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선주목사(1869-1935)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의 횃불’, ‘3·1운동 민족대표 중 한 사람’
‘영계(甯溪) 길선주 목사’
1.출생: 1869년 3월 15일 평안 안주읍에서 길봉순씨의 차남으로 출생.
2.어린시절
①신미양요(1971년)사건으로 나라가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음.
②가정은 무척 가난했으나 4살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7살때에는 당시 유명한 한 학자로부터 배워 시(詩)를 짓기도 함.
③길선주는 총명했고 정서도 풍부하였고 체격도 걸출하였음.
3.젊은 시절의 방황과 실의(失意)의 삶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던 길선주는 17세때 상점을 열었으나 실패하여 큰 좌절을 경험했고 방탕과 방황속에 빠짐.’
4.선도(仙道)의 문을 두드린 길선주
‘실의에 빠진 길선주에게 친구 김종섭이 선도의 길을 걷도록 권유하여 세속을 떠나 산속 깊이 들어가 도를 닦았지만 결국은 실망하고 다시 속세로 내려옴.’
5.기독교 신앙에로의 회심
①속세로 돌아온 길선주는 시력이 약해지고 건강도 쇠약해지었다. 이때 길선주는 예수교를 전하는 서양선교사 마포삼열의 소문을 들었음.
②어느날 자신을 선도로 인도했던 친구 김종섭이 찾아와 길선주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예수믿기를 권하였다.
‘자신은 지금 하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 참 기쁨과 평안을 얻었다고 그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를 권고하였다.’
③친구 김종섭이 끈질긴 설득으로 길선주는 예수교가 진정한 도리인지 알기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기도를 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길선주에게 “선주야, 선주야”라고 그를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길선주는 즉시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여, 제 죄를 사하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외치었다.
④이 사건으로 길선주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였고, 놀라운 회심의 체험을 동시에 하였다. 완전히 변화된 길선주는 기독교인이 된 증표로 머리를 깍고, 시간을 정하여 특별히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6.새벽기도를 시작한 길선주
①길선주는 특별히 새벽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새벽기도를 드리었다.
‘하루에 20분 동안은 반드시 성경을 암송하였고, 정오와 밤에는 시간을 정하고 기도를 드리었다. 그는 항상 성령 충만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②1905년 길선주 조사는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를 시작하여 그때부터 전교인이 새벽기도회로 공식적으로 갖기 시작하였다. 결국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의 발원지가 된 것이다.
7.한국 최초의 7인 목사가 된 길선주목사
①길선주는 1901년 장로가 되었고 1902년 교회의 조사(전도사)가 되었다.
②1903년에는 친구 김종섭과 함께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그는 최초의 한국 목사 7인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8.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목사
①1907년 1월초 시작된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운동은 길선주 장로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친구가 죽으면서 부탁한 미망인의 돈을 갈취햇다고 회개함으로 부흥운동의 물고를 텄다.
②그의 회개와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밤새도록 울며 통회 자복하였다. 놀라운 성령의 강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사람이 되어 교회가 새로워지고 큰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③1907년에 시작된 부흥운동은 그 이후 3년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기세로 한국 전역을 휩쓸었다.
9.성경통독의 대가(大家) 길선주목사
‘그는 평생에 요한 계시록만 1만 200회 통독했고, 구약성경은 30회 통독, 창세기부터 에스더까지 540회 이상, 신약은 100회, 요한서신만 500회이상 통독하였다. 그는 성경을 줄줄 암송하곤 하였다.’
10.별세: 1938년 11월 평남 고창교회에서 열렸던 사경회 마지막날 축도를 마친후 뇌출혈로 쓰러져 67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었음.
<<한 알의 밀알이 된 길선주목사의 사역>>
‘그는 29세때 회심후 40여년 동안 2만번 이상의 설교를 통해 약 380여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며, 3,0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60여개의 교회를 세웠고, 이를 통해 800여명의 목사와 전도사, 장로들을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