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TV에서 묵계월 안비취 등 경기 소리하는 분들을 자주 보았습니다. 세 분은 동시에 인간문화재로 선정이 되었는데 이 분들에 대해 평론가 윤중강이 올린 글을 가져 왔습니다.
#바로잡기 #이제는말할수있다 #잡가적 #가곡적 #신민요적
묵계월 = 잡가(雜歌)적, 좌창(坐唱)적, 경성방송출연. 좌창의 고수(高手) 및 고수(固守)
안비취 = 가곡(歌曲)적 좌창(坐唱)적, 경성방송출연. 좌창에서 입창으로.
이은주 = 민요(民謠)적, 입창(立唱)적 해방이전활동? 신민요에서 12잡가로.
묵계월 – 안비취 – 이은주,
세 분은 한날한시에, 인간문화재 (경기민요, 12잡가)가 되었지만, 세 분의 과거의 음악적 이력은 꽤 많이 다릅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을 시작한 명창명인에 대해선, 거의 그 분들이 말씀하신 것 대로, 그 분의 인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게 다 맞는 건 아닙니다. 강조할 건 강조하고, 뺄 건 뺀 것도 있다고나 할까요. (나 또한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그런 태도일지 모르지만요)
암튼... 난 평론하는 사람. 그건 요즘의 국악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죠? “안비취 – 묵계월 – 이은주” 이 분들은 경기민요 (십이잡가)의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은 후, 동일선상에 놓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이 분의 ‘과거’의 예술적 경력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이 분의 음악(적 색깔)이 다른 것이지요.” 내가 관심을 두는 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세 분을 나이 순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본명)
묵계월 (1921 ~ 2014) 이경옥
이은주 (1922 ~ 2020) 이윤란
안비취 (1926 ~ 1997) 안복식
================
1. 묵계월
세 분 중에서, 이 종목 “십이잡가”(좌창, 坐唱)과 연관해서, 가장 이 길을 더 먼저 걷기 시작한 분은 ‘묵계월’입니다. 그러니까, 묵계월 선생님은 스스로 좌창(坐唱)을 가장 먼저 부른 것으로서, 또한 본인(묵계월)이 ‘삼설기’까지 두루 부를 수 있다는 걸 크게 자부심을 가졌을 겁니다. 묵계월을 일찍이 소녀로서 잡가를 불렀습니다.
.
1933. 05. 23 (화) 낮 12시 05분. 장잡가(長雜歌, 긴잡가) 묵계월
1933. 10. 08 (일) 낮 12시 50분. 소녀가회 (少女歌會) 묵계월, 李금강산
=====================================
2. 안비취
안비취선생님은 조권 (조선권번) 출신입니다. 당시 경성의 4대권번 (5대권번) 중에서, 조선권번이 가장 유명하고, 또한 커리큘럼이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 서, 화를 포함해서 예인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덕목을 가장 많이 배운 곳이라고 할 수 있죠.
김소희, 김죽파 (당시 이름, 김운선), 안비취 등이 모두 조권 출신입니다. 조선권번하면 하규일이고, 조권권번 출신으로 유명하다면, 가곡을 잘 부른다는 겁니다. 김소희하면 판소리, 안비취하면 경기민요, 이런 등식이 있지만, 실제 이들은 조선권번에서 하규일 문하에서 ‘가곡’을 제대로 익힌 분입니다.
김소희는 자신의 국악생활 50년을 정리하면서 (1979년?) 그 무대에서 가곡 시조를 부른바 있습니다. (중경은 쌍쌍. 김월화와 함께)
안비취도, 처음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것은 ‘가곡’이었습니다. 가곡을 혼자 부른 것은 아니고, 여성 2인이 함께 불렀지요.
안비취는 말년 고음 등이 잘 나오지 않아서 자신의 스타일로 불렀지만, 안비취의 예전 노래를 잘 들어보면 ‘가곡의 품격’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물론 이 시기에 조선권번에서 ‘경성좌창’ (12잡가)도 배우셨을 겁니다.
(사라진 10년?)
이분이 1940년대 이후에 뭘하셨는지 잘 모르겠고, - 들어 앉아서 가정부인으로서의 삶? - 광복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는데, 그 때부터는 ‘민요’에 치중을 합니다. 서울방송 민요연구회를 이끌고, 당시 민요(경서도창)로 유명한 분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면서 민요연구회, 국악협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요. 그러면서 이른바 ‘안회장님’이 됩니다.
1939. 10. 27 (금) 밤 9시. 가곡 이화향, 안비취
1956. 06. 24 (일) 안비취, 서울방송민요연구회
===========================
3. 이은주
이은주선생님은, 해방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모릅니다. 적어도 경성방송국을 비롯한 메인 스트림(주류)에서의 주역은 아니셨습니다. 이은주 선생님은 인터뷰 등에서, 원경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가곡을 배웟다. 고 강조합니다. 이건 분명 자신도 묵계월과 안비취와 같이 가곡에 정진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저는 그런 행간이 읽혀집니다. (이런 말하면, 그 제자들이 과민반응할까봐 걱정이 되네요.) (저는 어느 한 분의 입장에서 쓰는 게 아닙니다.)
대신 해방이후, 특히 한국전쟁이후에는 묵계월과 안비취보다도, ‘이은주’가 훨씬 인기를 끌게 됩니다. 본인이 분명 만든 곡은 아니나, 이은주 선생님은 2000년대 들어서 자신이 ‘태평가’를 작곡했다고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태평가는 ‘정사인’ 작곡이고, 그 곡의 제목이 ‘태평연’이었다는 걸 잘 아실겁니다. 이 노래를 유행시키는데, 이은주 등 당시의 민요 가창자가 힘을 쓴 건 사실입니다.)
이은주는, 이 분의 가창 또는 지향점은 ‘신민요’입니다. (내가 국악계 논문을 잘 보는 게 아니어서 모르겠으나) 이은주와 김옥심의 롤 모델은 ‘장일타홍’입니다. 신민요 가수로서 크게 인기를 끌었고, 실제 두 사람은 장일타홍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서양악기’의 ‘경음악’ 편성의 반주로 ‘민요’ 등을 불렀다는 것이죠. 묵계월과 안비취의 노래에 비해서, 이은주의 노래는 ‘신민요적이고’ 좌창적이라기 보다는 입창적입니다.
1949. 03. 16 (수)
방송음악회신0 음경악단 (경음악단을 잘못 표기)
“신민요의 밤” 장일타홍, 김옥심, 이은주.
============================
나(윤중강)는 평론이 직업입니다. 그들의 과거의 경력이나 음악적 행보를 바탕으로 해서, (경기민요의 세 명창이라고 뭉뚱거려서 말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인간문화재 세 분을 말씀 드렸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위에서 밝힌 것과 같습니다.
묵계월 = 잡가(雜歌)적, 좌창(坐唱)적, 경성방송출연. 좌창의 고수(高手) 및 고수(固守)
안비취 = 가곡(歌曲)적 좌창(坐唱)적, 경성방송출연. 좌창에서 입창으로.
이은주 = 민요(民謠)적, 입창(立唱)적 해방이전활동? 신민요에서 12잡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