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내용]
시인 이상화(李相和)를 在 照明해 본다.
이상화는 1901년 음력 4월 5일 대구 서문로에서 이시우(李時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8세 때 부친이 작고하여 백부 이일우 슬하에서 성장, 큰아버지의 교육장인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한학과 애국정신을 배우고, 1915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하여 3년 수학하였으며, 1919년 10월 서울에서 서순애(일명 온순/3남 1여)와 결혼 후 2년 뒤 5월경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에 참여 1922년 "백조" 문예지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되었으며 호는 상화(尙火)로 섰었다.
우리나라 시단 초창기에 혜성처럼 나타나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민족 시인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귀향하여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단조’ ‘가을의 풍경’ ‘TO—’ ‘나의 침실로’ ‘이중(二重)의 사망’ 등을 발표하였고,
1923년 평소 꿈이었던 프랑스 유학을 위해 일본유학길에 올라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이듬해 1924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그 후 개벽(開闢)지를 중심으로 시,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고 '빈촌의 밤'(1925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 등을 발표(개벽 70호에)하면서 신경향파(新傾向派; 1920년 전후에 우리나라 문단에 등단한 사회주의 문학파)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이상화' 시비(수성못)-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개벽 58호에서 그는 “인생의 삶이란 충동의 연속이며, 충동은 생활 그 자체로 그것을 기록해가는 것이 시(詩)다. 그러므로 문학인은 삶을 기록하기 위해 남다른 책임이 있어야하고, 그 책임은 곧 민족 언어를 지켜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1935년 12월 "조광" 2호에 발표된 詩 '나는 해를 먹다'는 일제의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우리 강토와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고 풍요롭다는 예찬을 담은 서정시다. 특히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만끽하면서 '두 볼이 비자웁게 해 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에 이르면 '능금'이 곧 빛의 상징(광복)이며 뜨거운 희망(새 삶)의 다른 이름인 '태양'이라는 사실을 암시받게 된다.
[詩] 나는 해를 먹다
이 상 화
구름은 차림옷에 놓기 알맞아 보이고
하늘은 바다같이 깊다라 - ㄴ하다.
한낮 뙤약볕이 쬐는 지도 모르고
온몸이 아니 넋조차 깨운-아찔하여지도록
뼈 저리는 좋은 맛에 자지러지기는
보기 좋게 잘도 자란 과수원(果樹園)의 목거지다.
배추 속처럼 핏기 없는 얼굴에도
푸른빛이 비치어 생기를 띠고
더구나 가슴에는 깨끗한 가을 입김을 안은 채
능금을 바수노라 해를 지우나니.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발을 뻗기도 하면서
무성한 나뭇잎 속에 숨어 수줍어하는
탐스럽게 잘도 익은 과일을 찾아
위태로운 이 짓에 가슴을 조이는 이때의 마음 저 하늘같이 맑기도 하다.
머리카락 같은 실바람이 아무리 나부껴도
메밀꽃밭에 춤추던 벌들이 아무리 울어도
지난날 예쁜 이를 그리어 살며시 눈물지는,
그런 생각은 꿈밖에 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남의 과일밭에 몰래 들어가
험상스런 얼굴과 억센 주먹을 두려워하면서,
하나 둘 몰래 훔치던 어릴 적 철없던 마음이 다시 살아나자
그립고 우습고 죄 없던 그 기쁨이 오늘에도 있다.
부드럽게 쌓여 있는 이랑의 흙은
솥뚜껑을 열고 밥 김을 맡는 듯 구수도 하고
나무에 달린 과일-푸른 그릇에 담긴 깍두기 같이
입안에 맑은 침을 자아내나니.
첫가을! 금호강(琴湖江) 굽이쳐 흐르고
벼이삭 배부르게 늘어져 섰는
이 벌판 한가운데 주저앉아서
두 볼이 비자웁게 해 같은 능금을 나는 먹는다.
1936년 중국으로 갔다가 2년간 중국을 방랑하고 온 뒤 1937년에 조선일보사경북총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그 후 교남학교(嶠南學校)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했고, 1940년 이후에는 독서와 연구에 몰두 ‘춘향전’의 영역 국문학사(國文學史) 등의 집필을 기획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1943년 4월 25일 위암으로 작고하였다.
작품으로 위에 적은 내용 외에 ‘비음의 서사’ ‘마음의 꽃’ ‘가을의 풍경’ ‘조소’ 등 다수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생활한 우리나라 문인들은 모두가 빼앗긴 조국 강토에 대한 시대적 울분을 시로 분출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분들의 삶은 온전할 수가 없었고 일제의 모진 핍박에 시달리다 보니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모두들 세상과 일찍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무는 곁가지 하나라도 좋은 흙에 박혀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새순이 돋는다. 빼앗긴 들에 울분을 토하며 일찍 생을 마감한 ‘상화’ 그 영혼이 지금 이 땅에 부활하여 꽃으로 피고 있다.
매년 이상화기념사업회와 대구시 수성문화원의 주관(최)으로 3일간에 걸쳐 한국문학사에 찬연한 자취를 남긴 이상화 선생의 민족애와 투철한 詩 정신을 추모 계승하기 위한 이상화문학제, 상화문학세미나, 이상화시인상 시상과 아울러 기념공연을 곁들여 시행되고 있는데2012년에는 수성 못 수변 무대 일원에서 시행되었고, 2014년에는 계산동 고택 앞마당과 분도소극장(떼아뜨르 분도) 등에서 시행되었다. (세미나주제; 이상화 진실탐구 시대와 소통)
특히 상화정신을 주창해온 뜻있는 시민들과 문인들로 구성된 이상화기념사업회와 소재지 관활구청(대구광역시 중구청)에서는 옛길 복원 사업을 펼쳐 중구 계산동 상화 고택을 중심으로 예술, 문학, 학술, 기업 등 다양한 계산동의 어제와 오늘로 서상돈 고택, 3.1만세운동길, 청라언덕길, 계산성당, 약 400년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약령시 등 대구 근대골목투어로 발전시켜 도심골목투어객들을 위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치적의 산물로 민족정신의 숭고함을 성공적으로 부활시켜 큰 성과를 거두어 나가고 있다.
2015년 5월 7일(목)
시인 安山 李 學 德 作
[참고]
이육사; 1904.4.4.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부 이가호의 2남으로 출생, 본명은 원록(源祿), 아호는 육사(陸士),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말(馬) 게재, 1942년 수필 “계절의 표정”발표 후 문필활동 중지, 피검 1944년 1월 16일 중국 북경에서 사망, 현 고향 뒷산에 이장. 대표작 청포도, 교복, 광야, 절정, 황혼, 꽃 등/ 투옥희생 첫 번째 시인./두번째가 윤동주 /
詩文學事에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를 연결시켜 보면 끊기지 않는 명맥을 알 수 있다.
윤동주; 1017년 만주 북간도 명촌동에서 부 윤영석의 맏아들로 출생, 아명은 해황(海煥 ),
1936년 봄 북간도 연길에서 발행한 ‘카톨릭 소년’지에 병아리, 빗자루 등을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동요 동시 발표. 1945년 2월 16일 송몽규와 함께 구주 복강 형무소에 투옥 후 옥사함(송몽규는 3월 10일 옥사). 고향 동산에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