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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삼시의 전개와 의미망
인삼문화 https://doi.org/10.23076/jgc.2022.4.013 Research Article 초 록 한민족은 역사 기록 이전부터 인삼을 복용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 시(漢詩)는 신라, 고려,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 로 발전,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인삼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한국인의 한시 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인삼(人 蔘), 산삼(山蔘), 홍삼(紅蔘), 백삼(白蔘) 등을 키워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 고전종합DB’를 검색해 인삼에 관한 시를 찾아내어 그 의미망을 살펴보았다. 인삼 관련 한시를 편의상 ‘인삼시(人蔘詩)’로 명명(命名)했다. 2021년 11월 현재, 검색을 통해 찾아진 ‘인삼시’는 삼국시대 2편, 고려시대 2편, 조선시대 23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삼시의 시초는 6세기경 고구려에서 백성이 노래로 불렀 던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이란 시다. 고려시대 인삼시는 안축(安軸)의 시 로 대표된다. 안축은 인삼 조공의 부작용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노래했다. 조 선시대의 인삼시는 전기 서거정과 후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 서거정의 인 삼시는 인삼의 신비적인 약리작용을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용재 성현 의 「인삼(人蔘)」이라는 시도 인삼의 신비한 약효를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 다. 다산 정약용의 인삼시는 실학자답게 대단히 실용적이다. 다산은 가장 많 은 다섯 편의 인삼시를 남겼다. 다산은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고 그 과정을 시로 남겼다. 그 시에서는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다산의 인삼 농사는 정조 이후 자연삼의 고갈과 재배삼의 보편화에 따른 전국적 현상이기도 했다. 19세기 초반부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로 인삼 농사 한국 인삼시의 전개와 의미망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하응백* Eung Bag Ha*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소장. Director, Korea Regional Humanities Resources Research Institute E-mail: hbooks@empas.com 주제어 •인삼한시 •인삼시 •고려인삼찬 •송악산삼 •약성인삼 •대보원기 •연년익수 14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가 성행했고, 여타 지역에서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김진수의 시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 동인당에서 조선의 인삼이 ‘松嶽山蔘(송악산삼)‘이란 상표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매천 황현도 1900년 한시로 된 인삼 시를 남겼다. 한국 한시의 전통에서 인삼시의 전개를 의미망으로 파악하여 도식화하면 이렇 게 된다. 1) 위민(爲民) 정신의 인삼시 - 고려의 신흥사대부(안축) 2) 낭만적 인삼시 - 조선 초기의 관학파(서거정, 성현 등) 3) 실용적 인삼시 - 조선 후기의 실학파(정약용, 김진수, 황현 등) 한국 인삼시의 전개를 살피면서 그 의미망을 추출해 보았다. ABSTRACT Even before recorded history, the Korean people took ginseng. Later, poetry passed down from China developed into a literary style in which intellectuals from the Silla, Goryeo, and Joseon Dynasties expressed their thoughts concisely. The aim of this paper is to find Korean poems related to ginseng and to look for their semantic network. To this end, “Korea Classical DB ”, produced by the 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was searched to find ginseng poems. As the result of a search in November 2021, two poem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wo poems from the Goryeo Dynasty, and 23 poems from the Joseon Dynasty were searched. An examination of these poems found that the first ginseng poem was “Goryeoinsamchan,” which was sung by people in Goguryeo around the 6th century. Ginseng poetry during the Goryeo Dynasty is represented by Anchuk’s poem. Anchuk sang about the harmful effects of ginseng tributes from a realistic point of view. Ginseng poetry in the Joseon Dynasty is represented by Seo Geo-jeong in the early period and Jeong Yakyong in the late period. Seo Geo-jeong’s ginseng poem is a romantic poem that praises the mysterious pharmacological effects of ginseng. A poem called “Ginseng” by Yongjae Seonghyeon is also a romantic poem that praises the mysterious medicinal benefits of ginseng. As a scholar of Realist Confucianism, Dasan Jeong Yak-yong wrote very practical ginseng poems. Dasan left five ginseng poems, the largest number written by one poet. Dasan tried ginseng farming himself and emerged from the experience as a poet. The story of the failure and Keywords •Korean ginseng •Korean Chinese ginseng poem •Sementic network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15 Ⅰ. 서론 - 한국 ‘인삼시’의 정의 역사 기록으로 보면 우리 민족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인삼을 영약(靈藥)으로 복용했다. 아마도 역사 기록으 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우리 민족은 그보다 더 오랜 옛 날부터 이미 약효를 알고 인삼을 복용하였을 것으로 추 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 ‘성덕왕·소성왕·경문왕’ 조(799년 7월)에 “9자나 되는 인삼을 얻어 매우 기이하 게 여겨, 당(唐)에 보내 그것을 진봉(進奉)하였는데”1)라 는 기록을 보면 신라 때도 인삼을 매우 귀한 약재로 다루 1)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을유문화사, 1983), p.255 었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한시(漢詩)는 삼국시대나 통일 신라 시대에는 최치원 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이 향유한 문학 장르다. 고려 시대 부터는 여러 지식인이 한시에 익숙해진다. 고려 광종 때 과거제도가 도입되고, 고려 중기 이후 과거제도가 본격 화되면서 고려의 지식인 중에는 한시(漢詩)를 자유자재 로 짓는 이규보(李奎報)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소위 본격적인 문인(文人)이 등장한 것이다. 이규보 이후에도 안축(安軸), 이제현(李齊賢), 이곡(李穀), 이색 (李穡) 등으로 시 창작의 전통이 이어지며, 조선조에 들 어오면서 한시의 창작은 더욱 융성하였다. 권근(權瑾)은 고려와 조선의 문학적 교량 역할을 하면 success of his ginseng farming was described in his poems. At that time, ginseng farming was wide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due to the depletion of natural ginseng and the development of ginseng farming techniques after the reign of King Jeongjo. Since the early 19th century, ginseng farming had been prevalent on a large scale in the Gaeseong region, and small-scale farming had also been carried out in other regions. What is unusual is Kim Jin-soo’s poem. At that time, in Tong Ren Tang, Beijing (the capital of the Qing Dynasty), ginseng from Joseon sold well under the “Songak Sansam” brand. Kim Jin-Soo wrote about this brand of ginseng in his poem. In 1900, Maecheon Hwanghyeon also created a ginseng poem,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Thus, the sema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isidentified asfollows: 1) Ginseng poetry in the spirit of the people - Emerging gentry in the Goryeo Dynasty (Anchuk). 2) Romantic ginseng poetry - Government School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eo Geo-jeong, Seonghyeon, etc.). 3) Practical ginseng poetry - Realist School in the late Joseon Dynasty (Jeong Yak-yong, Kim Jin-soo, H
Ⅱ. 본론 - 한국 인삼시의 전개 1. 삼국시대의 인삼시 1)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 記)』, ‘동란섭필(銅蘭涉筆)’ 조에 보면, 제목을 「고려인삼 찬(高麗人蔘讚)」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를 소 개하고 있다. 三椏五葉(삼아오엽) 背陽向陰(배양향음) 欲來求我(욕래구아) 椵樹相尋(사수상심) 세 가지에 다섯 잎이3) 양지를 등지고 응달로 향했구나 나를 얻고져라 이곳을 오려거든 가나무 밑에 찾아와 주려무나 위의 시는 『시경』의 시와 같이 4언으로 된 고시(古詩) 다. 이 시는 언제 지어진 누구의 시일까? 연암은 이 시를 소개하고, 이 시는 중국 문헌에 많이 실려 있다고 하면 서 가수(椵樹)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가수의 잎은 오 동잎과 비슷하여 잎이 넓어 그늘이 지므로, 인삼이 이런 음지에서 자란다고 한다. 가수는 ‘자작나무’로 우리나라 에서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라 했다. 연암의 글은 두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이 시가 중국 문헌에 많이 실려 있다, 둘째는 가 수는 잎이 넓은 자작나무다. 이 작품을 전하고 있는 문헌은 『속박물지(續博物志)』 를 비롯하여 『본초강목(本草綱目)』, 『명의별록(名醫別 錄)』, 『패관잡기(稗官雜記)』,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이 지만 처음 기록한 책은 6세기에 양(梁)나라 도홍경(陶弘 景)이 완성한 『명의별록(名醫別錄)』이다. 『패관잡기(稗 3) 번역은 이가원(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17 官雜記)』, 『해동역사』는 모두 『본초강목』과 『명의별록』에 서 인용한 것이다.4) 『한국 한시사』에 『본초강목』 초부(草部) 「인삼조(人 蔘條)」에 실린 도홍경(陶弘景)의 주(注)에 “처음 난 작 은 놈은 3~4 마디 쯤으로 한 줄기에 다섯 잎사귀이고 4~5년 후엔 두 줄기에 다섯 잎사귀이지만 꽃이 달린 줄 기는 없으며 10년에 이른 후에 세 줄기가 나고 묵은 놈 은 네 줄기에 각각 다섯 잎사귀가 있다(初生小者三四寸 許 초생소자삼사촌허, 一椏五葉 일아오엽, 四五年後 사 오년후, 生兩椏五葉 생양아오엽, 未有花莖 미유화경, 至十年後生三椏 지십년후생삼아, 年深者生四椏各五 葉 연심자생사아각오엽)”5)이라 하고 이 시를 인용하였 으므로 이 시의 정착 시기는 6세기 고구려까지 소급될 수 있다. 『해동역사』에도 고구려인의 작품이라고 했다.6) 요약하면 「인삼찬」 혹은 「고려인삼찬」이란 시는 지은이 는 알 수 없지만 6세기경 고구려에서 창작된 것으로 짐 작되며 이후 중국 문헌에 실리고 그것이 다시 한국 문헌 에 인용되었다. 이 시는 처음에는 고구려어로 지어져서 노래로 불렸고, 『명의별록』에 한역(漢譯)되어 실리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2) 신라로 돌아가는 김가기(金可紀)를 전송하다 9세기 중엽 당나라 시인 장효표(章孝標)가 신라인 친 구를 전송하는 이별 시에도 인삼이 등장한다. 이 시의 주인공은 신라인 김가기(金可紀)다. 김가기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후일 벼슬을 그 만두고 종남산(終南山)의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하였다 가 신라로 귀국하였다. 시는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김 4) 이에 대해서는 김은정(金垠廷)이 「형성기形成期) 한시(漢詩) 연구 (硏究)」(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5)에서 자세히 논했다. 5) 이 부분은 아마도 도홍경이 인삼의 성장을 자세히 모르고 쓴 것으 로 보인다. 실제 인삼은 처음 1년생은 한 줄기에 세 잎이고, 2년생 은 두 줄기에 각각 다섯 잎, 3년생은 세 줄기에 각각 다섯 잎, 4년생 은 네 줄기에 각각 다섯 잎, 그 후 최대 여섯 줄기에 각각 다섯 잎이 된다. 도홍경이 이 정도로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6) 블로그 「한국한시사, 한시의 초기 모습 - 1. 대륙(大陸)의 노래, 인 삼찬(人蔘讚)」에서 재인용(https://leeza.tistory.com/35010) 가기는 후일 다시 당나라로 건너가서 858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는 전설이 있다.7) 送金可紀歸新羅(송김가기귀신라) 登唐科第語唐音(등당과제어당음) 望日初生憶故林(망일초생억고림) 鮫室夜眠陰火冷(교실야면음화냉) 蜃樓朝泊曉霞深(신루조박효하심) 風高一葉飛魚背(풍고일엽비어배) 潮淨三山出海心(조정삼산출해심) 想把文章合夷樂(상파문장합이락) 蟠桃花裏醉人蔘(반도화리취인삼) 신라로 돌아가는 김가기를 전송하다8) 당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 말 말하는데 해를 보자 고국을 그리는 맘 생겨나네 교실에서 잠을 자니 음화가 싸늘하고 신기루에 배를 대니 새벽 노을 짙구나 바람 거세 일엽편주 물고기 위 날아가고 파도 자자 삼신산이 바다 속에서 올라오네 생각건대 문장 지어 향악에 맞추고는 반도화 핀 속에서 인삼주에 취하리라 이 시를 보면 당나라에서 신라인과 이별할 때 이별주 로 인삼주를 마셨다. 여기 등장하는 인삼은 당시 신라에 서 가져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장효표는 791년에 태어 나서 873년에 사망한 중당(中唐) 시인이다. 2. 고려의 인삼시 1) 매화(梅花) 고려 후기 진화(陳澕:1180?- ?)의 시에 인삼이 들어간 7) 김가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 8) 이 시는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은 정선용(한 국고전번역원) 18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구절이 있다. 진화의 호는 매호(梅湖), 1198년 사마시 수 석 합격, 120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 다. 1215년 고려 고종 2년 관료들이 일종의 시짓기 대회 를 했을 때 이규보가 수석, 진화가 차석을 했을 정도로 시재(詩才)가 뛰어났다. 다음은 진화의 시 「매화」다. 梅花(매화) 東君試手染群芳(동군시수염군방) 先點寒梅作淡粧(선점한매작담장) 玉頰愛含春意淺(옥협애함춘의천) 縞裙偏許月華涼(호군편허월화량) 數枝猶對撩人艶(수지유대유인염) 一片微廻逐馬香9)(일편미회축마향) 正似淸溪看疏影(정사청계간소영) 只愁桃李末升堂(지수도리미승당) 매화10) 동군이 시험 삼아 뭇 꽃들을 물들일 때 먼저 겨울 매화를 점찍어 담박하게 단장했네 옥 같은 뺨엔 봄 뜻 살짝 머금어 두고 흰 치마엔 달빛 싸늘하게 퍼져 있네 몇 가지만 대해도 사람 취하게 하는 요염함 있고 한 조각만 떨어져도 산삼처럼 향기롭네 정녕 맑은 시내에서 성긴 그림자 보는 듯하지만 다만 복사꽃 오얏꽃과 당에 오르지 못함이 근심이네 이 시에서 동군(東君)은 봄의 신. 봄의 신이 먼저 매화 를 피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매화가 한 조각만 떨 어져도 산삼처럼 향기롭다고 했다. 산삼을 뜻하는 원시 (原詩) 구절은 축마(逐馬)인데, 축마는 산삼(山蔘)의 다 9) ‘逐馬’는 ‘말을 좇는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양주동). 그러나 시 의 전개로 보면 이러한 번역은 매끄럽지 못하다. ‘단삼’이라는 한 약재를 ‘축마’ 혹은 ‘산삼’이라고도 한다. 위의 번역에서 ‘산삼’이 실 제 ‘산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대로 ‘산삼’이 아니라고 단정 하기도 어렵다. 10) 번역은 변종현·윤승준·윤재환 공역(한국고전번역원). 이 시는 『동문선』과 『매호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른 이름으로 현삼(玄蔘), 단삼(丹蔘)이라고도 한다.11) 물 론 이 시에서 주인공은 매화이며 인삼은 매화향을 강조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고려인들의 인삼 향에 대한 인식 을 알 수 있는 시라 하겠다. 2) 산삼을 탄식하다[蔘歎] 고려 말기 안축의 시는 본격적으로 인삼을 노래한다. 안축은 인삼에 대해 찬사를 한 게 아니라 인삼을 캐어 나라에 바쳐야만 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에 초점을 맞 춘다. 그래서 이 시의 부제(副題)는 “산삼 조공의 폐단이 심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蔘貢多弊故云삼공다폐고운)” 이다. 안축(安軸: 1282-1348)의 본관은 순흥(順興), 호 는 근재(謹齋)다. 경상북도 풍기에서 과거를 통해 중앙 으로 진출한 신흥사대부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의 길 에 들어섰고, 원나라 과거에도 급제했다. 상주목사, 정 당문학 등 요직을 거쳤다.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 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다. 안축 은 유학을 배운 신흥사대부로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는 고려말 정통 관료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다. 蔘歎(삼탄) 蔘貢多弊故云(삼공다폐고운) 神農著書論草名(신농저서논초명) 草中羅蔘藥最精(초중라삼약최정) 一根三枝開五葉(일근삼지개오엽) 理人神效難具評(이인신효난구평) 年年貢獻聖天子(연년공헌성천자) 藥局老醫皆嘆驚(약국노의개탄경) 船車商沽競求買(선차상고경구매) 轉賣遠方價不輕(전매원방가불경) 從此官家利其利(종차관가리기리) 歲收編民有期程(세수편민유기정) 物之貴者本自貴(물지귀자본자귀) 非如凡草賤生成(비여범초천생성) 方民採掘遍山谷(방민채굴편산곡) 11)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각주에서.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19 千搜萬索得一莖(천수만색득일경) 何曾計日足銖兩(하증계일족수량) 農衣弊盡披蓁荊(농의폐진피진형) 是時秋禾臥風雨(시시추화와풍우) 畏吏督納忘私營(외리독납망사영) 歸來對妻苦悲泣(귀래대처고비읍) 已有棄土流亡情(이유기토류망정) 乾坤生物賦藥性(건곤생물부약성) 本以至仁濟群生(본이지인제군생) 生民一病出於藥(생민일병출어약) 理藥之藥其誰行(이약지약기수행) 有能移根種遠方(유능이근종원방) 括根無種非所爭(괄근무종비소쟁) 吾民寧作至愚民(오민녕작지우민) 不須益智多聰明(불수익지다총명) 산삼을 탄식하다 - 산삼 조공의 폐단이 심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12) 신농씨가 책을 지어 풀이름 논하기를 풀 중에 나삼의 약효가 가장 영험하다 하였지 한 뿌리 세 가지에 다섯 잎이 피고 사람을 치료하는 신묘한 효능 다 평하기 어렵네 해마다 천자께 공물을 바치느라 약국의 늙은 의원 모두 탄식하고 놀라는구나 배와 수레로 상인들 다투어 사니 먼 지방에 내다 팔면 값이 비싸서라네 이로부터 관리들이 그 이익을 이롭게 여겨 해마다 기한을 정해 백성에게 거두어 가네 이 물건 귀한 것은 본래부터 귀해 날 때부터 천한 여느 풀과는 다르다네 백성들 채취하러 온 골짝 돌아다니지만 천만번을 찾아야 한 뿌리를 얻는다네 언제나 기한에 맞게 근수를 채우나 가시덤불 헤치느라 농부의 옷 다 해졌네 12) 번역은 서정화·안득용·안세현 공역(한국고전번역원) 가을 벼가 비바람에 누운 이때에 독촉하는 아전이 두려워 제 농사일을 잊었네 돌아와 아내 마주하고 몹시도 슬피 울면서 이미 고향 버리고 떠돌아다닐 마음먹었네 천지가 사물을 내고 약의 성질 부여한 것은 본디 지극한 인으로 군생을 구제하려는 것인데 백성의 온갖 괴로움이 이 약초에서 나오니 이 약초를 다스리는 약은 누가 만들려나 뿌리를 옮겨 먼 지방에 심을 수 있다면 뿌리 뽑고 종자 없애기는 다툴 일 아니네 우리 백성 차라리 어리석은 백성이 될지라도 지혜와 총명이 늘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안축의 이 시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시에는 14 세기 초반 인삼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적인 정보가 확인 된다. 당시 인삼은 모두 자연삼, 즉 산삼이었다. 자연삼 중에서도 나삼(羅蔘)이 가장 약효가 뛰어나 상품 대접 을 받았다. 나삼은 영남 지역, 특히 경주 일대의 산삼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도 강원도에서 채취한 삼은 산삼(山 蔘),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이라 했다. 인삼은 해마다 원나라 황제에게 공물(貢物)로 바쳤 다, 상인들이 인삼을 고가에 구매하기에, 관리들은 백 성에게 인삼을 캐서 바치게 했다. 특히 가을 추수철에 아전들은 인삼 바칠 것을 백성에게 채근했다. 백성은 자 기 농사도 포기하고 인삼을 캐러 다녀야 했다. 이에 백 성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차라리 인삼이 없었 으면 좋겠다는 백성의 한탄을 담은 내용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14세기 초에 인삼이 공물로 바쳐졌고 고 가로 거래됐다는 것. 그리고 관료들이 날짜와 수량을 정 해 백성에게 조세처럼 징수했다는 것 등이다. 조선 초기부터 중국과의 외교에 인삼은 필수적인 공 물로 활용되었다. 그 단초가 13세기, 14세기 고려시대에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조공 으로 바쳐졌지만, 그 약효가 중국 민간에도 알려지게 되 어 조선 인삼의 명성이 높아졌다. 이 시로 미루어보면 조 선 인삼이 동아시아에서 일류 상품의 위치를 차지한 때 20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가 바로 13, 4세기 무렵이라고 짐작한다.13) 당시 고려와 원나라에 다 익숙했던 국제적 지식인 근재 안축은 그런 일류 상품 인삼일지라도 그것을 캐기 위해서 수반될 수 밖에 없는 백성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았다. 신흥사대부 의 위민(爲民), 애민(愛民) 정신은 바로 이색, 정몽주, 정 도전 등의 후배에게 이어진다. 3. 조선의 인삼시 조선시대에 인삼은 사대선린외교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품이었다. 중국과 일본, 심지어는 유구국(오 키나와)까지도 우리의 인삼을 명약으로 여기고, 조선 인 삼 구하기에 성의를 다했다.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으레 인삼 선물을 받았다. 인삼 선물의 값어치는 대단했 다. 인삼의 약효 또한 국내 외에 널리 알려졌다. 이 인삼 의 약효에 대해 조선 초의 서거정이 시를 남겼다. 1) 청신(淸晨) 조선 초기 가장 많은 한시를 지은 관료가 바로 서거정 이었다. 조선의 개국 공신 권근(權近: 1352-1409)의 외 손자였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조선 초기, 가 장 활발하게 시를 지은 사대부다. 양과 질 모두에서 후 인(後人)을 놀라게 한다. 호는 사가정(四佳亭). 세종부 터 성종까지 무려 6대에 걸쳐 임금을 모시며 ‘문학의 정 부(政府)’ 역할을 한 서거정은 평생 6,000여 수의 시를 지 었다. 그는 불암산 남서쪽 자락에 살면서 술을 좋아했고 육조(六曹) 판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한성부 판윤 (判尹)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3) 물론 한시만으로 이렇게 추론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신라나 고구 려 시기부터 한반도의 인삼은 그 약효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이렇게 추론한 결정적 이유는 13세기부터 14세기까지 약 100년 동안 고려가 원나라에 예속되어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 기 때문이다. 세계적 제국 원나라에 인삼을 조공했다는 것은 역설 적으로 인삼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 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淸晨(청신) 淸晨小坐擁緜衾(청신소좌옹면금) 窓日暉暉淨客心(창일휘휘정객심) 歲月幾何詩是史(세월기하시시사) 顏容如此酒宜箴(안용여차주의잠) 防身只有杜陵劍(방신지유두릉검) 垂橐曾無陸賈金(수탁증무육가금) 何日還鄕仍乞骨(하일환향잉걸골) 白鑱歸去斲人蔘(백참귀거착인삼) 청신14) 새벽부터 일어나 솜이불 쓰고 앉았다 보니 창 사이 밝은 햇살이 손의 맘을 맑게 해주네 세월은 그 얼마런가 시가 바로 역사인데 얼굴은 이 지경이니 술을 의당 삼가야지 몸 방어할 만한 두릉의 칼만 있을 뿐이요 텅 빈 낭탁엔 일찍이 육가의 금이 없었네 어느 날 고향에 가서 그대로 사직하고 쟁기 보습 채워서 인삼이나 캐볼거나 이 시에서 서거정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생각에 잠긴다. 모아 놓은 큰 재산은 없지만 그리 궁색하지도 않다. 문 제는 건강이 그렇게 좋지 않고 얼굴이 엉망인데, 그 원인 은 다 술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사직을 하고 인삼을 캐 볼까나, 하고 노래한다. 술로 인하여 몸이 힘드니, 고향 으로 돌아가 벼슬을 사직하고 인삼이나 캐어 먹고 몸보 신이나 하겠다는 내용의 시다. 주제와는 큰 상관은 없지 만, 인삼이 술로 인한 병에 큰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15 세기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의 시다. 2) 만금(晩唫) 만금은 서거정의 시다. 제목에서 만(晩)은 황혼의 뜻, 금(唫)은 음(吟)과 같은 의미로 읊다, 짓다, 노래하다의 뜻. 여름날 석양에 떠오른 생각을 표현한 시다. 14)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21 晩唫(만금) 畏日淡將夕(외일담장석) 微風吹小亭(미풍취소정) 長林爭宿鳥(장림쟁숙조) 細草暗飛螢(세초암비형) 古木新荑出(고목신이출) 疎枝病葉零(소지병엽령) 平生長抱渴(평생장포갈) 石鼎煮參苓(석정자삼령) 석양에 읊다15) 두려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실바람이 작은 정자로 불어오네 긴 숲에선 자는 새가 서로 다투고 잔 풀 위엔 개똥불이 침침도 해라 고목나무에선 새싹이 터 나오고 성긴 가지에선 병든 잎이 떨어지네 평생에 길이 소갈증을 앓는 터라 돌솥에 불 지펴 삼령을 달이노라 이 시는 서거정이 소갈증에 오래 고생했다는 것을 밝히 며, 소갈증을 치료하기 위해 돌솥에 삼령(參苓)을 달여 먹었음을 말하고 있다. 삼령은 인삼(人蔘)과 복령(伏苓) 을 합쳐서 부른 말이다. 복령은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균체로 한약재다. 3) 강원(江原) 조 감사(曺監司) 간(幹)이 인삼을 부쳐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 서거정의 시다. 강원도 관찰사(감사)에게 인삼을 선물 받고 사례하는 시다. 謝江原曹監司幹(사강원조감사간) 寄人蔘(기인삼) 藥聖人蔘出古方(약성인삼출고방) 一枝三椏最爲良(일지삼아최위량) 忽承佳惠能無感(홀승가혜능무감) 病骨還蘇喜欲狂(병골환소희욕광) 15)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강원 조 감사 간이 인삼을 부쳐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16) 약 중의 성인인 인삼은 고방에 나오거니와 한 줄기에 세 가장귀가 난 게 가장 좋다지 갑자기 이런 은혜 받고 감격하지 않을쏜가 병든 몸 소생하니 기뻐서 미칠 것만 같네 이 시는 인삼에 대해 찬양하고 약효를 직접 복용하여 입증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 초기 대문장가이자 문학의 정부라고 할 만한 서거 정의 시라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시에 나오는 ‘약성인삼(藥聖人蔘)’은 ‘약 중의 가장 뛰어난 약’ 혹은 ‘약 중의 성인(聖人)이 인삼’이라는 뜻으로 광고 문구로 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표현력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고방(古方)’은 고래로부터 전해 오는 약방문(藥方文)이 라는 뜻. 강원도 관찰사 조간(曹幹)이 서거정에게 인삼을 보내 주었고, 이 인삼을 복용해서 병이 치료되었다는 건데, 서거정은 소갈증으로 고생했으니 강원도 산(産) 인삼을 복용하고 술병이나 당뇨에 차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 다. 조간은 세조, 성종 때의 관료로 조간이 강원도 감사 (관찰사)로 임명된게 1487년이고, 이듬해인 1488년까지 감사로 있었다. 그런 정황으로 추측하면 이 시는 1488년 창작된 게 분명하다. 시 창작시기와 시의 창작 동기가 밝 혀져 있기에 이 시는 인삼사(人蔘史)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다.17) 4) 차사가운(次四佳韻)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잘 알려진 대로 세조의 찬탈에 절망하여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한시의 전통에서는 선배나 고인(古人)이 남긴 시에서 운(韻)을 가 져와 자신이 시를 붙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두보나 16)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17) “조간(曹幹)을 가선 대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 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1487년 10월 26일)의 기록이다. 조 간은 겨울에 임명되어 강원도에 부임했으므로 이듬해 서거정에 게 인삼을 보낸 것으로 추측한다. 22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이백과 같은 대시인의 운을 사용하거나, 고려나 조선의 선배 시인의 운을 가져오기도 했다. 사가(四佳)는 바로 서 거정. 김시습이 서거정의 시에 차운해서 이 시를 지었다. 서거정의 어떤 시를 차운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次四佳韻(차사가운) 床前詩筆懶全提(상전시필나전제) 信步東園薦草鞋(신보동원천초혜) 蜂唼花鬚香惹徑(봉삽화수향야경) 麝眠春塢綠沿溪(사면춘오녹연계) 壠頭枸杞千莖長(롱두구기천경장) 巖畔人蔘五葉齊(암반인삼오엽제) 禪院荒凉塵事少(선원황량진사소) 畫棟唯有燕沾泥(화동유유연첨니) 서거정의 시를 차운하여18) 책상 앞의 시필을 귀찮지만 다 마치고 동쪽 동산 거닐매 짚신이 좋아라 벌이 꽃술을 빨아 향기가 길에서 일고 사향노루 봄 언덕에서 조는데 푸른 빛은 시내를 따른다 밭두덕 머리의 구기는 천 줄기 길었고 바위 곁의 인삼은 다섯 잎이 가지런하구나 선원은 쓸쓸하여 속세 일이 적은데 화동에는 제비만이 진흙을 쌓네 이 시는 김시습이 선원(禪院)에 머물면서 원고 작성을 끝마치고 선원 주위를 산책하는 일상을 표현한다. 깊은 산이라 노루가 놀고, 바위 곁에는 인삼이 자라고 있다. 김시습이 살았던 15세기에는 인삼을 보편적으로 재배하 지는 않았기에, 이 시에 등장하는 인삼은 자연삼, 즉 산 삼으로 추측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기만 해도 산삼 은 귀하기는 하였지만, 요즘처럼 찾기 어려운 그런 식물 은 아니었다. 18) 번역은 김달진 5) 인삼(人蔘) 인삼에 대한 여러 시가 인삼 자체보다 인삼과 관련한 여러 상황을 노래한 경우가 많았다면 성현의 시는 인삼 그 자체를 묘사하고 노래하고 있어 매우 귀중한 시로 평 가할 수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은 호는 용재(慵 齋), 허백당(虛白堂). 시문이 뛰어나고 글씨도 좋았다. 음률에 뛰어나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대사헌, 예조판서, 경상도 관찰사, 장악원 제조를 역임하였다. 人蔘(인삼) 地靈多異物(지령다이물) 香霧滿山溪(향무만산계) 婀娜三枝秀(아나삼지수) 葳蕤五葉齊(위유오엽제) 劑和分佐使(제화분좌사) 烹瀹用刀圭(팽약용도규) 願保殘年性(원보잔년성) 紅塵不久迷(홍진불구미) 인삼19) 신령한 땅엔 특이한 물건도 많거니 향기로운 안개가 오솔길에 가득하네 아리따운 세 가장귀는 빼어나고 무성한 다섯 잎은 가지런하여라 조제할 때는 군신좌사를 나누고 팽약한 약재는 도규를 사용하네 원컨대 여생의 명이나 보전토록 홍진에 오래 골몰하지 않으련다 이 시는 인삼의 약효를 설명하면서 인삼의 신비함을 강조한다. 약을 조제할 때는 인삼을 주재료로 사용할 때가 많고, 여러 방법으로 인삼을 복용한다. 하지만 비 록 인삼에 의지해 병을 고치기는 하지만, 세속에 휩쓸려 타락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 사 대부들이 으레 하는 말이 홍진(紅塵)에 물들지 않겠다 는 것이니, 이 시에서 특이한 것을 찾으면 인삼에 기대어 병을 치료해보겠다는 희망이다. 신비한 인삼의 약효를 19)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23 기대하는 시다. 6) 6월 유두날에(六月流頭日) 이 시는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지었다. 남효 온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호는 추강(秋江)이다. 한시는 때로 제목이 상당히 긴 경우가 있다. 시를 짓게 된 동기나 배경, 날짜 등을 기 록했다. 이 시에도 남효온이 어느 해 6월 유두일(15일), 친구인 종지(宗之)와 숙도(叔度) 등과 함께 남산 성재암 동에 놀러 갔던 이야기를 제목으로 달고 있다. 종지는 허종(許琮:1434-1494), 숙도는 이칙(李則:1438-1496). 성재암동은 어딘지 불명(不明)이다. 산삼을 캐어 반찬을 할 정도였으니, 당시에는 산삼이 비교적 흔했다고 볼 수 있다. 六月流頭日與宗之叔度太眞遊南山聖齋岩洞張蓑度 雨使人炊飯手採山蔘以配飯夜二更雨歇月出戴月而下 (유월유두일여종지숙도태진유남산성재암동장사도우사 인취반수채산삼이배반야이경우헐월출대월이하) 老子老持律(노자노지율) 詩扁已戒荒(시편이계황) 溪山起我病(계산기아병) 馮婦下車忙(풍부하차망) 6월 유두날에 종지·숙도·태진과 함께 남산 성재암동에 놀러가서 도롱이를 펴 비를 피하며, 사람을 시켜 밥을 짓 고 손수 산삼을 캐어 반찬을 하였다. 밤 이경이나 되어서 비가 그치고 달이 나와서 달빛을 보며 내려왔다20) 늙은이가 늙어서도 율을 가지며 시편에서 이미 계가 거칠었다 시내와 산이 내 병을 일으키는데 풍부는 수레에서 내리기가 바쁘다 친한 친구가 찾아와 산 중에서 놀게 되었다. 남효온은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친구가 멀리서 술을 가지고 기생까지 데리고 왔으니 어찌 안 마 20) 번역은 김달진 실 수 있나. 친구들 대접하느라고 손수 산삼을 캐어 생 색을 냈다. 그리고는 취해서 자다가 달빛을 보고 산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시다. 태진(太眞)은 양귀비의 별칭. 기생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7) 다시 금강대에 오르다(復登金剛臺) 명종, 선조 때 문신인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시다. 호는 소재(蘇齋). 이언적(李彦迪)의 제자로 명종 때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19년간 전남 진도에서 오랜 귀 양살이를 했다. 선조 때 복직되어 우의정, 좌의정을 거 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직전에 죽 었다. 復登金剛臺(복등금강대) 興來何地是難躋(흥래하지시난제) 斷壁重重亦可梯(단벽중중역가제) 玉犬金雞鳴左右(옥견금계명좌우) 雲龕石室遍高低(운감석실편고저) 後凋琪樹千章老(후조기수천장로) 上品靈苗五葉齊(상품영묘오엽제) 更有幾峯爲絶頂(갱유기봉위절정) 依然虫鵠自雲泥(의연충곡자운니) 다시 금강대에 오르다21) 흥이 나면 그 어딘들 오르기 어려울쏜가 층층 절벽도 사다리로 오를 수 있고말고 옥견이랑 금계는 좌우에서 울어 대고 감이랑 석실은 높고 낮게 널려 있네 사철 푸른 좋은 나무는 천 그루가 고목이요 상등품 영초의 싹은 다섯 잎이 가지런쿠나 다시 그 몇 봉우리가 절정을 이루었던고 충곡이 서로 운니의 차이가 있는 것 같네 21) “조간(曹幹)을 가선 대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삼았 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8년(1487년 10월 26일)의 기록이다. 조 간은 겨울에 임명되어 강원도에 부임했으므로 이듬해 서거정에 게 인삼을 보낸 것으로 추측한다. 24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이 시에서 옥견, 금계는 모두 경치가 좋은 곳. 상등품 영초는 인삼을 말한다. 마지막의 층곡과 운니는 높고 낮 은 산봉우리와 계곡의 높낮이에서 오는 아찔한 산악미 를 뜻한다. 금강산의 경치를 노래하는 시로 금강산에 질 좋은 산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한양으로 가는 유선원(柳善元)을 전송하다 중국에서 조선의 인삼과 인삼·우황을 주성분으로 만든 우황청심환 등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명약으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사정을 보여주는 유몽인 (柳夢寅: 1599-1623)의 시가 있다. 이렇게 조선의 인삼 이 중국에서 인기가 높자, 조선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이 후 청나라에 가는 사신은 8포 무역의 원칙에 따라 인삼 8포22)를 지참하여 이를 출장비로 썼다. 유몽인은 8포 무 역을 원칙적으로 정하기 직전, 중국 사신으로 북경에 다 녀 왔다. 送柳善元赴京(송유선원부경) 二首(이수) 約束牛腰海錯乾(약속우요해착건) 黃蔘白箑日賖餐(황삼백삽일사찬) 投膠溷井行廚陋(투교혼정행주루) 緣葦橫渠去路難(연위횡거거로난) 豹脚殷雷盤野濕(표각은뢰반야습) 駞旃衝暑鶴城寒(타전충서학성한) 吾纔懲熱君循轍(오재징열군순철) 百褶生顔鼻觀酸(백습생안비관산) 御寇排風再浹旬(어구배풍재협순) 天遊屬子壯觀新(천유속자장관신) 擎空石闕開雙碣(경공석궐개쌍갈) 衣地瑤塼比萬鱗(의지요전비만린) 22) 1628년(인조 6)부터 북경으로 가는 사행원은 출장비 명목으로 은 (銀) 대신 각기 8포(八包:80근)의 인삼을 가져갈 수 있었다. 이를 8포 무역이라 한다. 인삼 1포는 10근, 8포는 80근이다. 약 50kg 정도다. 정사, 부사, 서장관, 역관 등이 사행원이다. 이들은 인삼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象背山移金輦進(상배산이금련진) 螭頭筍束玉班陳(리두순속옥반진) 羣仙問我東瀛舊(군선문아동영구) 謫滯人間十一春(적체인간십일춘) [辛卯丙申赴京(신묘병신부경) 到今丙午十一年(도금병오십일년)] 한양으로 가는 유선원(유경종)을 전송하다 2수23) 소허리처럼 꽁꽁 싸맨 말린 해산물 누런 인삼 흰 부채로 날마다 사다 먹네 아교 던져 우물을 더럽힌 듯 주방은 누추하고 갈대 타고 도랑 건너듯 가는 길은 어렵구나 들판이 젖어 얼룩 모기 우레처럼 윙윙대고 요동성 싸늘한데 깃발은 더위를 뚫고 가네 내가 징갱취해 하자마자24) 그대가 전철을 따르니 백 겹 주름 얼굴에 생겨 코끝이 시큰하네 스무날 동안 열어구처럼 바람 타고서 그대가 멀리 유람하니 장관이 새로우리라 하늘 떠받치는 바위문은 한 쌍 비갈처럼 펼쳐지고 땅을 덮은 벽돌은 만 개의 비늘 같다네 산을 옮길 듯한 코끼리 사이로 어가가 나아가고 죽순 묶음 같은 이두에 관원 반열 늘어섰으리 신선들이 내게 동해에 얼마나 있었냐고 묻거든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지 11년이라 하리라 [신묘년(1591)과 병신년(1596)에 북경에 갔으니 지금 병오년(1606)까지 11년이다] 이 시를 보면 당시 중국 출장의 열악함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유몽인이 출장을 갔던 명나라에서 사신단은 중국 에서 인기 품목이었던 조선의 인삼과 부채로 식료품을 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숙소는 누추하고 지저분 23) 번역은 장유승(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4) “징갱취해 하자마자”는 뜨거운 국에 덴 사람은 냉채도 불어먹는 다는 말. 한번 위험을 겪고 조심하는 태도를 말한다.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25 하며, 모기떼에 시달렸다. 유몽인은 1606년 세 번째 11 년만에 다시 중국 사신으로 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다. 곧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의 주인은 청나라로 바뀌 게 된다. 9) 봉산 동선으로 가는 도중에 읊어 참판 오만취 에게 드리다 이 시 역시 유몽인의 시이다. 위의 시가 중국 초입에서 지 은 시라면 이 시는 중국 수도 북경에 입성하여 지은 시이다. 鳳山洞仙途中口占奉呈吳參判晩翠 (봉산동선도중구점봉정오삼판만취) 疲馬虺隤入石叢(피마훼퇴입석총) 輕衫勃窣飽山風(경삼발솔포산풍) 海關春盡王三月(해관춘진왕삼월) 巖峀袍多帝六宮(암수포다제육궁) 樊噲治途勞不績(번쾌치도로부적) 子輿傳食泰何功(자여전식태하공) 流聞漢卒虜奴我(류문한졸로노아) 市上人蔘齊紫同(시상인삼제자동) 봉산 동선으로 가는 도중에 읊어 참판 오만취에게 드 리다25) 피곤한 말은 자갈길 다니느라 지쳤는데 가벼운 적삼은 산바람 맞아 부풀었네 바다 입구에 봄이 다하는 삼월에 바위산이 황제의 대궐을 감싸고 있네 번쾌는 길을 다스리며 치적을 자랑하지 않았는데 맹자는 떠돌아다니며 무슨 공을 자랑했나 들으니 중국 군사가 우리를 오랑캐로 여겨 시장에 인삼이 제자(齊紫)와 같다 하네 오만취는 오억령(吳億齡: 1552-1618)으로, 호가 만 취(晩翠). “시장에 인삼이 제자와 같다 하네”는 번역자 25) 번역은 장유승(한국고전번역원) 의 각주에 따르면 인삼을 찾는 중국 사람이 많다는 뜻이 다.26) 중국에서 인삼의 인기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 이형 여순(李兄汝詢) 순악(舜岳)이 조선 중기에 들어오면 자연삼이 귀해지면서 선물용으 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윤증(尹拯: 1629- 1714)은 선물 로 받은 인삼을 화분에 심어 싹을 보았다. 윤증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 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이 시에서 윤증에게 인삼을 보낸 사람은 이 순악(李舜岳:1625-1701)으로 자가 여순(汝詢)이었다. 1687년 강원도 인제 현감을 지냈다. 이때 이순악이 윤증 에게 인삼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李兄汝詢(이형여순) 舜岳(순악) 自麟蹄(자인제) 寄生蔘數本(기생삼수본) 種之盆中(종지분중) 新芽挺生(신아정생) 喜而詠之(희이영지) 亭亭玉立小牕間(정정옥립소창간) 來自寒溪萬疊山(래자한계만첩산) 不是閑人要玩物(부시한인요완물) 且將生意對衰顏(차장생의대쇠안) 이형 여순(李兄汝詢) 순악(舜岳)이 인제(麟蹄)에서 생삼(生蔘) 서너 뿌리를 부쳐 주기에 분(盆) 속에 심었더 니 새싹이 돋아 나왔다. 이에 반가워서 읊다. 정묘년27) 작은 창 사이에 뾰족뾰족 돋아난 삼 한계령의 첩첩 산을 넘어서 여기 왔지 일없이 완물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26) 제(齊)나라의 자줏빛 옷이라는 뜻으로, 『한비자(韓非子)』 〈외저설 (外儲說)〉에서 나온 말이다. 제 환공(齊桓公)이 자줏빛 옷 입기를 좋아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자줏빛 옷을 입었다. 환공이 관중의 조 언에 따라 자줏빛 옷을 입지 않자, 나라 사람들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삼을 찾는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 다.(장유승 역주에서) 27) 정묘년은 1687년. 숙종 13년이다. 이때 이순악이 강원도 인제 현 감이었다. 번역은 김동현(한국고전번역원) 26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시든 이 몸 너의 생기 대하려 함이지 완물은 꽃이나 그림을 감상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윤 증은 인삼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고 감상하면서도 인삼 의 생기를 대하고 싶다고 표현한다. 생삼을 선물하면 그 것을 화분에 심기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시로 가치가 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화분에 심어진 인삼을 보며 건 강을 기원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11, 12) 강호(江戶)에서 어명(御命)을 전달하면서 (조엄과 이인배) 1763년(영조 39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조엄, 이인 배. 김상익 등의 조선 통신사 일행은 약 1년간 일본에 다 녀왔다. 이 기록 전체가 바로 『해사일기(海槎日記)』이며, <일기>, <수창록(酬唱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통신 사 일행은 정사(正使)는 조엄(趙曮: 1719-1777)28), 부 사 이인배(李仁培: 1716-1774),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1721-1781), 서기관 성대중(成大中: 1732-1809) 등 총 477명이었다. 정사 조엄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임금의 명을 전달하면서 시를 지었고, 이것을 부사와 서기관 등 이 화답했다. 정사 조엄의 시와 부사 이인배의 시에 인삼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江戶傳(강호전) 命(명) 匪辟匪臣作威福(비벽비신작위복) 不知關白是何官(부지관백시하관) 親傳御札心如碎(친전어찰심여쇄) 追憶辰年淚欲瀾(추억신년누욕란) 萊市蔘椒徒日易(래시삼초도일역) 喬陵松柏尙春寒(교릉송백상춘한) 和戎本自非王意(화융본자비왕의) 一部麟書乙夜看(일부린서을야간) 28) 조엄은 당시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호에서 어명을 전달하면서29) 임금도 신하도 아닌데 위엄과 복을 만드니 관백이란 도대체 어떠한 벼슬인지 모르겠네 어찰을 전할 적에 심장이 찢어지는 듯 임진년을 추억하니 눈물이 쏟아지네 동래(東萊) 시장 삼초는 부질없는 무역(貿易)이라 교릉의 송ㆍ백은 봄이 아직 차가운 걸 화융 정책 본래부터 왕의 뜻이 아닐진대 한 질의 『춘추(春秋)』를 밤 깊도록 읽노라 이 시는 정사(正使) 조엄이 지었다. 상당히 의미깊은 시로, 먼저 일본의 관백(關白)을 정의한다. 관백은 임금 도 아니고 신하도 아니다. 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 로 말미암아 우리 조선은 엄청난 전란에 휩싸여 7년의 전란을 겪었고, 임금은 의주까지 몽진(蒙塵)을 해야 했 다. 그런 일본에 가서 관백을 만나서, 평화적 외교 관계 를 구축하면서도 조선의 위엄을 보여야 하는 게 조선 정 사(正使)의 임무다. 역사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진다. 왜를 달래느라고 인삼 무역을 하지만, 애당초 그들의 잔 인함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주는 인삼도 아깝다. 오랑캐 와 화기애애하게 지내라는 건 원래 임금의 뜻이 아닐 건 데, 그래서 『춘추』를 읽는다고 말한다. 『춘추』란 역사. 임 란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정신 바짝 차리라는 내용의 시 다. 일본에 가는 여러 부사와 통신사 일행의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한 시라 볼 수 있다. 이에 부사(副使) 이인배가 시를 붙인다. 使名回答更通信(사명회답갱통신) 辛苦和戎愧漢官(신고화융괴한관) 象舌徒凭多忍垢(상설도빙다인구) 馬情殆甚恐推瀾(마정태심공추란) 交隣蔘貨年年盡(교린삼화년년진) 衝斗虹光夜夜寒(충두홍광야야한) 從古詩人箴戒切(종고시인잠계절) 29) 번역은 신호열(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27 二陵風雨帶愁看(이릉풍우대수간) 사신의 명칭 회답사라 통신사라 붙여30) 애써 화친하려는 한관이 부끄럽네 통역에만 의지하니 욕(辱)을 참는 일도 많아 마도(馬島) 정세 자못 험해 파란이 또 일까 두렵네 해마다 교린하느라 인삼(人蔘)도 없어지고 별 부딪치는 무지개 빛은 밤마다 싸늘하구나 시인의 잠계는 예전부터 절실하여 이릉의 비바람을 수심 속에 바라본다오 이인배의 시는 좀 더 구체적이다. 통역에 의지해야 하 는 불편함이 있고, 대마도 정세가 불안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해마다 일본을 달래느라 인삼을 많이 사용한 게 너 무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런 실무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 영조 때는 자연삼이 고갈되어 중국과의 조공 무역에 산삼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정조 이후에야 재 배삼이 주력 무역품이 되어 인삼 부족 사태에서 벗어나 게 된다. 중국 사행단이 8포로 한정하여 가져가던 인삼 도 모자라, 인삼을 은(銀)으로 대신하여 가져가게도 하 였지만, 그것은 인플레이션 효과를 가져와 물가가 오르 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에 영조가 중국 수입 사치품 소 비 억제를 솔선하기도 하였다. 국가 경제 전체로 보면 은 의 유출은 물가 불안을 자극하였다. 은을 대신할 수 있 는 인삼은 그만큼 값진 물품이었다. 조엄과 이인배의 시 에서 나오는 구절을 통해 당시의 고위 관료들이 국가 자 원으로 인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3) 상안흥에서 자다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시다. 채제공의 호는 번 암(樊巖). 이 시는 『망미록(望美錄)』에 수록되어 있다. 宿上安興(숙상안흥) 日落征夫猶遠心(일낙정부유원심) 30) 번역은 신호열(한국고전번역원) 蕭蕭驅馬度橫岑(소소구마도횡잠) 風泉衆壑樵歸盡(풍천중학초귀진) 雨氣中林犬吠深(우기중임견폐심) 屋富始能舂鬼麥(옥부시능용귀맥) 山淸時得採人蔘(산청시득채인삼) 含悽羡爾優閒界(함처이이우한계) 行路難行無古今(행로난행무고금) 상안흥에서 자다31) 해 저무는데 나그네는 멀리 가려는 마음 있어 쓸쓸히 말을 몰아 가로지른 봉우리를 넘어간다 바람 소리 물소리 울리는 골짝엔 나무꾼 다 돌아갔고 비 젖은 숲 속 깊은 곳에선 개 짖는 소리 들려온다 부유한 집에서는 비로소 귀맥을 찧어 먹고 맑은 산에서는 때때로 인삼을 캐어 온다 서글픈 난 한가로운 세계가 부러워라 길 가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구나 정조 임금 때 총애를 받은 채제공은 영조 임금 때 깐깐 한 일 처리로 민원인에게 불만을 사서 이로 인해 강원도 삼척으로 1년 정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32) 삼척으로 귀양을 가는 길에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을 거쳤다. 이때 채제공은 상안흥에서 1박을 했고 귀양길의 감회 31) 번역은 양기정(한국고전번역원) 32) 나는 신미년(1751, 영조27) 7월에 삼척(三陟)으로 귀양 갔다가 임신년(1752) 8월에 비로소 사면을 받았다...(중략)... 배소에 도 착하여 죽서루(竹西樓)와 가까운 민가를 골라 거주하였다. 삼척 수령인 옥호(玉壺) 정하언(鄭夏彦)은 세속에 매이지 않는 선비였 다. 날마다 나를 맞이하여 죽서루 위에서 노닐지 않으면, 오십천 (五十川)에 배를 띄우고 노닐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매번 운(韻)을 뽑았고, 운을 뽑아서는 항상 종이를 펼쳐 깨끗이 시를 베꼈으니, 그 시편(詩篇)이 찬란하게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그때가 내 평 생에 가장 실의(失意)하였던 유배길이었으나, 또한 평생에 가장 득의(得意)하였던 유람이 아니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시는 뜻 을 말하는 것이다. 초택(楚澤)에서의 울적한 심사를 자연히 글에 다 풀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저 하늘 끝에 있는 미인을 그리도 다.〔望美人兮天一方〕”라는 구절에서 더욱 가눌 수 없는 감회가 있 었다. 마침내 그 시편을 ‘망미록(望美錄)’이라 이름하였다.( 『망미 록』 서문>에서, 번역은 양기정(한국고전번역원) 28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를 시로 남겼다. 『망미록』은 소식(蘇軾)의 「전적벽부(前 赤壁賦)」에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 인을 그리도다.[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33) 미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인데, 여 기서 미인이란 영조 임금이다. 안흥은 지금은 찐빵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산골 오지로 자연삼 이 드물지 않게 발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귀맥’은 보리 의 일종. 14) 가을에 문암산장에서 지은 잡시34)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 鏞:1762-1836, 호는 茶山)은 매우 부지런해서 많은 수의 시를 남겼다. 다산은 일기를 작성하듯이, 시를 지어 남 겼다. 다산의 시는 구체적으로 당시의 사건, 상황, 풍경 등을 적시(摘示)하고 있어 그 시대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秋日門巖山莊雜詩(추일문암산장잡시)(九月也(구월야) 時因看刈留數十日(시인간예유수십일)) 茅棟蕭條只數椽(모동소조지수연) 恰看香稻滿階前(흡간향도만계전) 試思方朔長安米(시사방삭장안미) 爭似歐陽潁尾田(쟁사구양영미전) 谷邃泉寒氣未平(곡수천한기미평) 東風七月太無情(동풍칠월태무정) 今年悔種緗毛稬(금년회종상모나) 來歲須栽坼背秔(내세수재탁배갱) 山裏煙光屬晚秋(산리연광속만추) 全家都在石田頭(전가도재석전두) 棉花日曬敎兒拾(면화일쇄교아십) 豆莢霜凋倩媼收(두협상조천온수) 水市西通五里纔(수시서통오리재) 33) 양기정의 역주에서 인용. 34) 정미년은 1787년이다. 문암산장은 다산 정약용의 별장으로 현재 행정구역의 위치는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로 추정된다. 高秋穴口賈船來(고추혈구가선래) 朝盤怪有紅鰕漿(조반괴유홍하장) 聞道前宵賣炭廻(문도전소매탄회) 樵叟前林打鹿歸(초수전림타록귀) 一村讙賀動山扉(일촌환하동산비) 地爐燒炙兼蔥蒜(지로소자겸총산) 誰道農家未齧肥(수도농가미설비) 靑帝峰陰接漆園(청제봉음접칠원) 溪山恰是武陵源(계산흡시무릉원) 今年不患罌無粟(금년불환앵무속) 新採人蔘八九根(신채인삼팔구근) 籬落三更猛虎來(리락삼갱맹호래) 萬山寥寂一聲雷(만산요적일성뇌) 少年獨出柴門去(소년독출시문거) 趕到前溪取狗廻(간도전계취구회) 禪房窈窕石門東(선방요조석문동) 山葉經霜萬樹紅(산엽경상만수홍) 安得僧如支遁者(안득승여지둔자) 騎驢來往水雲中(기려래왕수운중) 가을에 문암산장에서 지은 잡시(9월이었다. 이때 벼 베는 것을 보기 위해 수십 일 동안 머물렀다)35) 서까래 두서너 개 호젓한 초가집에 뜰에 가득 향그런 벼 흐뭇하게 바라보니 동방삭의 장안 쌀이 절로 생각나는구나 구양수의 영미 전원 그것과는 어떨는지 골짝 깊고 샘물 차서 기온 아니 고른데 구월이라 동풍이 너무도 무정하네 금년에 찰벼 심어 후회가 막심하니 내년에는 아무쪼록 메벼를 심어야지 산속이라 풍경은 늦가을에 접어들어 온 가족 빠짐없이 돌밭머리 나와 있네 볕에 말린 목화는 아이에게 줍게 하고 35) 번역은 송기채(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29 서리 맞은 콩깍지는 할멈 시켜 거둔다네 서쪽으로 오 리쯤에 어시장과 서로 통해 늦가을 강어귀에 장삿배가 들어오네 아침상의 새우국 이상하다 하였더니 어젯밤 숯을 팔고 돌아왔다 이르네 나무꾼이 앞산에서 노루 잡아 돌아오니 온 마을 환호소리 산중 사립 술렁이네 흙화로에 구워내고 파 마늘 곁들이니 농가에선 고기맛 못 본다고 뉘 말하리 청제봉 북쪽으론 칠원과 접해 있어 아름다운 산수가 무릉도원 흡사한데 금년에는 쌀독 빌까 걱정할 게 없으렷다 팔구 뿌리 인삼을 이제 방금 캐냈으니 삼경 밤 울타리에 사나운 범 들어와 우레 같은 한 소리에 온 산중이 고요터니 소년 하나 사립문을 밀치고 빠져나가 시내까지 쫓아가서 개 빼앗아 돌아오네 석문이라 동쪽에는 절간이 그윽한데 산중 잎 서리 맞아 일만 나무 빨갛네 어찌하면 지둔같은 고승을 한 번 만나 시냇물과 구름 속을 나귀 타고 왕래할꼬 이 시에서 주목할 수 있는 대목은 6연이다. 당시 자연 삼은 고가(高價)로 거래되었다. “팔구 뿌리 인삼을 이제 방금 캐었으니”, 인삼 판 돈으로 쌀을 사면, 쌀독 빌까 걱 정이 없다는 내용이다. 자연삼이 점점 고갈되면서 자연 삼은 더 비싸지기에 산촌에 사는 농민 혹은 심마니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산삼을 찾으러 다닐 수밖에 없다. 이는 조선 땅에서 자연삼의 멸종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연삼 생산은 한계에 달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 기도 하다. 15) 고시 24수(古詩二十四首) 중 16수 다산은 고시 풍으로도 여러 시를 남겼다. 이 시는 정조 의 총애를 받으면서 벼슬살이를 할 때지었다. 古詩二十四首(고시이십사수) 人蔘本山草(인삼본산초) 今人種園圃(금인종원포) 生成雖藉人(생성수자인) 天性亦滋補(천성역자보) 雞鶩異貴賤(계목이귀천) 狎暱蓋受侮(압닐개수모) 崇山摩穹蒼(숭산마궁창) 所養一拳土(소양일권토) 大塊蒸精液(대괴증정액) 詎獨遺村塢(거독유촌오) 五穀混百草(오곡혼백초) 世降爲人樹(세강위인수) 臺省遺材賢(대성유재현) 山林訪愚魯(산림방우로) 제 16수36) 인삼 본디 산속의 풀이지마는 지금에는 밭에서 심어 가꾸니 자라난 건 사람 손 빌린 거지만 본성 또한 사람 몸 보양코말고 닭과 오리 서로가 귀천 다른데 한자리에 어울려 수모를 받네 하늘을 찌를 듯이 드높은 산도 인삼을 기르는 건 한줌 흙일 뿐 대지의 정기 양분 충만하거니 인가 마을 텃밭만 빠뜨릴 리가 오곡도 온갖 풀에 뒤섞였다가 세월 흘러 인간이 심은 것인걸 대궐에 어진 인재 버려두고서 산림에서 우매한 사람 찾누나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산의 경력을 잠시 확인 할 필요가 있다. 다산은 178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정 작 문과에는 계속 낙방했다. 1787년 문암산장에서 지은 시는 과거에 낙방한 상태에서 미래가 암울한 다산이 지 는 시였다. 그러나 다산은 2년 후인 1789년 마침내 식년 36) 번역은 송기채(한국고전번역원) 30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다. 이후 10여년 간 정조의 총애를 받고, 1793년에는 수 원성 설계에 많은 공헌을 한다. 고시 24수를 지은 시기 는 1795년이니 다산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산 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산림에서 사람을 찾지 말 고 대궐에 어진 인재가 있다는 건,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러한 인재 이야기를 인삼에 빗대었다는 거다. 과거에 인삼은 산에서 자랐지만, 지금 은 재배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가치 있는 인재는 과거 에는 산림에 있었지만, 지금은 인삼처럼 인가(대궐)에 있다는 거다. 정조의 총애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今人種園圃(지금 은 밭에서 심어 가꾸니)”라는 부분이다. 인삼씨를 파종 하여 가꾸는 게 완전히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 송파수작(松坡酬酢) 연작 중 인삼에 관한 시 다산의 오랜 친구가 바로 윤영희다. 윤영희(尹永僖: 1761-1828)의 호는 송파(松坡). 높은 벼슬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당파를 떠나 발이 넓었던 윤영희는 다산을 구 명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다산은 18년의 유배 에서 풀려난 이후 그의 고향 마재마을(현 남양주 소재) 에 기거하면서 송파 윤영희에게 보내는 여러 시를 지었 다. 송파수작(松坡酬酢) 연작 시는 1820년대 중반에서 윤영희가 사망한 1828년까지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에 나오는 ‘淞翁’(송옹)은 윤영희.37) ‘수작(酬酢)’이란 말은 술을 주고받거나 말을 주고받는 것을 뜻한다. 원래 ‘수 (酬)’는 주인이 객에게 술을 따르는 것을 뜻하고 ‘작(酢)’ 은 객이 주인에게 술을 따른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다산 이 송파 윤영희와 서신이나 시를 교환했음을 의미한다. 특이한 것은 다산이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다는 점 이다. 다산은 인력을 동원해서 본격적으로 인삼 농사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실패했다가 1828년 무렵에는 성공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세 시편에서 다산의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볼 수 있어 대단히 흥미롭다. 37) 심경호, 「여유당 전서 해제」, 한국고전종합DB 松坡酬酢2(송파수작2) 去歲西山拾瓦礫(거세서산습와력) 砌作蔘園高九尺(체작삼원고구척) 挖取山骨如去乙(알취산골여거을) 剪裁稜角皆循墨(전재능각개순묵) 作事平生惡鹵莽(작사평생오로망) 褊性由來好端直(편성유래호단직) 探究銳鈍句股弦(탐구예둔구고현) 地平水平因可測(지평수평인가측) 防齮須將匾石圍(방기수장변석위) 滲濕別用麤砂隔(삼습별용추사격) 隔水看工倍勞疲(격수간공배로피) 小舠往來如梭織(소도왕내여사직) 暑天淫淫苦多雨(서천음음고다우) 身著蓑衣脚乘屐(신저사의각승극) 要亦消閑送餘光(요역소한송여광) 未必貪得心俱溺(미필탐득심구닉) 冬暄春寒値今年(동훤춘한치금년) 早芽凍死嗟可憐(조아동사차가련) 三椏五葉誰復見(삼아오엽수복견) 根培子種都無全(근배자종도무전) 福分涼薄愧鄰里(복분량박괴린리) 利窟打破餘林泉(이굴타파여림천) 以時空亭來酌酒(이시공정래작주) 已誤華燈聽算錢(이오화등청산전) 飭種桃花三百樹(칙종도화삼백수) 與作仇池一洞天(여작구지일동천) 日高酣眠呼不起(일고감면호불기) 猶勝曳履趨花甎(유승예리추화전) 송파수작 두 번째38) 지난해에 서산에서 와력을 주워다가 인삼밭에 구 척 높이의 계단을 만들고 바위를 캐다가 가지런히 다듬은 다음 38)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31 모두 규격에 따라 모서리를 끊어 내었네 일을 하는 데는 평소에 거 을 싫어하고 좁은 성질은 본디 똑바름을 좋아하기에 예둔과 구고현을 더듬어 연구하여 지평과 수평을 이것으로 헤아리는데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납작돌 갖다 받치고 습기를 제하려고 자갈을 따로 채워 넣노니 물 건너의 공사 감독 피로하기도 해라 왕래하는 작은 배는 베 짜는 북과 같네그려 무더운 날에 비는 하염없이 내리는지라 도롱이 걸치고 나막신을 신었나니 요컨대 남은 생을 심심소일하자는 것이요 무엇을 얻고자 마음까지 탐닉한 건 아니라오 금년에는 겨울은 다습고 봄은 추워서 일찍 난 싹 얼어죽으니 가련도 하여라 세 가장귀 다섯 잎새를 어디서 다시 볼꼬 뿌리도 씨종자도 온전한 게 전혀 없네 지지리도 분복 없는 건 이웃에 부끄러우나 이끗 생각 타파하니 산수는 여유가 있어 빈 정자에 때로 와서 홀로 술을 따라라 청루에 가서 돈 주고 술 마시긴 이미 틀렸네 복사꽃나무 삼백 그루를 심게 하여 더불어 구지의 한 동천을 만들고서 불러도 안 일어나고 대낮까지 달게 잔다면 시간 맞춰 등청하는 고관보다 나으리 이 시에는 다산이 인삼밭을 조성한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서쪽 산에서 기와 조각이나 작은 돌을 주워와서 구척 높이의 계단식 밭을 조성했다. 이 밭은 수평을 잘 맞추고 물이 잘 빠지게 자갈을 채우고 하여 공을 들인 밭이었다, 다산은 이 공사 감독을 하느라 부지런히 현장 에 갔었다. 하인들에게 일을 시키고 감독하는 것은 다산 의 몫이었다. 비가 오는 여름에도 그렇게 부지런히 인삼 밭을 일구었다. 밭이 완성되어 인삼을 심었건만 겨울은 따스하고 봄이 추워 인삼 싹이 올라오다 다 냉해를 입어 죽어버렸다는 것. 돈을 벌어 기생집에 가기는 틀렸으나 그래도 홀로 빈 정자에서 술은 마실 수 있으니, 시간에 맞춰 출근해야 하는 관리보다 낫다고 다산은 스스로 위 로한다. 17) 범석호가 병오년에 회포를 기술한 시 십 수를 차운하여 송옹에게 부치다[次韻范石湖丙午書懷 十首簡寄淞翁] 10수 중 7수 次韻范石湖丙午書懷十首簡寄淞翁 (차운범석호병오서회십수간기송옹) 10수 중 7수 鱸可鱠兮芋可煨(로가회혜우가외) 水西新築小亭臺(수서신축소정대) 一桴二米新畬起(일부이미신여기) 五葉三椏別圃開(오엽삼아별포개) 未羨麻衣游太華(미선마의유태화) 誰能朮餌入天台(수능출이입천태) 今年大有於焉計(금년대유어언계) 紫李紅桃取次栽(자이홍도취차재) 범석호가 병오년에 회포를 기술한 시 십 수를 차운하여 송옹에게 부치다 10수 중 7수39) 농어를 회칠 만하고 토란도 구울 만하여 물 서쪽에 조그마한 정대를 새로 지었는데 한 껍질에 두 톨 쌀은 새밭에서 나오고 다섯 잎에 세 가장귀는 별포에 피어 있나니 화산에 노닐던 마의도 부럽지가 않거니와 누가 능히 약을 캐자고 천태산에 들어가랴 금년의 대풍은 이에 헤아릴 수 있으니 오얏이며 복숭아를 차례로 심자꾸나 인삼밭을 일구고 첫해는 봄 냉해를 입어 참담한 실패 를 했다. 하지만 어느 해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드디 어 다산의 인삼 농사는 순조로워졌다. 다산은 그곳에 새 로 정자도 짓고, 별포(別圃)라 이름지었다. 약을 캐자고 천태산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한 건, 그만큼 다산의 39)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32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인삼 농사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인삼 농사가 잘되어 인삼(약)을 많이 수확하면 굳이 산에 약 을 캐러 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이 해는 벼농 사도 대풍이어서 다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18) 송파수작(松坡酬酢) - 앞의 운자를 재차 사용 하다 다산은 인삼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남겼는데 이 시가 인삼에 대한 마지막 시로 보인다. 松坡酬酢(송파수작) 再疊(재첩) 度迷津西橫一葉(도미진서횡일엽) 自玆登亭無喘脅(자자등정무천협) 且愛人蔘茁萬本(차애인삼줄만본) 姑舍雲蘿垂百疊(고사운라수백첩) 無立錐地曷負耒(무립추지갈부뢰) 著等身書空投篋(저등신서공투협) 夙知羨魚須結網(숙지선어수결망) 未聞懸貆由不獵(미문현훤유불렵) 年來大計在種蔘(연래대계재종삼) 孔兄之交有梯接(공형지교유제접) 豈唯朝夕紓急憂(개유조석서급우) 不妨雲仍流世業(부방운잉류세업) 송파수작 - 앞의 운자를 재차 사용하다40) 미진의 서쪽으로 일엽주를 횡단하면은 여기서는 정자에 오르기 숨이 차지 않는데 자라는 인삼 만 포기가 우선 사랑스러워 백 겹이나 드리운 운라는 차치한다오 송곳 찌를 땅도 없으니 어찌 쟁기를 지랴 수많은 서책은 부질없이 상자에 담겨 있네 그물 있어야 고기 잡는 건 진작 알았거니와 사냥 않고 오소리 매달린 건 듣지 못했도다 근년엔 생활의 큰 계책이 인삼 심는 데 있어 40)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금전과의 만남에 연줄이 늘 닿나니 어찌 조석의 급한 걱정만 해소할 뿐이리오 자자손손 세업으로 전하여도 무방하리라 이 시는 다산의 인삼시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지은 것 으로 보인다. 다산의 집이 있었던 능내리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건너면 서종면이다. 이곳에 다산은 별포를 마 련하여 인삼을 심었다. 여기에 인삼 만 본(萬本)이 자라 고 있다. 다산은 이 인삼 만 본이 큰돈이 될 것을 기대한 다. 그래서 “생활의 큰 계책이 인삼 심는 데 있다(年來大 計在種蔘)”라고까지 한다. 다산은 세세손손 가업으로 전해도 무방하다고 할 만큼 인삼 농사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 개성으로 가는 길에서 정조 시대를 지나고 19세기에 들어가면, 자연삼은 거 의 고갈이 되고 재배삼으로 거의 모든 인삼이 대체된다. 개성의 송상(松商)은 농민들에게 자금을 풀어 인삼 농사 를 짓게 한다. 이 인삼은 홍삼으로 가공되어 전국으로 유 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821년 개성유수 오한원은 임금 순조에게 인삼 재배 와 관련해 한 편의 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에 “신이 살펴 본 바로는, 영의 주민들이 대부분 인삼 재배를 업으로 삼고 있는데 매년 북경(北京)에 들어가는 홍삼(紅蔘)은 오로지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而臣謹察營下居 民(이신근찰영하거민), 多以種蔘爲業(다이종삼위업), 每歲入燕紅蔘(매세입연홍삼), 專出於此地(전출어차 지)).....”라고 하고 있다.41) 여기서 ‘영’이란 개성 관내다. 1820년대에 이르면 개성에서 생산하여 가공하는 홍삼 이 대세가 되었고, 그것이 북경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 다. 개성유수 오한원의 상소를 보면 의주 상인들, 즉 만 상(灣商)이 홍삼을 따로 가공하여 무역을 하니 그것을 방지해달라고 요청한다. 이 상인들을 잠상(潛商)이라 41) 순조 21년 신사(1821)11월 29일(병자), 『조선왕조실록』(번역은 김준)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33 했다. 이때 홍삼 가공권 혹은 무역권을 두고 상인 집단 끼리 경쟁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20년대에 이르면 개성이 인삼 재배와 홍삼 제조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며, 개성 홍삼이 중국 수출품으 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 는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시 한 편이 있다. 松京道中(송경도중) 山山紫翠幾書堂(산산자취기서당) 籬落勾連碧澗長(리낙구연벽간장) 野笠卷風林雨散(야립권풍림우산) 人蔘花發一村香(인삼화발일촌향) 개성으로 가는 길에서42) 붉고 푸른 이 산 저 산 서당이 몇이라냐 울타린 푸른 시내 엇물려 길다랗네 삿갓이 바람 타자 수풀 비 흩날리니 인삼꽃 피어피어 한 마을이 향기로세 추사의 이 시는 인삼꽃이 피어 한 마을 전체가 향기롭 다고 했으니, 드디어 재배 인삼이 인삼의 주역으로 등장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제목이 개성으로 가는 길이 니, 개성 부근 어느 마을에서 대규모로 인삼을 재배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 송악산의 산삼은〔松嶽山蔘〕 김진수(金進洙:1797-1865)는 호는 연파(蓮坡). 특이 한 이력의 소유자다. 어려서부터 독서가로 이름이 높았 으나 벼슬을 위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 고 시짓기를 일삼았다. 요즘 말로 하면 시인이다. 연파는 중국 북경에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중국 견문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송악산삼(松嶽山蔘)」도 그러한 시 중의 하 나다. 42) 번역은 신호열(한국고전번역원) 松嶽山蔘(송악산삼) 松嶽山蔘貌似童(송악산삼모사동) 帶方紙色雪翻風(대방지색설번풍) 北鋪太冷南鋪熱(북포태냉남포열) 世態人情驗此中(세태인정험차중) 【自註】 我東仁蔘(아동인삼), 雖小根短莖(수소근단경), 箇箇繡匣裏貼搨紙曰(개개수갑이첩탑지왈), 此蔘(차삼), 出於高麗松嶽山鷄犬不聞之地(출어고려송악산계견불 문지지). 大補元氣(대보원기), 延年益壽等語(연년익수 등어), 誇張(과장), 散賣於外國館所(산매어외국관소), 中原物種之眞假(중원물종지진가), 亦可類推也(역가류 추야). 송악산의 산삼은43) 송악산의 산삼은 모양이 아이와 같고 처방을 달아 놓은 종이색은 눈이 바람에 뒤집힌 것 같네 북쪽 가게 너무나 썰렁한데 남쪽 가게 북적대니 세태와 인정을 이 안에서 징험할 수 있네 【自註】 우리나라에서 나는 인삼은 비록 뿌리가 작고 줄기가 짧더라도, 하나하나 수놓은 상자 속에 넣고 탑본한 종이를 붙이기를 ‘이 인삼은 고려 송악산의 개나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나온 것이니, 원기를 크게 보호하여 수명을 연장한다.’ 등의 말로 과장해서 외국의 관소에서 산매(散賣)한다. 그러니 중국 물품의 진위 여부 또한 미루어서 알 수가 있다. 송악산은 높이 488m의 개성에 있는 산이다. 고려의 도읍인 송도(松都)의 진산이다. 송악산은 개성을 상징 하는 산이다. 이 시에서 자주(自註-시의 지은이가 스스 로 붙인 주)에는 중국 북경 인삼판매점에서 광고 문구 와 ‘松嶽山蔘’이라고 종이를 붙여놓고 판매를 하는 광경 을 설명하고 있다. 종이에는 ‘개나 닭 우는 소리가 들리 지 않는 땅’이라 했으니 인가(人家)가 없는 곳, 즉 심산유 곡(深山幽谷)을 말한다. 이런 곳에서 재배 혹은 채취한 43) 번역은 김영죽·박동욱 공역(세종대왕기념사업회) 34 EB Ha /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인삼이 바로 ‘송악산삼’이고 이 인삼은 ‘원기를 보호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다고 광고 문안을 만들었다. 중국 북경 동인 상점에서 이렇게 인삼이 팔리고 있었다. 김진수의 이 시는 여러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송악산 삼이란 바로 개성 인삼이다. 이 개성 인삼이 중국에서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大補元氣 延年益壽’(크게 보 약이 되어 원기를 돋우고 해가 갈수록 힘이 나서 장수한 다)는 홍보 문안까지 붙여서 북경 가게에서 판매했음을 알 수 있다. 21) 송경 삼성동에서 황림의 김씨초당에 적다 〔松京 三省洞題篁林金氏草堂〕 19세기에 이르면 인삼 재배는 재배와 가공 모두 완성 단계에 이른다. 19세기 중반에 한장석(韓章錫:1832- 1894)은 개성, 김씨 초당에 관한 시를 남기는데, 여기에 인삼밭이 묘사되고 있다. 松京三省洞題篁林金氏草堂 (송경삼성동제황림김씨초당) 籬落深迤細徑長(리락심이세경장) 人蔘春雨一村香(인삼춘우일촌향) 四面桃花迷舊路(사면도화미구로) 此身疑是古漁郞(차신의시고어랑) 송경 삼성동에서 황림의 김씨초당에 적다44) 울타리에 깊게 이어진 작은 길이 길고 인삼밭에 봄비 내리는 한 마을이 향기롭네 사방 복사꽃에 옛길 헤매니 이 몸이 옛날 어부인가 싶네 개성 삼성동 인삼밭에 인삼꽃이 피니 한 마을에 인삼 향이 가득하다는 내용. 옛날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고 기 뻐한다. 44) 번역은 김영봉(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2) 동복의 협곡에서 2수〔同福峽中 二首〕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조선 후기의 우국지사 (憂國之士)다. 호는 매천(梅泉). 1910년 일제에 의해 나 라가 망하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음독 순국하 였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30대 초반 전남 구례로 이주 했다. 이 시는 29세 때인 1883년에 화순군 동복면을 지 나다가 지은 시로 추정된다. 同福峽中(동복협중) 二首(이수) 殘山同福野人家(잔산동복야인가) 不種桑林不種茶(부종상림부종차) 貨殖湖南風土記(화식호남풍토기) 千根千戶牡丹花(천근천호모단화) 參圃盛時參戶貧(삼포성시삼호빈) 官人採取不論銀(관인채취부론은) 何當乳復珠還日(하당유복주환일) 穩覔三稏五葉春(온멱삼아오엽춘) 동복의 협곡에서 2수45) 황량한 산골짜기 동복 고을 시골집들은 뽕나무도 차나무도 전혀 심지를 않았네 호남 풍토기에 재산 불리는 방도를 보니 천 가호 각각 천 뿌리 모란꽃 심는 거로세 인삼 농사가 잘된 때도 농가는 가난했던 건 관청에서 캐 가고 돈을 안 주기 때문이었지 어찌하면 석종유 진주가 돌아온 날을 만나서 삼아 오엽의 봄을 평온하게 찾을 수 있을꼬 이 시를 보면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어느 시골집에서 는 인삼 농사를 짓는데 농사가 잘되어도 가난한 건, 관 에서 인삼을 가져가고도 돈을 주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인삼 수매를 하고도 정작 농민에게 돈을 주지 않으 니 가난하다는 말이다. 1880년대 국정이 혼란하고, 관 45) 번역은 임정기(한국고전번역원) Journal of Ginseng Culture 4 (2022) 13-37 35 리들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아 폭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매천은 언제나 ‘오엽의 봄’이 올까 하고 기 대하지만, 그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오엽의 봄이란 농민이 제값을 받고 인삼을 팔 수 있는 그런 날을 말한다. 탐관오리의 학정(虐政)은 계속되어 이 시를 쓴 이듬해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10여년 후에는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 전라도 지역은 쑥대밭이 된다. 23) 인삼(人蔘) 매천은 46세 때인 1900년 집에 심어 놓은 열다섯 종류 의 초목에 대해 15수의 시를 지었다. 그중 마지막 수가 바로 인삼이다. 매천은 15수의 시에 “집이 시루봉〔甑峯〕 자락에 있는데, 주위를 갖가지 나무들이 두르고 있으며 그중에는 내가 손수 심은 것들도 있다. 짙푸른 잎과 그 윽한 향기가 모두 성대하여, 봄여름 즈음에 틈틈이 생 각나는 대로 시를 짓기에 아주 좋았다. 그리하여 모두 오 언시 15편을 지었다.”라고 각주를 달았다. 人蔘(인삼) 灑灑光風轉(쇄쇄광풍전) 油油靈雨滋(유유영우자) 林深霧徐捲(임심무서권) 椏葉沃如飴(아엽옥여이) 時至蓏作花(시지라작화) 粲粲丹砂垂(찬찬단사수) 巡圃一欣然(순포일흔연) 俯立復多時(부립복다시) 昔聞蔘千年(석문삼천년) 下作人形奇(하작인형기) 餌之卽不老(이지즉불로) 姸好如童兒(연호여동아) 奈此俟河淸(나차사하청) 艾病易參差(애병역삼차) 且吾墮塵網(차오타진망) 不慕喬松姿(부모교송자) 種此數畝强(종차수무강) 擬博千金資(의박천금자) 生前五鼎食(생전오정식) 誰復戀肉芝(수복연육지) 高談伊傅業(고담이부업) 寧就韓商卑(영취한상비) 擧世貴速化(거세귀속화) 我亦從爾爲(아역종이위) 인삼46) 맑은 바람 솔솔 불고 46) 번역은 박헌순(한국고전번역원) 부슬비가 촉촉이 내렸다 숲이 깊어 안개 천천히 걷히니 줄기와 잎이 통통하여 맛이 달콤하다 때가 되어 봉오리가 꽃이 되더니 찬란하게 붉은 열매를 드리웠다 기쁜 마음으로 삼밭을 돌보며 굽혔다 일어섰다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예전에 들으니 삼이 천 년을 묵으면 신기하게도 하체가 사람 모양을 이루는데 그것을 먹으면 늙지 아니하고 어린이처럼 곱고 예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찌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랴 칠 년 병환에 삼 년 쑥도 구하기 어려운데 또한 나는 풍진 속세에 몸을 담고 교송의 자태를 흠모하지 않는다 이것을 서너 이랑 남짓 심어 놓고 천금의 자본이 되리라 기대를 걸고 있다 살아생전에 오정의 음식을 먹을 텐데 누가 다시 육지에 연연하랴 고상하게 이윤과 부열의 공적을 담론하면서 어찌 한비와 상앙의 하찮음을 추구하랴만 온 세상이 속화를 귀하게 여기니 나도 또한 그것을 따라할 수밖에 이 시에서 보면 인삼은 “먹으면 늙지 아니하고/ 어린이 처럼 곱고 예쁘게 된다고 하였다(餌之卽不老 姸好如童 兒)”라고 했다. 매천 같은 선비도 서너 이랑 인삼을 심었 다. 인삼을 심은 이유는 관상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천 금의 자금이 되리라는 기대(擬博千金資)”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구례 지역에도 이미 재배삼이 심어졌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농가에서 환금작물로 대규모는 아니더라 도 소규모 인삼 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論蘇軾詠茶詩之人文生活意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