송의 요절에서 온 심리적 타격, 국내 통일과정에서 승복하지 않는 세력과 안정되지 않은 민심을 밖으로 향하게 하고 부하 제장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한 것, 부하 제장에게 나눠줄 영지의 획득 등.
▣ 3. 조선의 대비책은?
ㅇ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ㅇ 류성용(柳成龍) 이덕형(李德馨)의 의견을 쫓아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의를 정탐키 위해 사절을 파견.(1590, 세종 25년 14443 통신사 변호문, 서장관 신숙주 파견후 150년만에 처음) -황윤길(黃允吉, 서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이 번쩍 번쩍 빛나고 담력이 있어 보였다.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필경 병화(兵禍)가 일어날 것" -김성일(金誠一, 동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은 쥐눈같아 두려워 할 위인이 못된다. 내침할 정세를 보지 못했다."
ㅇ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金)․이황(李滉)․윤선각(尹先覺) 등으로 하여금 경상․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신립(申砬)․이일(李鎰)에게는 변비(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1. 강한루에서 바라본 충렬사 입구.
▣ 4. 막상 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金誠一)은 어떻게 되었나?
ㅇ 김성일(1538~1593)은 본관 의성(義城), 자 사순(士純), 호 학봉(鶴峯),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다. 1556년(명종 11) 이황(李滉)문하생. ㅇ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며, 후손들이 문집《학봉집》을 간행했다. ㅇ 1589년 의정부사인(舍人)으로 있으며,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일본에 들어갔다.
ㅇ 일본에서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ㅇ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경상우병사로 재직중에 파직되었다. ㅇ 그가 그러한 발언은 흔히들 당쟁적 소견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ㅇ 왜란 초에 파직 소환되던 도중에 류성용이 변호하여,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있는 기회를 주기를 간청하여, 그 기회가 부여되어 경상도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우며,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한 공로는 그의 지난날 죄값을 다소나마 갚았다. 국난의 위기에 인재들의 허물을 탓하여 죽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와 같이 활용한 좋은 예다. 의병장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金)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키는 등 왜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가 1593년에 병으로 죽었다.
2. 충무공 이순신 사당은 남해 여러 곳에 있다. 통영에도 2곳이 있다. 하나는 해저터널 위쪽 언덕에 있는 착량묘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1599년에 군인과 주민이 세운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조 39년(1606년) 충무공 부하였던 이운룡이 통제사로 부임해 왔을 때, 왕명으로 지은 것으로 지금의 이자리 충렬사이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강한루 지나면 외삼문이 나온다.
3. 외삼문을 지나면 오른쪽이 숭무당(향사와 관리), 왼쪽은 경충재(인재양성)이다.
▣ 5.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부산첨사 정발(鄭撥)장군은 어떻게 싸웠나?
ㅇ 정발 장군(鄭撥, 1553~1592)은 본관 경주(慶州), 자 자고(子固), 호 백운(白雲), 시호 충장(忠壯). 좌찬성에 추증되고, 동래(東萊)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배향되었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강섬(姜暹)의 천거로 훈련원부정에 특진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 ; 줄여서 첨사)로서
ㅇ 1592년 선조 25년. 음력 4월 14일(양력 5/24)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앞세워 병선 700척에 18,700(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이후 계속된 후진까지 16만 대군으로 침략했다.
ㅇ 첨사영 병사는 군적상 정원 350명이나 실제는 훨씬 적었고, 전선은 형태만 갖춘 배 9척 뿐이었다. ㅇ 부산첨사 정발은 4월 3일 아들에게 할머니와 어머니를 봉양하라고 하며, 고향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죽음을 각오했다. 부하들이 피성을 청하자, "나는 성의 鬼가 되겠다" 고 하면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ㅇ 왜적은 첨사 정발에게 다음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우리는 北京(북경)으로 통하는 하나 밖에 없는 이 길을 통과하게 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리하면 우리들은 스스로의 규율을 지켜 곡식 한 톨이라도 건드리지 않고 통과할 것이다." 명분 없는 전쟁을 도발한 데 대한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었다. 4월14일 오전에 釜山鎭城은 함락되었다.
ㅇ 뒷날 일본에 간 우리 통신사이게 일본인들은 회고했다. '흑의장군(정발)의 용전분투에 조선을 정벌하기는 쉽지 않겠구나 라는 느낌으로 크게 좌절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 6. 동래부산 송상현의 천곡결서와 戰死易 假道難 정신이란?
ㅇ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본관 여산(礪山), 자 덕구(德求), 호 천곡(泉谷)․한천(寒泉), 시호 충렬(忠烈).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거쳐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귀국 후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로 파견 되었다. 이조판서․찬성사가 추증되고, 동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ㅇ 4월15일, 왜적은 東萊城(동래성)으로 진격, 성문 앞으로 다가와 깃발을 땅 위에 꽂았다. 戰則戰 不戰則 假我道(싸우려면 싸우자,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송부사는 답했다. 戰死易 假道難(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송상현이 부친과의 하직한 시는 본래 부채에다 혈서로 썼다. 부산충렬사의 유물은 1756년(영조 32년)에 서예가 윤봉구가 새로 쓴 것이다. 부친에게 남긴 이 편지를 송부사의 호 천곡을 따서 '泉谷決書' 라고 칭한다.
孤城月暈운 외로운 성에 달빛이 흐린데 列鎭高枕 여러 진은 깊이 잠들고 있도다. 君臣義重 군신의 의는 무겁고 父子恩輕 부모의 은혜는 가볍도다.
다이라(平調益)의 피신 권유를 묵살하고 북향 4배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배꼽 밑에 콩알만한 검은 점으로 시신을 확인, 왜장은 송공죽인 일인의 목을 베었다. 고향으로 시신 운구시 일군이 길을 비켜주었다. 이 날 싸움에서 울산군수 李彦誠(이언성)은 포로로 붙잡혔고, 일본군이 조선 조정과 교섭할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지참시켜 풀어주었으나, 이언성은 두려워하여 서찰을 조정에 전하지 않았다.
▣ 7. 왜군의 선봉장 小西行長은 어떤 인물인가?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의 무장. 약종상(藥種商) 아들로 태어났다. 딸 마리아는 대마도주 소오요시토모(宗義智)의 아내다 됐다. 임진왜란(1592~93) 때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다. 화평공작에 실패하여 귀국하였다. 정유재란(1597~98) 때 재침하여 절묘한 이간책(離間策)을 구사하여 이순신 장군 장군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더니 결국 그는 순천의 예교성(曳橋城)을 쌓고 수세의 위기에 몰렸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겨우 탈출해서 돌아갔다. 귀국 후 도쿠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에 반항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참수형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앙심이 깊은 장군이었다. 2군 대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동(侍童) 출신으로 고니시와는 앙숙이었다.
▣ 8. 침략 왜군의 규모는?
ㅇ 4월 13일 선봉군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 부산포, 19,000명 ㅇ 4월 18일-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부산포 ㅇ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多大浦)를 거쳐 김해(金海)에 상륙~추풍령 등 15만 8,000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도토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水軍 등 9군으로 나눠서 들어왔고, 전투병력 약 17만명에 후방경비와 선박관리 등 비전투병력 3만,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다. (☞ 자세한 것은 진주성 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ㅇ 제1군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 ;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 양주)-용진(龍津)나루-서울 동대문. ㅇ 제2군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남대문. ㅇ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북상하였다.
▣ 9. 서울이 함락되기 까지는 어떤 전투가 있었나?
ㅇ 고니시는 4월 24일 상주(尙州) 전투에서 순변사 이일(李鎰)의 부대를 격파하고, 4월 26일, 충주 탄금대(彈琴臺 ; 550년경 가야의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어 낸 곳.)에서는 달천을 배수진(背水陣)으로 5천여 명 병력으로 10만의 왜병을 맞아 싸운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장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탄금대 강물에서 자결하였다. 신립은 그때까지 조선 제1의 장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ㅇ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부산진성이 함락된 이래 20일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ㅇ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울산의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은 도망치다 임진강변에서 김명원에게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다.
▣ 10. 전쟁초기 선조는 어떤 고난을 겼었나?
ㅇ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우중에 선조는 평양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난민들이 관청, 궁전, 대신집을 불사르고,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은 왜장 가토에게 인질로 잡혀갔다. ㅇ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
ㅇ 선조 몽진(蒙塵), 6월 22일 의주이 도착하여, 나라의 참담함과 신하들의 탓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國事蒼黃日 誰能 李郭忠/ 국사창황일 수능 이곽충 (나라는 갈팔질팡 어지러운데 뉘라서 나라건질 충신이될꼬) 去濱存大計 恢復杖 諸公/ 거빈존대계 회복장 제공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요, 회복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나니)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통곡관산월 상심압수풍 (국경이라 달아래 소리쳐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마음 상하네) 朝臣今日後 尙可更西東/ 조신금일후 상가경서동 (신하들아 오늘이 지난 뒤에도 또 다시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ㅇ 고니시는 평양성 공략에 앞서서 이덕형(李德馨)을 지명하여 회담을 제의했다. 이덕형과 고니시의 부장 겐소(玄蘇)․ 야나기가와(柳川調信)가 대동강 한복판에 띄운 배 안에서 만났지만, 결렬되었다. ㅇ 6월18일, 평양성이 고니시에게 함락되고, 선조(宣祖)는 압록강변 의주로 몽진했다. 고니시는 선조를 조롱하는 서찰을 보냈다. '일본 水軍 10만이 또한 西海로 북상하여 오는 길이니 이제 大王의 수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요?'
4. 충렬사 경내에 400년된 동백나무를 안내한 것.
▣ 11. 평양성까지 함락한 왜군은 왜 한계에 부딪쳤나?
ㅇ 겨울이 닥쳐오는데, 평양성에 입성한 왜군은 군량이 바닥을 보였다. 들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조선의 청야(淸野) 전술 때문이었다. 왜 육군은 평양성을 함락했지만, 수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연전연패하자 서해바다로 보급하고자했던 수륙병진전략(水陸竝進戰略)은 빗나가고 말았다. 육상 병참로도 의병들이 기병하여 곳곳이 막혀 여의치 못했다.
ㅇ 明 구원군 선발대 조승훈(祖承訓)의 기병 5000명을 격파하긴 했지만, 더 이상 북상이 어려워졌다. ㅇ 明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심복으로서 유격장군이란 벼슬을 달고 조선에 파견된 책사 심유경(沈惟敬)과의 휴전협상에 나섰다. ㅇ 고니시는 명군 이여송(李如松)군(4만5000명)과 朝-明 연합군의 기습을 받아 고니시 왜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남으로 도주했다.
* 1924년 일본 참모본부가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에 의하면 1592년 4월13일 부산포 상륙 당시 1만8700명이던 제1군 병력은 1593년 3월 현재 6626명으로 줄어들어 감소율 64.6%를 기록했다. 함경도 국경까지 침범했던 가토오 제2군(2만800명)도 의병봉기와 寒波(한파)로 고전하여 병력감소율이 40%에 달했다.
▣ 12.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어떠하였나?
ㅇ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조정은 선조의 도요내부론(渡遼內附論 ;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땅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갑론을박하다가 도요내부를 전제로 세자를 항전의 중심으로 삼고자 세자의 분조정을 설치했다. ㅇ 광해군을 권섭국사(權攝國事)로서 종묘사직을 받들고 군국기무의 대권집행 분조신은 대부분 선조의 도요내부를 반대한 영의정 최흥원 등 인물로 구성 분조는 쉴 새 없이 옮겼다. 민심수습과 전황에 따른 교두보 확보가 목적이었다. ㅇ 선조 26년 윤 11월 광해군이 상경할 때까지 1년 5개월간 지속되었다.
5. 석류가 익어 탐스럽다.
▣ 13. 류성용과 이순신 장군
ㅇ 이순신 장군은 1588년 윤 6월에 北邊(북변)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 한거하던 그는 이듬해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군관이 되고, 11월에 선전관을 겸했다가 12월에 정읍현감(井邑縣監 : 종6품)이 되니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ㅇ 임진왜란 1년2개월 전인 1591년 2월에 진도군수로 임명되어 부임도 하기 전에 가리포(지금의 완도읍) 첨사로 전직, 그것 역시 부임하기도 전에 같은 달 1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使)로 임명되어 좌수영(左水營, 여수)에 부임했다. 불과 13일 사이에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군절도사로 6계단을 뛴 것이다.
ㅇ 왜 이런 파격 승진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만큼 시대의 풍운이 급박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 전국의 통일정권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중국과 인도를 아우르는 「大아시아帝國 건설」이란 허황한 꿈을 꾸면서 조선에 대해 明나라를 치러 가겠으니 길을 빌려 달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전란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조정은 장재(將材)를 찾았다. ㅇ 좌의정 류성용이 이순신 장군을 강력히 천거했다. 이순신 장군은 원래 서울에서 류성용과 이웃으로 살다가 소년시절 외가인 아산으로 이주해갔다. 류성용은 이순신 장군보다 세 살 위로서 이순신 장군의 인간의 품성을 잘 알고 있었다. 류성용은 그 혜안으로 국가존망의 난세에 구국의 영웅을 발탁한 것이다.
6. 외삼문
▣ 14. 이순신 장군의 활약_임란 최초의 승리 옥포해전
ㅇ 경상우수사 원균이 1백척 전선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하자 이영남이 "구원병을 전라도에 요청해 보고 도망해도 늦지 않소" ㅇ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장군(48세) 함대는 1592년 5월4일 새벽 2시경에 여수의 左水營(좌수영)을 출발,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했다. 함대의 세력은 板屋船 24척, 狹船(협선, 5명 정도 탑승) 15척, 鮑作船(포작선, 어선) 46척으로 모두 85척이었다. 5월6일 唐浦(당포)에서 경상우수사 元均 휘하의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과 합류, 이로써 전라좌도-경상우도 연합함대의 세력은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으로 증강되었다.
ㅇ"적선을 만나거든 망동하지 말고 산처럼 정중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부하들의 경상도 원병 반대를 설득하였다. 옥포 합포 적진포 등서 42척 파괴. 5월7일, 이순신 장군 함대에 맞선 일본 함대는 30여척. ㅇ 이순신 장군 함대는 옥포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대선 13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격침시켰는데, 특히 조선수군의 당파(撞破 ; 배를 부딪쳐 파괴함. 우리배의 우수성)전술 위력을 발휘했다. 옥포해전은 임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기록한 최초의 승전이었으며, 현재 옥포조선소 자리였다.
ㅇ 옥포전투에 이은 합포(合浦 : 진해시 院浦洞)․ 적진포(赤珍浦 : 고성군 거류면 堂洞里) 전투에서도 완승했다. 이순신 장군 함대는 제1차 출전(1592년 5월4~9일)의 세 차례 전투에서 일본의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선박 7척 등 모두 44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 함대의 피해는 全無했다. 일본 水軍이 막강한 줄 알았는데 싸워 보니 별 거 아니더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 15. 이순신 장군의 2차 출전 : 사천, 당포, 당항포, 적진포
ㅇ 개전 이후 유독 해전에서만 연패 소식을 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긴급대책으로 陸戰에 참가 중이던 수군장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오 요시아키(加藤嘉明)에게 즉각 남하하여 이순신 장군 함대와 결전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ㅇ 와키사카는 경기도 龍仁에서 불과 1500명의 병력으로 전라․충청․경상 3도 연합군 5만 명을 기습공격 한번으로 붕괴시켜 기고만장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7월6일 구키와 요시아키가 군선 정비 등을 하는 동안 단독으로 김해를 떠나 출전을 감행했다. 와키사카가 거느린 함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으로 지금까지 해전에 나선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세력이었다. ㅇ 제2차 출전(1592년 5월29일~6월10일) 이순신 장군 함대는 이순신 장군 23척, 이억기 25척, 원균3척 도합 51척으로 구성. ㅇ 사천전투에서부터 거북선이 첫 출동하였다.
ㅇ 1592년 6월2일, 제2차 출동의 두 번째 싸움인 당포해전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다. 당포는 현재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이다. 적의 철환이 장군의 왼편 어깨에 상처를 입혔다. 원균은 적의 머리 베기에 급급했다. ㅇ 6월 5일 당항포(고성군 동해면) 해전에서 적선 26척, 이어 거제도의 율포해전에서 적선 7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水軍將 구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는 자신의 함대가 전멸하자 할복 자결했다한다. ㅇ 연합함대는 제2차 출동의 11일 동안 네 차례의 해전에서 일본군선 72척을 격파하였다.
7. 중문
▣ 16. 이순신 장군 제3차 출전 ; 한산대첩, 안골포 해전
ㅇ 전라우수영의 李億祺(이억기) 함대와 좌수영에서 7월4일 합류했다. 연합함대는 7월6일 역사적인 제3차 출동에 나섰다. 연합함대는 남해의 노량(露梁)에 이르러 원균(元均)의 전선 7척이 합류했다. 판옥선 56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는 출항 이틀째인 7월7일 저녁 무렵에 통영 미륵도의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 머물렀다.
ㅇ 7월 8일 아침 일찍 일본 함대가 집결한 견내량을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견내량에는 왜함선 73척 와키사카의 함대를 먼저 戰船 5~6척을 투입하여 넓은 바다로 유인하였다. ㅇ 거제도의 서남단 가배량은 임란 발발 당시 元均의 경상우수영이 소재했던 곳이다. 용초도에는 6․25 동란 때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용초도의 바로 윗섬이 閑山島(한산도)다. 한산도 앞바다가 세계 해전사에서 빛나는 한산대첩의 현장이다.
ㅇ 그들이 한산도 앞 넓은 바다에 이르자, 이순신 장군 함대는 일시에 大선회하여 鶴翼陣(학익진)을 펴면서 돌격을 감행했다. 학익진은 함대의 공격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橫列陣(횡렬진)의 한 형태다. 모든 전선이 地字(지자)․玄字(현자)․勝字(승자) 총통을 발사하여 먼저 일본군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군의 사기가 꺾여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견내량은 좁았다. 연합함대가 포위 공격을 가하자, 일본 함대는 퇴로가 막혀 참패했다.
ㅇ 한산대첩의 결과를 종합하면 연합함대는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를 지휘한 와키사카는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을 수습해 金海 방면으로 탈출했다. 와다나베(渡邊七右衛門) 등 와키사카의 副將 둘이 전사하고, 선장 중 하나는 한산도에 상륙했다가 할복자살했다. 일본 수군의 전사자는 최소한 2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었다.
ㅇ 7월10일 안골포(安骨浦 : 지금의 진해시 안골동)에 일본 함대의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등 42척이 정박 중이었다. 안골포는 포구의 진입로가 병 주둥이처럼 좁고 수심이 얕아서 판옥선 규모의 戰船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밀물 때를 이용하여 전선을 교대로 포구에 투입하여 각종 총통과 불화살 등으로 일본 함대에 집중공격을 가했다. 일본 군선은 불타고, 잔존병력은 육지로 도주했다.
▣ 17. 이순신 장군의 제4차 출전 ; 부산포 승첩, 정운 장군 전사
ㅇ 이순신 장군은 9월1일 일본 함대 450척이 집결한 부산포를 공격하여 일본 함선 130여 척을 격파했다. 녹도(鹿島) 만호 정운(鄭運)이 앞장서 돌격하다가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정운은 이순신 장군 함대의 10회 해전에 모두 참가하여 무명을 떨친 용장이었다. ㅇ 녹도는 지금의 고흥반도 끝에 있는 녹동(鹿洞)이다. 임란 발발 직후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 장군은 승산도 없이 출전부터 하고 보는 장수가 절대 아니다.
ㅇ 이순신 장군은 여러 진포(鎭浦)의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諸將들은 "倭勢(왜세)가 심히 날카로우니 경솔하게 출전하는 것은 불가하오", "임금께서 이미 西行을 했으니 배를 서쪽으로 몰아 임금을 호위해야 하오", "후퇴하여 병사를 보호하다가 정세를 보아 출전함이 타당하오." 등의 避戰論(피전론) 일색이었다. 이때 鄭運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영남도 우리 땅이요, 호남도 우리 땅인데, 넘어다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소? 급히 군사를 동원 반격하여 호남도 방어하고 영남도 구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라고 외쳤다.
8. 내삼문
9. ▣ 18. 이순신 장군 장군의 해전 승리가 갖는 전략적 의의는?
ㅇ 한산해전에 대하여, 미국인 헐버트 이 전투는 한국의 살라미스 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한 사형선고, 그가 기도하던 중국정벌의 웅도를 좌절케 하였다.
ㅇ 한산대첩을 큰 승리로 이끈 공로로 이순신 장군은 정2품으로 승진하고 초대 3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7년 전쟁기간을 통해 적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명장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은 신중하여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길 만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웠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초년도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공은 10전10승을 했다. 특히 한산해전에서는 일본의 정예함대와 싸워 완승을 거두었다.
ㅇ 그 결과 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곡창 전라도를 방어하고,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을 좌절 시켜 전쟁의 국면(局面) 전환을 달성할 수 있었다.
▣ 19. 한산도 제승당과 한산도가
ㅇ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 다음해인 1593년 7월 한산도에 제승당(制勝堂)을 짓고 3道 수군의 본영으로 삼았던 곳이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의 후임 통제사였던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1597년 7월 초토화했다. 이로써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42년 후인 英祖 15년(1739)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운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 113호 「한산도 李충무공 유적지」로 지정했다. 1975~1976년, 정부는 境域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성역화했다. 제승당 내부에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을 그린 다섯 폭의 벽화가 있다.
ㅇ 이순신 장군은 武人이면서도 깊은 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물임을 閑山島歌 하나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비가는 절대고독 속에서 잠 못 이루며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詩作은 불가능하다.
ㅇ 한산도의 밤 水國秋光暮 / 한바다 가을빛 저물었는데 驚寒雁陣高 /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憂心輾轉夜 / 가슴에 근심가득 잠못드는 밤 殘月照弓刀 / 새벽달 칼과 활을 비치는 구나
▣ 20. 거북선은 어떤 활약을 하였나?
ㅇ 거북선은 한쪽에 8~10개 양쪽에 16~20개의 노가 있다. 노 1개마다 4명의 격군, 2명씩 교대, 전진 후퇴가 눈부시게 빨랐다. 거북선으로 적의 심장부를 타격, 지휘계통에 혼란을 주어 정신을 못 차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으로 섬멸한 이순신 장군 전법의 정형(定型)이었다.
ㅇ 거북선은 한국 조선사(造船史)의 개척자인 고 김재근(金在瑾·전 서울대 조선공학과) 박사가 주장한 대로, 내부가 2층 구조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국방부 장학근(張學根) 박사는 거북선은 3층 구조라는 학설을 제시하고 있다. ‘군사(軍史)’ 51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노와 포가 한 층에 있는 2층 구조였다면 거북선은 순간의 기동력이 승패를 좌우하는 해전에서 연전연패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며 자신이 복원한 3층으로 된 내부구조도를 공개했다.(조선일보 2004.4.28)
10. 정당의 충무공 영정
▣ 21. 임진왜란 시에 조선의 함선에 대하여
ㅇ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점은 미리 준비하는 자세다. 壬亂을 앞두고 거북선 제조, 화기검열, 군사조련, 군기확립 등 대비에 철저했음은 난중일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 장군은 리더십도 탁월했지만, 화포․戰船(전선) 등 무기체계에 있어서도 이순신 장군 함대는 일본 함대를 압도했다.
ㅇ 조선 수군은 건국 이래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국왕과 조정의 주도하에, 즉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성을 갖고 발전된 것이 특징이다. 태종과 세종대에는 화기의 개발과 군선 개량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명종10년(1555) 을묘왜변(乙卯倭變)을 계기로 판옥선(板屋船)과 대형 총통이 개발되어, 이것이 임진왜란 해전의 핵심 무기체계가 되었다.
ㅇ 판옥선(板屋船)의 특징은 배의 밑면이 평탄한 평저선(平底船)이다. 평저선은 첨저선(尖底船)에 비해 물속에 잠기는 흘수(吃水)가 깊지 않고 선회반경이 작아 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이다. ㅇ 판옥선의 구조는 갑판 위에 상장(上粧) 갑판을 설치하고 그 좌우에 여장: 성가퀴(女牆)을 설치한다. 이 구조는 戰船에 승선한 전투원과 非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은 상장갑판 위에, 비전투원은 上․下 갑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공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ㅇ 판옥선의 크기는 저판(底板)의 길이가 15~21m. 승선인원은 100명 안팎이었다. 일본의 주력 군선인 안택선(安宅船 : 아타케)이나 관선(關船 : 세키부네)과 비교하면, 판옥선은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을 어렵게 하였다. 판옥선은 일본 군선에 비해 강한 구조를 가져 外板(외판)의 겹이음 구조와 목정(나무못)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군성을 압도했다.
▣ 22. 무기 화기의 비교
ㅇ 일본 수군은 해적 집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해적 집단들은 戰國시대를 지나면서 통일정권 휘하의 직속 수군, 혹은 지방 다이묘에 속한 수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壬亂에 참전한 수군 편성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일본 수군이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한계점으로 작용했다. ㅇ 왜군은 이미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 등의 전술에 숙달해 있었다. 일본은 1543년 종자도(種子島)로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조총(鳥銃)을 입수한 이래 꾸준히 개량하여 대량생산, 실전에 사용하였다.
ㅇ 임진왜란 당시 조총으로 왜군은 육상전투에서 연전연승했는데, 왜 이순신 장군 함대와의 해전에선 연전연패했을까. 조총의 명중률이 높다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선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여서 조선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가 뒤졌다.
ㅇ 조선은 1555년 을묘왜변 이후 1563년(명종 18년)까지 화포 제조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명종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등의 대형 화포를 제작, 임란 해전에서 사용되었다.
ㅇ 그런데도 임란의 초전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전선들을 불태우고 도주했나? 7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니 박홍과 원균은 싸우기기도 전에 워-포비아(war-phobia: 전쟁공포증)에 걸린 것이었다.
ㅇ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 명량해전 등에서 거둔 이순신 장군의 전공(戰功)은 사실 거북선과 판옥선(板屋船)을 제조한 조선의 선박기술과 일본보다 월등히 성능 좋은 화약을 제조할 수 있었던 화학기술에 힘입었던바 컸다고 생각된다.
ㅇ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직접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서다. 중국은 이미 10세기께 부터 화약을 사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전쟁무기로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화약 제조술을 일급비밀로 해서 고려에 알려주지 않았다.
ㅇ 최무선은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그 비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당시의 화약은 염초.유황.숯가루를 섞어 만들었는데 최무선은 화약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인 염초(焰硝.초석 또는 질산칼륨)를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고 유황과 숯가루를 섞는 비율을 연구하여 화포를 개발해 냈다. ㅇ 최무선 이래 우리나라는 화약 제조술에 관한 한 일본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무기도 다량의 화약을 이용할 수 있는 화포 위주로 발전하였다.
ㅇ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개인 화기인 조총(鳥銃)을 주무기로 하였으나 조총은 사정거리가 짧아 지상전이 아닌 해전에서는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구나 뚜껑을 덮은 거북선이나 판옥선에 대해서는 무력하기만 한 반면 조선의 중화기인 화포는 먼 거리의 일본 선박도 격침시키는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ㅇ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은 뛰어난 지도력에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결합된 소위 기술기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11.
▣ 23. 전세의 역전
ㅇ 1592년 10월, 진주목사 김시민,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7일간 공방전을 격퇴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신은 성루에 올라가 퇴각하는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ㅇ 의병장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녕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ㅇ 의병장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ㅇ 의병장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ㅇ 의병장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ㅇ 의병장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ㅇ 의병장 휴정(休靜)․유정(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와 명군의 내원, 해전의 승리, 권율장군의 행주성대첩 등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 24. 명군의 내원,
ㅇ 선조의 요청에 의하여 들어왔으나, 사실은 평양이 왜군에 함락 당하자, 자국의 영토가 위태로운 것을 깨닫고 자위책으로 파병한 것. 제1차 조승훈의 5천군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 4만 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아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1993.1.27)하고, 남하하다 고양 백제관(碧蹄館) 대패, 개성으로 퇴각하고.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여송은 평양에 돌아가 전투보다 강화에 힘을 기울이다가 명일간의 화의가 진행되자 1만 명의 군사만 남기고 요동으로 철수하였다.
12.
13. 충렬사 정당
14. 건물의 통기구멍
▣ 25. 강화 교습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ㅇ 明․日 양군은 1593년 초부터 講和(강화) 국면에 들어갔다. 양측 협상의 주역은 심유경(沈惟敬)과 고니시 유끼나가이었다. ㅇ 일본측 고니시의 강화회담 제의로 이덕형(李德馨)과 일본의 야나가와 초신(柳川調信)․겐소(玄蘇)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어 강화는 교섭단계에 들어갔다. 회담이 결렬된 이유는 명에서는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으로써 국면을 해결 지으려 했으나 도요토미의 요구는 지나쳤다.
- 명의 황녀로써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게 할 것.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할 것. - 조선의 8도 중 한강 이남의 4도를 일본에게 할양할 것, - 감합인(勘合印 : 貿易證印)을 복구하여 대명무역을 재개할 것. -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심유경은 이러한 무리한 요구가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는데, 화의는 결렬되고 이듬해 왜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3월10일 서울 철수를 허락했다. 4월 중순까지 고니시 유끼나가와 심유경은 용산에서 몇 차례 만나 강화회담을 벌였다. ㅇ 5월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강화조건을 지시하며, 남하 후퇴하면서 진주성을 재차 총공격하여 기어이 함락시키고 곧 복귀해서 남해안 연안에 축성을 지시하고 장기전에 돌입했다
ㅇ 심유경과 고니시는 각각 본국의 지휘부를 기만하고 협상을 진전시켰다. 심유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하는 것은 단지 일본 국왕으로 책봉 받는 것이라고 본국 조정에 허위 보고했다. 그러나 결국 둘의 사기극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ㅇ 1596년 9월, 明의 정사 양방형(楊方亨) 부사 심유경이 오사카성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국왕에 봉한다' 는 칙서(勅書)를 내렸다. 글을 모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만하기 위해 통역을 맡은 승려에게 허위 번역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칙서의 내용을 뒤늦게 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애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니시는 목은 달아났을 터이다. 결국 휴전협상은 깨지고, 1597년 초부터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15. ▣ 26. 제2차 진주성 전투
ㅇ 왜군은 4월 18일, 서울 퇴각을 시작하여 남하하면서 1593년 6월20~29일 사이에 소서와 가토오, 구로다(黑田長政)가 거느린 왜병 10만 명이 앞서 김시민 장군에게 패퇴한 1차 진주성싸움(1592년 10월 5일~11일)에 대한 보복으로 진주성을 재차 총공격해 왔다.
ㅇ 황진(黃進)․최경회(崔慶會)장군, 의병장 김천일․등이 역전했으나 함락되어 군사 수천과 6만의 관민이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전투였다. 민족정기의 본보기. 강화교섭중이라 명군의 원병도 없고 조선군 주력 부대도 일군의 위세에 접근하지 못했다.
ㅇ 고니시 유끼나가는 천주교 신자로 왜장군으로서는 얼마간 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측에 작전계획을 누설하며 피해를 줄이려면 진주성에서 도피하라고 권해왔다.
▣ 27. 주논개(朱論介)가 순절한 것은 어느 시점이었나?
ㅇ 1574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 출생에서 탄생했다. 부모를 어려서 여의고 가난해 장수현감 최경회 부인 심부름꾼으로 들어왔다가, 부인이 죽자 최현감의 측실이 되었다.
ㅇ 최경회는 의병 3천을 일으켜 금산 무주 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경상우병사가 되어 의병 3천으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ㅇ 논개는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스스로 기생이 되어, 2차 진주성전투 직후에 때마침 칠석날을 맞이하여 승리에 도취해 있던 왜장 毛谷村六助(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변으로 유인하여 껴안고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ㅇ 시신을 장수로 옮기던 중 왜병들의 감시로 함양까지 왔다가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뒤에 묻었다. ㅇ 중앙일보 2002.11.27자에 '해주 최씨 전남 화순군 최경진 종회장'의 사연을 보도한 바 있다. 일본의 왜적장 사당에 있는 '朱論介墓碑石(주논개묘비석)'을 한국에 반환할 수 있도록 여론 조성을 해달라는 것.
ㅇ 1970년대 초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우에스카 하쿠(上塚博男)는 후쿠오카(福岡) 소재 히코(英彦)산 기슭 자신의 땅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와 관련된 두개의 비석을 발견했다. 우에스카는 바로 게야무라의 행적 추적을 시작했고 결국 그가 임진왜란 때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에스카는 1973년 진주 남강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을 올렸다. 장수에서 돌을, 진주에서 모래를 실어 가서 보수원(寶壽院)이라는 사당을 짓고 초혼하여 논개를 왜적장의 현지처로 전락시키는 치욕의 현장이 되었다.
ㅇ 논개는 '우리들 마음속의 절개'로 자리하고 있다. 조선 말기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은 물론 근대 들어 수주 변영로. 만해 한용운 등 수많은 문사들이 시와 글을 남긴 것은 같은 맥락에서다. 하지만 정작 논개의 넋이 우리 땅 진주시 촉석루 사당에도, 장수군에 복원된 생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유명한 변영로의 시 '논개'의 1~2연이 문득 더 애절하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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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ㅇ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은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15) 식년문과(式年文科) 출신이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ㅇ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ㅇ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ㅇ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ㅇ 행주산성전투 ;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행주산성(幸州山城 ; 고양, 서울 서북 30리 한강변)에서 3만 명의 고바야카와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왜군은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물러났다. 그 전공으로 전라도순찰사에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를 거쳐서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ㅇ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ㅇ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마쳤다. 권율은 이항복의 장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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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팔사품은 충무공의 존공을 높이 산 명나라 신종이 보낸 8가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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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활약은 어떠하였나?
ㅇ 곽재우(1552~1617)는 본관 현풍(玄風). 자 계수(季綏). 호 망우당(忘憂堂). 시호 충익(忠翼). 의령(宜寧)인. ㅇ 1585년 선조 18년 과거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唐太宗敎射殿庭論'이란 제목 하에 '군주가 유약하면 나라가 위태롭다' 라는 논지를 펴서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임금이 대노하여, 합격이 취소되었다. ㅇ 의병 거병 날짜는 1592년 4월 22일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열흘도 안 된 때였다.
ㅇ 첫 전투인 기강전투에서 적의 군량운반선 30여척을 격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의령 삼가 합천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를 보호하였다. ㅇ 1592년 5월 함안군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ㅇ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경상관찰사 김수(金)와의 불화로 누명을 쓰고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狀啓)로 석방된 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조방장(助防將)․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ㅇ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고,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ㅇ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는데, 그 후 부총관(副摠管)․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다가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 장군(李舜臣)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은 일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였다. 공적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였다. 창암(蒼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전쟁 내내 거의 패한 적이 없고 의병장으로는 드물게 천수를 누렸다. ㅇ 필체가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망우집》이 있다. 일괄유물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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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통제영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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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의병장 조헌 장군
ㅇ 조헌(趙憲, 1544~1592), 본관 배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충북 옥천 안남면 도농리에 산소. ㅇ 문벌이 없어 농사를 지으며 공부하여 급제하였다. 타협을 모르며 직언을 서슴지 않아 쫓겨났다. ㅇ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ㅇ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ㅇ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東還封事)》 등이 있다. ㅇ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여러 관직을 거쳐서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ㅇ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ㅇ 1589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도끼 상소를 올렸으나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여 길주에 귀양을 갔다.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선견지명이 있다하여 석방되었다.
ㅇ 왜란이 일어나자 16,000여병의 의병을 모집,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8월 1일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잔여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감사 권율에게 사람을 보내 8월 18일 함께 공격하자고 약속했다. 권율이 사정이 있어 금산공격을 늦추자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것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조헌은 모르고 있었다. 금산전투에서 전멸하여 영규대사와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 31.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장군
ㅇ 지모와 용력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ㅇ 담양에서 의병을 모아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편입. 고성~창원 사이 수비를 맡았다. 전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소수정예주의를 채택하여 군율을 엄하게 하려다 체포되었으나 공을 생각해서 사면되었다. ㅇ 1596년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 발생하자 이몽학의 토벌에 나섰던 그가 오히려 관련이 있다고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ㅇ 사후에 삼형제를 모신 三烈祠가 섰다. 광주시 북구 금곡동 忠壯祠(1975년)에 모셔졌다. 우리는 왜 억울하게 죽인 후에 법석을 떨 줄은 알아도 산 인재를 아낄 줄을 모를까. * 이몽학은 전주 이씨 서얼 후예. 사복시의 겸사복 한현의 모속관(募粟官)이 되면서 한현을 왕으로 하는 역성혁명을 꾀하였다. 홍주성에서 잠든 사이에 심복에게 목이 베어졌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川)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없어 하노라. (김덕령)
▣ 32. 의병장 김천일 장군
ㅇ 임진왜란 의병중에 김천일의 활동무대는 교과서에 나주라고 되어 있는데, 시험문제에 수원 의병장이라고 나와 있는데?
-김천일은 임란시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주로 활동은 경기도 지역에서 펼쳤고 최후는 진주성에서 맞이하였다. 즉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은 평양으로 몽진한 선조를 따라 북상하여 수원, 인천을 거쳐 강화에서 상당한 기간을 주둔하였다.
ㅇ 김천일의 군사가 수원에 이르러 독산고성에 웅거하면서 왜적에게 붙은 배신자들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에 왜적의 수중에서 다시 돌아와 따르는 경기지역의 백성들이 많았다. 김천일은 6월 1일부터 7월 1일간 약 한 달간 수원에 머물다 인천지역으로 이동하였다. ㅇ 최후에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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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승려 의병장 서산대사 휴정
ㅇ 휴정(休靜, 1520~1604.1.23)은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아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ㅇ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낙방하자 지리산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었다. 1552년(명종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ㅇ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ㅇ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제자 사명당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ㅇ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儒佛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ㅇ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삼가귀감(三家龜鑑)》등이 잇다.
▣ 34. 승려 의병장 사명당 유정
ㅇ 사명대사(惟政,1544~1610)은 속성 임(任). 본관 풍천(川). 자 이환(離幻). 호 사명당(泗溟堂, 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鍾峯). 시호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법명은 유정, 경남 밀양(密陽) 출생. ㅇ 어려서 조부 밑에서 공부를 하고 1556년(명종 11)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우다가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의 신묵(信黙)을 찾아 승려가 되었다.
ㅇ 18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선과(禪科)에 급제했다. 조선조에 들어 중종 때 한동안 과거에 선과가 제외됐으나 명종 때 섭정한 문정왕후가 보우대사(普雨大師)를 중용하면서 승과(僧科)를 다시 부활시켜 서산과 사명대사 등 큰 인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ㅇ 1575년(선조 8)에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청허(淸虛)휴정(休靜:西山大師)의 제자가 돼서 법을 이어받았다. ㅇ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무죄 석방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승병을 모집, 휴정의 휘하로 들어갔다. 첫째 개가는 평양성 탈환이다. 둘째는 수락산 대첩에서의 승리다. 이어 도주하는 왜군을 뒤쫓아 호남과 영남 일대에서도 권율 장군의 관군과 합쳐 큰 전과를 올렸다.
ㅇ 이듬해 승군도총섭(僧軍都摠攝)이 되어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 평양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權慄)과 의령(宜寧)에서 왜군을 격파, 전공을 세우고 당상관(堂上官)의 위계를 받았다. ㅇ 조정의 명을 받아 수차례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왜장 가토와 직접 담판으로 강화교섭에 임했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의논,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3차례 방문, 화의 담판을 하면서 적정을 살폈다.
ㅇ 인질로 잡혀간 두 왕자의 신병 반환에도 성공했다. ㅇ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의 도산(島山)과 순천(順天) 예교(曳橋)에서 전공을 세우고, 1602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使)가 되었다.
ㅇ 1604년 국왕의 친서를 휴대하고, 절충장군(折衝將軍) 손문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를 만나 네 차례에 걸쳐 사명대사와 회견한 후 화평 제의에 따라 사명대사는 도쿠가와의 서약을 받아내고, 임란시 중종의 묘 정릉과 성종비의 묘 선릉에서 도굴한 범릉지적(犯陵之賊)의 반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ㅇ 사명대사가 이룩한 이같은 대일 강화 외교는 이후 1607년 여우길(呂佑吉)을 정사로 하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 兼 刷還使, 朝鮮通信使)를 시작으로 1811년까지 약 200년간 무려 12차례 선린우호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ㅇ 선조가 죽은 뒤,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초서를 잘 썼으며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 등이 있다. ㅇ 사명대사의 생가지인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땀 흘리는 사명대사 표충비가 유명하다.
ㅇ 사명대사 1742년(영조 18년) 송운대사의 5세 법손 남붕(南鵬) 스님이 경북 경산에서 캐낸 돌로 세운 것으로 높이 2.76m, 폭 97㎝, 두께 70㎝의 흑랍석(黑臘石)으로 돼 있다. 용머리 대좌까지 전체 높이는 3.9m다. ㅇ 특이한 것은 큰 경사나 난리가 있을 때마다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더욱 신기하게도 비석의 땀이 사람 몸에서 나는 땀과 같이 짠맛이라는 점이다. 과학자들도 이 비석의 땀을 분석하고 과학적인 해명을 못하고 신비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ㅇ 밀양 단장면에는 사명대사를 받드는 표충사가 있다. 조선조엔 유교 숭상이 극에 달해서 승려 신분을 천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나라와 백성을 구한 사명대사를 유생 서원에 모시고 해마다 춘추로 제향을 올리는 극히 예외적인 곳이다. 이와 같은 예외는 해남 대흥사(大興祠), 묘향산 수충사(酬忠祠) 두 곳이 더 있다. 1871년(고종 8년)에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철폐령에도, 표충서원만은 온전했다. 표충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사찰 안에 유림서원이 공존하는 유일한 곳이 됐다.
ㅇ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밀양 영남루 일원에도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동상을 건립하도록 명해 동상의 높이는 약 2.5m고 받침구조물의 높이가 3~4m다. 한글 종서로 유정 사명대사 상이라고 쓴 동판은 박대통령의 친필이다.
ㅇ 사명대사는 1610년 8월16일 67세를 일기로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入寂)했다.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ㅇ 오늘날의 홍제암은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하사금으로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명대사의 영정과 자통홍제존자 석장비는 생애 전반에 관한 사항을 허균이 기록한 것이다. 일제 때 이 비석과 영정은 호된 시련을 겪었다. 영정은 일본 경찰에 의해 탈취돼 여러 군데 예리한 칼날로 찢겨졌고, 비석은 파괴되었다.
ㅇ 특히 왜장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 들어가 열띤 토론을 했던 사실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기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묻기를 "당신 나라의 보물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자 대사는 "우리나라의 보물은 일본에 있다"고 답했다. 다시 기요마사가 "그것이 무엇이냐?" 고 묻자 대사는 "바로 네 놈의 목이다"고 했다. 이에 기요마사는 크게 놀랐다고 기록돼 있다. 이 석장비는 1943년에 일제 경찰에 의해 네 쪽으로 파괴된 것을 다시 곱게 땜질로 복원했고 진영도 손질하여 복원 됐다.
ㅇ 밀양의 표충사당을 해인사 홍제암으로 옮기려고 두 차례 소동이 있었다. 제1차 분쟁은 1739년 3월 해인사의 승려들이 나서서 위해 비변사에 상소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조정은 표충사는 밀양에 그대로 두기로 하고 해인사 홍제당을 훼찰해 버렸다. 두 번째 분쟁은 1783년(정조 7년) 통도사의 승려 의성(義成) 등이 30여 명의 중을 이끌고 밀양 표충사를 강제로 점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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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반환되어 왔는데 무슨 비인가?
ㅇ 북관대첩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1565~1624)가 이끌었던 함경도지역 의병들의 왜군 격퇴하여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북 길주군 임명 지역에 세웠던 전공비이다. 높이 187㎝, 폭 66㎝, 두께 13㎝. 1500여자의 글자가 새겨졌고 함경도 의병이 왜군을 무찌른 사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ㅇ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제2예비사단의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여단장이 일본으로 강탈해 가서 야스쿠니신사 (靖國神社)신사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1978년 재일사학자 최서면(崔書勉) 국제 한국연구원장에 의해 확인했다. ㅇ 반환은 북관대첩비 반환추진위원회(위원장 이승호․李承虎 한일문화재교류위원회 집행위원장)라는 민간단체의 2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결실을 보았다. 1999년 7월 20일 부산항에 도착, 94년 만에 돌아왔으며, 북관대첩비는 원래 위치했던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국립박물관에 있는 것은 실물과 같은 모조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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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李舜臣은 왜 백의종군을 하는 수난을 당했나?
ㅇ 이중간첩 요시라가 고니시 유끼나가의 명을 받고,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공작하여, 가토오 기요마사가 일본에서 건너오는 정보를 전했다. '가토오 기요마사의 배를 공격하라'는 조정 명령을 권율이 몸소 찾아가서 전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해전상식으로 미루어 출동하지 않았다. 밀고한 날짜에 가등이 도착하자 후배인 이순신 장군의 지위를 불쾌히 여기다 충청병사로 옮겨진 원균을 동정하던 조신들이 이순신 장군을 탄핵하였다.(欺罔朝廷 縱賊不討 :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
ㅇ 1597년 초, 이순신 장군을 붙들어 국문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았다. 이순신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것은 2월25일 전후로 추정된다. 1차 문초에서 고문까지 받으며 28일간 옥생활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ㅇ 선조는 영의정 류성용(柳成龍)을 중심으로 한 남인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선조의 속뜻을 받들어 서인 영수 윤근수(尹根壽) 등은 이순신 장군의 처형을 주장했다. ㅇ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상소(신구차 伸救箚, 상소문)로 플려났으나, 정유년 4월 1일에 풀려나 白衣從軍하게 되었다. 南下하던 중 4월 11일 모친상을 당했지만, 상례도 치르지 못했다.
ㅇ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과 맞서야 하는 전선뿐만 아니라 선조 임금의 집요한 의심의 시선이란 또 다른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죽음’으로 두 전선을 동시에 돌파했다. 그의 몸에 박힌 왜적의 유탄은 차라리 시시각각 조여 드는 임금의 음험한 의심과 그에 덧붙여진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결국 마지막 전장에서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스스로 택함으로써 이순신 장군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죽이면 왜적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없었기에 임금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살려준 것은 왜적이었다. “임금이 보낸 면사첩을 받았다…‘면사(免死)’ 두 글자뿐이었다…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30. ▣ 37. 정유재란의 발발과 원균의 최후는 어떠하였나?
ㅇ 1593년 8월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이진하였고, 9월 3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0월에 선조가 환도하였고, 1594년 2월에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1596년 9월 4년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사람이 코 한 되씩, 10년 뒤면 성공할 것" 이라며 1597년 1월 15일, 정유재란 일어났다.
ㅇ 1596년 12월에 고니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이듬해 1월에는 가토군이 다대포(多大浦)에 상륙하여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서생포(西生浦)에 진을 쳤다. 정유재란 때의 왜군 총병력은 14만으로, 수군도 강화되었다.
ㅇ 이때에는 조선도 경상도의 금오(金烏)․공산(公山)․화왕산성(火旺山城)을 비롯하여 각도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를 갖추었고, 양호(楊鎬)를 경리,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한 명의 원군 5만 5000명도 즉시 출동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
ㅇ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소사평에서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ㅇ 2월 이순신 장군이 하옥되었고, 원균(元均)이 그 후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권율 도원수로부터 "지난날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잡으러 나가지 않는다고 모략하더니, 자기는 왜 출전하지 않느냐" 고 질책을 당한 후 출전하였으나 패전하여 전사하였다. 7월의 거제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원균과 전라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의 수군이 전멸하였다.
ㅇ "소수의 수군 함대가 가덕도에만 진출해도 가토오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며 이순신 장군을 모략했던 元均이 후임 통제사가 되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된 후 원균의 생각은 달라졌다. 원균은 갑자기 수륙병진론(水陸竝進論)을 들먹이면서 조정과 도원수 권율에게 안골포의 적을 육상에서 먼저 공격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원균에게 적의 집결지인 부산포 공격을 재촉했다. 원균은 6월18일 이후 안골포와 가덕도 해역 등에서 몇 차례 소규모 해전을 벌여 사소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그의 함대도 적지 않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조선의 열세함대가 물길이 험한 낙동강 하구의 해로를 횡단하여 부산포를 직격한다는 것은 거의 무모했다. 그러나 선조는 수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ㅇ 칠천량 해전 직전에 도원수 권율이 출전을 머뭇거리는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치면서까지 부산포 공격을 재촉했다. ㅇ 7월14일, 원균은 이순신 장군이 육성해 놓은 全함대 180여 척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일본 함대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었다. 부산 앞바다의 물마루(水宗)까지 추격했지만, 거센 풍랑을 만나 일부 함선이 흩어졌던 것이었다. 원균 함대는 회항 중 식수를 구하러 가덕도에 상륙했다가 일본의 복병에게 걸려들어 일시에 400여 명이 살해되고 식수도 얻지 못했다. 지친 원균 함대는 7월 16일에 이르러 칠천량에 매복 중이던 일본 함대의 포위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원균은 도주하여 고성 추원포에 상륙했으나, 매복 중인 왜병의 칼을 받고 죽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지휘부도 거의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 10여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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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명량해전으로 이순신 장군이 다시 재기하였다는데?
ㅇ 이순신 장군 우여곡절 끝에 1597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再임명의 교서를 받았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3道 수군이 궤멸한 이후 한산도 本營(본영)이 불타고 남해의 제해권도 일본군이 장악했던 만큼 이순신 장군에게는 정처(定處)가 없었다. 그 무렵은 그가 머무는 곳이 바로 통제사의 행영(行營)인 것이었다. 그에겐 전선도 부대도 없었다.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순천부사 우치적 등이 합류했다. 장병들을 취합해서 그 수가 60명에서 120명으로 늘어났는데, 대부분 자원병이었다.
ㅇ 8월 19일에는 회령포(전남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0여 척의 군선을 인수했다. 전선을 인계한 배설은 9월 2일 밤, 이순신 장군의 앞날에 전혀 희망이 없다고 보고 도주했다. 그는 종전 후 고향 선산에서 체포되어 참형을 당한다.
ㅇ 이때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海戰을 포기하고 陸戰을 도와도 좋다는 왕명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상주했다. "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戰船이 있습니다" 그는 신념의 인간이었다. 각처에 흩어져 있던 水軍 장병들이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속속 모여들었다. 특기해야 할 것은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 휘하 세력으로 참전했거나 전장 해역에서 함대를 도운 피란민 세력의 존재다. 특히 피란민 선단은 군량을 지원하면서 명량해전 때 배후의 함대세력으로 위장하는 역할을 했다.
ㅇ ‘12척 신화’ 이순신 장군 명량해전 뒤엔 사대부들 배 1000척 응원 있었다. 피란을 포기하고 수군에게 식량과 옷 등을 조달해준 사대부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당초 조선수군의 패배를 예감하고 인근 외딴 섬으로 피란을 가기 위해 배를 띄운 사대부들은 이순신 장군의 수하에서 일했던 사호(沙湖) 오익창(吳益昌·1557∼1635, 『사호집』은 영조 49년(1773)에 간행된 2권짜리 문집이 있다)의 다음과 같은 설득에 마음을 바꾼다.
“통제사(이순신 장군)가 패하게 되면 우리의 울타리가 철거될 것이니, 비록 외딴 섬에서 저마다 보전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 합세해 통제사를 위해 성원(聲援)한다면 온전히 살길이 있을 것이니, 가령 모두 죽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게 될 것이오.”
오익창은 피란을 가려는 사대부들을 설득하는 글을 지어 여러 선박에 돌렸고, 이에 감화받은 사대부들은 1000여 척의 배가 둘러리로 서서 소리를 질러 전함 13척과 군사들의 사기를 도왔다. (중앙일보, 2012.09.19. 참모 오익창이 쓴 산문집 공개)
ㅇ 우수영(지금의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해남의 서쪽 끝 화원반도에서 진도로 가는 길목) 아래가 울돌목, 한문으론 鳴梁이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서해로 진출하려는 일본 함대를 저지했다. 이것이 칠천량 패전 후 꼭 2개월 만인 1597년 9월16일에 전개된 명량해전이다.
ㅇ 이곳은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울돌목」이라 이름하였고, 더구나 수심이 얕아 항해하기 어려운 협수로다. 협수로 곳곳에서 물이 동심원을 그리며 소용돌이를 친다. ㅇ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 장군이 확보한 세력은 전선 13척과 초탐선 32척이 전부였다. 이순신 장군 함대가 벽파진(진도군 군내면 벽파리)에 머물고 있다가 이순신 장군은 명량 협수로를 등지고 싸울 수 없다고 판단, 진영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겼다.
ㅇ 9월16일, 이른 아침에 일본 함선 300여 척이 명량 협수로로 접근했다. 이순신 장군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는 말로 휘하를 격려했다. 일본 함대 지휘부는 대형 군선인 安宅船이 협수로를 통과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형 군선인 관선(關船)만 133척으로 진용을 짜고 협수로를 통과, 이순신 장군 함대를 향해 진격했다.
ㅇ 전단은 오전 11시경에 열렸다. 일본의 관선 여러 척이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여러 겹으로 포위 공 격했다. 대장선만 각종 포와 화살을 난사하며 응전했고, 휘하의 전선들은 일본 수군의 척수와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났다. 이순신 장군은 몸소 최선봉에 나서 일본 함대에 포위당한 채 상당 시간 홀로 버텼다. 대장선이 위험해지자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다가왔다. 이순신 장군은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안위의 판옥선이 황급하게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해 갔다. 중군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도 가까이 다가왔다. 이순신 장군은 김응함을 불러 이렇게 독전했다. "네가 중군으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하지 아니한 죄, 마땅히 참형에 처할 것이나 전세가 급하니 공을 세울 것을 기다린다"
ㅇ 안위와 김응함의 군선이 좌충우돌하자 나머지 전선 10척도 돌진하여 본격적인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함선은 수적으로 10배여서 먼저 돌격한 안위의 전선이 적선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돌연, 고조(高潮)에서 잠시 멈추었던 조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이순신 장군 함대에게 유리한 흐름인 남동류였다. 대장선을 비롯한 모든 전선이 집중공격을 펼쳐 안위의 전선을 구출하면서 잠깐 사이에 일본군선 31척을 격파했다.
ㅇ 이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은 유명한 해적 출신 장수로서 선봉에 섰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사살하고 그 시체를 바다에서 갈고리로 낚아 올려 토막토막 자르게 했다. 이에 일본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ㅇ 이순신 장군 함대의 강력한 반격으로 31척의 군선을 상실한 일본 함대는 일단 해전을 중지하고 퇴각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16일 일기 끝부분에 「此實天幸」(이것은 실로 천행이다)이라고 썼다. ㅇ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13척(처음 12척 남았으나 그 사이 한척을 더 보강한듯하다)이 왜선 133척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재기하였다. 왜적은 그 보복으로 이순신 장군의 아산집을 불사르고, 아들 면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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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진도 고군면 내동리에는 ‘왜덕산(倭德山)’에 얽힌 사연은?
ㅇ 여기에는 1597년 9월 16일 벌어졌던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水軍)의 묘(墓) 100여 기(基)가 있다(향토사학자 박주언(61)씨 발굴) 바닷물에 떠내려 온 왜군들의 시체를 이 동네 사람들이 거두어 묻어주었다고 해서 산 이름을 ‘왜덕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군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의미이다. 2006년 8월 15일에는 이곳에 묻힌 일본 수군의 후손들 20여명이 진도를 방문하여 왜덕산을 참배하면서 내동리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ㅇ 여기에 묻힌 일본 수군들은 대부분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고 한다. 참배단을 이끌고 온 무라세 마키오(村瀨牧男)씨에게 물어보니까 명량해전에서 선발대에 배치되었던 일본 수군은 ‘구루시마 수군’(來島水軍)이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원래 일본 내륙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장악하고 있었던 해적집단(海賊集團)이었다. 당시 세토나이카이를 통과하는 일본의 모든 상선들은 이들에게 무조건 10%의 통행료를 바쳐야 했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면서 약탈을 감행했던 왜구(倭寇)들의 본거지가 바로 여기에 있었고, 구루시마(來島)라는 섬이 바로 그 핵심 근거지였다.
ㅇ 에히메(愛媛)현 이마바리(今治)시에 속해 있는 구루시마는 조그만 섬이지만, 천혜의 요새였다고 한다. 진도의 ‘울돌목’처럼 구루시마와 육지 사이로는 시속 11노트(20km)의 급조류(急潮流)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배들이 쉽게 공격할 수 없어서 난공불락이었다. 여기에 구루시마 수군의 본거지인 ‘해성(海城)’이 구축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최전선에서 맞붙은 팀이 바로 이 구루시마 수군들이었다.
ㅇ 그 대장은 당시 36세였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였고,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그보다 5년 전에 당항포(唐項浦)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장군에게 죽은 친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출전했지만, 동생 역시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죽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일보,2006.08.18,조용헌 살롱)
[나머지 얘기는 '통영세병관'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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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진왜란 공부를 좀 하는 계기가 됐지요.
공부는 차츰 하겠고 사진 고맙습니다.
학정 정말 우리 보배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