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친구 모임 '가천문자방'

아래 글은 2020년 3월 12일 목요일 MBC라디오 '양희은 서경석의 여성시대'에 채택돼 방송으로 소개한 필자 글입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경남 사천의 작은 시골 마을이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는데 스무 살까지 내가 살 당시엔 50여 가구였으나 지금은 이촌향도로 20여 가구 살고 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줄어들어 주변 다른 학교와 통폐합돼 지금은 청소년 수련원으로 쓰이고 있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내 또래의 아이는 12명이었다. 남자가 7명, 여자가 5명이었다. 나이가 아래위로 한두 살 정도로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같은 학년에서 공부했으니 나이 한두 살은 그냥 무시하고 친구로 지냈다. 또래 친구들은 모두 나처럼 고향 시골에 머물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도시로 나가 생활하고 있다.   지금 50대 후반에 접어들어 소꿉친구들이 사는 곳을 알아보니 서울에 2명, 경기에 2명, 부산에 2명, 울산에 1명, 창원에 1명, 진주에 1명, 통영에 1명, 사천에 2명이 살고 있었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셈이다.   1년에 한 번 봄에 초등학교 총 동창모임이 있지만 모두 사는 일이 바빠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다. 형편이 되는 친구는 동창모임에 참석하고 바쁜 친구는 참석하지 않는다. 나도 동창모임에 처음 몇 번은 참석했으나 요즘은 사는 일이 바빠서 거의 참석하지 않는 편이다. 부산에서 경남 사천까지 휴일에 시간 내어 가는 것도 쉽지 않고 이상하게도 동창모임 때마다 이런저런 갖가지 일이 생겨서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한 친구가 주축이 돼 12명의 친구들 휴대 전화번호를 일일이 파악해서 단체 문자방을 개설했다. 이름은 태어나 자란 고향 가천 시골마을 지명을 따서 ‘가천문자방’이다. 가천문자방엔 남녀 친구 12명이 등록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비록 서울, 부산, 창원 등 전국적으로 떨어져 살지만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친구들은 틈틈이 가천문자방에 들어와 수시로 살아가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눈다. 어려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다 보니 나이가 들어도 허물이 없고 친근감이 든다. 모두 50대 후반의 나이이니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지만 휴대전화 프로필 사진을 보니 어딘지 모르게 코흘리개 시절의 순진했던 모습이 어렴풋이 엿보인다.  사는 여건이나 형편에 따라 가천문자방에 자주 들르는 친구가 있고 아주 가끔 들르는 친구가 있다. 어려서 학교에 다닐 때에 공부 좀 잘하고 성실했던 친구는 자주 들르는가 하면 공부 안 하고 게으름 부렸던 친구는 뜸하게 들르기도 한다. 또한 사는 일이 바빠 자주 들르지 못하는 친구도 있다.   자주 들르던 가끔 들르던 가천문자방은 우리 고향 친구 12명의 소중한 수다공간이자 해방구 역할을 톡톡히 한다. 가족 간에 있었던 이야기, 직장에서 겪었던 이야기, 정치나 경제, 사회 현상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의견 등을 마구 펼치곤 한다.   문자방에 글을 올리는 친구들 모습을 보면 그 친구의 성격이나 형편 등이 짐작된다.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친구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나 가족사 등을 글이나 사진으로 직접 띄우고, 바쁘거나 글 적는 것이 번거롭게 생각되는 친구는 남의 전화로부터 따온 글이나 사진을 띄우곤 한다. 글이든 사진이든 동영상이든 문자방에 올라오는 내용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생살이 교훈적인 이야기도 있고 정치인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이야기도 다분하다. 또한 텃밭을 가꾸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친구도 있고 음악을 듣고 너무 좋아서 친구들도 감상해 보라며 띄우는 친구도 있다. 그 밖에 꽃 사진, 동물 사진, 기이한 풍경 사진 등을 띄우고 기기묘묘한 동영상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미 본 것도 있고 새로운 것도 있다.   나는 주로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나의 의견을 달아 띄우는 편이다.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나 경제 현실에 대한 걱정, 거리의 어수선한 모습 등을 사진이나 글로 띄우면 찬성하며 동의를 표하는 친구가 있고 무심하게 넘어가는 친구도 있다. 글이나 사진은 띄우지 않고 그냥 눈팅으로만 넘기는 친구도 몇 명 있다.  그래도 문자방을 통해 12명의 고향 친구들이 살아가는 근황을 나누고 소식을 주고받으니 반갑고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다. 일찍 결혼한 친구는 벌써 손주까지 보았고 늦게 결혼한 친구는 아직 자녀교육도 다 마치지 못한 친구가 있다. 조금 있으면 은퇴할 나이다.   은퇴하면 12명의 고향 친구들이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길지 모르지만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 문자방을 통해 서로 정을 나누고 코흘리개 시절의 추억을 꾸준히 되새겼으면 좋겠다. 사는 형편이 어려우면 적극 나서기가 어렵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소중하다. 특히 고독이나 무료함과는 거리를 두는 게 무병장수에 이롭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면 가난, 질병, 외로움이 심신을 괴롭힐 것이다. 그럴수록 소꿉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희로애락을 나누면 삶은 덜 외로울 것이다. 마음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는 더없이 소중하다. 소꿉친구는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기에 부담이 적다.   친구를 위해 어떤 색다른 내용을 단체문자방에 띄울지 늘 생각하게 되니 머리가 창의적으로 발전하는 것 같다. 머리도 좀 써야 나중에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니 고향 친구를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살아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