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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 간 문 학 이 야 기 원문보기 글쓴이: 마운틴
3.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의 생일은 깊은 가을이었다. 찬비가 남부 아이오와 주 시골에 있는 그녀의 집창을 때렸다.
그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빗줄기 사이로 미들강 언덕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며 리처드를 떠올렸다.
그는 8년 전, 그녀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이제 그를 기억하며, 그의 변함없는 친절과 흔들림 없는 처신,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선물해 준 편안한 인생을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전화가 왔었다. 그녀는 올해 67번째 생일을 맞았지만 두 아이 다 집에 올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이해했다.
언제나 그랬었다. 늘 그럴 것이고. 아이들 둘 다 한창 일할 때였다.
병원을 운영하느라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일에 휘둘리며 살았다. 마이클은 두 번째 결혼 생활에 접어들었고, 캐롤린은 첫번째 결혼 생활에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사실 프란체스카는 아이들이 올 수 없었던 것이 내심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그날을 위해 나름대로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이날 아침 윈터셋에 사는 친구들이 생일 케이크를 가지고 들렀다.
프란체스카는 커피를 만들었고, 손주 이야기에서 그 지역이야기로, 추수 감사절 이야기로, 크리스마스에 누구에게 무엇을 사줄 것인가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거실에서는 나즉하게 웃음 소리가 났고 말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편안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리처드가 죽은 후에도 이곳에 머무르는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마이클은 플로리다로 오라고 권했고 캐롤린은 뉴잉글랜드로 이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남부 아이오와의 언덕들을 바라보며 그 땅에서 살고 싶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예전 주소를 그대로 간직하며 살았고, 그러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프란체스카는 점심 때쯤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뷰익과 포드를 몰고 도로를 따라 가다가 포장된 시골길로 들어서서 윈터셋으로 향했다.
와이퍼가 움직이며 빗방울을 밀어냈다.
그들은 프란체스카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테고, 말해준다고 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이었다.
남편은 전쟁이 끝난 후 나폴리에서 이곳으로 그녀를 데려오면서 좋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될 거라고 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오와 사람들은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 하나 다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거든."
그 말은 옳았고, 지금도 그랬다.
그들이 만날 때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여자 사립 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면서 인생에 대해 의구심을 느낄 무렵이었다.
대부분의 이탈리아 청년은 죽었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아니면 전쟁 중에 몸을 완전히 망쳤거나. 대학의 미술 교수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다가 밤이면 그녀를 데리고 나폴리 뒷골목을 쏘다니던 니콜로와의 관계는 1년간 지속되었지만, 보수적인 부모가 끊임없이 반대하는 바람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녀는 검은 머리에 리본을 두르고 꿈에 매달려 살았다.
하지만 어떤 미남 선원도 그녀를 찾으러 오지 않았고, 거리에서 위층 그녀의 창문에 대고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도 없었다.
압박해 오는 현실감이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리처드는 그럴 듯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친절했고, 달콤한 미국에의 꿈을 내밀었다.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함께 카페에 앉아 있을 때면, 프란체스카는 군복 차림의 그를 찬찬히 살폈었다.
그가 중서부인답게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와 함께 아이오와로 왔다.
그의 아이들을 낳게 되었고, 추운 10월의 밤 마이클이 풋볼 경기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캐롤린을 데리고 디모인으로 댄스 파티용 드레스를 사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매년 몇 차례씩 나폴리에 사는 언니와 서신 왕래를 했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었을 때 두 차례 그곳에 갔었다.
하지만 이제 매드슨 카운티는 그녀의 집이었고,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 따위는 없었다.
한낮에 비가 멈추더니 막 저녁이 되기 전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어스름 무렵, 프란체스카는 작은 잔에 브랜디를 따르고, 리처드가 쓰던 뚜껑 달린 책상 제일 아래 서랍을 열었다.
이것은 리처드네 집안에서 3대째 대물림해온 호두나무 책상이었다.
그녀는 마닐라지 봉투를 꺼내어 천천히 쓰다듬어다. 매해 이날이면 그래왔듯이.
'워싱턴 주 시애틀, 9월 12일, 1965'라는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늘 먼저 소인을 보았다. 그것은 의식의 일부분이었다.
그리고 나서 길쭉하게 쓴 주소. '프란체스카 존슨, RR2, 아이오와 주 윈터셋'. 다음에는 봉투 왼편 상단에 아무렇게나 갈겨쓴 보낸 사람의 주소. '사서함 642, 워싱턴 주 벨링햄'. 그녀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주소들을 들여다보며 신경을 모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의 손의 움직임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녀는 22년 전 그의 손길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몸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그녀는 봉투를 열어 조심스럽게 편지 석 장과 짤막한 원고, 사진 두 장,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 권과 다른 잡지에서 오린 기사들을 꺼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는 그곳에서 그녀는 브랜디를 홀짝이며, 유리잔 너머로 타자 친 원고 위에 붙인, 직접 손으로 쓴 메모를 넘겨다보았다.
그의 전용 편지지에 쓴 편지였다.
단순한 편지지 위쪽에는 분명한 활자로 '로버트 킨케이드, 작가이자 사진 작가'라고만 씌어 있었다.
9월 10일, 1965
친애하는 프란체스카,
사진 두 장을 동봉하오. 하나는 해뜰 무렵 초원에서 찍은 당신 사진이오. 당신이 나처럼 그 사진을 마음에 들어했으면 좋겠소. 또 하나는 당신이 붙여놓은 쪽지를 떼기 전의 로즈먼 다리를 찍은 것이오.
나는 여기 앉아 잿빛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더듬고 있다오.
내 자신에게 되풀이 되풀이해서 묻소.
'아이오와의 매디슨 카운티에서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라고.
그리고 그 기억을 되살리려고 무진 애를 쓴다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여기 동봉한 'Z지역에서의 추락'이라는 가벼운 글을 적었소.
내 혼돈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말이오.
렌즈통을 내려다보면 그 끝에 당신이 있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소.
당신에 대해서 말이오.
아이오와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소.
어쨌든 털털이 트럭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온 길을 거의 기억할 수가 없다오.
몇 주일 전 나는 자기충족감을, 상당한 만족을 느꼈소.
어쩌면 심오한 행복은 아니겠지만, 약간의 외로움이 섞인 것이겠지만, 적어도 만족스럽기는 했소.
아무튼 모든 것이 변해 버렸소.
오랫동안 내가 당신을 향해, 당신이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하오.
서로 만나기 전 우리는 둘 다 상대를 몰랐지만, 분명히 우리가 함께 되리라는 확신이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도 저 가슴 밑바닥에서 쾌활하게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오.
하늘의 부름을 받아 광활한 초원을 나는 외로운 두 마리 새처럼, 그 모든 세월과 인생 동안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거요.
그 길은 정말 이상한 곳이오. 8월의 어느 날, 길을 따라가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당신이 잔디밭을 지나 내 트럭으로 다가오고 있었소. 되돌아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던 듯 싶소.
달리는 될 수가 없었던 것 같소.
어쨌든 거짓말 같은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내 안에 있는 다른 사람과 함께 거닐고 있소.
우리가 헤어지던 날, 내가 말했지요.
우리 둘에서 제3의 인물이 창조되었다고 말이오.
그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드오. 그리고 이제 그 다른 존재가 내게 접근하고 있소.
어떻게든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하오.
어디서든, 언제든. 뭐가 필요하거나 그냥 나를 보고 싶거나 하면 내게 전화해요.
난 언제든지 당신이 부르는 곳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소.
언제 여기 올 수 있는지 내게 알려줘요.
언제라도. 비행기 비용이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소.
다음 주에는 인도 남동부로 가지만 10월 하순에는 돌아올 거요.
당신을 사랑하는
로버트
추신 : 매디슨 카운티에서 찍은 사진이 잘 나왔소. 내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찾아봐요. 혹시라도 내가 잡지를 한 권 보내주길 원한다면 말만 해요.
프란체스카 존슨은 브랜디 잔을 널찍한 참나무 창틀 위에 내려놓고, 그녀가 찍힌 8x10 사이즈의 흑백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22년 전, 그 당시에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 기억하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었다.
몸에 끼는 물빠진 청바지, 샌들, 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울타리 기둥에 기대선 그녀는 아침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빗줄기 사이로 여전히 초원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울타리 기둥을 볼 수 있었다.
리처드가 죽은 후 그 땅을 임대해 주면서 그녀는 초지를 손대지 말고 계속 보존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었다. 비록 지금은 텅 비어 풀만 자라게 되었지만.
얼굴에 심각하게 주름이 지기 시작한 것이 사진에 드러났다. 그의 카메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사진 속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머리카락은 까맣고, 알맞게 부푼 몸은 따스한 느낌이었고,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얼굴이었다. 그 사진을 찍은 남자와 절실하게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
그녀는 밀려드는 추억 속에서 그의 얼굴 또한 분명히 그릴 수 있었다.
해마다 프란체스카는 마음 속으로 그 모든 이미지를 떠올렸다. 빈틈없이, 모든 것을 기억했다.
세대에서 세대로 구전되는 어느 부족의 역사처럼, 기억의 구석구석을 더듬으며 모든 것을 그려 보았다.
그는 키가 훌쩍 크고, 마른 몸은 단단했다.
그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풀잎 그 자체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은빛이 도는 회색 머리가 귀 아래까지 내려온 모습이 언제나 빗질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모진 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바다를 여행하고 돌아와 대충 손가락 빗질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갸름한 얼굴,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머리칼이 찰랑이는 이마, 그 아래로는, 다음에 촬영할 대상을 찾는 일을 멈춰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약간 파란 눈동자, 그는 프란체스카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이른 광선 속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따스한지 말했다.
또 기둥에 등을 기대보라고 요구하고 나서 넓게 원을 그리며 그녀 주위를 빙빙 돌았다.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다가 일어나서 찍고, 또 누운 채로 카메라를 그녀에게 들이대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그가 사용하는 필름의 양에 약간 놀랐지만, 그가 쏟는 관심이 크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일찌감치 트랙터를 타고 나온 이웃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이 특별한 아침, 이웃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별로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그년 셔터를 누르고, 필름을 감고, 렌즈를 바꾸고, 카메라를 바꾸고, 몇 번 더 셔터를 눌렀다.
그는 작업을 하면서 나즉하게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녀가 얼마나 예쁘게 보이는지,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프란체스카, 당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소."
때때로 그는 동작을 멈추고 그냥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몸을, 그녀의 주변을, 그녀의 마음 속을.
면 티셔츠가 딱 달라붙어서 젖꼭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프란체스카는 이상할 만치 거기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셔츠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점이 다행스러웠다.
그가 렌즈를 통해 그녀의 가슴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몸이 따스해졌다.
리처드가 곁에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옷을 입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용납하지도 않았을 테고. 사실 로버트 킨케이드를 만나기 전에는 어느 때도 이런 차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로버트는 그녀에게 등을 약간 굽히라고 요구하고 나서 속삭였다.
"그래요, 바로 그거요. 그대로 있어요."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사진을 찍은 것이 바로 그때였다.
광선이 완벽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구름이 깔린 밝음'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녀 주변을 돌면서 그는 규칙적으로 셔터를 눌러댔다.
그는 유연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 단어였다.
쉰두 살 먹은 그의 몸은 잘 빠진 근육뿐이었다.
힘들여 일하고 자신을 돌볼 줄 아는 남자들에게서만 나오는 강인하고 힘차게 움직이는 근육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태평양 전쟁에서 종군 사진 작가로 복무했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프란체스카는 그가 해군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는 해변에 오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목에 카메라 몇 대를 걸고, 한 대는 두 손으로 붙잡고 한쪽 눈으로는 렌즈를 들여다보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댔으리라.
그녀는 다시 사진을 쳐다보다가 찬찬히 살폈다.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하자니 약간의 자화자찬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좋아 보인 적은 없었지. 바로 그이 때문이었어.'
그리고 그녀는 브랜디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 사이 빗줄기가 솟아 올라 11월의 바람에 실려 다녔다.
로버트 킨케이드는 일종의 마법사였다.
그는 기이하고, 위험하다고까지 할 만한 곳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는 1965년 8월의 무덥고 건조했던 월요일, 그가 트럭에서 내려 그녀의 집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왔을 때, 즉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리처드와 아이들은 일리노이 주 박람회에 가고 없었다.
박람회에서는 수송아지 품평회가 열리고 있었고, 그 바람에 프란체스카는 그 주일을 홀로 지냈다.
남편과 아이들을 송아지들에게 빼앗긴 셈이었다.
그녀는 현관 앞의 그네에 앉아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픽업 트럭이 일으키는 먼지 바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트럭은 천천히 움직였다.
운전사가 뭔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집 앞길에 멈췄다가 그녀의 집 쪽으로 올라왔다.
아, 하나님 맙소사. 도대체 누굴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프란체스카는 맨발에 청바지와 물빠진 청색 작업복 셔츠를 밖으로 내서 입고 소매를 둘둘 말아올리고 있었다.
긴 검은 머리는, 그녀가 고국을 떠날 때 아버지가 준 거북껍질 핀으로 묶고 있었다.
트럭은 집 앞길을 올라오더니 문 근처, 집을 둘러싸고 있는 철책에서 멈춰 섰다.
프란체스카는 현관에서 내려와 서두르지 않고 잔디밭을 통해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픽업 트럭에서 로버트 킨케이드가 나왔다.
'무당의 역사'라는 그림책을 누군가 쓴다면, 그 책 속에나 등장한다면 안성맞춤일 모습의 사내였다.
그가 입은 낡은 군대 스타일의 셔츠는 땀에 젖어 등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겨드랑이 밑에서 넓고 짙은 색 원들이 얼룩져 있었다.
제일 윗단추 세 개는 풀어 헤쳐져 있어서, 그녀는 그의 목에 걸린 단순한 사슬 모양의 은목걸이 바로 밑의 단단한 가슴 근육을 볼 수 있었다.
어깨에는 오렌지색의 넓은 멜빵을 하고 있었다. 황야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하는 멜빵이었다.
킨케이드는 미소지었다.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쪽 어디엔가 있다는 지붕덮인 다리를 찾고 있는데 쉽지가 않군요.
여기 어디서 길을 잃은 듯합니다."
그는 파란색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길이 곧장 그녀에게 향하자, 그녀는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눈매, 목소리, 얼굴, 은발, 몸을 움직이는 가벼운 동작, 고풍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무엇, 사람을 끄는 신경쓰이는 무엇, 아른아른 잠에 빠지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분자 공간을 재배열하는 무엇.
세대는 굴러야만 한다. 구르고 또 구르기 위해서는 오직 한가의 것만이 필요하다.
남녀의 끌어당기는 힘, 그 힘은 무한하고도 아름답다.
이런 힘이 작용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조금도 어긋나는 법이 없이 단순하고 또렷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복잡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뿐. 프란체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그 힘을 느꼈다.
세포 속속들이 자석과도 같은 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그녀를 영원히 변하게 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자동차 한 대가 먼지를 흩날리며 달리다가 경적을 울렸다.
프란체스카는 쉐비 승용차의 차창으로 구릿빛 팔을 내민 플로이드 클라크에게 마주 손을 흔들고 다시 낯선 사람에게 몸을 돌렸다.
"굉장히 가까워요. 다리는 여기서 겨우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요."
바로 그때, 20년 동안 이곳에서 시골 무화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과 감정을 제한된 울타리 안에 감추고 산 프란체스카 존슨은 이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하신다면 제가 직접 가르쳐 드려도 좋겠는데요."
왜 그랬는지는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갑자기, 그렇게도 오랜 세월이 흐른 이 마당에, 파도가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어린 소녀 시절로 되돌아간 것일까.
그녀는 수줍어하지 않았지만, 너무 나서지도 않았다.
그녀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로버트 킨케이드가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당겼다는 점이었다.
그를 본 지 단 몇 초 사이에.
그는 그녀의 제의를 듣고 눈에 보일 정도로 약간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재빨리 감정을 수습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해주면 감사하겠다고 대답했다.
농사일을 할 때 신곤 하는 카우보이 부츠를 뒤편 계단에서 집어올려 신은 파란체스카는, 그의 트럭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킨케이드를 따라서 조수석 문이 있는 곳까지 갔다.
"부인이 타실 공간을 만들 시간을 잠깐만 주십시오. 잡동사니가 많이 널려 있어서요."
그는 거의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킨케이드가 약간 당황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된 데 대해 약간 수줍어했다.
킨케이드는 캔바스 천으로 된 가방들과 삼각 다리, 더모스 보온병, 종이 봉지들을 다시 정리했다.
픽업 뒤칸에는 낡아빠진 샘소나이트 가방과 기타 케이스가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채 빨랫줄로 스페어 타이어에 묶여 있었다.
트럭문이 활짝 열리고 그가 뛰어올랐다.
뭐라고 중얼대면서 종이컵과 바나나 껍질을 갈색 봉지에 넣고 정리를 마치자 봉지를 트럭 뒤칸에 던졌다.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아이스박스를 꺼내 그것 역시 뒤칸에 넣었다.
초록색 트럭 문짝에는 색바랜 빨간 페인트로 '킨케이드 포토그라피, 워싱턴주 벨링햄'이라고 씌어 있었다.
"됐습니다. 이제 경우 앉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는 문을 잡고 있다가 그녀가 올라타자 문을 닫고 빙 돌아 운전석으로 갔다.
그리고 동물 같은 우아하고 특이한 걸음걸이로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는 프란체스카를 쳐다보았다. 재빨리 슬쩍. 그리고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느 방향이죠?"
"오른쪽이에요."
그녀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열쇠를 돌렸고, 요란한 엔진 소리가 나면서 차차 출발했다.
도로로 나가는 작은 길을 달리기 시작하자 차가 흔들렸고, 그의 길다란 다리는 자연스럽게 페달들을 밟았다.
낡은 리바이스 청바지 아래로, 수없이 먼길을 돌아다닌 갈색 가죽 부츠가 보였다.
킨케이드는 몸을 기울여 자동차 앞쪽의 소지품을 넣는 함에 손을 뻗었다.
우연히 그의 팔뚝이 그녀의 허벅지 아래쪽을 스쳤다. 반은 앞창을 바라보고, 반은 소지품 함을 쳐다보면서 그는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로버트 킨케이드. 작가이자 사진 작가.' 그의 주소가 전화 번호와 함께 적혀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그 잡지에 대해 잘 아십니까?"
그가 말했다.
"네."
프란체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잡지사 측에서 다리들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려고 합니다.
아이오와 주의 매디슨 카운티에 흥미를 끌 만한 다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여섯 군데는 찾았는데, 나머지 한 군데는 못 찾았어요. 아마 이쪽으로 가면 나오겠지요."
"'로즈먼 다리'라고 해요."
프란체스카는 바람 소리와 자동차 바퀴 소리, 엔진 소리가 나는 중에도 들릴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이상하게 들렸다.
나폴리의 어떤 집 창에 기대서서 멀리 아래쪽으로 도시의 도로와 기차, 항구를 내려다보며 멀리 있는 애인이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십대 소녀의 목소리 같았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그의 팔 근육이 기어를 변속하면서 이완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녀 옆에는 배낭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었지만 하나는 뒤로 제껴져 있어서, 제일 윗부분이 은색이고 뒤판은 검정색인 카메라가 튀어나온 것이 눈에 띄었다. '코닥크롬 Ⅱ, 25. 노출 36'이라고 씌어진 필름 상자 끝이 카메라 뒤판에 닿아 있었다. 그 짐 뒤로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낡은 조끼가 쑤셔박혀 있었다. 한쪽 주머니 밖으로, 끝에 공이줄이 달린 얇은 줄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다리 아래에는 삼각 다리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긁힌 자국이 많았지만, '지쪼'라고 쓰인 너덜너덜한 라벨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사물함을 열었을 때 프란체스카는 공책, 지도, 펜, 빈 필름통, 잔돈, 카멜 담배 한 상자가 뒤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 모퉁이에서 우회전하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로버트 킨케이드의 옆모습을 힐끗 볼 기회를 얻었다. 햇빛에 그을린 부드러운 피부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그의 입술은 멋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프란체스카는 그를 보자마자 그의 입술이 근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었다. 코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이 함께 서부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봤던 인디언 남자들과 비슷했다.
미남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말은 그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있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세월에 약간 시달린 듯한 무엇인가가. 외모가 아니라 눈빛에 그 무언가가 있었다.
왼쪽 팔목에는 땀에 젖은 갈색 가죽줄에 달린, 복잡하게 생긴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팔목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은팔찌를 끼고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그 팔찌를 은 닦는 약으로 잘 문질러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런 하찮은 생각에 매달린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시골 구석의 사소한 일에 발목이 붙잡혀 있는 자신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로버트 킨케이드는 셔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탁탁 털더니 그녀에게 담배를 권했다. 프란체스카는 5분 새에, 두 번째로 놀라운 짓을 했다. 자기도 모르게 담배를 받아든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오래전에는 담배를 피웠지만, 리처드가 줄기차게 심한 비난을 하는 통에 담배를 끊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담뱃갑을 탁탁 털더니 한 개비를 입술에 물고 금장 지포 라이터를 켜서 그녀 쪽을 불을 내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도로를 향해 있었다.
그녀는 바람을 막기 위해 라이터 주위를 양손을 둥그렇게 싸고, 트럭이 덜컹거려서 불꽃이 흔들거리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그의 손을 잡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간은 한 순간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그의 손의 따스함과 손등에 난 작은 털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가 등을 기대자 그는 불을 자기 담배 쪽을 당겨 익숙한 솜씨로 바람을 막으며 불을 붙였다. 그러느라 운전대에서 손을 뗀 시간은 1초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농부의 아내인 프란체스카 존슨은 먼지를 일으키는 트럭의 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손짓했다.
"커브를 돌면 있어요."
빨간 칠이 벗겨진 오래된 다리가, 세월이 흐르는 새에 약간 기울어진 채로 작은 강줄기 위에 놓여 있었다.
로버트 킨케이드가 미소를 지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멋지군요. 해가 뜰 무렵에 찍으면 그만이겠어요."
그는 다리에서 백 피트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열린 배낭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조사 작업을 벌이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어 주었다.
프란체스카는 그가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더니 배낭을 왼쪽 어깨에 둘러메고 시골길을 따라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킨케이드는 수천 번도 넘게 해본 일인 듯 동작이 정확했다. 그녀는 유연한 동작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걸을 때도 머리를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러고 나서는 다리로, 또 다리 뒤편의 나무 사이로, 그는 몸을 돌려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하루에 세 번씩 고깃국물 소스와 감자, 반쯤 익힌 고기요리를 먹는 이 지방 사람들과 비교하면, 로버트 킨케이드는 과일과 견과류, 야채만 먹는 사람처럼 보였다. 단단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육체가 단단해 보였다.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엉덩이가 얼마나 작은지, 왼쪽 주머니에는 지갑이, 오른쪽 주머니에는 손수건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쨌든 그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요했다. 철책 위에 앉은 빨간 날개의 지빠귀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길가 수풀에서는 들종다리가 노래했다. 8월의 백색 태양 빛 속에서 그외에는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다리 바로 앞에서 로버트 킨케이드는 멈춰 섰다. 그는 잠시 거기 서 있다가 쭈그리고 앉아서 카메라에 눈을 갖다 댔다. 그는 길의 다른쪽으로 걸어가서 똑같은 동작을 했다. 그러더니 지붕 덮인 다리 안으로 들어가서 기둥과 바닥의 널반지를 점검했다. 그리고 옆에 난 구멍을 통해 아래 강줄기를 내려다보았다.
프란체스카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다음 차 문을 활짝 열고 부츠 신은 발을 자갈밭에 디뎠다. 그녀는 이웃 사람의 차가 지나가지 않는지 휙 둘러보고 나서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서 다리 안쪽이 시원해 보였다. 그녀는 저쪽 끝에서 그의 실루엣을 보았다. 그는 강 쪽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안에서는 비둘기떼가 둥지에서 나즉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옆쪽에 붙은 널빤지를 만지니 미지근했다. 널빤지 일부에는 '짐보 -- 데니슨. 아이오와.' '세리 + 더비' '덤벼라!' 같은 낙서가 있었다. 비둘기떼는 계속 꾸꾸거렸다.
프란체스카는 옆쪽 널빤지 두 개 사이의 틈으로 로버트 킨케이드가 사라진 강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강의 한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에 서서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는 다시 강둑으로 뛰어와서 가파른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카는 그의 부츠가 다리 바닥에 닿는 것을 느낄 때까지 물을 보고 있었다.
"정말 멋져요, 이곳은 진짜로 전망이 좋아요."
그의 목소리가 지붕 덮인 다리 안에 울려퍼졌다.
프란체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우리는 주변에 살면서도 이 오래된 다리들에 관심을 쏟아 본 적이 없어요.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죠."
킨케이드는 그녀에게 다가와 야생화와 노랑 데이지로 만든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며칠 새로 새벽에 다시 와서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그녀는 또 다시 속에서 뭔가 느꼈다. 꽃. 특별한 경우에도, 누구에게 꽃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부인의 성함도 모르는군요."
킨케이드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이름도 말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멍청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이름을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억양이 아주 조금 이상한 걸 느꼈는데요. 이탈리아 사람이신가요?"
"그래요. 오래 전에 그랬죠."
다시 초록색 트럭으로 왔다. 자갈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주 오는 차를 두 번 만났지만, 프란체스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다시 농장에 도착하는 데는 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뭔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머릿속이 정돈되지 않았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 로버트 킨케이드.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더 많이 알고 싶었다. 그녀는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여학생처럼 꽃다발을 움켜쥐고 가지런히 무릎 위에 세웠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프란체스카는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행동도, 무슨 말도 하지 않았지만 꼭 한 것처럼 느껴졌다. 길에서 나는 소리와 바람 소리 때문에 트럭의 라디오 소리는 거의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스틸 기타에 맞추어 노래가 나왔다. 그리고 5시 뉴스가 이어졌다.
킨케이드는 작은 길로 차를 돌렸다.
"리처드가 남편입니까?"
그는 아까 우편함을 봤었다.
"네."
프란체스카가 대답했다. 그녀는 약간 숨이 가빴다. 일단 입을 열자 계속 말이 나왔다.
"굉장히 덥네요. 아이스티 한 잔 하시겠어요?"
킨케이드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괜찮으시다면 저야 환영하죠."
"괜찮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프란체스카는, 혼연스럽게 들리기를 바라면서 그에게 집뒤편에 차를 세우라고 했다. 그녀로서는 리처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웃 남자가 '이봐, 딕.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지난 주에 초록색 픽업이 저기 세워져 있는 걸 봤거든. 프래니가 집에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가서 확인해 보지 않았지.'라고 말하는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깨진 시멘트 계단을 오르면 뒷문이 있었다. 그는 카메라 배낭을 맨 채 프란체스카가 들어가도록 문을 잡아주었다.
"너무 더워서 장비를 트럭에 그대로 둘 수가 없거든요."
장비를 꺼내면서 그가 말했다.
부엌에 들어서니 바깥보다는 시원했지만 여전히 더웠다. 개가 킨케이드의 부츠 근처를 킁킁거리고 다니다가 뒷문으로 나가서 앉았다. 그 사이 프란체스카는 금속 그릇에서 얼음을 꺼내고 반 갤론짜리 유리컵에 든 노랑색 차를 따랐다. 그녀는 킨케이드가 부엌 식탁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긴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양손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레몬 넣으세요?"
"네. 부탁합니다."
"설탕은요?"
"됐습니다."
유리잔 안으로 천천히 레몬 주스가 떨어졌고, 그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버트 킨케이드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프란체스카는 유리컵을 그 앞에 놓았다. 그리고 포마이카 상판이 얹어진 테이블의 맞은편에 자기 잔을 놓고, 꽃다발을 물병에 담궜다. 쓰던 젤리병에는 도널드 덕 그림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한쪽 다리로 중심을 잡고 서서 허리를 굽혀 부츠 한쪽을 벗었다. 그리고 맨발로 서서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 다른 쪽 부츠도 벗었다.
그는 아이스티를 조금 마시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165센티미터 가량의 키에 나이는 사십,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먹었을까. 얼굴은 예쁘장했고, 근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여행하는 곳마다 예쁜 여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그는 그런 육체적인 면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지성과 타고난 열정,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마음과 정신의 섬세한 부분에도 감동받을 수 있는 능력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라도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에게 끌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젊은 여자들은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점들을 가질 만큼 오래 살지 못했거나 힘들게 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프란체스카 존슨에게는 정말로 그를 끌어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지성적인 면모가 풍겼다. 그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열정이 있었다. 비록 그로서는 그 열정이 어떤 방향으로 향해 있는지, 혹은 방향이라는 게 있기나 한지, 정확히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나중에 그는 그때의 그 인상을 그녀에게 말했다. 뭐라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그날 그녀가 부츠를 벗는 모습이 가장 관능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고.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인생에 접근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분석하는 것은 전체를 망쳐 버린다. 무언가 신비로운 것들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결정한다. 조각조각을 보면 신비는 사라지고 만다.' 바로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다리를 꼬고 테이블 앞에 앉아서 얼굴에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거북껍질 핀으로 다시 묶었다. 그리고 나서 기억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 끝으로 갔다. 그녀는 재떨이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 그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놓았다.
무언의 허락을 받자 킨케이드는 카멜 담뱃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프란체스카는 담배를 한 개비 받았다. 그가 땀을 많이 흘려서 담배가 약간 축축했다. 아까와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가 금장 지포 라이터를 켜자 프란체스카는 불꽃을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그의 손을 만졌다. 그녀의 손가락에 그의 살결이 느껴지자 그녀는 뒤로 물러앉았다. 담배맛이 기가 막혔다. 그녀는 미소지었다.
"하시는 일이 정확하게 뭐지요? 그러니까 사진을 어떻게 하는 건가요?"
킨케이드는 담배를 바라보다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와 계약을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진 작가지요. 시간제로 일하지요.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잡지사에 팔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쪽에서 원하는 일거리가 있으면 저와 계약을 하기도 하고요. 예술적인 표현 능력을 발휘할 여지는 많지 않아요.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상당히 보수적인 간행물이거든요. 하지만 보수가 괜찮습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냥 괜찮고 안정적이지요. 나머지 시간에는 글을 쓰고, 내 구미에 맞는 사진을 찍어서 다른 잡지사에 보내지요. 사정이 어려울 때는 공동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굉장히 사람을 얽매게 하는 일이란 걸 알았지요.
가끔은 나 자신을 위해 시를 씁니다. 이따금씩 가벼운 픽션을 써보려고 시도하지만 거기에는 감각이 없는 것 같아요. 시애틀 북부에 사는데, 아주 가끔은 그 주변 지역을 떠돌기도 하죠. 낚싯배와 인디언 주거지역, 그리고 풍경 사진을 즐겨 찍습니다.
지오그래픽의 일로 해서 두어 달씩 다른 지역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죠. 특히 아마존이라든가 북미 사막 지역 같은 중요한 일을 맡았을 때는 그렇죠. 보통은 이렇게 임무를 맡으면 비행기로 날아가서 차를 렌트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앞으로 촬영할 만한 곳을 고르기도 해요. 슈피어리어 호수를 따라 내려왔는데 블랙힐즈를 통해 돌아갈 예정입니다. 부인은 어떠십니까?"
프란체스카는 그에게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 이런. 뭐 선생님 같지는 않아요. 비교 문학 학위를 땄지요. 내가 1946년에 여기 왔을 때, 윈터셋에서는 선생님 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내 남편이 재향 군인이라고 나를 배려해 주더군요. 그래서 교사 자격증을 따고 몇 년 동안 고등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죠. 하지만 리처드는 내가 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우리를 부양할 수 있으니 내가 일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죠. 아이 둘이 자라고 있을 때였는데도요. 그래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농부 아내로 전업했지요. 그뿐이에요."
프란체스카는 그의 잔이 거의 빈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잔에 병에 든 아이스티를 더 따랐다.
"고맙습니다. 아이오와에 사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제 진실을 말할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았다. '아주 좋아요. 조용한 생활이에요. 사람들은 다들 착하구요.' 그런 대답이 모범 답안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담배 한 대 더 피워도 될까요?"
다시 카멜 담배를 받고, 라이터가 켜지고, 다시 그의 손을 가볍게 만졌다. 햇빛이 뒷문 바닥과 개의 등에 비쳐 들었다. 개는 일어나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프란체스카는 처음으로 로버트 킨케이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좋아요. 조용한 생활이에요. 사람들은 다들 착하구요.'라고 말해야 당연하겠지요. 대부분은 정말로 그러니까요. 조용한 곳이에요. 그리고 사람들도 어떤 면으로는 착하구요. 우리 모두 서로 도와요. 만일 누군가 병이 나거나 다치면, 이웃들이 서로서로 옥수수를 따거나 밀을 추수하거나 뭐든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죠. 시내에서도 자동차 열쇠를 잠그지 않고 그대로 두고 가도 되고, 아이들이 별 걱정 없이 마음대로 뛰어놀 수도 있어요. 이곳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이 많지요. 그런 점에서는 나도 이곳 주민들을 존경해요.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말을 멈추고 담배를 한모금 빨면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로버트 킨케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 내가 꿈꾸던 생활은 아니에요."
마침내 고백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묵혀 두기만 하고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지만, 정말 하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지금 초록색 픽업 트럭을 타고 워싱턴주의 벨링햄에서 온 어떤 남자에게 그 말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생각날 때마다 노트에 메모를 해두곤 하죠. 차를 몰다가도 생각나는 걸 적곤 하는데,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적은 적이 있어요. '옛날에 꿈이 있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게 그런 꿈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저 자신도 그 말의 뜻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그걸 써먹을 작정입니다. 부인의 기분을 저도 조금을 알 것 같군요."
바로 그때 프란체스카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으로 따스하고 깊은 미소였다. 그러자 도박사 같은 본능이 일어났다.
"여기서 저녁 식사를 하실래요? 가족들이 집에 없어서 별로 차릴 건 없지만 뭘 좀 만들 수는 있는데요."
"글쎄요. 식료품 가게와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에는 정말 진절머리가 나긴 합니다. 정말로 그렇지요. 큰 폐가 아니라면 그러고 싶습니다."
"포크찹을 좋아하세요? 밭에서 야채를 따가지고 포크찹을 만들 수 있는데요."
"저는 야채만으로 충분합니다. 고기는 먹지 않거든요. 그런 지 오래 됐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는데, 그냥 그런 식으로 먹는 게 기분이 더 좋아서요."
프란체스카가 다시 미소지었다.
"이 부근에서는 그런 관점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지요. 리처드와 그의 친구들은 선생님이 자기들의 생계를 막으려 한다고 말할 걸요. 저도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아요. 하지만 가족들에게 고기를 넣지 않는 저녁 식사를 차려줄 때면 불평이 터져나오죠. 그래서 아예 그런 노력은 포기했어요. 기분 전환을 위해서 좀 색다른 일을 하면 재미있을 거예요."
"좋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너무 힘든 일은 하지 마십쇼. 저 아이스박스 안에 필름이 들어 있습니다. 녹은 얼음 물을 버리고 안에 든 물건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킨케이드는 일어나서 남은 아이스티를 쭉 마셨다.
프란체스카는 그가 부엌문을 빠져나가 현관을 가로지른 후 마당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방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랬지만 그는 얌전히 문을 닫았다. 마당에 나가기 전에 그는 쪼그리고 앉아서 개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기에게 관심을 주는 것을 안 개는 그의 팔을 몇 번 핥았다.
위층으로 올라간 프란체스카는 재빨리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리면서 창문 아래쪽만 가리는 커튼 너머로 발 쪽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킨케이드는 옷가방을 열어놓고, 낡은 손펌프를 이용해 몸을 씻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말해 줄 수도 있었다. 원한다면 집에서 샤워를 해도 좋다고. 프란체스카는 그럴 뜻이 있었지만, 너무 친한 내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순간적으로 망설였고, 그러다가 공연히 마음이 혼란해져서 그 말을 잊어먹고 말았다.
하지만 로버트는 더 나쁜 환경에서도 몸을 씻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인도에 갔을 때는 썩은 냄새가 풍기는 물로 몸을 씻었고, 사막에서는 수통에 든 물로 몸을 씻은 적도 있었다. 밭에서 그는 웃통을 벗고 더러운 셔츠를 샤워 수건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수건! 최소한 수건이라도 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을 나무랐다.
펌프 옆의 시멘트 위에 놓은 그의 면도날이 햇빛에 반사되었다. 프란체스카는 그가 얼굴에 비누를 문지르고 면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 그녀는 또 다시 그 단어를 떠올렸다 -- 단단해 보였다. 체구가 크지 않았고,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약간 호리호리했다. 하지만 자기 체구에 비해 넓은 어깨 근육을 지니고 있었고, 배는 편평했다. 몇살인지 몰라도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아침에도 비스킷 위에 그레이비를 많이 얹어 먹는 이 지방 남자들 같지가 않았다.
지난 번에 디모인으로 쇼핑을 갔을 때 산 새 향수 -- 이름이 바람의 노래였다 -- 를 조금 뿌렸다. 어떤 옷을 입을까? 그가 아직도 작업복 차림이므로 지나치게 격식차려 입는 것도 적당하지 않을 듯 싶었다. 그래서 긴팔 흰 셔츠를 입고 소매를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접고, 깨끗한 청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었다. 리처드의 말에 의하면 그녀를 말괄량이처럼 보이게 한다는 넓적한 귀고리를 하고, 금팔찌를 했다. 제대로 차린 기분이 들었다.
프란체스카가 부엌에 내려왔을 때, 그는 거기 앉아서 배낭과 아이스박스를 펼쳐놓고 있었다. 킨케이드는 깨끗한 카키 셔츠 위에 오렌지색 멜빵을 두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카메라 세 대와 렌즈 다섯 개. 새 카멜 담뱃갑이 놓여 있었다. 카메라에는 모두 '니콘'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작은 것 둘, 중간 것 둘, 긴 것 하나인 검은색 렌즈들도 마찬가지였다. 장비는 긁히고 곳곳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흔연스럽게 닦고, 솔질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또 진지하고 수줍음 타는 얼굴이었다.
"아이스박스에 맥주가 있는데 드시겠습니까?"
"네. 그거 좋겠군요."
킨케이드는 버드와이저 두 병을 꺼냈다. 그가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자, 안에 장작처럼 차곡차곡 쌓은 필름이 든 플라스틱 상자가 보였다. 그가 꺼낸 두 병 외에도 맥주는 네 병이 더 들어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병따개를 찾으려고 서랍을 열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제게 있습니다."
그는 벨트에 차고 있던 스위스제 군용 칼집에서 칼을 꺼내 병따개를 펴더니 솜씨좋게 사용했다.
킨케이드는 그녀에게 맥주병을 건제고, 자신이 들고 있는 병을 반쯤 들어 건배를 했다.
"오후 늦게 본 지붕 있는 다리들을 위하여. 그리고 내일 아침의 화창한 날씨를 위하여."
그가 씩 웃었다.
프란체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만 지으며, 머뭇거리면서 어색하게 병을 약간 들어 보였다. 이상한 낯선 사람, 꽃다발, 향수, 맥주, 그리고 늦여름의 어느 무더운 월요일의 건배,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벗어난 것들이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있었대요. 그는 어느 8월 오후에 심한 갈증을 느꼈지요. 그래서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을까, 연구하다가 맥주를 발명한 겁니다. 맥주는 바로 그렇게 만들어졌고, 갈증은 해소되었지요."
그는 카메라를 손질하다가 거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보석 세공용 드라이버로 카메라 제일 위의 나사를 죄었다.
"잠깐 밭에 나가야 해요. 곧 돌아오겠어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프란체스카는 고개를 젓고 그의 앞을 지나 걸어나갔다. 그녀는 그의 눈길이 자기 엉덩이에 머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문 밖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도 내내 그가 쳐다볼지가 궁금했다.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 킨케이드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다가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그녀의 몸매를 보면서, 그는 그녀가 지성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을 다른 점들이 궁금해졌다. 킨케이드는 프란체스카에게 빨려 들었고, 그런 감정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 밭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프란체스카는 흰 에나멜이 벗겨진 팬을 들고 움직였다. 그녀는 당근과 파슬리, 파스닙(서양 방풍 나물)과 양파, 순무를 땄다.
그녀가 부엌에 들어갔을 때, 로버트 킨케이드는 다시 배낭을 싸고 있었다. 말끔하고 정확한 솜씨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음이 분명했다. 킨케이드는 이미 맥주병을 비우고 다시 두 병을 꺼내놓았다. 그녀의 병에는 아직 술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도. 프란체스카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마시던 병의 술을 다 마신 후 빈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그가 물었다.
"현관에 있는 수박을 가져오세요. 그리고 밖에 있는 양동이에서 감자도 몇 개 가져오시고요."
그가 너무나 가뿐하게 움직여서 프란체스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킨케이드는 겨드랑이에는 수박을 끼고 양손에는 감자를 들고 돌아왔다.
"이만하면 충분합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유령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킨케이드는 가져온 것을 그녀가 야채를 씻고 있는 개수통 옆의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의자로 돌아가 앉자마자 카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여기 얼마 동안이나 계실 거예요?"
프란체스카는 씻고 있는 야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별로 바쁘지 않을 때이긴 해요. 다리 사진 마감이 아직 3주일이나 남아 있어서요. 사진을 제대로 찍을 때까지는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일주일쯤 걸리겠죠."
"어디서 머무르시죠? 시내에 숙소를 정하셨어요?"
"네. 방이 몇 개 있는 작은 곳이죠. 모텔 같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체크인 했습니다. 아직 짐도 풀지 않았죠."
"하숙을 치는 칼슨 부인네 집을 제외하면 머무를 만한 곳은 거기 뿐이에요. 하지만 식당은 실망스러울 거예요. 특히 선생님 같은 식습관을 가지신 분에게는요."
"알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죠.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배웠죠. 매해 이맘때면 그다지 형편이 나쁘지 않아요. 상점이나 길가의 노점에서 신선한 야채를 살 수 있으니까요. 빵이랑 몇 가지 다른 것들을 사면 거의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초대를 받으니 좋군요. 감사드립니다."
프란체스카는 카운터 위로 팔을 뻗어서 소형 라디오를 켰다. 다이얼이 두 개뿐인 라디오에는 천을 씌운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시간이 내 호주머니 속에 있고, 날씨는 내 옆구리에 있다네……."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프란체스카는 볼륨을 낮췄다.
"제가 야채 다지기에는 선수인데요."
그가 돕겠다는 제의를 했다.
"좋아요. 저기 도마가 있고 칼은 그 아래 오른쪽 서랍에 있어요. 제가 스튜를 만들 테니까 야채를 준비해 주세요."
킨케이드는 그녀와 60센티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서 시선을 내리깔고 당근과 순무, 파스닙, 양파를 자르고 다졌다. 프란체스카는 감자를 벗기면서도 낯선 남자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데에도 약간의 감정이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
"기타를 칠 줄 아세요? 트럭에서 기타 케이스를 봤어요."
"약간 합니다. 친구가 되어주죠. 그 이상은 아니구요. 아내는 포크송이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던 초창기 때 가수였는데 제게 기타 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죠."
프란체스카는 '아내'란 말에 약간 몸이 굳었다. 맙소사, 그녀는 몰랐다. 그에게도 결혼할 권리가 있었지만, 어쩐지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는 킨케이드가 결혼한 상태인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몇 달씩 촬영 여행으로 집을 비울 때면 견디지 못했어요. 지금도 그녀를 비난하진 않아요. 9년 전에 떠나갔죠. 헤어진 지 1년 후에 이혼했고요. 우리에게는 아기가 없었는데, 그래서 이혼이 복잡하지 않았죠. 그녀가 기타 한 대를 가져가고 싸구려는 내게 남겨주었지요."
"그분 소식을 듣나요?"
"아니오, 전혀."
그가 말한 것은 그뿐이었다. 프란체스카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기분이 더 나아졌다. 그녀는 왜 자신이 이런 저런 식으로 신경을 쓰게 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킨케이드가 입을 열었다.
"이탈리아에 두 차례 가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 고향이 어디십니까?"
"나폴리요."
"거기는 못 가봤습니다. 한 번은 북부에서 포강을 따라 촬영하며 지냈지요. 그 후에 다시 갔을 때는 시칠리 촬영을 위해서였고요."
프란체스카는 감자를 벗기며 잠시 이탈리아 생각을 했다. 로버트 킨케이드가 곁에 잇는 것을 의식하면서, 구름이 서쪽에서 솟아 올라 태양 틈으로 들어가자 빛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개수통 위로 난 창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신비스런 광선이군요. 달력 회사에서 혹할 만한 그림인데요. 종교 잡지에서도 그렇구요."
"선생님 하시는 일이 재미있게 들리네요."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그녀는 계속 중립적인 대화를 이어나갈 필요를 느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일을 아주 좋아해요. 길도 좋고, 사진을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그녀는 그가 사진을 '만든다'고 표현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진은 찍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일요일에 스냅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와 사진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프로의 차이가 그거지요. 오늘 우리가 본 다리 촬영을 끝내면 부인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사진이 나올 겁니다. 렌즈를 선택하고, 카메라 각도나 일반적인 구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조화로 내 나름대로의 장면을 만들게 될 겁니다.
사물을 주어지는 대로 찍지는 않습니다. 뭔가 내 개인적인 의식이, 정신이 반영되는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이미지에서 시구를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어서 요구를 하죠. 하지만 제가 언제나 편집자의 취향에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바로 괴로운 점이 그 부분이죠. 어떤 사진을 넣고 어떤 사진을 빼느냐는 그들이 결정하지만요. 그들은 독자들의 취향을 알고 있긴 하지만, 이따금씩은 그들이 좀더 시야를 넓혀 주었으면 하고 바라죠. 그쪽에 그런 말을 하지만, 그쪽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예술 행위를 통해 밥을 먹고 사는 데는 바로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언제나 시장-대형 시장-만 생각하죠. 그리고 시장은 평균의 기호를 충족시키도록 만들어집니다. 많은 수가 거기에 속하니까요. 바로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거죠. 하지만 이미 말한 대로 그것은 대단한 구속입니다. 잡지사에서는 게재하지 않는 사진을 돌려주죠. 그러니까 적어도 내 마음에 드는 걸로 개인 파일을 만들기는 하죠.
어떤 때는 다른 잡지사에서 한두 장 사가기도 하지요. 제가 가본 곳에 대해 기사도 쓰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좋아하는 것보다 약간 더 대담한 사진을 싣기도 하죠.
앞으로 언젠가 예술로 생계 수단을 삼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마추어리즘의 미덕'이라는 에세이를 만들 예정입니다. 시장이라는 것은 예술적인 열정을 죽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바깥 세상에서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안정을 원하고, 잡지나 제조 회사들은 그들에게 안정을 주지요. 동질성을 안겨주고,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주고,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이윤을 내는 것과 예약 구독자를 얼마나 확보하느냐 등등이 예술을 지배합니다. 우리 모두는 단일함이라는 커다란 바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어요.
시장 사람들은 언제나 '소비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것을 생각할 때면 풍성한 반바지에 하와이언 셔츠를 입고, 맥주 병따개를 단 밀짚 모자를 쓴 땅딸막한 사람이 손아귀에 돈을 한 움큼 쥐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다지 심하게 불평을 하지는 않죠. 말씀드렸다시피 여행을 좋아하고, 카메라로 연출하는 것이 좋고, 야외에 자주 나가는 것이 마음에 드니까요. 리얼리티라는 것이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워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 킨케이드에게는 이런 대화가 일상적인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런 대화는 문학적인 대화였다. 매디슨 카운티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날씨와 농산물 가격, 새로 태어난 아기, 장례식, 정부의 프로그램, 운동 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예술과 꿈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음악을 침묵하게 만드는 리얼리티니, 상자 안에 가둬둔 꿈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야채 다지는 일을 끝마쳤다.
"달리 더 할 만한 일이 있을까요?"
프란체스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의 준비가 다 됐어요."
그는 다시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가끔 맥주를 홀짝였다. 그녀는 요리를 하면서 중간 중간 맥주를 마셨다. 마신 양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프란체스카는 알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밤이면 재향 군인 홀에서 그녀와 리처드는 술을 마시곤 했다. 그 외에는 별로 마시지 않았고, 집에도 술은 거의 없었다. 다만 혹시 시골 생활 중에도 낭만적인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희망을 가지고 그녀가 사둔 브랜디 한 병이 있긴 했다.
야채에 어느 정도 식용유를 넣고, 약간 갈색이 날 때까지 가열하고, 밀가루를 섞어 잘 저은 다음, 물을 한 컵 정도 첨가한다. 나머지 야채와 양념을 넣고, 40분 가량 불에 올려놓고 있으면 요리가 끝난다.
요리가 되는 동안 프란체스카는 다시 그의 앞쪽에 마주앉았다. 부엌에 정갈한 다정함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그런 다정한 느낌은 함께 요리를 하는 데서 왔는지도 몰랐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그와 함께 순무를 다지고, 그러다보니 낯선 느낌이 스러져버렸다. 낯선 느낌이 없어지니, 친밀감이 들어설 공간이 생겼다.
킨케이드는 라이터를 얹어서 담배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담뱃갑을 흔들어 한 개비를 빼물고 라이터를 켰지만 잘 되지 않았다. 불꽃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가 빙긋이 웃고는 그녀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라이터를 받았다. 불꽃을 일어나게 하는 바퀴를 두 번 돌리고 나서야 불이 올라왔다. 그가 켠 라이터에 그녀는 담뱃불을 붙였다. 남자들 주변에 있을 때면 그녀는 언제나 그들과 비교해 자기가 우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로버트 킨케이드와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흰 햇살이 붉은 색으로 변해 옥수수밭에 빛줄기가 쏟아졌다. 그녀의 눈에 비상하는 매 한 마리가 부엌 창을 통해 들어왔다. 7시 뉴스와 시장 정보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프란체스카는 노란 포마이카 테이블 위로 로버트 킨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부엌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그를. 거리로 환산할 수 없는 곳에서 온 그를.
"벌써 냄새가 좋은데요."
그는 한마디 덧붙이고 나서 스토브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냄새가…… 고요하네요."
그는 한마디 덧붙이고 나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요해요? 냄새가 고요할 수도 있나?"
프란체스카는 그 구절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가족을 위해 포크찹과 스테이크와 구이 요리를 한 후에 비하면 이것은 조용한 요리였다. 이 음식에는 야채를 뽑은 것만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도살이 연관되지 않았다. 스튜는 조용히 끓었고, 조용한 냄새가 풍겼다. 이곳 부엌은 고요했다.
"괜찮으시다면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어땠는지 조금 이야기해 주시지요."
킨케이드는 의자에 몸을 쭉 기대고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갰다.
프란체스카로서는 주변이 조용한 것이 신경쓰였기 때문에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성장기의 이야기며 사립 학교에 다니던 이야기, 수녀들, 어머니, 은행 지배인이었던 아버지에 관해서 말했다. 십대 소녀였을 때는 바다 절벽에 서서 세상 저 너머에서 오는 배들을 봤다는 이야기. 나중에 미군 병사들이 온 이야기. 친구 몇 명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리처드를 만난 이야기. 전쟁이 생활을 망쳐버렸고, 그들은 과연 결혼하게 될지 어쩔지 걱정했다는 것. 그녀는 니콜로 교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킨케이드는 아무 말 없이 이따금씩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그녀가 말을 멈추자 그가 말했다.
"아이들이 있으시죠?"
"그래요. 마이클은 열입골 살이죠. 캐롤린은 열여섯이구요. 두 아이 다 윈터셋에서 학교에 다녀요. 4H 클럽에 속해 있죠. 그래서 일리노이 주의 박람회에 갔어요. 캐롤린이 기른 수송아지를 전시하려고요.
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그들이 그렇게 동물에 사랑과 애정을 퍼부어 키운 후에 어떻게 도살용으로 팔리는 꼴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에요. 하지만 감히 그런 이야기는 하지 못하죠. 리처드와 그의 친구들은 단숨에 나를 덮쳐버릴 거예요. 하지만 이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냉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구석이 있어요."
그녀는 리처드의 이름을 거론한 데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어떤 짓도, 결코 무슨 짓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걱정스러웠다. 혹시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어쩌면 로버트 킨케이드는 그냥 떠나버리리라. 그는 약간 부끄럼타기는 하지만 매우 조용하고 좋은 사람인 듯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저녁이 파랗게 변했고, 가벼운 안개가 초원에 내렸다. 그는 프란체스카가 조용히 스튜를 요리하는 동안 둘이 마실 맥주 두 병을 더 땄다. 그녀는 일어나서 야채를 끓는 물에 넣고 저었다. 그리고 싱크대에 몸을 기대고 서서 워싱턴 주 벨링햄에서 온 로버트 킨케이드에게 향하는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너무 일찍 가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는 조용하고 예절바르게 스튜를 두 그릇 먹었고, 두 번에 걸쳐 음식이 너무나 맛있다고 말했다. 수박맛이 그만이었다. 맥주는 시원했다. 저녁은 푸른빛이었다. 프란체스카 존슨은 마흔다섯 살이었고, 라디오에서는 행크 스노우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