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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虎臣 1506 1556 豐川 武伯 知足庵 貞簡
정여창(鄭汝昌)1450년(세종 32)~1504년(연산군 10)
一蠹先生遺集卷之三 / 附錄 / 行狀[從子希參]
生子女六人。女長適副司直崔浩文。生子彥淸。壻觀察使任虎臣。二女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三女適李賢孫。生子承壽。四女適薛公諄。生子璿。公之兄弟三人。曰汝裕。縣監。曰汝寬。生員。妹嫁宗室寧仁君楯。公沒之四十五年(1548,명종3)。今本道觀察使任虎臣。欲立石爲表。謹具大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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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蠹先生遺集卷之三 / 附錄 / 讚述
嘗聞先正鄭公諱汝昌先生之風。而孤陋寡聞。未得其詳。心嘗愧欿。其有著述及碑誌及行狀。伏望暫許借觀。以發蒙滯。不勝千萬之幸。退溪與任虎臣書。見退溪集。○下同
鄭汝昌。慶尙道咸陽郡人。官至縣監。信古好義。學務踐履。與金宏弼同師佔畢齋。志同道合。時人稱爲金鄭。自號一蠹。卒贈右議政。郡人立書院以祀之。隆慶丁卯秋。翰林學士許國,兵科給事中魏時亮。奉穆宗皇帝登極詔來頒。求問傳孔孟心學者姓名實行。退溪書示以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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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명종실록 5권, 명종 2년(1547,정미) 2월 19일 신축 4번째기사 / 안현·임호신·유창문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안현(安玹)을 한성부 우윤으로, 임호신(任虎臣)을 경상도 관찰사로, 유창문(柳昌門)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6.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7월 3일 임자 1번째기사 / 경상도 감사 임호신이 도내의 수재에 대해 보고하다전교하였다. "지금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 임호신(任虎臣)의 수재에 관한 서장(書狀)을 보았다. 전날에 공주(公州)의 수재에 대해서도 이미 매우 놀라왔었는데, 이제 물난리가 이와 같다니, 나는 무슨 일이 그러한 장마를 불러왔는지 알 수가 없어 더욱 어쩔 줄을 모르겠다." 【*】 【*서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5월에 안동(安東)에 큰비가 내려 냇물이 넘쳐서 ...
17.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7월 5일 갑인 6번째기사 / 경상도 감사 임호신이 도내 수해 상황을 보고하다경상도 감사 임호신(任虎臣)이 치계하였다. "김해(金海)에 큰물이 불어 넘쳐서 민가 4백 54채[區]가 떠내려갔고, 익사한 사람이 8명, 압사한 자가 2명이었으며, 안동 영호루(暎湖樓)의 액자(額字) 현판(懸板)이 경내(境內)의 강 어귀에 떠 있는 것을 건져내었고, 용궁(龍宮)의 객사(客舍)·관청(官廳)·형옥(刑獄)·마구(馬廐)가 물에 잠기고 인가 20여 채 가 떠내려갔으며, 함안(咸安)...
18.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7월 16일 을축 1번째기사 / 경상 감사 임호신이 도내의 수재에 대해 보고하다이 생겼으니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 임호신(任虎臣).】 【*】 【*장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함창(咸昌)에 큰 비가 와서 재악산(宰岳山)의 흙과 바위가 무너져 집 다섯 채가 파묻혀 주민 34명과 소 9마리, 말 2필이 압사하였 고, 물가의 인가 19채가 떠내려갔으며, 진보(眞寶)에 큰비가 와서 산 밑에 사는 사람 1명이 압사하고 물가의 인가 7채가 떠내려갔고 5채는 ...
19.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7월 20일 기사 1번째기사 / 밀양 수산제의 국둔전이 물에 잠겨 군인들에게 곡식을 거둔 것에 대해 논의케 하다전교하였다. "이번에 경상 감사 임호신의 계본(啓本)을 보니, 밀양 수산제(守山堤)의 국둔전(國屯田)의 화곡(禾穀)이 물에 잠겨 손상되었으므로 농사지은 군인들에게 곡식을 거둔다고 하는데, 지금 바야흐로 실농한 때에 그렇게 거두어들이는 것은 구황하는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니,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20.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9월 26일 갑술 2번째기사 / 근친하고 돌아가는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을 친견하다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근친하려고 서울에 왔다가 이때에 돌아가는데,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금년의 흉년은 근고에 없던 일로서 팔도가 다 그러하니, 백성을 살리기가 사실 어렵게 되었다. 그 진휼하는 조목은 이미 하서(下書)에 다 말하였다. 다만 백성들이 무휼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수령이 법을 받들지 않기 때문이고, 군졸이 안접(安接)할 수 없 는...
21. 명종실록 7권, 명종 3년(1548,무신) 2월 12일 기미 6번째기사 / 손홍적의 공초손홍적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그때의 승지는 아마 임 호신(任虎臣)과 김익수(金益壽)였던 듯싶습니다.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6월 어느날, 노윤천이 승지들이 있는 곳에 와서 이 사실을 말하여 신도 그 사실을 들어 알았기 때문에, 9월의 시정기를 수찬(修撰)할 때에 이를 추록(追錄)한 것입니다. 이 일을 노윤천에게 물어 보소서."
22. 명종실록 11권, 명종 6년(1551,신해) 4월 25일 계미 1번째기사 / 동지중추부사 임호신을 성절사로 보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임호신(任虎臣)을 북경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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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주-D001答閔判書
9 與任判決字武伯。觀察使樞之子。生正德丙寅。觀察公以冬至使如京。公以書狀官隨之。名流贈詩。以鳳將雛比之。官判書。諡貞簡。
10 주-D001答任方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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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九 / 書 / 與任判決 虎臣
嘗聞先正鄭公諱汝昌先生之風。而孤陋寡聞。未得其詳。心常愧欿。玆敢仰稟。不審令公外舅氏於先生爲何親。先生是何郡人。何年出身。仕至何官。其爲安陰縣監。是因何有此外補。其得罪以佔畢門徒云。然其詳亦不知爲何事。其有著述及碑誌,行狀等。或在令公處。或藏其後嗣之家。伏望暫許借觀。以發蒙滯。不勝千萬之幸。後嗣今日見存爲誰。其謫關北。的是何地。被罪之年是何年。葬之何地。幷望諭及。何如。
退溪先生文集卷之九 / 書 / 答任方伯 丁未(명종 2 1547)
承再惠音。慰諭良至。益見愛予之意。深荷深荷。曾聞盤錯別利器。肯綮恢游刃。以本道浩繁。災極民困。正相公發蓄施仁之秋。何以有欲辭無路之嘆也。亦見憂國恤民不自滿足之心。是固君子之日乾乾也。如滉上負國恩。下媿時賢。直作一鄕里之陳人。枉過了一生。緣病至此。浩嘆柰何。區區鄙懷。屢發於左右。太似率然。幸有以容之。不宣。
명종 2 1547 정미 嘉靖 26 47 3월, 月瀾庵에 머물다. ○ 5월, 聾巖 李賢輔의 초대로 簟巖을 유람하다. ○ 7월, 安東 府使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 8월, 응교가 되어 조정으로 돌아가다. ○ 9월, 朝講에 입시하다. ○ 12월, 병으로 사직하고 다시 儀賓府 經歷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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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집 제13권 / 행장(行狀) 부(附) 가장(家狀) 행록(行錄) 모두 11편인데 9편을 수록하였다.
증 좌찬성 별동 윤공 행장〔贈左贊成別洞尹公行狀〕
융경(隆慶) 원년인 정묘년(1567, 명종22)에 중국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 공자와 맹자의 심학(心學)과 기자의 주수(疇數)에 뛰어난 자가 있느냐고 물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고려의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와 본조의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彥迪)과 선생을 적어서 보여 주고 글로 써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 신라와 고려가 있을 때 문헌의 나라라는 칭호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시대의 유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끝내 언어와 문자 사이에 있었습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정자와 주자의 책이 나오자, 우탁과 정몽주 같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는 선비가 암송하고 익히는 것이 공자와 맹자, 정자와 주자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혹 습속에 젖어 예전의 것을 그대로 따라 밝히지 못하고 살피지도 못하였으며, 혹은 뜻만 크고 일에는 거칠어서 이용할 줄도 모르고 비판할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 중에 뛰어나게 독자적인 견해를 가지고 개연히 분발하여 성현의 학문에 종사한 자는 지금 거론한 몇 분이니, 어찌 심학(心學)의 무리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셨다.
명종 22 1567 정묘 隆慶 1 67 5월, 召命을 받고 상경하다. ○ 6월, 都城에 들어오다. ○ 明宗이 승하하다. ○ 7월, 大行王行狀修撰廳 당상이 되어 明宗의 행장을 찬하다. 예조 판서가 되다. ○ 8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 10월, 大護軍이 되다. 지중추부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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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섬(洪暹)1504년(연산군 10)~1585년(선조 18)
忍齋先生文集卷之二 / 碑誌 /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任公行狀。
任虎臣 1506 1556 豐川 武伯 知足庵 貞簡
丙午。陞右承旨。又陞左承旨。陞都承旨兼藝文館直提學。二聖繼陟。國家多事。公盡瘁於哀疚之中。惟允於出納之間。是冬。上親享大廟。加恩執事。賞公以嘉善階。病遞爲僉知樞府。未久。拜漢城府右尹兼同知春秋館事。參修中廟實錄。出爲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公之友趙松岡士秀贈之以詩曰。平生峻節忠公直。三世棠謠父子孫。蓋以昭簡父子。亦曾按是道。此句乃實錄也。嶺南一道。地大而廣。俗多訴訐。號稱難治。公政先敎化。不喜別立科條。簿領塡委。而左右酬答。見若容易。而審之皆得其中。瓜滿。入爲同知中樞。戊申九月。丁母夫人憂。庚戌。釋服。爲掌隷院判決事。辛亥。朝京賀聖節。還拜同知中樞。冬。復爲判決事。燭理之明。裁決悉當。直養之餘。人不敢工以私。壬子秋。病遞爲上護軍。俄授同知中樞。癸丑。兼五衛都摠府副摠管。冬。拜漢城府右尹。甲寅秋。又以病遞。爲同知中樞。乙卯正月。特加階資憲。拜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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忍齋先生文集卷之二 / 碑誌 /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五衛都摠府都摠管任公行狀。
任爲豐川大姓。有諱中善。仕麗季。判撫山縣事。壻于柳巷先生韓脩。生四子。其一曰孝敦。終於報恩縣監。縣監有子 曰漢。卒官遂安郡守。郡守生工曹判書由謙。旣德且壽。爲世達尊。卒諡昭簡。用昭簡貴。推恩先世贈遂安公吏曹判書。報恩公戶曹參判。昭簡生諱樞。仁孝寬毅。人皆以公輔期之。而爲當路者所忌。職止於慶尙道觀察使。德積而不施。年僅踰知命。時論惜之。觀察 娶河 陽望族郡守許邃之女。以正德丙寅十一月初三日。生公。公諱虎臣。字武伯。聰警英邁。資稟甚高。養於外家。爲郡守公所鍾愛。幼與群兒遊戲。公輒主張號令。群兒莫敢違公指揮。見者嗟異。年纔弱冠。已遍誦四書三經。洞曉理趣。入太學爲寄齋。始與暹遇。便許爲忘年友。暹初以儕輩視之。與之遊處旣久。迺知其可爲師而不可爲友也。在諸生中。衆或縱談無益。而公獨端坐。讀書不輟。觀察公已爲達官。而公之衣服處己。儉素謙簡。如自草茅中來者。不覺其爲顯閥子弟。爲文。操毫立就。若不經意。而悉有思致。見人行有邪曲苟且者。公必托爲調戲。而實深折之。以此諸生咸加敬愛。年纔二十。而隱然有長者之風。歲戊子。中司馬試。升上舍。學問益篤。操履端方。捷辛卯丙科。選入承文院。爲權知副正字。壬辰。授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蓋薦公以有良史才也。俄陞待敎。夏。移入世子侍講院。爲說書。是年秋。觀察公朝京師賀冬至。公以質正官隨之。父子竝膺朝命。爲士林榮觀。名流贈詩。有鳳將雛之句。摭其實也。觀察公竣事東歸。病卒于高嶺驛。公在異域遭大慼。號慟拊擗。人不忍視。華人見者無不嘖嘖歎服焉。丙申。服闋。復拜藝文奉敎。時權奸當國。日斥異己。惡公不附。公之弟適與蔡無擇爲隣。公見其附勢亂政。絶不與通。以是。群奸合力而排之。論遞爲司正。丁酉。出公爲黃澗縣監。縣當大路之衝。邑殘民彫。人莫不蹙額規免。而公獨視以樂土。治之裕如。僅踰一㫷。百弊俱興。闔境畏而愛之。猶恐其去。權奸旣敗。大夫人在堂而病。思戀公不置。公不獲已辭以病。戊申。遞授成均館典籍。未幾。遷刑曹佐郞。冬。移兵曹佐郞。歲季。陞拜司諫院獻納。錄入弘文館副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是時。公當起廢之餘。不復置纖芥慍意於曩時用事者。諫諍論議。務持平恕。爲時論所韙。坦懷接物。意絶恩怨。公之素性然也。己亥。陞校理。夏。轉吏曹正郞兼侍講院文學。辛丑。拜軍器,宗簿僉正兼侍講院弼善。冬。薦授議政府檢詳。壬寅。陞舍人。歲遭凶荒。朝廷講救荒之策。擧公爲淸洪道救荒敬差官。公躬齎饘粥。出入村巷。遇餓輒哺。至於病戶。染汚可畏。而親自問視。施以藥餌。一方賴以全活。五月。轉拜侍講院輔德。秋。移授司憲府執義。振肅朝綱。不屑細瑣。癸卯。復拜議政府舍人。移司諫院爲司諫。各衙門跟隨奴多不能自立。其代役者徵價布於本身濫甚。廷議急於革弊。令該曹收其直於本身而分之。公啓于上曰。此非所以養廉。國家待士大夫。豈宜若是薄乎。雖不見納。識者是之。秋。拜司僕寺正。再爲執義。病遞爲軍資監正。冬。中廟上賓。以公爲國葬都監郞廳。董役勤謹。百工趨事。拜弘文館典翰。旋陞直提學。乙巳。擢拜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未幾。患眼。遞爲護軍。秋。復拜右副承旨。俄陞左副。丙午。陞右承旨。又陞左承旨。陞都承旨兼藝文館直提學。二聖繼陟。國家多事。公盡瘁於哀疚之中。惟允於出納之間。是冬。上親享大廟。加恩執事。賞公以嘉善階。病遞爲僉知樞府。未久。拜漢城府右尹兼同知春秋館事。參修中廟實錄。出爲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公之友趙松岡士秀贈之以詩曰。平生峻節忠公直。三世棠謠父子孫。蓋以昭簡父子。亦曾按是道。此句乃實錄也。嶺南一道。地大而廣。俗多訴訐。號稱難治。公政先敎化。不喜別立科條。簿領塡委。而左右酬答。見若容易。而審之皆得其中。瓜滿。入爲同知中樞。戊申九月。丁母夫人憂。庚戌。釋服。爲掌隷院判決事。辛亥。朝京賀聖節。還拜同知中樞。冬。復爲判決事。燭理之明。裁決悉當。直養之餘。人不敢工以私。壬子秋。病遞爲上護軍。俄授同知中樞。癸丑。兼五衛都摠府副摠管。冬。拜漢城府右尹。甲寅秋。又以病遞。爲同知中樞。乙卯正月。特加階資憲。拜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當飢饉荐臻之後。又値倭寇屠陷湖南。內賑餓殍。外調軍食。無不取辦於度支。而顧視國儲。殆不能支數年。朝野殷憂。實在於此。而公能時裁闊狹。量入爲出。不煩握算。內竭心計。外若簡易。不動聲色。而實無毫髮遺忘。吏胥奸猾。不待敲榜。而自不敢欺誣。事擧職辦。此特公之緖餘耳。憂國之勤。激發舊證。水火未濟。轉成鼓脹。引疾力辭。遞知敦寧府事。七閱月。竟不救。以是年八月初八日。終于正寢。年僅五十一。訃聞。上震悼。輟朝市二日。朝野相弔曰。善人亡矣。執友之來護其喪者。犀金盈坐。哭之如哭私親。彌旬嗚咽不止。見者以爲古未嘗有也。上臨群臣嘆曰。良宰相死矣。予甚悼之。後二月。葬于天寶山南麓觀察公墓之側。公之季參議輔臣。經紀後事。襄庀之具。無復遺憾。嗚呼痛矣哉。公之家自先世以來。家法甚美。父兄訓子弟。子弟敬父兄。不敢有驕怠凌傲之習。循循繩墨。到公尤謹。公之學。不喜浮華。近裏着實。但欲踐履。不欲言浮於行。尤用力於警策。自未達時。常就一間淨室。書古人格言。貼諸窓壁。坐臥省勵。功不少弛。人不見其勉學苦行。而眞率正直。超邁沖澹。所謂有儒者氣象。其公之謂乎。任眞推分。只存誠信。官雖貴顯。猶執寒素。如遇親戚故舊之貧賤者。解衣推食。略不吝嗇。檢勑僮僕。蕭然如一布衣之家。朋友之至。輒略設杯盤曰。家不欲富。仕不欲貴。陶然歡洽。樂我眞趣。嘗乎書今日不知明日事。百年便作萬年計兩句于壁上曰。人世缺陷。無時可滿。役役期滿。不已惑乎。扁其所居室曰知足庵。揭安分無辱四字。戒諸子曰。吾不以膴仕期汝輩。但願不墜先世舊業而已。外若溫醇。內實剛果。與人談笑。不置畦畛崖異。人無不爲之心醉。而臨事決疑。毅然不撓。其所守之確。得於學問者然也。壬子。朝廷欲砥礪廉恥。就士林中拔其廉謹者。稱廉謹選以聞。命賜宴于殿庭。至輟御燭遣歸。以寵勉驚動之。公與弟參議公。俱中其選。公愀然語于其弟曰。君子惡名過其實。吾兄弟何因盜得此名。庶各自勉。無負聖眷而已。東宮旣知向學。廷議請選宰相中學行可爲師法者。號爲輔養官。使之奉護養蒙。有所薰陶。大臣之外。安贊成玹,李贊成浚慶,趙參贊士秀曁公。輿焉。蓋極一時之選也。公性寡慾耿介。不喜苟合。見人有喜權喜名者。避之若將浼焉。挺然自守。故立朝以來。士林累遭禍網。而公獨超然無所與焉。公於朋儕。不肯偏有所厚。唯趙參贊相與爲知己。參贊於人少許可。自公之亡。常語人曰。安得見正直平澹如武伯者。公之始病。暹以謂是適然耳。及往候之。則病勢已痼。對之愕爾。不覺泫然拭淚。公笑曰。公何不達於死生之理耶。人未五十而死者。其亦何限。吾則位至六卿。寵榮亦極。止此足矣。其寧有不滿之意耶。起就書架。抽唐詩正音一卷授暹曰。公試爲我快吟一篇。談敍移時。無一語及乎死生之境。病臥旣久。諸子及婢僕環侍而寢。有一子弟中夜忽驚。傍人胥駭。一室震洶。公怡然不動。徐起而鎭定之。平生學有定力。遇急常自靜暇。皆此類也。公娶全州崔氏部將浩文之女。生二男二女。長曰元。造紙署別坐。次曰凱。未仕。皆有學行。餘慶未艾。二女皆幼。別坐娶郡守李漢之女。生一男一女。季娶縣令尹佐之女。亦生一男一女。嗚呼。公之言行事業。在人耳目。固無待於吾言。但以耳聞不如目見。泛交不如切交。交之切而見之熟。宜無有過於暹者。而節惠易名。不可不稽之於狀。故略敍平昔所見聞。參以家譜。以備執事者考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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忍齋先生文集卷之三 / 碑誌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貞簡任公神道碑銘 幷序
豐川任氏世有名人。當麗季。有判撫山事諱中喜。壻于柳巷先生諱脩。生縣監諱孝敦。縣監生郡守諱漢。是生工曹判書諱由謙。判書生觀察使諱樞。早負公輔之望。見忤權倖。位不稱德。娶河陽名族郡守許邃之女。生公。正德丙寅十一月初三日也。公諱虎臣。字武伯。生而資稟甚高。讀書倍文。尋究理趣。不但爲章句之陋。弱冠。入大學。學務踐履。人稱有儒者氣象。中戊子司馬試。捷辛卯丙科。權知承文院副正字。以史才見薦。入藝文館爲檢閱。序陞待敎。選爲侍講院說書。秋。觀察公如京師賀冬至。公以書狀官隨之。名流贈詩。多以鳳將雛比之。還未出上國界。遭觀察公喪。扶櫬萬里。號擗毀戚。華人見者。無不嘆服。丙申。喪畢。復拜奉敎。時權奸當國。斥逐異己無虛月。出公爲黃澗縣監。公怡然就道。無幾微見於辭色。戊戌。因親病。遞拜典籍。歷兵刑兩曹佐郞,司諫院獻納。持論平恕。無纖芥慍意於前時軋己者。坦懷接物。意絶恩怨。公之素性然也。轉弘文校理,吏曹正郞兼侍講院文學,弼善。俄遷議政府檢詳。陞舍人。値壬寅歲饑。朝廷知公有活人手段。擧爲淸洪道救荒敬差官。親齎粥餌。出入病戶。一方賴以全活。夏。移輔德。秋。授執義。糾擧務存大體。有古御史風。復爲司諫。各衙門根隨奴代立者。徵價布於本身甚濫。朝廷許令該曹。收直分給。公執之曰。此非所以養廉。其待士大夫不已薄乎。言雖不用。時論韙之。拜弘文館典翰。陞直提學。乙巳。擢拜承政院同副承旨。病遞。秋。復爲右副。循序至都承旨。丁未。上親行祔禮于太廟。加恩執事。公授嘉善階。未幾。病遞。還拜左尹兼同知春秋館。參修二聖實錄。出爲慶尙道觀察使。嶺南地廣務繁。人多不堪。公至。治尙簡易。不多敎條。文簿塡委。而事無停滯。人稱其能。官滿還朝。同知樞府。戊申。丁外艱。庚戌。釋服。判決掌隷院者至再。燭理旣明。訟直其冤。辛亥。如京師賀聖節。乙卯。特加資憲。拜戶曹判書兼都摠管。時飢饉連仍。島夷擾邊。公長度支。內殫心計。量入爲出。時裁闊狹。以適機宜。而事無不集。人以爲難也。治劇盡瘁之餘。激成脹證。自丙辰二月。引疾固辭。遞拜知敦寧。禁其家母得受祿。蓋不欲無事而食也。病遂沈綿。終于八月初八日。享年五十一。有司以聞。上悼甚輟朝曰。良宰相亡矣。朝野相弔。執友臨護。犀金滿坐。如哭私親。十月二十日。祔葬于楊州天寶山南麓觀察公墓側。太常易名曰貞簡。公爲人。學欲着實近裏。心欲平正坦夷。自少靜掃一室。以爲棲息之所。扁曰知足庵。手書先賢格言于窓壁。殆無虛紙。蓋欲寓目輒警。檃括不弛也。不肯矯情。任眞推分。如見親舊寒窘。推食解衣。略無難色。身旣貴。淡素無異布衣。門閭蕭然。不類有位者之家。深味李文靖缺陷世界之語。常語所親曰。是吾心也。達於死生之理。嘗書古人百年便作萬年計七字于左右。以爲貪生惡死者之戒。外若坦率。而內有定力。臨事毅然不撓。遇急常自靜暇。壬子。朝廷選士大夫廉謹者。奬勸砥礪。公與其弟參議輔臣。俱與其選。人以爲榮。而公愀然曰。安得無忝此二字。丙辰。東宮向學。上欲揀宰相中學行俱邁者。號爲輔養官。使之薰陶養蒙。公與安左相玹,李左相浚慶,趙參贊士秀。與焉。拯一時之選也。耿介寡欲。遠迹權要。立朝以來。屢經士林之禍。而公獨超然無與於其間。趙文貞於人。少許可。獨以公歿爲痛曰。寧復見正直平澹如武伯者。公娶部將崔浩文之女。卽贈右議政鄭汝昌外孫女。姿性端莊。善理內職。有外家風。生二男二女。長曰元。牙山縣監。次曰凱。定山縣監。俱有學守。能業其家。女長適及第鄭淑男。次適士人朴好謙。牙山娶郡守李漢之女。生一男。曰慶基。定山娶郡守尹佐之女。生一男三女。女長適幼學李惇。慶基娶都事申承緖之女。生一女。夫人自喪判書公。守慼閨閤。常恨未亡。雖連墻骨肉之家。亦未嘗往來焉。壬申九月初六日。病歿于牙山任所。以是年十二月十八日。葬同公塋。喪旣襄。諸孤謀不朽於暹曰。子知吾父。盍銘諸神道。嗚呼。暹忝與公同遊大學。又同戊子辛卯榜。又辱執友。不敢以文拙辭。拭淚而爲之銘曰。
學本窮經。公早講明。燭理惟精。玉汝于成。諫坡西淸。芝秀鳳鳴。謙虛遠名。與物無爭。內葆堅貞。多慾營營。笑彼申棖。氷檗自程。才周眷傾。佇畀邦衡。天靳其齡。儻來簪纓。若寄浮生。沒亦吾寧。瓮岩崢嶸。鬱彼佳城。配祔淑靈。考德有銘。言無過情。足後人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