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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전화가 왔다. 핸드폰이 아니고 가게 전화였다. 선영은 가게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신의 귀뜸이었을까. 우연찮게 그 전화는 재완한테서 온 전화였다. 너무 뜻밖이어서 선영은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내가 네 연락처를 모른대서야 말이 되니?"
그의 목소리는 이십 오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약간 쉬어 있는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소년처럼 청청했다. 그의 말은 그가 선영과 헤어진 후에도 선영의 소식을 알려고 노력했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 같았다.
"두 아들을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냐? 위로할 말이 없구나."
선영은 해묵은 미움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원망을 퍼부었다.
"그래요. 선영이는 이제 홀가분합니다. 아주 만만해 보일 거예요.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무슨 힘이 있겠수? 선영이는 늙었지만 아직 쓸 만하니까 필요하면 저를 부르세요. 아무러면 매춘부 몸값만큼 비싸겠어요? 무료로 드릴 용의가 있으니 하고 싶으면 부르시라구요."
"선영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다 변해도 너만은……"
"나 변했어요. 거기만 빼놓고 푹 썩었으니 필요하시다면……"
"선영아!"
재완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선영은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잊었던 격정이 되살아나며 그를 껴안고 울고 싶었다. 재완의 목소리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답게 교육자답게 그의 인품은 여전히 고결했다.
"나는 네가 굳세게 살 거라고 믿는다. 내가 왜 너를 모르겠니? 지금도 네 입김, 네 가슴의 고동소리를 가슴으로 느낀다. 모두가 내 잘못이다. 네가 불행해진 것은 내 탓이야."
"저는 불행하지 않아요."
"알고 있다. 너는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는 여자란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말하는 불행은 그런 뜻이 아니야.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널 도와 주고 싶어. 무슨 방법이 없겠니?"
"선생님의 도움 같은 것 필요 없어요."
"살기는 괜찮니?"
"나 돈 많다구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내 힘이 필요하면 내게 전화해라. 나는 네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재완은 그가 근무하는 학교의 이름과 읍소재지명을 가르쳐 주고 전화를 끊었다. 버스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재완은 그 고등학교의 교장이 되어 있었다. 선영은 일기책에 얼굴을 묻고 그 일기가 다 젖도록 실컷 울었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는데 막상 들으니 왜 그렇게 미운지 몰랐다. 그녀는 사랑의 상처를 가지고 미움만 키웠던가 보다.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라고? 선영이가 그렇게 비굴한 여자인 줄 알았나?"
그 말을 되씹으며 허허 웃었다. 인생 교차로에서 재회한 두 개의 그림자. 껍질만 남은 목소리의 주인공들. 선영은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채었다.
다음 날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밥맛도 떨어졌다. 살기 위해 구역질 나는 밥을 억지로 삼켰다. 청소도 하지 않고 가게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궁리했다. 잊으려고 해도 떠나지 않고 시시각각 노을처럼 짙어 가는 영상이었다.
"만나자. 만나서 그 잘난 얼굴을 한 번만 보자. 만나는 건 죄가 아니겠지. 그 사람을 만나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선영은 재완을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여행 채비를 했다.
<급한 일로 하루 휴업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주인 드림.>
이라고 쓴 휴업표를 붙여 놓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바람꽃(황사먼지)이 자욱한 오후였다.
7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교문으로 나온다.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이다. 선영은 선글라스를 끼고 껌을 씹으며 교문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지나가는 세 남학생 앞으로 걸어갔다.
"학생,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이 누구지?"
"성재완 씨입니다."
"교장 선생님 좋은가?"
"예, 너무 좋아요. 아버지 같아요."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시고 가난한 애들을 많이 도와 주셨어요."
"모두 우리 교장 선생님을 정의파라고 불러요.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않고 궂은 일에 몸을 아끼지 않으시니까요. 우리는 그분을 존경해요."
세 학생은 자랑스럽게 한 마디씩 했다. 선영은 가슴이 뿌듯했다. 재완이 올바른 교육자의 길을 가고 있다는 데 자긍심을 느꼈다.
(그래, 내가 좋아했던 남자가 잘돼야지. 못 되면 쓰나?)
선영은 핸드백에서 책 두 권을 꺼내어 학생들에게 주며,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이야. 이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아'이고. 읽어 보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거야."
한 학생에게는 줄 게 없어서 껌 한 통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학생들은 얌전히 인사하고 지나갔다. 선영도 학생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학교 앞에 공중전화통이 보였다. 선영은 공중전화로 재완에게 전화를 했다. 재완은 회의 중에 전화를 받았다.
"오느라고 수고했소. 학교 앞에 커피숍에서 기다려요. 커피숍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찾기 쉬울 거요."
재완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커피숍은 바로 학교 정문 앞에 있었다. 선영은 커피숍 의자에 앉아 재완을 기다렸다. 아가씨가 보리차를 탁자 위에 놓고 갔다. 슬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을 들으니 선영은 울고 싶어졌다. 성재완 씨. 내 마음의 사랑. 그 사람을 한 날 한 시라도 잊은 적이 있던가. 일기를 쓸 때마다 그리움에 눈물을 씹었던 이십 오 년. 그 세월이 한 조각 상처의 그림자 되어 여기 앉아 있구나. 그리운 사람이여. 내 인생의 바로미터여.
8
커피숍 문이 열리고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기사처럼 단정한 얼굴. 성재완 선생님이었다. 그의 모습은 크게 달라진 데가 없었다. 변하지 않았다는 게 선영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남자였다.
재완은 선영과 마주앉아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한 조각 남은 그리움이라도 가져가려는 듯 숨을 멈추고 바라보는 눈. 선영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재완은 손수건을 꺼내어 선영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더운 커피를 마시며 몇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고르지 않아서 선영의 불룩한 젖가슴이 격동하듯 툭툭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재완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최유나의 노래가 끝나고 잔잔한 음악이 이어졌다. '블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란 음악이었다. 그 음악이 애절해서 선영은 또 울음이 터졌다. 남편의 죽음 때도 이렇게 울었던가? 두 아들의 죽음 때도 이렇게 슬펐던가?
두 개의 슬픔, 아니 세 개의 슬픔을 다 합해도 사랑의 슬픔만은 못하리라. 남편과 자식들의 죽음은 죽음에서 끝나지만 사랑의 죽음은 내세에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들의 참혹한 죽음 앞에 넋을 잃었지만 이내 그 슬픔을 잊었다. 잊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생명의 본능이었다. 허나 사랑의 이별 앞에선 생명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이십 오 년 전에 이미 죽었던 것이다.
지금 여기 찾아온 것은 그 죽음의 잔해이다. 아무런 감각도 감정도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그날이 찾아왔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픈 욕망. 그가 남의 남자가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아름다운 감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블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는 닫혀 있다. 영 어둠만 짙게 깔려 있다. 광막한 어둠만……
그들은 커피숍에서 나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교장은 말이 없었다. 침묵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식사만 했다. 그 침묵은 어떤 부담도 없이 편안한 침묵이었다.
편안한 고요가 선영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었다. 폭풍 같은 격정은 지나가고 두 나그네가 세월의 문 앞에 숨을 멈추고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잊었던 향수가 되살아날 것 같았다.
선영은 감정에 민감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언제라도 연주할 수 있는 악기처럼 비상구가 견고하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의 의지로 굳건한 척할 뿐이다. 그가 사랑해 주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선영은 밥을 먹는지 밥과 전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열심히 숟갈질을 해도 밥이 굴지 않았다. 그녀는 숟갈에 얹힌 밥을 다시 내려놨다가 입으로 가져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그녀는 창 밖에 내린 어둠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용한 거리로 차와 사람들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조용한 소읍이었다. 선영은 끝내 수저를 내려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식사를 좀 해야지."
"먹기 싫어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해. 내가 먹여 주지. 아 해 봐요."
교장은 그녀의 수저로 밥을 떠서 선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선영은 그가 먹여 주는 밥을 오물오물 억지로 씹어 삼켰다. 반찬과 밥이 따로따로 입 안에서 놀다가 꼬르륵 하고 억지로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교장은 선영에게 두 번 세 번 밥을 먹여 주었다. 국도 떠 먹여 주고. 그녀가 체할까 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는 흐뭇한 듯 웃었다. 그의 밥그릇의 밥과 국도 그대로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식당 주방에서 진동하고 다른 손님들은 맛있게 밥을 먹고 있었다. 선영은 부러운 듯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맛있게 식사한 적이 한 번이나 있던가.
조건반사처럼 살아야겠다는 욕망에 먹기 싫은 밥을 먹고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의 품에 안기는 게 소원이었다. 그녀는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서 사랑받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9
열린 차창으로 습기 품은 바람이 파닥이며 몰려들어왔다. 선영은 차멀미를 해서 여행할 때 차 창문을 열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교장은 선영이 옛날에 차멀미를 했던 걸 기억하고 멀미약을 준비했다가 그녀에게 주었다. 멀미약을 마시니 울렁거림이 가라앉았다.
"지금도 위가 안 좋으세요?"
"고질병이 어디로 가겠니? 난 사실 수학이 내 체질에 맞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전공을 택했던 거야. 부모님 성화 때문에……"
"모두들 선생님을 존경하잖아요? 학생들도 존경하던데요."
"그런 걸 학생들에게 물어 봤니?"
선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승용차가 급커브를 돌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왔다. 교장은 핸들을 꺾어 아슬아슬하게 그 트럭을 피했다. 하마터면 충돌할 뻔했다. 교장이 미안하다고 선영에게 사과했다. 교장의 잘못은 아니었다.
운전석 앞에는 약갑과 약봉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선영은 약을 보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녀도 약으로 연명하고 있으니. 선영은 약갑을 집어들고 읽어 보았다. 위암 치료제라고 씌어 있었다.
"어머, 암 치료를 받으세요?"
"예방 차 먹는 거지."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선영은 그가 암에 걸려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슬펐다. 차바람이 너무 세차서 차창을 닫았다. 어둠 속에 불빛들이 하나 둘 보였다. 바다 같았다.
"답답하면 여기에 오곤 하지. 파도소리를 들으면 해묵은 우울증이 씻겨지거든. 바다를 떠나면 그놈의 우울증이 되살아나지만 말이야."
승용차는 모래밭 위를 달리다가 더 나갈 수 없는 곳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바닷물은 없고 검은 갯벌만 어둠 속에 전개되어 있었다. 썰물 시기인 것 같았다. 그는 물때를 잘못 맞춰 왔다고 투덜거렸다.
한쪽으로 마을의 불빛이 드문드문 반짝이고 정박한 어선들이 거뭇거뭇 해변에 늘어서 있었다. 밤하늘을 쳐다보고, 그 무수한 별무리에 갑자기 목이 탁 메었다. 오랜만에 그와 함께 보는 별빛이었다.
바다에서 거센 해풍이 불어 왔다. 선영은 엷은 옷을 입고 있어서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다. 그의 따뜻한 손이 선영의 몸을 어루만지자 금방 추위가 해소되었다.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선영은 그의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았다. 말할 수 없는 평화가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바다에선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끊임없이 귀청을 자극했다.
선영은 그와 함께 걸으면서도 졸고 있었다. 사각사각 발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 모래 속에 그들의 대화가 있었다. 사랑해요. 사랑한다. 차를 세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식당이 있었다. 식당과 여관을 겸한 곳이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주인이 이층 시원한 방으로 안내했다. 바다가 보이는 넓은 방이었다. 식당엔 손님이 없었다. 아직 피서철이 아니어서 해변은 조용했다.
선영은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서 목욕하는지를 몰라 목욕을 포기했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방에 들어오니 재완은 옷을 입은 채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교장 같지도 않고 선생님도 아닌, 그냥 덩치 큰 시골 청년 같았다. 그의 몸에선 선생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선영은 스스럼없이 그의 옆에 드러누웠다.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나며 그의 체취가 그리웠다. 사내의 손이 먼저 와서 선영을 포옹했다. 그 옛날 수없이 드나들었던 문 앞에서 그녀도 그도 별 거부감 없이 그 일을 했다. 그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의 몸은 쇠퇴되어 있었고 그녀의 샘도 말라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즐겁게 그 기쁨을 교환했다. 신체의 한계 이상으로 달리고 돌진한 끝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
찬 기운에 선영은 눈을 떴다. 벌거벗은 남자가 그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방 안에 불을 켜 놓은 채 자고 있었다. 그녀도 그도 벌거숭이였다. 선영은 그의 몸 구석구석에 뚫린 땀구멍 하나, 솜털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모두 그녀의 기억에 저장했다. 재완은 교장도 선생도 아니고 선영의 것이었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랑.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랑이 아니고 허상이었다. 이렇게 옆에 두고 만지고 들여다봐야 내 것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확인하려고, 그 무지개 같은 허상을 찾아 여기까지 달려왔다. 달려와 보니 무지개는 허상이 아니고 성재완이란 실존 인물이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테야.)
선영의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선영은 이불로 그의 몸을 덮어 주고 의자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커튼과 이불, 텔레비전, 선풍기가 있고 의자 두 개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엔 물컵과 플라스틱 물병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 교장의 약봉지가 놓여 있었다. 승용차에서 그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교장은 깨어나서 그 약을 먹을 것이다. 교장은 잠자면서도 괴로운 듯 배를 움켜쥐고 끙끙거렸다. 고통이 심한 것 같았다. 선영은 그 고통에 익숙했다. 옛날에도 그는 비슷한 약을 먹었고 항상 고통스러워했다.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았다.
10
선영은 팬티와 윗옷만 걸치고 의자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쏴아쏴아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렸다. 바다 위엔 드문드문 뱃불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별인지 불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선영은 그녀의 핸드백에서 상비약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고 물컵에 물을 따랐다. 상비약은 그녀가 죽고 싶을 때 죽기 위해 항상 지참하고 다니는 약이었다. 그 약을 담고 다니며 이십 오 년 동안 이 시간을 미뤄 왔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혼자 죽기는 싫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어야지.
소유할 수 없는 사랑. 죽음으로 대신하리라. 이것이 나쁜 짓인 줄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나는 이미 죽었고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하는 일만 남아 있어. 나의 장례식에는 그가 내 곁에 있어 외롭지 않겠지. 그와 함께 천국으로 가는 거야.
투명한 물약이 물컵으로 쏟아져 물과 합류되었다. 두 개의 물컵에 절반씩 붓고 빈 약병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혀끝에 대고 맛을 보았다. 약간 쓴맛이 있을 뿐 무색무취였다. 조금만 먹어도 몇 분 안에 죽는다는 극약이었다. 약병에는 사람이 먹지 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동물을 죽이는 독약이다.
두 마리의 동물이 죽는 것이다. 선영은 흐흐 웃었다. 술을 먹지 않고 맑은 정신에 독약을 먹으려니 가슴이 떨리고 두려웠다. 술을 마실 걸 그랬구나. 재완은 그녀가 원하면 술을 사 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운전하니까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술을 사 준다고 해도 그녀 혼자서 술을 마실 순 없었다. 그건 청승이지. 꼴불견이야. 재완 씨에게 내 흉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지. 결국 맨정신에 음독자살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알고 그녀는 슬퍼졌다. 지난 날의 추억이 밀물처럼 해변으로 몰려왔다. 그녀는 소리없이 눈물을 씹었다.
교장이 고통스러운지 몸을 꿈틀거렸다. 그는 눈을 뜨고 의자에 앉아 있는 선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알몸임을 깨닫고 얼른 팬티를 주워 입었다. 교장은 탁자 옆으로 와서 선영과 마주앉았다.
"내가 너무 철없이 굴었지?"
"옛날과 하나도 변함 없던데요."
"내가 할 말을 하는군. 여자는 늙지 않고 남자만 늙는가 봐. 당신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야. 조금도 늙지 않았어. 조금도 늙지 않았단 말은 거짓말이고 거의 처녀 때 그대로지."
"호호호"
"왜 웃어?"
"선생님과 해변에서 이렇게 불륜 관계를 맺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제가 아직도 쓸 만하다는 말처럼 들려서 기분은 괜찮군요."
"아냐. 입에 바른 말이 아니고 내 진심이야.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워. 내가 범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깨끗한 것 같아. 처녀쩍의 순결을 보존하고 있다는 건 기적이지. 당신만이 할 수 있는 기적. 내 느낌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이 그런 것 같아. 오염되지 않는 영혼. 그렇게 표현하면 좋겠군."
교장은 선영의 두 손을 감싸 쥐고 그녀 손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몸이 흔들려서 탁자 위에 놓인 물컵이 출렁거렸다.
"너와 함께 살고 싶다. 남은 여생을 너를 위해 바치고 싶어. 어떻게 너를 도와 주면 좋겠니?"
"도움 같은 것 필요 없어요. 제 힘으로 살 수 있어요."
"물론 살 수는 있겠지. 내가 말하는 건 그런 삶이 아니야. 널 호강시켜 주고 싶어 그러는 거야."
"호강도 부귀영화도 원치 않아요. 이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거죠. 선생님을 사랑했다고 하는 그 추억 하나면 됩니다. 선생님이 선영이를 잊지 않고 사랑한다는 게 저에겐 영광이예요."
"내 진심을 몰라 주는구나."
"사모님을 사랑해 주셔요."
"또 그 얘기구나. 난 네 말을 듣고 그 여자와 결혼했다. 나도 잘못이 많지만 결혼하고 나서 후회 많이 했어."
"전 선생님을 사랑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약혼녀의 마음을 울리지 않고 결혼한 것은 잘한 일이었어요. 그 다음은 선생님이 책임지셔야 해요. 교육자로나 인간으로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제 소원은 그뿐이예요."
"그만두자. 너와 얘기하면 내가 이길 수 없지."
11
교장은 약봉지에서 약을 꺼내어 입에 털어넣고 물컵을 집어들었다. 선영은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교장은 물컵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그 순간 선영은 얼른 그의 손에서 물컵을 빼앗았다. 물컵의 물이 탁자 위로 엎질러졌다. 교장은 놀란 눈으로 선영을 바라보았다.
"그 물엔 독약이 들어 있어요."
"왜 빼앗았지?"
"선생님을 사랑하니까요. 저 혼자 죽겠어요."
선영은 다른 물컵을 집어들고 마시려고 했다. 이번엔 교장이 빼앗았다. 선영은 마시려고 하고 교장은 빼앗고. 물컵의 물이 남김없이 탁자와 방바닥 위로 엎질러졌다. 교장은 선영을 끌어안았다. 선영은 아이처럼 잉잉 울었다.
"사랑해서 선생님을 죽일 수 없었어요. 잉잉"
"알고 있다. 내가 다 안다. 미안하다."
교장은 탁자와 방바닥에 엎질러진 독약물을 화장지로 닦았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충혈되었다. 화장지에 물을 묻혀 깨끗이 닦았다. 두 사람은 평온을 되찾고 잠자리에 누웠다. 신혼부부처럼 껴안고 아침까지 푹 잤다. 파도소리에 잠이 깨었다. 밀물이 들어 바다는 푸른빛이었다.
두 사람은 일어나서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아침을 먹었다. 승용차를 타고 읍내로 돌아왔다. 교장은 선영을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차표를 사 주면서 그가 말했다.
"다음에 네 가게로 내가 찾아가겠다."
"찾아오지 마세요."
"왜?"
"다시는 만나서는 안 돼요. 죄를 짓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게 무슨 죄냐?"
"사랑하는 건 죄가 아니지만 선생님과 제가 만나는 건 죄악이예요. 다시 저를 만나고 싶으면 제가 죽었을 때 무덤으로 찾아오세요. 아셨죠?"
"……"
"어서 대답하세요. 대답 안하면 죽어 버릴 테야. 당신 앞에서 아주 보기 흉한 꼴로 죽을 거라구."
"알았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교장은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모습은 터미널의 유리에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보였다가 사라졌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니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울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울더라도 절대로 그를 초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문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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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양선영(47)……액세서리 가게 주인, 의지가 굳센 여자
성재완(55)……시골 고등하교 교장, 선영의 옛사랑
임씨(60)……부동산 중개소 주인, 선영을 좋아한다
가게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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