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얼굴
이 다 해
햇살이 순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이다. 편한 신발을 신고 산책을 나선다.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꽃댕강나무의 하얀 꽃이 작은 몸짓으로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마른 풀냄새가 좋아서 천천히 걷는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내 안에서 노래가 물안개처럼 올라온다. 초라한 모습이 왜 보고 싶은지 잔잔히 불러보다 울컥한다. 길거리에 뒹구는 낙엽의 갈색 이파리에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이 그려진다. 젖은 장작처럼 무겁게 누르는 가슴 한편에 애잔한 물길이 고인다.
나의 아버지는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단어와 상통한다. 젊은 날 집을 떠나버린 아내 대신 다섯 남매를 평생 책임져야 했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었다. 우유부단하고 유약했다고 기억되지만, 끝까지 자식을 책임진 아버지는 그 어떤 아버지보다 강하고 굳건하였다. 이른바 법이 없어도 살 무골호인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면 안 되었던가.
작가 정채봉의 산문집 『그대 뒷모습』을 읽다가 나의 아버지가 그려졌다. 저물녘 개펄에 혼자 힘겹게 기어가는 게를 보면서, 부모 없는 어린 손주들을 키워야 하는 할머니의 막막한 심정을 떠올렸다는 대목에서 아버지의 시린 가슴이 느껴졌다. 그 당시 아버지도 밀물이 닥칠 뻘밭을 다급히 건널 생각에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속을 씻어내는 소주를 좋아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강소주를 마셨다. 동생은 요즘도 소주 냄새를 맡으면 쓸쓸한 감정이 되살아나 쓰디쓴 소주가 싫다고 했다. 동생과 달리 나는 아버지 생각에 소주 냄새가 정겨워 좋다. 한 잔을 마시면 목으로 지나가는 짜릿함이 가슴까지 다다르고 두 잔을 마시면 무겁고 지난한 현실을 잊게 만든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런 느낌 때문에 독한 소주를 즐겨 드시지 않았는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가, 부산에 드문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페인트공이었던 아버지는 그날 일을 나가지 않았다. 바깥에서 놀다 들어온 나에게 동전을 주며 잔 소주를 사 오라고 하였다. 지금처럼 병이나 플라스틱이 흔하지 않은 때라 구멍가게에서 잔술을 팔았다. 산동네 우리 집 위에 있는 가게까지 달려갔다. 소주를 양은그릇에 받아오다 비탈진 눈길에 미끄러져 주저앉는 바람에 그릇에 담긴 술이 순식간에 눈밭으로 사라졌다. 빈손으로 돌아온 나에게 아버지는 말없이 다시 동전을 던져주었다. 그날의 흐린 회색 하늘보다 더 어두운 방 안에서 나를 흐릿하게 바라보며 동전을 던지던 아버지의 눈빛은 깊은 어둠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딸이 눈길에 사다 준 소주를 한 잔 드시고 쓸쓸하고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되었을까.
초라한 모습이 왜 자꾸 보고 싶은가. 자문하며 그 시절로 기억이 되돌려진다. 엄마 이야기하는 걸 아버지는 싫어했는데 정작 아버지는 매정한 엄마를 잊지 못하였다. 가끔 집을 떠난 엄마를 원망하면서 끝까지 견디고 혼자 버티셨다. 아버지는 일터 따라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그 와중에 올망졸망한 아이들 다섯을 혼자서 키워냈다. 키웠다지만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자라지 않았나 싶다. 이성보다 감성이 넘쳤던 아버지의 일생이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느라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언니가 시집을 간 후 내가 집안 살림을 맡아서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는 퇴근길에 찬거리를 사 오는 나를 보며 눈물을 지으시고 미안해하였다. 그때는 밥과 반찬을 해놓고 친구 만나러 나가려고 처삼촌 벌초하듯 건성건성 식사를 준비했다. 어린 딸이 지은 설익은 밥과 손맛 없는 찬을 드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는 집안 살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지금도 이리저리 제멋대로다. 결혼 후에 몸이 약한 시어머니도 내가 하는 집안 살림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밥상 앞에서 솜씨가 없다는 말은 종종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고 첫아들을 낳았을 때 아주 좋아했다. 먼저 시집을 간 언니는 서울에 살아 자주 못 본다고 아쉬워했는데, 가까이 사는 내가 아들을 데리고 가면 함박 웃으시며 대견하다고 손자를 내내 안고 계셨다.
아들 백일잔치에 오셨던 아버지가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밤에 난데없이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더욱 시집에 사는 딸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를 지나가다 들렀다고 했지만, 손자가 보고 싶어 체면 불고하고 오셨던가 보다. 아버지를 접대하는 시아버님께 손자를 안고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사돈요, 내 손자지만 참말로 잘생기지 않았소?”
“사돈, 그런 말 하지 마소. 내 친손자입니다.”
시아버지도 지지 않으셨다. 두 분의 아버지가 호탕하게 껄껄 웃으셨다. 그날의 기뻐하며 웃던 얼굴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밤에 화장실을 다녀오다 쓰러져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나셨다.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는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는데도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왜 초라한 모습으로만 기억될까.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효도의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인가. 아버지의 심약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시집살이의 힘듦과 의지처가 없던 탓에 이후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
초라한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불러보고 싶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