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 삼청고원입구-말바위 등산로입구-말바위 쉼터-숙정문-창의문 쉼터
*거리.시간: 약 4km,2시간
*가는길: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삼청공원 입구까지 도보로 15분 소요
*산행비 : 2,000원
*만나는장소: 소사역 9시,안국역 안에서 10시
*광장시장 뒷풀이는 인원수 나누기
*신분증 꼭 가져 오세요(신분증 없으면 입장이 안됩니다)
30m 간격으로 군인이 서 있어 여자 혼자 걸어도 무섭지 않다. 등산의 시작점인 삼청공원도 시간을 내 둘러볼
만하다. 서울 도심에 있는 공원치고는 꽤 아름답고 공기도 좋다. 말바위 쉼터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경치 또한 아름답다.
삼청공원 입구에서 말바위 쉼터까지는 오르막으로 되어 있는 계단길이다. 이후에는 서울 성벽을 따라
잘 다듬어진 길을 걷는다고 보면 된다. 이 길 또한 주로 계단으로 조성되어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무방하다.
청와대와 가까워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 있으니 사진을 찍으려면 유의하도록 하자.
화장실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으로 가는 길과 삼청공원 안에 화장실이 있고 이후에는 없다. 창의문 쉼터에는
화장실이 있다.
음식점 또는 부대시설
지하철역에서 삼청공원에 이르는 길에는 맛집이 많다. 밥집은 물론 커피숍과 매점도 있다. 말바위 쉼터부터
창의문 쉼터까지는 매점은 물론 음료수 자판기도 없다.
삼청공원
조용하고 예쁜 공원
‘삼청(三靑)’이란 산이 푸르고 하늘이 푸르고 마음이 푸름을 뜻한다. 그 이름처럼 삼청공원은 아름다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옛 서울의 정취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머리와 목에 푸른빛이 도는 박새,
몸 전체가 잿빛을 띤 어두운 갈색 직박구리, 광택이 나는 오색딱다구리 등 다양한 새들도 삼청공원에 살고 있다. 오래되고, 소박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삼청공원에는 1897년 종로에서 출생한 소설가 염상섭의 동상이 있다.
염상섭은 1920년 <폐허> 창간 동인으로 신문학운동을 시작한 이래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봄이면 다양한 꽃들이, 가을이면 아름다운 나무가 그 빛을 발하는 삼청공원은 찾은 이들의 마음을 풍요롭고 기쁘게 만든다. 등산을 하기 전이나 하고 나서 휴식 겸 찾으면 좋다.
말바위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
말바위 희미한 글씨가 여전히 남아 있는 말바위의 모습
조선시대 말을 타고 온 문무백관이 녹음을 만끽하며 시를 읊고 쉬던 자리였다고 전해진다. 또 백악(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바위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말바위 바로 밑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전망대는 서울시에서 선정한 우수 조망 명소다. 전망대 위에 서면 종묘, 청계산, 창덕궁, 남산, 관악산, 광화문, 63빌딩, 경희궁 공원, 사직공원이 한눈에 보인다.
말바위자체는 큰 볼거리는 아니지만 말바위 주변 풍경은 탄성이 절로 날 정도로 아름답다. 전망대 말고도 앉아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그래서 이곳을 말바위 쉼터라 부른다. 말바위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삼청공원에서 말바위까지는 신분증이 따로 필요 없다.
숙정문
비상시 목적으로 지은 곳
- 1숙정문
- 2숙정문
고개를 들면 보이는 숙정문의 속살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지닌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北大門)이다. 원래 숙정문은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울 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은 문이었다.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었기에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이 형성되지 못했다.
조선 후기 학자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서 정월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두게 했다는 속설을 기록하였다. 그만큼 숙정문 지역은 풍수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다. 태조 5년(1396) 처음 서울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1·21 사태 소나무
총탄 흔적이 있는 나무
- 11·21 사태 소나무
총탄을 맞고도 살아남은 나무
- 21·21 사태 소나무
1·21 사태 소나무 (총탄 흔적이 있는 나무)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일당은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김신조 등 북한군 31명은 1968년 1월 21일 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을 벌인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과정에서 이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다. 이후 이 소나무의 이름은 ‘1·21 사태 소나무’로 불리게 되었다. 15발의 총탄을 맞았는데도 소나무는 아직도 건재하다. 북한에서 침투한 31명 중 29명은 사살되었고,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되었다. 생포된 1명이 바로 김신조다. 김신조는 이후 우리나라로 귀순하여 신학을 전공한 뒤 목사가 되었다.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
무장공비와 교전 중 순직하신 분
창의문 바로 아래 청와대로 가는 길이 바라보이는 곳에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정종수 경사 순직비가 있다. 최규식 경무관은 종로 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파주 지역에서 남하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경찰관들을 현장에 배치, 지휘하였다.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경무관이 그들을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은 와중에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현장에서 순직하였다. 정종수 경사 역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하던 중 순직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