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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시집 <애월>을 읽고
- 애월을 애월하는 눈빛과 애월의 슬픔, 역사, 설화, 방언을 그려내는 세 가지 방식
장인수(시인)
나는 고작 제주도에 딱 두 번 가봤다. 30년 전에 갔고, 20년 전에 갔다. 지난 20년 동안은 제주도에 가본 적이 없다. 나는 애월에 가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서안나 시인의 애월 서평을 써도 되는지 조금 망설였다.
사실 나는 시집 애월을 읽는데 꽤 애를 먹었다. 애월이 애를 먹이다니! 제주의 역사도 잘 모르고, 제주의 방언도 잘 모른다. 시집을 읽으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웠다. 배우는 입장에서 읽었다. 제주의 역사적 사료를 찾아보고, 제주 사투리를 배우면서 읽었다.
서안나 시인은 애월이 고향인가 보다. ‘애월’에 대한 시를 15년 전부터 꾸준히 발표하고 시집을 낼 때마다 ‘애월 시편’을 싣고는 했다. 이번에는 아예 애월이라는 시집을 냈다.
애월 서평을 쓰기 전에 내가 페이스북과 카페에 올린 서안나 시 자료를 찾아보니 2013년 3월 3일에 「새의 팔만대장경」, 2015년 9월 6일에 「슬픔의 좌표」, 「소년들 2」라는 시를 소개했었다. 그리고 내가 2015년에 펴낸 새롭게 인생을 디자인하는 창의적 질문법이라는 책에서 서안나 시인의 시 「립스틱발달사」를 가지고 지식융합 수업을 했던 사례를 짤막하게 실었다. 이것이 내가 서안나 시를 다룬 내용들이다.
시 「립스틱발달사」의 수업 사례는 시의 한 토막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시적 상상력인가 과학적 상상력인가 시인과 과학자는 어떤 상상력을 추구하는 존재들인가를 토론하는 지식융합적 수업이었다.
서안나 시인의 시집 립스틱의 발달사에 대한 단상에서 나는 ‘겉장은 까맣다. 글씨는 빨갛다. 무슨 애정 스릴러 영화포스터 같다. 애정 스릴러물! 조선시대의 은밀한 애정사를 들추는 듯한 묘한 분위기다. 애월, 병산서원, 전언, 별사, 분합, 천축국 등 옛 용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실제와 환상을 넘나들고 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옛날의 실제 경험이었는데 세월이 흐른 후에 필름을 돌리면 아득한 몽환의 분위기에 휩싸이는 느낌. 살면서 더욱 또렷해지는 단편적인 추억이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 뒤섞여서 몽환적인 그림으로 남는다. 오히려 더욱더 다른 색깔로 채색이 되거나 고서화처럼 색깔이 흐릿해지거나…… 리얼리즘이 시간이 지나면 환상적 낭만주의로 재해석되듯이…… 서안나 시인의 사랑 시편들은 갑자기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이른바 Jump Cut(장면의 급전환) 기법도 있다.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평행 행위를 시간상 전후 관계로 병치시키는 Cross Cutting(교차 편집) 기법도 보인다. 세밀한 심리 묘사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스릴컨셉의 영화나 범죄 심리를 다룬 영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기법’처럼 읽힌다고 짤막한 단평을 썼었다.
「새의 팔만대장경」에 대한 감상에서는 ‘환치의 기법이 참 새롭다. 팔만대장경의 글자수와 군무를 추는 새 떼의 수가 새까맣게 많은 데서 유사점을 연결했다. 새는 팔만대장경의 글자다. 자유로운, 비상하는, 군무를 추는, 천수만이 적멸보궁이 되는, 대웅전이 되는, 해탈이 되는, 경전이 되는 경지. 멋진 시다. 온몸으로 육필 경전을 쓰는 천수만 뻘과 새떼들. 시인은 자신의 몸도 경판이 되었으면 바란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사랑은 자신의 몸이 경판이 되는 순간 완성이 될 거라고……’라는 시평을 썼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다시 읽으니 새롭다.
또한 「슬픔의 좌표」, 「소년들 2」에 대한 단평에서는 ‘서안나 시인은 점점 세계의 내면을 맑고 깊게 응시하면서 존재의 속성을 형상화하는 시작법을 보인다. 중년을 넘어버린 수녀의 눈빛을 닮아간다. 가을 초입에 어울리는 시편’이라고 썼었다.
이제 본론. 시집 애월을 들여다보자. ‘애월(涯月)’을 발음하다보면 ‘생애(生涯)’, ‘천애(天涯)’의 ‘애(涯)’를 떠올린다. ‘애(涯)’는 천애지각, 천애고아, 일망무애라는 사자성어에도 들어있는 한자어다. 아득하고, 깊고, 넓고, 처연하고, 물냄새가 나고, 가늠할 수 없는 끄트머리를 생각하게 하는 한자어다. 그러니까 ‘애월’은 ‘물가의 끄트머리에서 바라보는 아득하고 깊고 넓고 처연한 달’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전문적인 서평을 쓸 수 있는 평론가가 아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 느낀 점 몇 가지를 두서없이 말해보고자 한다.
첫째, 애월은 진혼곡이다. 레퀴엠이다. 진혼굿이다.
해방 이후인 1947년 3월 1일부터 동란 이후인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하는 사건이 제주도에서 발생했다. 4.3 사건이라는 거대한 회오리가 제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나는 그 사건을 잘 모른다. 나는 제주도의 역사를 잘 모른다. 제주국제공항 비행장에서 388구의 주검이 발굴된 지도 몰랐다. 4.3 사건의 최대 학살터가 제주국제공항 비행장이란다. ‘박성내 다리’ 등 제주 곳곳이 학살 현장이었단다. 그런 의미에서 서안나 시집 애월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제주도민에 대한 진혹곡이며, 진혼굿이다. 제주 4.3 원혼을 위로하고, 섬사람의 애환과 굴곡을 노래한 시집이다.
밤에 애플민트를 꺾었다
꺾은 자리가 떨렸다
실직한 이와 오랜만에 만난 술자리였다
김 모 시인이 말했다
여리고 푸른 것들은
쓰다듬어 손으로 향기를 맡는 거라고
술집 유리창에 발이 사라진
나와 일행이 허공에 떠 있었다
실직한 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집단 학살터였던 박성내 다리 앞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나를
실직한 자의 밤을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제9 연대 군인 트럭에 실려와
집단 학살된 백 오십 명의 맨발을
이지러진 밤의 애플민트가
사과 향기로 어루만져 주는 밤
그 여리고 푸른 것들 앞에
내 무심한 폭력을 내려놓는다
다시는 풀과 꽃을 꺾지 않으리
*박성내 다리:4,3 사건 때 함덕국민학교에 모인 와흘, 함덕 등의 주민들 3백여 명 중,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1백5십 명을 철사로 묶어 트럭에 태웠다. 제9 연대 3대대는 제주시 아라동 박성내 다리에서 이들 모두 집단 학살하고 시체는 불태웠다.
- 「밤의 애플민트」 전문
박하와 사과를 섞은 향이 나기 때문에 애플민트다. 애플민트를 나도 집에서 키우고 있다. 그냥 잎을 따서 날것으로 씹어먹기도 한다. 연약해서 그냥 잘 꺾인다. 나도 손이 닿으면 그냥 무심결에 꺾곤 한다. 그 향기를 맡기 위해서다. 서안나 시인도 실직을 한 모 시인과 술 한 잔 하면서 무심결에 허브 애플민트의 생잎과 생줄기를 꺾었는데 창밖으로 제9 연대 3대대 군인들이 백여 명의 주민을 집단 학살하고 시체를 불에 태워 죽인 박성내 다리가 창밖으로 보였나보다. 마치 무심결에 허브 애플민트의 생잎을 꺾은 것처럼 그렇게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한 현장인 것이다. 제주는 끔찍한 살육의 전쟁터였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제주도로 유배를 왔던 선조들의 영혼과 그들의 예술 작품을 소환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 신장 위그루 등 참혹한 학살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 여러 곳을 제주도의 슬픈 역사와 결부시켜 노래하고 있다.
둘째, 애월은 설화의 재해석이다. 제주도는 여신의 섬이다. 설화는 어떤 원형 상징을 지니고 있다. 설화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그리고 있다.
제주도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가 선명한 지역인 것 같다. 「검은 진화론」, 「백묵」, 「애월, 검은 사람」, 「흑해에서 온 사람」, 「운문적 인간」 등의 시편에서 흰색과 검은색의 이미지가 작품 전체를 이끌어간다. 흰색과 검은색은 시집 애월에서 어떤 상징성을 띠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원형 상징 이론의 원형적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시집 겉장도 온통 흰색이다. 애월에는 검은들먹오름이 있다. 돌도, 언덕도, 들판도 검은색이다.
자산어보를 적으며 나는 자주 검은색에 물든다
물고기며 해초의 내력을 적고 물결의 배를 가르면
물결은 어떤 얼굴로 엄둠을 건너는지 궁금하다
검을 현(玄)을 두 개 연이어 적으면
흑산도는 자(玆)로 더욱 검어지고
내 눈도 시든 산그늘처럼 검어진다
검을 현 자에 기대어 고요하게 앉아 있으면
물결이 밀려와 나는 물속에서 고요하게 앉아 있다
어둠이란 게 무엇인가 가시가 있다
검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늘이 있다
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비로소 아둔한 내가 보인다
심중에 있는 이 답답하고 애잔한 것들은 모두 검은색에서 걸어나왔을 터
검다는 것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입도 없고 살도 없는 검은색이 흐르고 멈추고 다시 되돌아온다
밤의 처음처럼 눈발의 끝이 어둠의 보법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 「애월, 검은 사람 –자산어보(玆山魚寶)2」에서
검은색에 대해 탐색한 시다. 서안나 시인을 몇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겐 그녀가 오직 검은색 옷을 입었던 기억밖에는 없다. ‘수녀 같구나! 영성이 흐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검은색을 탐색한 시가 몇 편 시집에 실려있다. ‘자산어보’라고 명명한 데 대하여 정약전은 ‘자(玆)’는 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자산은 곧 흑산과 같은 말이나,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두워 두려운 데다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흑산 대신에 자산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흑산어보’라 하지 않고 ‘자산어보’라고 제명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玆)’는 검고 검다는 뜻이다. 서안나 시인은 ‘검은색’의 원형 상징성을 집요하게 탐색하고 끄집어내고 있다. 검은색에는 고요, 가시, 비늘, 흐름, 멈춤, 흩어짐, 고단함, 고적, 흔들림, 만물의 연모, 태어남, 죽음, 물결의 씨앗이 담겨있다고 한다. 사람들과 물고기는 검은 어둠에서 태어나고, 어둠의 물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다와 섬의 어둠을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정약전은 알았을 것이고, 서안나 시인도 분명 알았을 것이다. 나는 서안나 시인이 써놓은 시를 통해서 바다와 섬의 어둠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만 할 뿐이다.
표범나비는 저승으로 날리고
이승에 능수 매화 피우는 나는
아바님과 어마님 피를 받아
눈가에 뱀을 키우고
당신 등에 동서남북
칠성별 문신을 새기는 나는
이마에 큰 산 올리고
오백장군 서서 죽은 한라산
돌 나비 되어 날아오르는 나는
돌 속 열두 문 열어
보살의 다라니를 태우는 나는
진흙 묻은 비린 것들 이끌며
돌북을 치는 나는
뒤돌아서면 부서지는
돌 속의 사람
전생의 나는
- 「애월, 전생의 나는」 전문
서안나 시인은 전생을 탐색한다. 한라산 영실기암은 한라산 백록담 서남쪽 해발 1,600여m의 위치에서 아래로 약250여m의 수직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란다. 천태만상 기암괴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듯 하늘로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석가여래가 불제자에게 설법하던 영산(靈山)과 흡사하다 하여 영실(靈室)이라고 했다. 영실의 옥좌로서 엄숙한 형상의 미륵존불암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솟아있는 500이 넘는 기암괴석들이 설법을 경청하는 불제자 모습과 같다하여 오백나한, 또는 억센 장군들과 같다하여 오백장군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제주에는 돌이 많다. 돌이 살아 움직인다. 돌이 설화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삶이 된다. 돌은 오백나한이 되고,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기도 하고, 돌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도 하고, 돌북을 치기도 하는 등 돌마다 설화가 서려 있나 보다. 돌이 많은 제주. 돌에서 이야기가 태어나고, 돌마다 묵직한 서사가 서려있다. 제주 사람들은 세상 모든 만물에 신이 스며 있다고 믿는단다. 무려 1만 8천의 신이 제주에 산단다. 제주도는 여신이 만들었단다. 그러니까 제주도는 여자의 섬이다. 제주를 만든 창조의 여신 ‘설문대’. 설문대할망은 커다란 거인의 모습을 한 여신이다. 바다 깊은 곳도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을 정도로 크고 힘도 세서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 하늘과 땅을 나누고, 이어 흙으로 제주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치맛자락에 흙을 퍼 담아다가 한라산을 만들었는데, 이때 치마의 터진 구멍 사이로 흘린 흙이 제주 섬 곳곳에 있는 360여개의 오름이 됐다고 전해진다. 성산일출봉에는 설문대할망이 길쌈할 때 등잔으로 썼던 등경돌이 남아있고, 제주시 오라동의 한천에는 할망이 썼던 족두리로 알려진 커다란 돌덩이인 일명 '족감석(族感石)'이 있다. 또 설문대할망이 오줌을 누니 과거 육지로 이어져 있던 우도가 떨어져 나가 섬이 됐다는 일화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서안나 시인의 전생은 설문대할망이거나 설문대할망과 친했던 여인이라는 것이다. 제주도의 여신인 설문대가 어찌보면 서안나의 전신이 아니었을까? 서안나 시인은 전생에 제주도의 검은 돌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음… 이러니 그녀는 제주도의 여인이다. 제주도의 피가 흐르는 제주도 여신의 후예다.
시편마다 제주도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제주도 지명에 서려있는 설화의 서사가 숨어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서사를 잘 알지 못하니 시의 여백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제주도는 특별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서사를 지니고 있는 섬인 것 같다. 특히 내게는 가장 명편으로 다가온 「애월, 전생의 나는」이라는 시는 어떤 신화적인 서사의 신비함과 제주 무녀의 피가 섞인 듯한 화자의 목소리가 묘한 전율을 주었다.
‘윤이월’과 ‘매화’를 중심으로 절기에 따른 전통의례와 제주의 습속과 인생사와 삶의 서정이 출렁거린다. ‘붉은팥을 뒤로 던지면 매운 수선화 피고 저수지가 깊어진다’거나, ‘매화 향기 가두어 차로 마시면/ 나이 삼십에는 꽃이 어렵고/ 사십에는 아픈 곳에서 꽃이 핀다’와 같은 구절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고 성장한 사람이 아니면 쉽게 나올 수 없는 기막힌 표현 같다.
제주도 방언이 툭툭 튀어나온다. 방언은 단순한 언어 변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방언은 그 지역의 역사, 문화, 생활 방식, 영혼과 정신을 반영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나는 제주도의 방언을 거의 모른다. 그래서 시를 읽고 감상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봇디창옷’, ‘콥데사니’, ‘심방’, ‘물애기’, ‘이문간’, ‘독무릎꽝’, ‘작산 사름’, ‘써넝한’ , ‘말모래기’ 등 처음 들어보는 어려운 제주 방언을 쉽게 시어로 사용하면서 제주의 삶을 그려낸다. 고향의 언어를 예술적으로 살려낸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셋째,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개인사적인 아버지의 죽음 체험과 근현대사의 가장 처절한 학살이 자행된 제주 <4.3 항쟁> 그리고 지구 곳곳에 발발하고 있는 전쟁의 비극성을 정교하게 직조하고 있다.
시인의 아버지 3주기 기일에 맞추어 시집을 출간했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혼자 남으신 늙으신 노모에 대한 애틋함을 담은 시편들이 많다.
즉, 이번 시집은 두 개의 묵직한 서사가 무늬를 직조하고 있다. 개인적인 가족 죽음 체험 서사가 그 하나라면, 근현대사의 비극인 4·3의 희생자들의 제의 서사가 거들고 있다. “나”가 경험하는 ‘아버지의 죽음’은, 생과 사에 관한 근원적 질문을 제기하는 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다. ‘아버지 세대의 죽음’은 곧 가부장적이면서도 부녀간의 애틋한 체험을 드러내고 있다. ‘나’가 ‘아버지’를 통해 추적하는 ‘죽음에의 기억’은 진혼의 노래인 동시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월경하여 역사를 목도하는 증폭된 힘으로 구체화한 시집이다.
슬픔은 소주잔처럼 손잡이가 없어 캄캄하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새벽마다 물결로 흩어졌다
삶은 돼지고기 한 근에 찬술 마시고
아버지는 북극처럼 혼자 춥다
습자지처럼 뒤돌아보면 자국만 남는
슬픔은 그런 것이다
봄날 새벽
나도 아버지가 마셨던 녹색 빈 술병을 본다
술병 속에 아버지가 앉아있다
병만 남은 사람의 몸은 고요하다
병 속에서 바람이 흘러나온다 담배 냄새가 났다
애월을 걸으면
물빛이 아버지의 눈빛과 닮았다
당신을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서투른 결심을 한다
- 「애월, 서투른 결심」 전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온몸을 휘감는 통증으로 무척 괴로워했나 보다. 「흑해에서 온 사람」이라는 시를 읽으면 참을 수 없는 가혹한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년이 그려지고 있다. 아버지는 추운 짐승이다. 아버지는 측백나무를 끌고 흑해를 건너는 괴괴한 짐승이다.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등에서도, 발뒤꿈치에서도 춥고 추운 통증이 만져진다. 아버지는 북극에서 온, 흑해에서 온 춥고 추운 짐승이다. 아버지의 몸은 빈 술병처럼 춥다. 아버지는 찬술보다도 춥다. ‘춥다’로 그려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을씨년스럽고 춥다. ‘뜨거움’이나 ‘따스함’으로 아버지를 그려내지 않고 ‘추움’으로 그려내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한없이 따스하고 다정하셨던 아버지를 북극과 흑해에서 온 추운 짐승으로 표현한 반어와 역설의 표현! ‘죽음’에 대한 사유는 그만큼 깊고, 처연하다.
장인수
2003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 적멸에 앉다, 천방지축 똥꼬발랄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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