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에 준공된 안동댐.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면 민속박물관과 문화재단지, 각종 볼거리와 쉼터, 조각공원이 있다. 안개등 저온 현상으로 인한 농작물의 피해등 여러말들이 많지만 도심속에 이러한 공간이 있다는게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퍽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른쪽 다리를 건너지 않고 똑바로 올라가면 동악골이 나오는데 이 지역에선 오래전부터 매운탕으로 이름난 곳이다. 새로운 매운탕 집들이 속속 들어서고 팜스테이,찜질방에 얼마전 부터 모텔까지 들어서고 있다. 좀더 올라가면 이렇게 남의 집안 일이지만
제사가 몇군데 있기도 하다. 안동댐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 집안만이 아는 정말 한적한 산골이었을 것이다.
동악골 끝 집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데 집사람이나 날 아는 사람들은 한번씩 다 들 다녀간 집이다. 실력도 마이 늘어서 우리 입맛에 완전히 맞춰졌다. 아니 우리가 완전히 맞춰졌다.
이집 마당에 서서 과수원의 사과꽃을 감상하기도 하다가
사슴도 보고 장닭이 울고 강아지도 뛰노는 그런 구경을 할수 있는 곳이다. 사슴의 눈처럼 이집은 큰 기교 부리지 않고 평범하게 먹고 갈수 있는 그런 집이다.
돌솥밥 포함 일인분 철천원의 메기 매운탕. 정말이지 큰 기교 부리지 않지만 조미료맛이 덜나는 수수한 그런 맛을 느낄수 있다.
땀 약간나게 먹고 동악골 넘으면 도산서원 방향으로 접어드는데 커브머리 돌때마다 잠깐씩 보이는 안동호. 제천,단양의 암벽으로 둘러쳐진 청풍호와는 다르게 소박한 맛이 풍긴다.
예안의 백로 서식지. 자연환경이 30년만에 돌아 왔다는 이야기인지. 수입어종인 블루길,베스가 안동호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고 난리가 난적이 있는데 이젠 쏘가리가 더 많이 잡힌단다. 블루길,베스의 먹이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그들도 자연스레 감소하여 균형을 이룬다는 소리다. 수달이 그 꼭지에 자리한다는데...자연치유다. 여기서 돌아가야한다. 더 들어가면 하룻만에 못 돌아 나올만큼 안동 문화권의 핵이 이 고을을 따라 다 들어앉아 있다.
법흥동 7층전탑. 국보제 16호의 모습인데 1916년에 벌어진 일제의 복원공사로 기단부가 시멘트 땜방으로 되어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법이었다는데 이제와서 누굴 탓할수 있겠는가. 답답하게 중앙선 철로 방음벽까지 보인다. 자주 앞길을 지나가지만 들어와서 보기는 십년이 넘었는데 저 철길이 우리 민족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나라 단일가문 최대의 독립운동가 집안 마당을 가로지른 철로이며 국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가는 철로이기도 하다.
전탑은 고성이씨 탑동종택과 부근 임청각이 같이 붙어 있다. 이렇게 유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문화재를 한꺼번에 만날수 있는 곳이 쉽지 않다고 한다.
옛날 이 지역에는 집을 잘짓는 목수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손 솜씨가 매우 좋은 도깨비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지역의 집들은 솜씨 좋은 목수가 다 지엇기 때문에 도깨비는 매우 심술이 났다고 한다.
자기도 충분히 솜씨 좋은 손으로 훌륭한 집을 지을수 있는데 말이다. 어느날 목수를 찾아간 도깨비는
"목수 당신은 임청각을 짓고 나는 탑을 짓는데 달이 뜰때 시작하여 새벽닭이 울때 까지 누가 빨리 짓는지 시합을 합시다. 지는 사람이 이 땅을 떠납시다." 라고 했단다.
목수는 임청각 아흔아홉칸 집을 완성하고 쉬고 있었는데 도깨비는 날이 밝아와도 마지막 벽돌 한장을 올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결국 시합에서 진 도깨비는 안동땅을 떠났다고 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전탑과 1685년에 건립된 임청각의 건립시기는 서로가 맞지 않으나 인간과 도깨비, 유교와 불교라는 서로 대립되는 상징성을 놓고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기와가 군데군데 얹혀져 목조탑의 분위기를 살리고...감실은 나무판자로 막혀 있는데 아직도 그대로인것은 쉽게 손대지 않으려는 좋은 뜻이려니 생각한다. 기차가 붙어서 달리며 쿵쾅거리기를 수십년. 허물러지지 않음은 얼마나 장한 일인가?
왕산 허위, 우당 이회영 가문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대 항일 명문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기도한 임청각은 독립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세번이나 판것을 문중에서 매번 구입 했다고 한다.
고성이씨의 종택이지만 사당에는 위패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1911년 50여명의 식솔들과 함께 만주로 독립 운동을 떠나기 전에 "나라가 없어졌는데 종묘가 무슨 소용이냐" 하시며 위패를 전부 땅에 묻고 떠났기 때문이라 한다.
3.1운동이후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독립운동 진영은 임시정부를 마련하지만 내외부적인 갈등에 직면하게 되는데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해외 독립운동가들을 망라한 총회의를 주제하는 대표로써 좌우익의 존망을 받고 있는 사람이 석주 이상룡 선생 이었다고 한다.
시대를 살아가면서 막히거나 쏠리지 않는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임청각은 초창기에 강변쪽으로 루가 하나 있어서 거기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했다는데 확인할길 없으나 지금도 그러한데 대단한 규모 였으리라 생각한다.
임청각이 법흥사터에 자리잡았다느니 유교가 불교를 밀어 냈다느니 말들이 무수히 많다. 석굴암의 석굴,익산 미륵사지의 석탑과 함께 일제가 보수한 아주 실패한 사례로 꼽히는...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홀대 받는다는 국보, 법흥동 칠층석탑. 지금은 일제를 욕하고 있을때가 아닌것 같다.
"귀신붙었다"는 안동댐 들어가는 입구의 나무. 어릴때 전국 라디오 방송에도 나온것 같은데 전설인지 사실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를 제거 할려다가 변을 당했다는데...임청각지은 사람이 홍수때 떠내려가는 나무를 심었다는 전설도 있고...제거 하는데 현상금도 붙었다고 했으며...철로에 도로까지... 내가 임청각을 짓고 전탑을 지엇다면 변고를 내리고 말고다. 하지만 요즘은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 평범한 한그루의 회나무 사실은 임청각 대문을 지키던 나무이다..... 그래도 안개낀 새벽이나 비오는 한밤중에는 조심 해야 할 것임!
♪하늘의 아들/한태주 |
출처: 빗방울때리기 원문보기 글쓴이: 빗방울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