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2일 일요일 날씨 맑음
동행자; 필자, 아내, 시현님, 현우님, 혜은님
구간개요 : 덕유산권의 마지막구간으로 육십령 구시봉 민령 북바위 덕운봉 삼거리 영취산 선바위 최고봉인 백운산을 찍고 중고개재로 하산하는 백두대간 덕유산권 남진구간으로 도상거리 17.27km로서 호남금북정맥의 갈림길과 낙동강 섬진강 금강의 갈림으로 유명한 영취산(1076m)을 찍고 가는 여정으로 난이도가 어렵지 않지만, 능선의 아기자기함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길로서 사랑을 받는 유명한 길이다.
육십령에 4시에 도착하여 준비를 갖춘 후 4시 30분에 출발한다.육십령고개는 장수군에 속하는 곳과 함양군에 속하는 곳이 뚜렷이 구분되는데 장수군과 함양군이 따로 고갯돌을 세워 놓았다.
함양군쪽 고갯돌.
장수군쪽 고갯돌
함양군쪽 고갯돌 함양군쪽이 훨씬 크다.
육십령까지 왔으면 백두대간 의 5분의 4가 마치는 것으로 이제 오분의 일 거리만 가면 된다.
육십령을 지나 한시간여 오르면 구시봉 직전에 유명한 샘터에서에서 잠간 목을 축인다.
구시봉(1,014.8m)
지도에는 깃대봉이라 했다. 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경계에 있다. 옛날 임금님이 신하나 백성들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땅을 하사했는데, 이를 사패지(賜牌地)라 했고, 경기도 의정부의 사패산도 유명하다. 이 땅에는 누구의 사패지라고 하는 깃대를 꽂아 놓은 데서 깃대봉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시봉에서 해뜸을 맞이한다.
구시봉은 특히 가을의 억새와 구절초 향으로 유명하다. 정상에 오르면 북으로 남덕유산(1,503m), 동으로는 기백산( (箕白山1,331m) 남쪽으로는 장안산(1,236.9m)과 백화산이 보인다. 정상에는 구시봉으로 표지석이 되어 있다. 옛문헌과 주위의 구전되어 온 것을 종합하여 그전에 부르던 이름인 구시봉이라 다시 명명했다 한다. 아래는 남덕유산 방면. 남덕유 동봉 서봉이 나란히 하고 그 앞이 할미봉.
구시봉이라 함은 구시에서 유래된 말로 구시란 구유의 이곳방언으로서 구유는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든다 죽통(粥桶)이라 한다.정상부분에서 보니 정상 북사면이 구유처럼 움푹 패인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순한 능선을 따라 민령(岷領)이 잇대어 있는데 진달래 천지다. 아마도 올해 진달래를 볼수 있는 마지막 날인듯 화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민령에서 진달래 군락과 함께..
민령은 구시봉과 영취산 사이에 있는 중요한 참고점이다. 백운산은 논개의 고향이다. 생가는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이고, 무덤은 경남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이다. 민령은 바로 논개의 생가와 무덤을 오가는 대간의 고갯길이다. ‘밋밋한 고개’라는 우리 이름인데, 소리에 따라 ‘岷’이라는 한자를 음차하였다.
북바위(961m)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군 중 이긴 측에서 이곳에 올라 북을 쳐 아군에게 알린 장소에서 유래 했다. 과연 그 명성대로 경치가 일품인 북바위에 오르니 남진기준 우로는 오동제 저수지가 좌로는 서상면이 있고 사방이 트였다. 한 발자욱만 더 내딛으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나갈 것 같다. 북바위 맨 꼭대기에 올라 북을 쳐 내가 왔노라 외치고 알리고 싶다.
북바위에서 본 지나온 구시봉 능선과 남덕유.
논개 생가터 갈림길 자승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산행 후 택시를 타고 이동 중 논개 생가터를 잠깐 눈으로 스치 듯 지나 왔다. 논개는 본명이 주논개(朱論介) 충절의 여신 주논개는 1574년 영취산 북쪽의 대곡리 주촌(朱村 주씨 집성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왜장(倭將)을 껴안은 채로 죽은 논개의 묘는 백두대간 육십령 동남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함양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뒷산에 있다. 대간에서 나고 대간에 묻힌 것.
논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보통 경상우도의 병마 절도사인 최경회(崔慶會)의 후처로,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촉석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군의 잔치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정도까지만 알고 있다. 나중에 택시기사께서 서상에 있는 묘지를 고향마을로 이장 위해 10년째 소송중이라 열변을 토한다. 기사님은 논개를 주논개 성생님이라고 시종일관 깍듯하게 존칭을 쓴다.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 중국)이며,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났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2차 진주성 싸움때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는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다.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 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977봉(전망대 바위) 중1 현호가 씩씩한 포즈를 한다.
덕운봉 3거리봉(950m).안내팻말에는 덕운봉이라 했지만,실제 덕운봉은 이보다 동쪽에 비켜있다.
남진기준 덕운봉(德雲峰 956m)은 대간에서 살짝 비켜 앉아 좌측에 자리잡고 있다. 화살표가 덕운봉.
덕운봉은 덕운봉 3거리 봉우리보다 겨우 6m 높다.
시간이 있으면 덕운봉 정상 근처에 있는 극락바위를 보고 싶지만.. 일행들이 가기 싫어한다. 특히 중학교 1학년인 현호가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재촉하고..
덕운봉을 찍으면 제산봉(852.6m)을 거쳐 운곡리로 하산할 수 있다.
아래 사진은 덕운봉 극락바위 모습을 퍼왔다.(식물님 블로그)
영취산(靈鷲山 1075.5m)
유명한 여수 영취산(510m)과 한자까지 같다. 전국에 영취산은 7개 인데 모두 한자가 같다 장수 영취산((靈鷲山)은 백두대간에서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이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줄기가 갈라져 나가 무령고개를 지나 장안산으로 이어진다. 처음 백두대간을 시작할 때부터 가장 궁금한 산 중의 하나였다.
장수영취산도 신령령(靈),독수리취(鷲)를 쓰는데, 그 뜻은 산세가 신묘하고 신령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나 옛 지도상에는 영취산의 이름이 없었다. 원래는 장안산(長安山1,237m)에 가려 무명봉이었다. 영취산은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즐겨 설법했던 산의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옛날에는 이웃 덕유산을 영취산으로 부르다가 산 이름이 덕유산으로 굳어지자 부르자 잽싸게 그 이름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취산은 13개 정맥 중 3개의 정맥을 가지를 치는 시작점이다. 장안산 마이산를 지나 진안 주화산(朱華山 565m)에서 부여 부소산으로 빠지는 금남정맥, 다시 주화산에서 내장산을 경유, 광주 무등산, 순천 조계산, 광양 백운산으로 떨어지는 호남정맥이다. 낙동강, 섬진강, 그리고 금강을 발원하는 삼강 분수령이다.
1,066봉을 지나 선바위고개 (1,040m)에서.
영취산에서 백운봉을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작은 고개. 고개 위에 큰 바위 하나가 있다.
선바위고개를 지나 백운산까지의 능선은 산죽능선이라 불리는데 이름값을 한다. 하루동안 아무도 오가지 않았는지, 앞을 헤치고 가야 하는데 거미줄이 너무 많아 스틱으로 권법을 해야 했다.
백운산(白雲山1,278.9m)
아랫쪽 큰 정상돌
위쪽에 있는 옛 정상돌
전북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와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전면에 경계를 하고 있다. 백운산의 이름은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서 아래서 볼 때, 봉우리에 흰 구름을 감싸 안고 있는 산이라 뜻이다. 백운산 정상돌은 두개가 있고 제법 넓다. 정상에서 남진기준 우틀을 해야 하는데 자칫 알바하기 쉽다. 정상에 아내가 대간길이 빼빼재 쪽이라고 , 잘 모르면서 우긴다. 대방마을 쪽으로 가야 한다.
정상에서 남진기준 급 좌틀하면 서래봉(1,157m)과 923 능선으로 이어지는 곳이며 절고개로 향하는 길이다. 이정표는 빼빼재라 되어있다. 아래 화살표가 서래봉.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면 헬기장이 있는데, 헬기장을 밟고 남진하면, 남쪽 능선 쪽에는 중봉(1,230m) 끝봉(1,232m)이 연하여 있다.
특히 가을 백운산은 단풍이 천하일품으로 산허리 마다 갈대와 싸리나무, 그리고 산죽이 한데 어우러져 비경의 극치를 이룬다. 정상에서 중봉과 끝봉을 안내하는 갈림길에서 우측 중재방향으로 가야 한다.
무심코 하산길 4.2km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중봉과 끝봉을 경유 운산리로 가는 길이다.
중고개재(755m)까지는 한시간 남짓 걸리는데, 급경사를 1.5km를 내려간 후 0.9km 남기고서는 평탄하고 아름다운 흙길이다.
고개의 동쪽 즉 남진기준 좌측에는 신라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영은사지를 비롯해 많은 암자가 있는데. 이곳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가 고향이자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제창한, 본명이 백상규(白相奎)라고 불리운 용성(龍城)스님이, 평소 선사의 지론인 선농일치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미를 들고 세운 농장인 화과원(華果院 )이 이곳에 있다. 수 많은 사람이 화과원에서 농사 지으면서 살았고, 그 사람들이 볼일을 보려고 다니던 동쪽 고개가 절고개이며, 서쪽고개가 여긴데, 중생과 스님들이 많이(衆:무리지어) 넘나 들었다고 중(衆)고개라고 했다. 용성스님은 기미독립선언서 대표 33인중 한 분이다.
중고개재(755m)
다음의 중재와 혼동하기 쉽다. 중재는 다음 고개이다.
중고개재에서, 남진기준 우측길로 0.9km만 접속하면 힐링펜션 간판이 있는 도로가 접속되고, 743번 지방도로인 삼거 정류장으로 하산한다.
삼거정류장에서 육십령까지 택시비 35,000 원. 육십령에서 차량회수 귀경.
구간지도(펌)
도상거리 17.27km 접속거리 0.9km 도합 18.17km
순수 산행시간 7시간 51분 03초
만보거리 43,434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