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수만에 달했던 홍건적, 몽골 제국의 잔당에 못지않게 고려의 행정을 위협하는 군대였다. 물론 절대적인 군세로만 보면 원(몽골)이나 홍건적이 더욱 강성했지만, 왜구들은 양민 학살이나 약탈에 대한 집착이 더 심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컸던 면이 있다. 특히 왜구들은 식량은 물론이고, 백성들을 잡아가는 것도 목표로 했다. 왜구들은 주로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잡아 목에 밧줄을 얽어서 끌고 갔고 이들을 노예로 삼아 매매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지는 도중, 드디어 반격의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한다.
3. 진포 해전[편집]
진포해전에서 고려는 500여 척의 대함대를 100여 척으로 격파하는 대반전을 보여준다. 이는 한반도에서 함포가 대대적으로 사용된 첫 번째 해전으로 유명하다. 이 시점에서 전기 왜구들의 기세는 한풀 꺾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박해 있던 500여 척의 대함대를 격침시켰음에도 약탈을 위해 육지로 상륙한 왜구가 남아 있었다. 오히려 퇴로가 차단된 왜구들은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살인, 약탈을 일삼았다. 진포해전 승리의 달콤함도 잠시, 고려 백성들의 악몽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왜구는 옥주(沃州)[11]와 영동, 금산, 선산, 상주로, 상주에서 성주를 거쳐 함양까지 지속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4. 사근내역 전투[편집]
진포 대첩에서 살아남은 일부 왜구들은 내륙의 옥주로 이동했다. 진포에서 옥주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당시의 왜구들은 고려의 도로망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금강의 중류, 상류 지역은 기세가 완만하고 수심이 얕아 하천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12]
이렇게 한반도 깊숙이 들어선 왜구들은 이미 상륙해 있던 여타 왜구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면 여기저기서 고려를 약탈하고 있던 병력들이 합세하여 상당한 규모였다. 이 병력은 충청북도의 이산(利山)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어모(禦侮)를 거쳐 경상북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대 최대의 진군로에 있던 여타 고을들은 모조리 학살당했다. 중모(中牟)ㆍ화령(化寧)ㆍ공성(功城)ㆍ청리(靑利) 등을 불바다로 만든 왜구는 경상북도의 상주에 이르렀다.
당시 상주는 경상도 지역의 중심지로서, 상주목 지역에는 상주목, 안동부, 경산부 등 3개의 주현과 53개의 속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비교적 규모가 있던 상주 역시 왜구의 잔혹한 칼날에 처참하게 유린되었는데, 상주에 들어선 왜구들은 장장 6일간 머물며 상주를 잔혹하게 도륙하고 불태웠으며,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면서 완전히 제 세상처럼 활보하였다.
이때, 전라도 원수 지용기(池湧奇)의 휘하에 있던 배검(裵儉)이라는 인물은 이 기세등등한 왜구를 직접 정탐하겠다는 요청을 했고, 고려군의 원수들은 이를 승낙하여 배검은 왜구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 상주로 찾아갔다. 배검을 본 왜구들은 즉시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배검은 "천하에 사신을 죽이는 일이 어디에 있느냐!"라며 되레 성화를 내었고, "우리 군의 장수들이 네놈들을 날려버리려고 하고 있다. 근데 우리가 너희들 죽인다고 뭐가 남냐?"는 발언을 했다. 이에 왜구들은 "너희가 우릴 살려주려고 하면 왜 진포에서 우리를 공격했냐."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13] 여하간 배검은 왜구들에게 술 한잔 받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왜구들은 가히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고 있었다. 겨우 나이가 3살, 4살인 어린 여자아이를 하나 잡아오더니, 씻긴 이후에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씻고 생쌀을 넣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기괴한 만행을 부린 것이다. 아무리 전장이라지만 왜구가 도덕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무너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참 그 짓을 한 왜구들은 일이 끝나자 아이의 시체를 불태우고는, 점괘가 불리하게 나오자 "여기에 있으면 패하겠다." 싶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14]
이때 남하한 왜구들은 선주(善州)[15]와 현재의 성주군(星州)인 경산부(京山府)를 침공했다. 이렇게 경상북도 역시 철저하게 유린한 왜구는 이제 경상남도까지 이동하여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인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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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며 제 맘대로 활보하고 있는 왜구를 계속해서 두고만 볼 순 없었다. 사근내역 전투 당시 고려군은 9명의 원수가 결집했는데, 배극렴은 주로 경남 지역에서 왜구를 막고 있었고 김용휘, 정지, 오언, 도흥은 몇 달 전인 1380년 5월부터 전라도 광주, 화순 등에서 움직이며 왜구를 상대하고 있었다. 또한 지용기는 몇 달 전에 전라도의 정읍, 명량에서 왜구를 물리친 참이었다. 배언은 명나라에 갔다가 6월 경에 귀국한 후 급히 투입되었다. 즉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던 고려군의 주요 사령관들이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힘을 합쳤던 것이다.
당시 사근내역에 모인 이 고려군은 대체로 원수 1명 당 최소 1,000여 명 정도를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16], 그렇게 된다면 사근내역 전투에 참여한 고려군은 9,000명에서 1만을 넘는 상당한 대군이 된다. 왜구가 좀 더 잠잠해진 후에 고려가 전력을 기울여 탈탈 털어내서 시도한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총병력이 5만이고 그중에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 3만 남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대군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 이들은 자신의 담당 지역에서 왜구와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기 때문에 전 병력을 데려오진 않았을 수 있다. 어찌 되었건 9명의 원수라는 이름값을 고려하면 적어도 5,000명 정도는 모였을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사근내역에 주둔한 왜구와 고려군은 격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고려군은 박수경과 배언, 두 명의 원수가 참살당하고, 500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도륙되는 엄청난 참패를 겪었다. 5,000여 명 중에서 단순히 십분지 일의 병력이 없어졌다고만 해도 적지 않은 타격인데,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보통 대패했다고 하여 살상율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한 참패였을 것이다.[17]
여기에 모인 정지 등의 원수들이 원균 같은 졸장도 아니고, 치열하게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노련한 장수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시의 왜구가 가진 기세는 어마어마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자신들을 가로막는 관군도 사라지자 왜구는 마음 놓고 함양을 초토화했다. 옥주에서부터 함양에 이르기까지 그 근방을 불태워 버린 왜구에 대하여 당시의 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군ㆍ현을 쳐서 함락시켰으며,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졌다. 3도(道)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어 버렸다. 왜란이 있던 이후로, 여지껏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은 또 없었다.
- 고려사절요 1380년 |
5. 황산대첩[편집]
5.1. 이성계, 드디어 출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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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 이상훈
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중심으로 -The Hwangsan battle and strategy tactics of the Koryoarmy
군사연구
2012, vol., no.134, pp. 187-218 (32 pages)
DOI : 10.17934/jmhs..134.201212.187
UCI : G704-SER000002076.2012..134.003
발행기관 : 육군군사연구소
연구분야 :
사회과학
>
기타사회과학
이상훈 /Yi Sang-hun 1
1경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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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전투는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을 결정적으로 멈추게 한 전투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군의 전략과 전술의 관점에서는 연구가 미흡한 점이 남아 있다. 따라서 황산전투가 고려말 왜구토벌에 있어 어떠한 위상을 가지는지 살펴보았다. 황산전투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왜구토벌과정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황산전투 직전에 발생한 사근내역전투를 통해 살펴본 결과, 고려군은 왜구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여 왜구를 황산전투의 전장으로 몰아넣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산전투에는 왜구 수천 명과 고려군 2만 명 내외가 참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군은 적의 매복과 방어가 예상되는 지점을 크게 우회하여, 왜구의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전투에서 이성계는 왜구를 기만하는 작전을 구사하여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렇듯 고려는 사근내역전투와 황산전투를 비롯한 일련의 토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여기에는 고려군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작전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he Waegu(倭寇) rode 500 ships and it invaded Koyro(高麗) in 1380. The Waegu moved to Sagunnae station(沙斤乃驛), after attacking Kyoungsang-do(慶尙道). The Koryo army attacked the Waegu continuously. The Koryo army moved the Waegu to west one. 20,000people of an army participated in the Hwangsan battle(荒山戰鬪) of Jeolla-do(全羅道). Previously, the Koryo army detoured greatly the defense line of the Waegu and marched away. Next, the Koryo army deceived the Waegu by the full-scale battle. After all the Koryo army annihilated the Waegu by the Hwangsan battle. The strategy of the Koryo army was a success. Invasion of the Waegu decreased after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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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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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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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Hwangsan battle(荒山戰鬪), Yi Seong-gye(李成桂), Waegu(倭寇),Koryo army(高麗軍), Strategy(戰略)
이상훈
대학/대학원교수
역사학자
인물소개
우리나라 고대 전쟁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현재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관생도에게 한국사와 군사사를 강의하고 있다. 학군ROTC 37기로 육군 제1사단에서 군 복무했고, 경북대학교에서 『나당전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가쿠슈인대학과 중국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전임연구원과 영남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KBS, MBC, EBS, 국방TV 등 역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한편 『아시아경제』 신문에 「이상훈의 한국유사」 전쟁사 칼럼을 6년간 연재했다. 현재 고대군사사연구회, 북악사학회, 한국고대학회, 한국군사사학회 등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최근에는 군사사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2023 군사사 콘텐츠의 현재와 미래」를 기획하기도 했다. 개인 저서로 『나당전쟁 연구』(2013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전략 전술의 한국사』(2015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2016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전쟁 이후의 한국사』 (2018), 『신라의 통일전쟁』(2021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등이, 번역서로 『군인수지』(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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