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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부란에 묻혀버린 누란
인류역사상 최대의 대하여행기인『대당서역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곳은 바로 옛 차르첸[沮末國, Charchan]의 영토1)로 성곽은 우뚝 솟아있지만 인적은 끊어졌다. 다시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납박파의 유지에 도착하는데, 바로 누란의 땅이다
그러니까 현장법사는 “바로 누란의 땅이다.[即樓蘭地也]” 라는 짤막한 구절로 끝을 맺고 있지만, 이 말 속에는, 할 말은 많지만 줄인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현장이 왜 이런 말투로 대단원을 마감했는가 하는 의문은 곧 밝혀진다.
누란(樓蘭, Loulan)2)은 범어로는 크로라(Krora 또는 Kroraina,曷勞落迦)로 알려진 나라로 서역남, 북로의 분기점이라는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 에서 수세기 동안 번영하던 곳이기에, <사기>를 비롯한 중국 고대사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에, 현장도 이 나라에 대하여 기록할 정보가 많았겠지만, 이미 치라(Chira:策勒)조의 갈로락가성의 전설에서 아래와 같이 이미 이야기한 바 있기에, 말미에서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 잡다한 정보는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 만리장성의 끝부분과 둔황 그리고 선선 인근의 지도
▼ 서역남, 북로 개괄도
▼ 이노우에 야스시의 역사 소설 <누란>과 <둔황> 표지
▼ 로프노르 위성사진
‘누란’하면, 먼저 필자가 젊었을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일본의 유명한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의 소설『누란』3)그리고 『둔황』이 먼저 떠오른다. [그 줄거리가 각주로 돌린다.]
그 다음으로 꽃의 시인 김춘수의 시구절도 떠오른다. 그는 <고비사막의 울음소리>에서는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 현장도 들었으리.”4) 라고 읊었고 이어서 <명사산>에서는 전설적인 누란왕국을 ‘양파 꽃’으로 비유하며 그리워했다.
아, 양파 꽃 같은 나라! 누란! 누란! 누란!
그 명사산(鳴沙山) 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중략]5)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 누란
무슨 암호 같이 함축성 있는 위 구절은『대당서역기』12권의 치라(Chira:策勒:媲摩城)6)조- 이미 우리들이 지나쳐 왔지만,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의 전설과 겹쳐 읽어야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이라는 의미가 드러난다.
옛 결전장에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면 비마성에 도착한다. 전단(栴檀)나무에 새긴 입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두 길 남짓하고 영묘한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난다. (중략) 전설에 의하면 이 불상은 옛날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코삼비7)의 오타연나왕이 만든 것인데 여래가 세상을 떠나신 뒤 그곳에서 허공을 날아 이 나라 북쪽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Krora/樓蘭)8)으로 왔다고 한다. 처음 [불상이]성에 도착했을 때 (중략) 여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거나 공경하지 않았다. (중략)
후에 어떤 아라한이 와서 이 불상에 예배를 하였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이 낯선 사람에게 모래와 흙을 뿌렸지만, 한 사람만이 몰래 그 사람에게 음식을 주었다. [그랬더니] 그 아라한이 말하기를,
"내가 떠난 지 7일이 지나면 흙모래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이 성을 가득 메울 것이니,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그대에게 그 일을 알려주니 서둘러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시오."(중략)
그런데, 과연 7일째가 되던 한 밤중에 모래와 흙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성 안을 가득 메웠다. (중략)
앞에서 우리는 누란의 범어명이 크로라(Krora 또는 Kroraina)라는 것을 이미 확인한 바 있었는데, 이 구절에서 다시 누란의 한어명이 갈로락가성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원전부터 실크로드의 허브도시로 번영을 누리던 누란이 돌연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 이유를 현장은 떠도는 전설을 소개함으로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전설이란 다름 아닌, 불법을 믿지 않은 ‘괘씸죄’로 인해 엄청난 검은 모래폭풍, ‘카라부란’에 의해 모래산으로 변해버렸다는 내용이다. 또한 현장이 『대당서역기』마지막에서 “바로 누란의 옛 땅이다.” 라고 짧게 언급한 이유도 이제는 설명이 되는 것이다. 법사는 이어서 모래산으로 변해버린 누란왕국의 후일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갈로낙가성[樓蘭]은 지금은 커다란 구릉이 되어있는데 여러 나라의 왕이나 귀족들이 보물을 발굴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바로 그 근처만 가도 맹렬한 바람이 사정없이 불고 자욱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 길을 잃게 만든다.
▼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 이동도
▼ 로프노르 호수 북안에 있던, 루란왕성의 도웁지 우니성의 평면도
▼ 누란의 유지
▼ 누란의 도성 유지 원경
▼ 누란에서 출토된 목판에 쓰인 카로슈티 문자
그럼 과연 현장의 이야기처럼 불법을 믿지 아니한 일종의 ‘괘씸죄’로 인해 누란왕국이 하루아침에 모래더미로 변했을까?
그러나 현장이 이야기하는 그냥 전설일 뿐, 사서들이 전하는 누란왕국의 부침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중국 사서에 '누란'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한 문제 4년(BC 176년)『사기』「흉노열전」에 수록된 편지 중에서였다. 그것은 북방초원의 맹주인 흉노의 황제 묵돌선우[冒顿單于]9)가 보낸 것으로 흉노가 대월지를 격파하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근처의 26국을 평정하여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고 하서회랑에 수만의 군세를 두어 그 교역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한나라에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BC 141년에 한 무제가 즉위하면서 대 흉노 정책을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막북초원은 전운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서 당시 흉노족에게 쫓겨 서쪽으로 민족이동을 하던 대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장건(張騫, ?~BC 114)10)을 파견하였는데, 그 견문록에서 누란이란 이름이 나타난다. 이어서 한나라는 BC 121년에 표기장군 곽거병이 출병하여 흉노와의 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서역사군을 설치하고는 본격적으로 서역으로 진출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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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누란을 비롯한 몇몇 서역제국은 한나라의 진출을 꺼려하며 오히려 흉노와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자 이를 빌미로 하여 한 무제는 BC 109년 대군을 보내 누란을 침공해 국왕을 사로잡고 왕자 1명을 인질로 데려 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흉노가 누란을 공격하여 역시 인질을 데려오고 조공을 받아내었다. 이렇게 한과 흉노의 패권다툼은 오랜 기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서 누란은 힘겹게 줄다리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BC 77년에 누란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당시 흉노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던 국왕 안귀가 사망하자, 한나라는 그 틈을 이용하여 장안에 인질로 잡혀 있던 동생 위도기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도 선선(鄯善)으로 바꾸고 도읍도 옮기는 등 완전하게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은 전한(前漢)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당시 상황도 역시『한서』「서역전」에 자세히 나타난다.
선선국(鄯善國)은 원래 누란이라 불렀는데, 장안에서 6천리 양관에서 1천6백리 지점에 있다. 가구 수는 1,570호, 인구는 14,100명, 군인은 2,912명이다. 관리로는 선선도위(鄯善都尉)을 비롯하여….
그러나 6세기의「낙양가람기」에서는 선선이 티베트계의 토욕혼에 점령되어 있는 상황도 나타난다.
토욕혼에서 서쪽으로 3천5백리를 가서 선성성(鄯善城)에 도착하였다. 원래 자신들이 왕을 세웠으나 토욕혼(吐谷渾)에 병합되어, 지금 성의 주인은 토욕혼 국왕의 둘째 아들 영서장군(寧西將軍)으로 삼천 부락을 거느리고 서쪽 오랑캐들을 방어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이 도착했을 누란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누란의 쇠락은 토욕혼(Tuyuhun,吐谷渾)11)의 지배를 거치고 난 7세기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여 진다.
중국 측의 사서에 의존하여 누란의 역사를 구성해보자면, 이렇듯 누란왕국은 흉노와 한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힘들게 생존하다가 한나라에 귀속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근래 계속되고 있는 고고학적 발굴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뜻밖에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어서 누란의 전설화를 부추기고 있다. 그 요인의 양 날개는 이른바 ‘방황하는 호수[The Wandering Lake]라는 로프노르(Lopnor;羅布泊;蒲昌海)12)와 또 하나는 근래 발굴된 수많은 미이라에서 비롯되고 있다. “아니, 세상에 호수가 방황을 하다니…” 실크로드 마니아가 아니더라고 흥미가 땅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이런 환상적인 전설에 매료되어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와 누란왕국의 실체를 찾아 나선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딩(Sven Heding)이었다. 그는 1901년 겨울 배를 타고 타림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사막을 횡단해 로프노르에 도착하여 호수 북쪽 있던 누란의 왕성[扜泥城] 과 호수 남쪽의 다른 유적지[Miran, 伊循城]에서 다량의 유물과 카로슈티(Kharoṣṭῑ)13)문서 등을 발굴하고는 이 호수는 1천6백년을 주기로 이동을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말하자면 “사막을 방황하고 있는 호수”라는 인상적인 이름을 붙여 주었다.
이어서 영국의 오럴 스타인(Aurel Stein) 등의 발굴이 이어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과 국공내전 및 공산화 등으로 누란은 다시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1979년에 중국 CC-TV의 신실크로드 제작팀과 고고학자들이 외국인은 출입금지 된 이 지역으로 들어가 탐사를 시작하여 ‘태양고분군’이라 불리는 곳에서 <누란의 미녀>라고 널리 알려진 미라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이 미라는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에 매장된 것으로, 나이는 약40세 신장은 155㎝로 추정했는데, 놀랍게도 이들이 모두 유럽계 백인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나라 사서의 기록보다 무려 1,800년 이상 앞서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상당한 문화를 지닌 유럽계인이라는 사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 3, 800년 전의 누란의 미녀의 미라
▼ 누란의 미라들
▼ 누란의 미라가 전시되고 있는, 우룸치 신장위구르박물관
▼ 뤄창의 누란박물관
▼ 뤄창의 버스터미널스
이 미라들은 현재 우루무치의 위구르박물관 유리관 안에 진열되어 있는데, 한눈에도 중국인이나 몽골인과는 전혀 생김새가 다른 가느스름한 얼굴에 노란머리칼을 가진 인종이라는 것이다. 또한 같이 매장된 부장품들은 고대 인도, 그리스 문명의 흔적이 농후한 유물이 많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헌속의 한나라의 속국과는 전혀 다른 유럽계통의 문화를 이룩한 고대의 사막도시 누란이 사막의 모래 속에서 3,800년 동안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누란왕국은 방황하다가 사라져 버린 호숫가를 무대로 존재하다가 역시 호수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 버리고 지금도 환상적인 전설로 만 남아 있게 되었다.
아, 양파 꽃 같은 나라! 누란! 누란! 누란!
1) 현 서역남로의 체말[且末/Charchan]로, 차르첸 강 연안에 있는, 현재 광업과 목축업을 주로 하는 마을로 근처에 엣 체모의 유적지가 있다.
2) 누란은 타클라마칸 사막 속에 있던, 서역남로의 허브도시 역할을 했던 오아시스 도시로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기원전 176년 흉노의 선우가 한나라에 보낸 편지와 장건의 귀환 보고서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기원전 2세기부터 번성하였다. 기원전 115년 한나라가 하서(河西)지역과 타림분지의 왕국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77년에는 국명을 선선(鄯善)으로 바꾸어 속국으로 두면서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서역공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였고 이런 상황은 4세기 전반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프노르의 수량의 감소와 물길의 변화에 따라 신비스런 전설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옛 성터의 유적이 움직이는 호수로 유명한 로프노르 호수의 서안에 남아 있는데, 스벤 헤딘과 아우렐 스타인이 탐사를 하여 다량의 목간본 카로슈티 문서를 찾아내어서 그것들을 해독하여 누란왕국의 실체를 밝혀내었다. 이들은 헬레니즘의 문화를 이룩한, 인도 유러피언어족에 속한 민족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최근에 이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미이라들의 DNA 분석으로 확인되었다.
3)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을 잘 버무려 만들어낸 소설로써 그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로프노르 호숫가에는 누란이라는 작은 오아시스 나라가 있었다. 누란 사람들은 소금호수인 로프노르에서 소금과 물고기를 얻어 사막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팔며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들은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서 눈치껏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왕의 아들 중 하나는 흉노에, 다른 하나는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란 왕이 죽게 되자, 흉노에 인질로 갔던 왕자인 안귀가 왕위에 올랐다. 안귀는 왕위에 오른 뒤 한나라를 멀리하고 흉노와 가까운 정책을 폈다. 그러자 화가 난 한나라는 안귀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안귀의 동생 위도기를 왕위에 앉힌다. 그러나 왕이 된 위도기는 한나라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로프노르에서 멀리 떨어진 선선이라는 곳으로 옮겨야 했다.
누란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호수 로프노르를 떠나 원하지 않는 이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주하기 며칠 전, 안귀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상 대대로 뿌리내리고 살아오던 로프노르 호수가의 정든 땅을 버리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란 사람들은 부인의 시신을 로프노르 호수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묻어준 뒤 누란의 땅을 떠났다. 그렇게 누란이라는 나라는 모래 속에 묻힌 채 지상에서 사라져갔다. 누란이 없어지자, 로프노르 호수도 점점 물이 마르더니, 아예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누란과 로프노르는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버리게 되었다는 스토리이다.
4)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五千里) 사방(四方)이 돌밭이다. 월씨(月氏)가 망(亡)할 때, 바람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千年)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 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百年)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奬)도 들었으리.
5) <명사산(鳴沙山)>이란 지목의 시의 (중략부분)은 사기의 한 구절로 다음과 같다. /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 기원전(紀元前) 백이십년(百二十年). 호(胡)의 한 부족(部族)이 그 곳에 호(戶) 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구(口)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 이천 구백 이십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
6) 현 호탄(和田/Khotan)과 위탄(于田/Keriya)의 중간에 있는 치라(Chira Bazar/책륵(策勒,)으로 비정된다.
7) 현 인도 북부 유피주(州) 알라하바드의 서쪽 60km에 위치한, 갠지스강의 지류인 야므나강 북안에 있는 유적으로 코샴(Kosam)또는 코삼비(Kosāmbī)라고 부르는 곳이다. 불가세존 제세시대에는 바지국(Vajji)의 수도로써 경전에도 나타나고 있는 도시였다. 현재 대규모의 발굴조사가 진행 중에 있는데, 성내 동북에 아소카왕 석주가 서 있다.
현장은 이 나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교상미국의 둘레는 6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다. 토지가 매우 비옥하고 지리(地利)가 풍요롭다.(중략) 성안의 옛 궁에는 커다란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60여 척에 달하며 전단나무를 조각한 불상이 있는데 위에는 석개(石蓋)가 걸려 있다. 오타연나왕(鄔陀衍那王)이 만든 것으로서, 영험이 간간이 일어나고 있으며, 신령스러운 빛이 이따금 비친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군왕들이 자신의 힘을 믿고서 이 불상을 들고 가려고 하였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힘을 써도 능히 옮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불상을 그려서 공양 올리기로 하고, 모두들 이 불상 그림을 가리켜 진짜 부처님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라고 하였다. 바로 최초의 불상건조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8) 범어로는 크로라(Krora 또는 Kroraina)로, 바로 고대왕국 누란(樓蘭)을 가리킨다.
9) 선우(單于, Shanyu)는 흉노제국의 황제의 호칭으로 왕중왕(王中王) 즉 중국의 천자 또는 황제에 해당하는 흉노제국의 대군주이다. 선우 밑에 여러 명의 왕을 두었는데, 이 왕은 평화 시에는 번왕이나 제후로서 다스리고 전쟁 시에는 장군으로서 싸웠다. 한서 흉노전에 의하면 선우라는 호칭은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의 약칭으로,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광대함을 뜻한다. 이는 흉노가 강성하던 진나라, 한나라 시대 이래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천자(天子), 즉 하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역대 선우 중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사람은 묵돌선우(冒顿)로 이 시기에 남쪽으로는 중국 한나라 고조(유방)의 군대를 격파하고 항복를 받아내어 매년 왕비와 공물을 받았으며, 동쪽으로는 동호를 격파하였고, 서쪽으로는 월지국을 토벌하여, 동서에 이르는 광대한 흉노제국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흉노의 뒤를 이은 유목 부족들인 유연, 돌궐 등은 선우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카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흉노의 언어도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우'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10) 중국 사상 최초로 서역교통를 개척한 사람으로서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일리강(江) 유역에 있던 대월지(大月氏)와 동맹하고자 장안을 출발하여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혔으나 탈출하여 대완(大宛) ·강거(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야 북안으로 옮긴 대월지에 도착하였다(BC 129년경).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를 칠 의사가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귀국하던 중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BC 126년 귀국하였다.
BC 121년 오손(烏孫)으로 파견되었는데, 그 곳에서 그가 파견한 부사(副使)들이 서역 제국의 사절 ·대상(隊商)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의 여행으로 서역의 지리 ·민족 ·산물 등에 관한 지식이 중국으로 유입되어 동서간의 교역과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11) 토욕혼은 현재의 청해성을 중심으로 하던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로 285년 모용 토욕혼이 창시하였으며, 중국에서 하남국(河南國) 또는 백란(白蘭)으로 알려졌고 수도는 칭하이 호의 서쪽에 있었으며, 부사(伏俟)라고 불렸다. 티베트에서는 아시(阿柴, Azha)라고 불렸다. 한 때 서역으로 세력을 뻗히기도 했지만, 7세기 초부터는 점차 세력이 약해지며 당나라에 무릎을 꿇고 종속국이 되었다가 다시 663년 토번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
12)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타림 분지 안에 있는 마른 호수로 1950년대까지만 해도 2,000㎢ 정도의 호수였으나 수원지가 되던 타림강의 중간에 저수지가 생김으로써 물이 끊김으로서 완전히 말라 바닥이 드러나 버렸다. 1980년 C-14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약 2만 년 동안 때에 따라 크기가 변하는 호수가 이 지역에 존재했다고 한다. 현재 염분으로 덮인 '야르당'(yardang:불규칙적인 모양의 소금 둔덕들)이 널려 있다. 노르'(nor)는 '호수'를 뜻하는 몽골어 'nuur'에서 나왔다 스벤 헤딩이 이곳을 탐사하고 방황하는 호수라는 인상적인 호칭을 지어 주었다.
13) AD 500년경 이전에 인도 북서부 지방에서 쓰인 문자로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비문은 BC 251년이며 가장 나중은 AD 4, 5세기의 것이다. 이 문자는 인도 북서부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BC 5세기에 아람 문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람 문자는 자음을 나타내는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셈 문자인 반면, 카로슈티는 음절문자이며 자음과 모음이 결합한 음절을 나타내는 252개의 기호를 갖고 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초서체이며 상업적·장식적인 용도로 쓰였다.
첫댓글 신장위구르 박물관에서 미라와 유물을 조금 본 기억이 납니다.
와, 누란왕국의 전설이..
타클라마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
누란 누란 누란
어메이징~~`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 ~~
아, 누란왕국
신바로운 누란왕국
상당한 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