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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의 순교 터와 시신을
유기·매장한 터에 대한 연구
서종태
1. 머리말
2. 읍성 안의 여러 순교 터
3. 서문 밖 순교 터
4. 숲정이 참수 터와 시신 유기·매장지
국문 초록
이 글에서는 연구가 미진한 해미 순교 터와 아직 연구가 없는, 해미 순교자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터에 대해 규명해 보았다. 그중 읍성 안의 옥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정사박해(1897~1899)부터 병인박해(1866~1868) 때까지 순교 터를 알 수 있는 56명 중 33명의 순교자가 옥에서 나왔다. 1799년 12월 15일 이보현과 인언민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5일에 서는 남문 안 장터였다. 1817년에 체포된 손연욱이 오래
옥살이하다 1824년에 순교한 터는 옥 근처 샘이 있던 곳이다.
*이 논문은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 주관으로 ‘성지의 과거와 미래’란 주제로 개최된 제1회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 원장
바로(Barraux, 范) 신부가 1935년에 병인박해 당시의 여러 목격 증인과 다수의 전문(傳聞) 증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의 처형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한 『해미 순교자 약사』의 내용과 박해 시기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구체적인 구전 자료로 볼 때, 서문 밖에서는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 이후와 그 여파가 미친 1867년에만 한시적으로 교수(絞首) 처형과 자리개질 처형만 이루어졌다.
그동안 참수 처형 터로 추정된 서문 밖은 그 터로 입지적 조건이 적합하지 않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반면에 해미천 변 숲정이는 입지적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고, 숲정이에서 일반 죄인도 죽였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있으며, 박화규가 참수 처형된 곳도 숲정이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인박해 때 6명이 참수당해 순교한 곳은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 밭으로 판단된다.
해미와 같이 죄인을 심문하고 처형하는 권한을 갖고 있던 포도청이나 진영이 있던 서울이나 지방에는 처형된 죄인의 시체를 내다 버리고 묻어 주는 터가 있었다. 또한 숲정이는 여우가 살아 여숫골이라 불리었고,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에서 생매장하면 그러한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리고 홍주의 숲거리 생매장터는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시신들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해미 숲정이도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주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숲정이(여숫골)는 생매장 순교 터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참수 터로서의 의미와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터로서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숲정이(여숫골)는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큰 역사적 의미가 배어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제어 : 해미 순교터, 읍성 안 옥, 남문 안 장터, 서문 밖, 숲정이, 여숫골
1. 머리말
충청 좌영인 해미 진영의 영장을 겸하고 또 토포사까지 겸한 해미 현감은 해미 고을의 행정뿐만 아니라 해미를 포함한 내포 지역의 13개 고을에 대한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는 권한과 죄인을 체포해 심문하고 처형할 수 있는 사법권까지 겸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이 일찍부터 전해진 내포 지역의 여러 고을에서 많은 신자가 체포되어 해미로 끌려와 심문을 받고 처형됨에 따라 해미에서 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아울러 1935년에 서산 가재 본당의 바로(Barraux, 范) 신부가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벌어진 박해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과 전문(傳聞) 증인들을 두루 찾아내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천주교도들을 생매장한 터를 발굴하여 그 과정과 결과를 『경향잡지』에 연재함에 따라 해미의 천주교사와 순교사는 일찍부터 교회와 연구자들로부터 주목받아 여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1)
이러한 일련의 연구를 통해 해미 지역의 천주교사와 순교사가 체계적으로 규명되고 그 역사적 의미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해미 순교 터와 처형 방식은 연구가 미진한 부분이 있고, 여러순교 터에서 처형된 시신들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터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연구가 미진한 해미 순교 터와 아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여러 순교 터에서 처형된 시신들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터에 대해 규명해 보고자 한다.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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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미 지역 천주교사와 순교사를 전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다. 조광, 「천주교 분야」, 『서산·태안문화유적』, 서산문화원·충북대학교고미술사학과, 1991. 조광, 「19세기 해미 지방에서의 서학 신봉」, 『남도영교수고희기념 역사학논총』, 민족문화사, 1993; 『순교지와 순교 유물』(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3). 김일환, 「조선후기 해미지방의 천주교 박해」, 공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석사학위논문, 1991. 차기진, 「해미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교회사학』 4, 2007. 차기진의 이 논문은 천주교 대전교구 편, 『홍성·해미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2006, ‘제2부 해미 성지 자료집’ 207~236쪽에 수록된 논문 「해미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를 수정·보완하여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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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루 활용하여, 우선 읍성 안의 여러 순교 터와 서문 밖 순교 터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고, 다음으로 숲정이, 즉 여숫골 참수 터와 시신 유기·매장지에 대해 밝혀 그 역사성을 보완해 보기로 한다.
2. 읍성 안의 여러 순교 터
해미읍성 안에는 박해기 때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터가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교 터는 옥이다. 우선 논의의 편의를 위해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를 두루 조사하여 해미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을 모두 찾아내 유명 순교자 137명과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을 정리하면 뒤쪽
에 제시한 [표 5]와 같다.2) 그리고 이 [표 5] 가운데 해미에서 순교한 유명 순교자 137명을 순교 터별로 분류하면 아래의 [표 1]과 같다.
[표 1] 해미 순교자들의 순교 터별 분류
정사박해~기해박해 | 병인박해 | 합계 | |
옥 교수·병사 터 | 5명(병사) | 28명(교수) | 33명 |
남문 내장 장사 터 | 2명(장사) | 2명 | |
석방 병사 터 | 3명(옥 근처 집 1명, 자기 집 2명) | 1명(집으로 가던 길) | 4명 |
서문 밖 교수 터 | 8명(교수) | 8명 | |
숲정이 생매장 터 | 3명 | 3명 | |
숲정이 참수 터 | 6명 | 6명 | |
미상 | 1명 | 80명 | 81 |
합계 | 11명 | 126명 | 137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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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표 5] 박해 시기 해미 순교자 일람표(1797~1868)는 선행 연구인 조광, 「19세기 해미지방에서의 서학신봉」, 『순교지와 순교 유물』, 429~431쪽에 실려 있는 표와 차기진, 『홍성·해미 성지 자료집』, 207~310쪽에 수록된 표 등과 필자가 새로 찾은 일부 자료를 바탕으로 새롭게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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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 1]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유명 순교자 137명 중 순교 터를 알 수 있는 천주교도는 모두 56명이다. 이 56명 중 옥에서 순교한 천주교도3)는 모두 33명으로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그중 5명은 모진 고문을 받은 뒤에 병이 나거나 굶주려 순교했고, 28명은 교수당해 치명했다. 그리
고 옥에서 순교한 33명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정사박해~기해박해 순교자가 5명이고, 병인박해 순교자가 28명이다. 옥에서 정사박해 때부터 병인박해 때까지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옥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순교 터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옥에서 순교한 33명 중 1814년 12월 15일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는 2014년에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또한 해미 옥은 함께 갇힌 교우들이 통경하며 순교할 마음을 다지기도 하고 마음이 약해지거나 배교한 신자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배교를 취소하고 다시 순교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던 곳이기도 했다. 즉, 1866년 10월 1일 잡혀 옥에 갇힌 김선양은 다른 교우들과 서로 즐겨 통경하고, 모두가 죽기를 슬퍼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이런 때를 만나 위주 치명하면 곧 승천하여 주 예수와 성모를 뵐 것인데 어찌 슬퍼하느냐? 그리 말고 치명할 예비들 하라.”고 격려했다.4) 그리고 1866년 1월에 잡힌 박춘정(프란치스코)은 함께 옥에 갇힌 교우 28명과 함께 서로 권면하고 통경했으며,5) 1866년에 잡혀 옥에 갇힌 손사장(요한 세례자)은, 먼저 잡힌 교우 중에 약간 배교한 사람이 있자, 민망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교우를 권면하며 날을 보냈다.6) 또한 1866년 11월에 잡혀 옥에 갇힌 정정심(가브리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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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좌·우포도청, 형조, 진영 등에서 교수 처형은 일반적으로 옥에서 집행되었으므로 교수로 처형되었거나 교수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는 모두 옥에서 순교한 자로 분류했다.
4)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1, 천주교 수원교구, 2020, 599쪽.
5)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위의 책, 519쪽.
6)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5, 천주교 수원교구, 2020, 129~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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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조만과를 통경했고,7) 1866년에 잡혀 옥에 갇힌 조유진은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른 교우들을 많이 권화했다.8) 또한 읍성 안 순교 터 중에는 인언민(마르티노)과 이보현(프란체스코)이 매 맞아 순교한 읍성 안 장터도 있다. 우선 덕산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출신으로 황심(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보현은 연산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 정사박해 때인 1798~1799년에 잡혀 연산 관아에서 심문받은 뒤 고향 지역을 관할하는 해미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형벌에도 줄곧 신앙을 굳게 지킨 그는 장터에서 1799년 12월 15일 27세의 나이로 매 맞아 순교했다.9)
다음으로 덕산 주래(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출신으로 황사영(알렉시오)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인언민은 신앙을 위해 집과 재산을 포기하고 공주로 이주하여 살던 중 정사박해 때인 1798~1799년에 잡혀 공주 관아와 청주 병영에서 심문받은 뒤 해미로 이송되었다. 모진 형벌에도 시종 신앙을 굳게 지킨 그는 이보현과 같은 날인 1799년 12월 15일 63세의 나이로 매 맞아 순교했다.10) 해미에서 이보현과 같은 날 매 맞아 순교한 점으로 보아 그가 순교한 곳도 장터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면 이보현과 인언민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어디일까? 서유구(1764~1845)가 지은 『예규지(倪圭志)』 권4 ‘전국의 장시[八域場市]’에 보면, 해미에는 5일에 서는 남문 안 장[南門內場]과 10일에 서는 서문 안 장[西門內場], 관아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해미 동면(현 해미면 홍천리)에
서 3일과 8일에 서는 대교장(大橋場), 관아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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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1, 589쪽.
8)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2, 천주교 수원교구, 2020, 557~559쪽.
9)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799)」,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3, 73~75쪽.
10)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편, 위의 책, 「인언민 마르티노(1737~1799)」, 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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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현 서산시 대산읍)에서 1일에 서고 일도면에서 6일에 서는 여미장(予美場) 등 네 장터가 있었다.11) 이중 대교장과 여미장은 관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이보현과 인언민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남문 안 장과 서문 안 장 중 하나로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매 맞아 순교한 날이 15일이므로 그들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남문 안 장, 즉 옥에서 가까운 읍성 안 남문 쪽에 있던 장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읍성 안 순교 터 중 하나로 손연욱(요셉)이 순교한 곳도 주목된다. 해미에서 옥살이하다가 가석방되어 곧 병사한 천주교도 중에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1827년에 집에서 순교하고,12) 박 바르바라는 1868년에 풀려 집으로 가던 중 길에서 순교했지만,13) 성녀 김 데레사의 남편인 손연욱은 읍성 안에서 살다가 순교했다. 즉, 홍주 출신으로 덕산 배나다리에 가서 살던 손연욱은 1817년에 잡혀 해미 관아에서 심문을 받았다. 여러 형벌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던 그는 6~7년 동안 옥살이하다가 가석방되어 옥 근처에 있는 한 집에서 그의 동생과 함께 살 허락을 얻어 살았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1824년에 집 밖의 샘 옆에 있는 큰 돌 위에 앉아 마지막 숨을 거둬 순교했다.14) 이처럼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 순교한 옥 근처 집 밖의 샘이 있던 주변도 순교 터로 기억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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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동인·정명현·김현진 외 옮김, 『예규지』 2, 풍석문화재단, 2019, 96~97쪽.
12) 아들 손연욱이 체포된 후 사흘 뒤에 잡힌 손여심은 해미 관아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던 중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관장이 다 나아서 다시 오라며 그를 가족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27년에 숨을 거두고 순교했다(천주교 대전교구 편, 앞의 책, 254쪽).
13) 방 마리아의 시어머니 박 바르바라는 1868년에 체포되어 해미 관아에서 심문받은 뒤 하옥되었는데, 나이가 많아 옥에서 죽을 듯했다. 그리하여 옥사 장과 하졸들이 옥문 밖에 내어놓고 “집에 가서 죽어라.”고 하니, 본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순교했다(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4, 천주교 수원교구, 2020, 433쪽).
14) 천주교 대전교구 편, 앞의 책, 253~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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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문 밖 순교 터
해미 서문 밖은 여러 방식의 처형이 이루어진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선 1956년 3월 5일 신자들 피정 강론을 위해 서산 본당을 방문한 오기선(요셉) 신부는 신규식(도미니코) 주임 신부를 대동하고 해미에 가서 유물을 찾던 중 해미초등학교 안명선 교장을 우연히 만나 서문 밖 돌다리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즉, 서문 밖 돌다리에서 천주학쟁이들을 태질해 죽였으며, 그 근처는 그렇게 죽인 신자들의 핏자국이 낭자해 사람들이 피해 다녔다는 이야기를 선친에게 들었다고 안명선 교장이 증언해 주었다.15)
또한 황민성 주교는 1982년에 세운 ‘해미읍성 천주교 순교 기념비’에 새긴 글에서 서문 밖 돌다리 위에서의 처형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즉, 서문 밖 돌다리 위에서 천주교도의 사지를 들어 메치니, 가슴이터지고 머리가 부수어져 청혈이 흘러 바다 어귀 십 리에 이르렀다고 밝혔다.16)
그리고 1985년 당시로부터 몇 년 전에 서산 본당의 백낙관 회장은 해미 현장에서 안명선 교장이 증언한 ‘태질’ 처형을 ‘자리개질’ 처형이라 하고 그 방법을 더욱 상세히 밝혔다. 즉, “해미 서문 밖 돌다리 위에서 무수한 순교자들이 자리개질로 피를 흘렸는데, 자래개질이란 군인 네 명이 사형수의 팔과 다리를 각각 하나씩 잡고서 ‘어영차’ 구호 소리에 맞춰 높이들었다가 세차게 돌다리 위에 메다꽂으면, 단번에 해골이 깨지고 창자가 터져 나와 돌다리와 수채 도랑은 선혈의 내를 이루고, 시체더미는 성 밖에 아무렇게나 쌓았다가 개천에 버렸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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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오기선, 「해미의 태기질 바위」, 『가톨릭신문』, 1974년 3월 4일자; 오기선, 「해미 순교 기념탑」, 『경향잡지』 제1293호(1975년 12월).
16) 이 ‘해미읍성 천주교 순교 기념비’는 현재 해미읍성 옥 앞 잔디밭에 세워져 있다.
17) 천주교 대전교구 편, 앞의 책, 「방재희 필립보의 고증 자료-해미 순교자 ‘방영창 안또니오’에 대한 고증(1985.9.14.)-」,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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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85년 4월 1일부터 1990년 12월 6일까지 해미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며 해미 성지를 조성한 윤종관(가브리엘) 신부는 1985년에 지은 「해미순교선열현양가」에서 자리개질 처형 외에 돌로 쳐 죽이는 처형도 집행되었다고 밝혔다. 즉, 천주교도를 서문 밖에 매일매일 끌어내어 돌밭에다 눕혀 놓고 맷돌로 쳐 빈대 갈 듯 으깨 죽이고, 또 돌다리에 사지를 들어메쳐서 머리가 빠개지고 가슴이 터져서 벌레처럼 뻗게 하니, 죽은 몸뚱이가 산이 되고 핏물이 흘러 내가 되어 해미 벌에 홍수 져 바다까지 이르렀다고 노래했다.18)
그리고 서문 밖 자리개질 처형은 1987년에 편찬된 『서산 동문동성당 70년사』에도 반영되어, 서문 밖 돌다리인 자리개 돌 위에서 형 집행 사령의 지시와 구령에 따라 형리들이 천주교도의 사지와 머리를 하늘 높이 치켜올려 공중 낙하시켜 떨어지는 압력으로 살상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19)
이어 윤종관 신부는 1989년 6월 23일 세운 서문 밖 ‘순교 현양비’의뒷면에 새긴 글에서 자리개질 처형과 돌로 쳐 죽이는 처형 외에도 박해 시기 내내 다양한 방식의 처형이 서문 밖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윤종관 신부가 짓고 쓴 그 글 중에서 관련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재앙의 씨알머리란 해넘이로 쫓을 거라 하여, 사학 무리들을 서문 밖 이곳으로 묶어 내 오니, 일백 년에 이천 명 주검으로 쌓이고 또 쌓여서 산이 되고, 흐르는 물 피의 내가 되어 내리더라. 돌덩이에 맞아 깨진 몸, 돌구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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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해미성당 3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해미 본당 3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해미성당, 2015, 6쪽. 그러나 이 책에는 저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김진복, 「충남 해미본당 신앙의 묘 그 터에서」, 『경향잡지』 제1413호(1985년 12월)에 “‘별이 곱고 바람 순한 내포의 땅 고을고을…그 임들의 순절한 넋 너희 집과 너희 발길 닿는 곳에 힘을 주고 광채 살려 온 누리에 채울 거라 영영 세세 밝힐 거라.’ 윤(종관) 신부는 이와 같은 해미 순교 선열 현양가를 작성하여 놓고 있다. 본당 교우들은 이 현양가를 익혀 순례자들의 안내자 역할을 담당할 생각이다.”라고 밝혀져 있는 것으로 윤종관 신부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19) 정병배 편, 『서산 동문성당 700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서산동문교회, 1987,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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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인 밧줄로 목을 옭아 지렛대로 조일 적에 숨넘어가면서 천주 부르기 그치지 않고, 휘광이 칼날 아래에 목 떨어져 따로 된 몸뚱이 두 손 모아 기도하네. 함께 누인 여러 몸이 돌 대들보 밑에 눌릴 때 으깨진 얼굴의 입술에 평화의 미소만 남았네. 동지섣달 바람 바지에 얼리어 죽은 몸이거나 백지 덮고 물을 맞아 숨이 막혀 죽은 몸이거나 나뭇가지에 달려 횃불로 눈알 지녀진 몸들이 세상 어둠 씻고 환한 얼굴로 하늘만 늘 바라네. 들어 올려 돌다리에 자리개질 쳐 머리 깨이고 찢어진 몸이건만 숨 남을 제 천주만 부르도다.
위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윤종관 신부는 박해 시기 내내 서문 밖에서 천주교도들을 돌로 쳐 죽이고, 밧줄로 목을 옭아 죽이고(교수), 칼로 목을베어 죽이고(참수), 여러 사람을 눕혀 놓고 그 위에 돌 대들보를 떨어뜨려 죽이고, 동지섣달에 얼리어 죽이고(동사), 얼굴에 백지를 붙인 뒤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고(백지사), 나뭇가지에 목매달아 죽이고, 돌다리에 자리개질 쳐 죽여, 주검이 쌓이고 또 쌓여 산이 되고,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형벌로 서문 밖에서 순교한 천주교도의 숫자는 박해 시기 일백 년 동안에 이천 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를 근거로 하여 서문 밖 순교 터는 여숫골 생매장터보다 훨씬 더 많은 순교자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 했던 곳으로, 사실상 해미 일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자리매김했다.20)
그러면 이와 같이 서문 밖에서 집행되었다고 보는 여러 처형 방식에 대해 연구자들의 견해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우선 조광은 199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교회 측 자료인 『치명일기』와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등을 활용하여, 김선양(요셉) 1명이 서문 밖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사실을 규명하고 또한 김경오·김여집·김여흥·이선경·이순백 등 5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을 서문 밖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서문 밖 돌다리에서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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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윤종관, 「해미 ‘서문 밖 순교성지’에 관련한 건의서」,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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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의 지시와 구령에 따라 형리들이 순교자들의 사지와 머리를 하늘 높이 치켜올려 공중 낙하시켜 떨어지는 압력으로 살상시켰다는 자리개질 처형에 대해서는 물리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일로 생각된다며 이 구전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밝혔다.21)
그러나 윤종관 신부가 서문 밖에서 집행되었다고 밝힌 다른 방식의 처형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았다.
이어 김일환은 1991년 12월에 통과된 석사학위 논문에서, 1989년 6월 23일 세운 서문 밖 ‘순교 현양비’의 뒷면에 새긴 글에서 윤종관 신부가 언급한 서문 밖에서 집행된 처형 방식들 가운데 자리개질 처형은 조광의 견해에 따라 물리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일로 보았고, 교수형과 참수형도 서문 밖에서 행해졌다는 조광의 설을 따랐다.22)
그러나 나머지 돌로 쳐 죽이는 처형, 여러 사람을 눕혀 놓고 그 위에 돌 대들보를 떨어뜨려 죽
이는 처형, 얼굴에 백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죽이는 처형, 얼려 죽이는 처형 등은 사실 여부를 논하지 않고 윤종관 신부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23)
다음으로 차기진은 2007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교회 측 자료인 『치명일기』,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박순집증언록』, 『병인치명사적』, 「방재희 필립보의 고증 자료-해미 순교자 ‘방영창 안또니오’에 대한 고증-」, 『공충도사학성책』 등을 두루 활용하여, 김선양(바오로), 박춘정(프란치스코)등이 서문 밖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실과 최 야고보가 동문 밖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실, 방영창(안토니오)이 서문 밖 돌다리에서 자리개질(장사형의 일종)로 순교한 사실 등을 규명했다. 또한 참수 터도 서문 밖 교수형과 장사형의 예로 볼 때 서문 밖이 아닐까 추정했다. 그러면서 서문 밖을 해미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중요한 순교 터로 자리매김했다.24) 그러나 윤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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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조광, 앞의 논문, 1991, 119~126쪽.
22) 김일환, 앞의 논문, 1991, 31~37, 38쪽.
23) 김일환, 위의 논문, 19991, 37쪽.
24) 차기진, 앞의 논문, 2007, 143~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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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가 서문 밖 ‘순교 현양비’의 뒷면에 새긴 글에서 언급한 다른 처형 방식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한편 2015년에 간행된 『해미 본당 30년사』에서, 서문 밖은 자리개질 처형, 참수 처형, 얼굴에 백지를 붙이고 물을 뿌려 죽이는 처형 등이 집행된 곳으로, 사실상 해미의 순교지 중 그 의의를 가장 크게 지닌 장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25)
그리고 최근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만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산시’ 편에도 서문 밖에서 매질 처형, 교수 처형, 참수 처형, 자리개질 처형 등이 이루어졌다고 서술되어 있다.26) 또한 2022년 현재 해미국제성지 홈페이지의 ‘성지 소개’에도 서문 밖에서 교수형, 참수형,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여러 명을 눕혀 놓고 그 위에 돌기둥을 떨어뜨리는 처형 등으로 많은 천주교도가 순교하여, 서문 밖은 항상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27)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서문 밖에 세워져 있는 ‘순교 현양비’의 뒷면에는 박해 시기 내내 서문 밖에서 여러 방식으로 천주교도들을 처형하여 순교자가 이천 명에 달한다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하여 서문밖 순교 터를 해미 일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
한 내용은 현 해미국제성지 홈페이지의 성지 소개 글에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처형 방식 중에는 기존 연구에서 미처 검토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따라서 서문 밖 처형 방식에 대해 체계적으로 규명 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서문 밖 처형 방식을 규명하고자 할 때 우선 주목되는 자료는 1935년에 서산 가재 본당의 바로 신부가 병인박해 때 천주교도들이 산채로 매장당해 순교한 해미 숲정이 생매장 터를 발굴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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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해미성당 30년사 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2015, 41~45쪽.
26)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http://www.grandculture.net/) “서산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
27) 해미국제성지 홈페이지(http://www.haemi.or.kr/about/history) ‘성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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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한 『해미 순교자 약사(海美殉敎者略史)』이다. 이 책은 『경향잡지』 제29권 815호(1935.10.27.)부터 제30권 822호(1936, 1.28)에 연재한 내용을 한데 묶은 것이다.
『해미 순교자 약사』에 의하면, 바로 신부는 생매장터의 발굴에 앞서 병인박해 당시 목격 증인과 전언 증인을 두루 찾아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의 처형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했다.28) 당시 증인들을 유형별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 2]와 같다.
[표 2] 1935년에 병인박해기 해미 진영의 천주교도 박해에 대해 증언자들
증언자들의 유형 | 성명 | 당시 나이 | 거주지 |
친히 목도한 노인들 | 이주필 | 12 | 해미서문밖 |
박승익 | 17 | 해미 도당리 | |
부모에게 들은 자들 | 이치심 | 해미조산리 | |
이병준 | 해미 | ||
오영배 | 해미역말 | ||
동무한테들은자들 | 함범동 | 11 | 해미오동 |
그전어른들한테들은자들 | 임인필 | 해미 조산리 | |
이기남 | 해미 | ||
박제만 | 해미 | ||
이교성 | 해미 | ||
석씨 | 해미젓내 | ||
김기호 | 해미조산리 | ||
교우쪽 사람들 |
위의 [표 2]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바로 신부가 증언을 청취했던 증인들은 1868년 당시 생매장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주필과 박승익 2명,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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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해미 순교자 약사(海美殉敎者略史)』,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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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이주필에게 전해 들은 한동범 1명, 뒤에 부모에게 전해 들은 이치심· 이병준·오형배 3명, 뒤에 그 전 어른한테 전해 들은 임인필·이기남·박제만·이교성·석씨·김기호 6명, 교우 쪽 사람들 등이다. 목격 증인들 가운데 이주필은 해미 서문 밖에 거주했고, 당시 17세인 박승익은 해미 도당리(현 음암면 도당리)에 살았으며, 당시 동무 이주필에게 전해들은 한동범은 해미 오동(현 해미면 오학리)에 거주했다. 또한 뒤에 부모에게 전해 들은 이치심은 해미 조산리에, 오영배는 해미 역말에 살았고, 뒤에 그 전 어른한테 전해 들은 임인필과 김기호는 해미 조산리에, 석씨는 젓내에 거주했다.
이러한 여러 증인 중에서도 이주필과 한동범이 특히 주목된다. 이주필은 한동범보다 한 살 많았다.29) 그런데 『청주한씨정선공파세보』에 의하면, 한동범은 병진(1856)생이다.30) 그러므로 이주필은 을묘(1855)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866년 당시 12세였던 이주필은 집이 서문 밖에 있었다. 그리고 서문에서 가까운 오동(현 해미면 오학리)에서 누대 살아온 청주한씨 집안 출신인 한동범은 1866년 당시 11세였고, 자기보다 한 살이많은 12세인 해미 서문 박에 살던 이주필과 가끔 만나 놀았다. 그러므로 이주필과 한동범은 병인박해 때 숲정이에서 집행된 생매장뿐 아니라 서문밖에서 벌어지는 천주교도들의 처형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31)
그리 고 이치심·임인필·김기호가 살던 조산리와 오영배가 살던 역말(해미면 동암리)도 서문 밖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므로 그들도 병인박해 때 숲정이에서 집행된 생매장뿐 아니라 서문 밖에서 벌어지는 천주교도들의 처형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여러 증인이 1935년에 증언한 내용에는 서문 밖에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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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3쪽.
30) 한만년 편, 『청주한씨정선공파세보』 하, 청주한씨정선공파세보편찬위원회, 1990, 800쪽. 이 족보는 해미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한기송 선생이 제공해 주고, 한동범에 관한 기록도 찾 아 주었다.
31)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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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집행된 사실만 서술되어 있고, 그 밖의 다른 처형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즉, 병인박해 당시 서문 밖에 살던 이주필은 토포 병방 박영완이 서문 밖에서 몇 명의 사령들을 데리고 천주교도들을 목매어 죽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또한 그 말고도 서문에는 그러한 광경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서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동문으로 가서 20여 세가량 된 이병준의 부친 집에서 쉬다가 서문 밖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그리로 갔다.
아직도 박영완이 천주교도들을 목매어 죽이는 그곳에는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비창한 적막이 넘치는 중에 간간이 헐떡이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릴뿐이었다. 서문을 나가서 보니, 왼쪽에 죽은 시신이 즐비했는데,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 죽었는지 확인해 보다가, 한 사람이 아직 숨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막 때려서 죽여 버렸다. 이주필이 서 있는 데서 15보가량 되는 곳에 시체가 쓰러져 있었고, 성 밑에도 시체 몇이 있었다고 하는 내용만 서술되어 있다.32)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35년에 증인으로 참여한 서문 밖에 살던 이주필과 서문에서 가까운 오동에 살던 한동범, 그리고 서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조산리에 살던 이치심·임인필·김기호와 역말에 살던 오영배 등은 병인박해 때 서문 밖에서 집행된 처형에 대해 직접 목격하기도 하고 부모나 어른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도 서문 밖에서 집행된 천주교도의 처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된 『해미 순교자 약사』에는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이 집행된 사실만 서술되어 있고, 그 밖의 다른 처형 방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 외에도 여러 방식으로 처형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와 같이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만 집행된 사실은 박해 시기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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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위의 책, 6쪽과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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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의 검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해 시기에 서문 밖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을 관련 자료를 두루 조사하여 정리하면 아래의 [표 3]과 같다.
[표 3] 1880년대~1920년대 증언자들의 해미 서문 밖 처형에 대한 증언33)
성명 | 출신지 | 거주지 | 순교때나이 | 체포시기 | 순교시기 | 순교지 | 순교형식 | 비고 |
김선양 바오로 | 해미역말 | 해미안우리 | 57 | 1866. 10.1 | 1866. 10.11 | 해미 서문 밖 | 교수 | 봄에 체포·석방, 치명 715, 사적 6-58 |
방영창 안토니오 | 경기파주 | 덕산 황무실 | 1866. 11.12 | 서문밖(?) | 교수 (?) | 포졸 2명이 찾아와 “네 남편은 자리개질로 죽었다. 시신을 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아라. 우리가건네주겠다.” 함. | ||
김정옥 파비아노 | 해미이문 | 40여 | 1866. 11.11 | 1866. 11.20. (22) | 해미서문 밖 | 교수 (?) | 첨지, 이군명과 함께 잡힘, 입에 그을음, 치명 700, 증언38, 사적 1-51,사적23-86(박 90) | |
이군명 바오로 | 공주 청장이 | 해미에미점촌 | 대개33 | 1866. 11.11 | 1866. 11.20. (22)(? | 해미서문 밖(?) | 교수 (?) | 김정옥 파비아노와 함께 해미 포교에게 잡혀 순교함. 순교일이 11월 10일로 되어 있음.증언38·39, 사적 1-51, |
김순장 | 해미에미점촌 | 50세여 | 1866. 11.11 | 1866. 11.20. (22)(? | 해미서문 밖(?) | 교수 (?) | 이군명과 한마을에 살다가 해미 포교에게 함께 잡혀 순교함. 순교 일이 11월 10일로 되어 있음. 증언 39, 사적 1-52 | |
박춘정 | 영동 | 해미역촌점촌 | 56 | 1866. 10 | 1866. 10.20 | 해미서문밖 | 교수 | 병인 봄 체포·배교·석방, 우병방이 처형 지휘, 치명 708, 증언 163(사적 24-3), 사적 6-24 |
최 야고보 | 수원갓등이 | 해미삼진리 | 1866. 11 | 1867.1 | 해미서문밖(?) | 교수 | 동문 밖에서는 처형하지 않음, 동문 밖은 서문 밖의 오기인 듯. 치명 706, 사적 3-66 | |
표 안드레아 | 덕산 황무실 | 36 | 1867.9 | 1867. 10~11 | 해미서문 밖(?) | 교수 | 교하여 죽일 때, 큰 매로 덜미를 몹시 치고 죽인 후에 얼굴을 불로 지짐, 치명 720, 증언 92(사적 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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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표 3]의 ‘비고’ 난 중 전거를 표시한 ‘치명’은 ‘치명일기’를, ‘사적’은 ‘병인치명사적’을, ‘증
언’은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을, ‘박’은 ‘박순집증언록’을 줄여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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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 3]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박해 시기에 서문 밖에서 순교한 천주교도들은 모두 8명이다. 이들 8명 가운데 해미에 살던 중 1866년 봄 박해 때 잡혀 배교하고 나왔다가 10월에 또 해미 포교에게 잡혀 순교한 박춘정과 해미 역말에 살던 중 1866년 봄 박해 때 잡혔다가 배교하지 않고 풀려난 뒤 10월 1일 다시 해미 포졸에게 잡혀 순교한 김선양(바오로) 2명 은 자료에 해미 서문 밖에서 교수로 순교했다고 밝혀져 있다.34) 그러므로 그들이 서문 밖에서 교수당해 순교한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또한 순교한 곳이 서문 밖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 그 밖의 순교자들도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서문 밖에서 순교한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덕산 황무실 사람으로 1867년 9월 해미에서 교수당해 순교한 표 안드레아는 교수하여 죽일 때 큰 매로 목덜미를 몹시 치고 죽인 후에 얼굴을 불로 지졌다고 한다.35) 그런데 이러한 광경은 토포 병방 박영완이 서문 밖에서 천주교도들을 교수하여 죽이면서 사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심지에 불을 붙여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 보다가 아직 숨이 남아 있으면 막 때려서 죽여버렸다고 한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므로 표 안드레아는 서문 밖에서 교수당해 순교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해미 삼진이에 살던 중 1866년 11월에 해미 포교에게 잡혀 순교한 최 야고보는 동문 밖에서 교수당해 순교했다고 그 아들 최 안드레아가 증언했다.36) 이 증언을 근거로 차기진은 최 야고보의 순교 터를 동문 밖으로 보았다.37) 그러나 조선 초 이래로 동문 밖에서는 죄인을 처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태종 16년(1416) 7월 17일 예조에서 “사람을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실로 편치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서경』에 ‘사(社)에서 죽인다.’라고 했는데, 사는 우편(서쪽)에 있으니, 바라건대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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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1, 517쪽과 599쪽.
35)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4, 425쪽.
36)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1, 215쪽.
37) 차기진, 앞의 논문, 2007,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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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에 의하여 서소문 밖 성 밑 10리 양천지방 예전 공암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여,38) 이후 당고개,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 등에서 죄인을 처형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최 안드레아가 그의 순교 터로 증언한 ‘동문 밖’은 ‘서문 밖’의 오기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해미에서 순교한 김정옥(파비아노)과 이군명·김순장은 해미 여미리(현 당진시 정미면 여미리)에서 살다가 같은 날 함께 잡혔다. 즉, 여미리 이문안에 살던 김정옥은 여미리 점촌에 사는 이군명·김순장과 함께 1866년 11월 10일 해미 포교에게 잡혀 해미에서 순교했다.39) 이들 가운 데 김정옥은 11월 20일 순교한 뒤, 그의 장자 김 요한 세례자가 자기 부친의 시신을 거두러 가서 보니, 죽은 사람 입에 솜을 비겨(박아 넣어) 불로 태워 그 모습이 참혹했다고 한다.40) 이와 같이 입에 솜을 넣고 불로 태운 모습은 교수하여 죽인 후에 얼굴을 불로 지진 표 안드레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러므로 김정옥도 서문 밖에서 교수당해 순교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장자 김 요한 세례자는 자기 부친의 시신을 거둘 때 그곳에 다른 두 주검이 함께 있어서 그 두 주검도 같이 거두어 해미 장사마골(현 서산시 운산면 수평리)에 안장했다.41) 여미리 점촌에 살던 이군명과 김순장이 여미리 이문안에 살던 김정옥과 함께 1866년 11월 10일 해미 포교에게 잡혀 해미에서 문초를 받고 순교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김 요한 세례자가 자기 부친의 시신과 함께 거두어 해미 장사마골에 안장한 두 주검은 이군명과 김순장의 시신으로 판단된다.42) 그러므로 이군명과 김순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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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태종실록』 16년(1416) 7월 17일.
39)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5, 277쪽;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 치명사적』 4, 255~257쪽.
40)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5, 277~279쪽.
41)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위의 책, 279쪽.
42) 차기진도 자세히 논증하지는 않았지만 김 요한 세례자가 자기 부친의 시신과 함께 거두어 해미 장사마골에 안장한 두 주검은 이군명과 김순장의 시신으로 이해했다(차기진, 앞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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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11월 20일 서문 밖에서 김정옥과 함께 교수당해 순교했다고 볼수 있다.43)
마지막으로 방영창(안토니오)은, 교회 측 자료와 그의 아내와 후손들이 집안에 대대로 전한 구전 자료에 의하면, 1866년 11월 12일(또는 늦가을, 즉 11월경)에 자리개질로 순교했다. 즉, 덕산 황무실(또는 양촌)에 살던 방영창이 해미 포교에게 붙잡혀 해미로 끌려간 지 며칠 후에, 해미 포졸 2명이 그의 집으로 찾아와 그의 아내에게 “네 남편은 자리개질로 죽었다. 시신을 찾고 싶으면 돈을 내놓아라.”고 했다고 한다.44) 이러한 그 아내의 증언으로 볼 때, 그가 자리개질로 순교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현전하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박해 시기에 서문 밖에서 처형된 천주교도는 [표 3]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모두 8명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교수당해 순교했다. 그 시기는 병인박해 때, 그중에서도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에서 11월에 집중되어 모두 7명이 체포되어 순교했고, 그 여파로 박해가 이어지던 1867년 9월에 1명이 체포되어 순교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옥에서 주로 집행되던 교수 처형이 병인박해 중에 서도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에서 11월에 체포된 천주교도에 집중되고, 그 여파가 미친 1867년까지 이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1866년 10월에 체포되에 심문을 받고 20일 만에 서문 밖에
서 교수형을 당한 박춘정이 문초를 받을 때 옥에 28명의 신자들이 갇혀 있었다고 한 사실45)로 미루어볼 때,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되어 한꺼번에 많은 천주교도가 체포되어 옥에 갇히면서 옥에서 집행된 교수 처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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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35쪽).
43) 이군명과 김순장의 순교 시기를 1866년 11월 10일로 증언한 기록이 있지만(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4, 257쪽), 그들이 김정옥과 함께 잡힌 날짜가 1866년 11월 11일이므로, 그들의 순교 시기는 1866년 11월 20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44) 천주교 대전교구 편, 앞의 책, 「방재희(필립보) 고증 자료 해미 순교자 ‘방영창 안토니오’에 대한 고증(1895.9.14.)-」, 272~274쪽.
45)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1, 517~5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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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때 특별히 교수 처형을 서문 밖에서도 집행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체포되어 순교한 천주교도가 적은 1867년까지도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이 이루어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당시 서문 밖 교수 처형을 주도한 토포 병방 방영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의 처형 상황을 친히 목격한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도당리 박승익은 토포 병방 박영완에 대해 “그 악독한 박영환은 아주 몹쓸 놈이라고 다들 그랬습니다.”라고 증언했다.46) 그리고 『해미 순교자 약사』에서 토포 병방 박영완이 서문 밖에서 천주교도들을 교수 처형하는 참혹한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마저 죽었고, 아무 자손이 없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므로 비신자들 은 모두 천벌이라 말하며 인증했다.”라고 덧붙였다.47) 이러한 토포 병방 박영완의 주도로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이 집행된 결과 체포되어 순교한 천주교도가 적은 1867년까지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1868년 남연군묘도굴사건으로 박해가 더욱 격화되어 수십 명의 천주교도가 숲정이(여숫골)로 끌려가 생매장당한 사실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토포 병방 박영완에 대한 언급이 없다.48) 이로 미루어볼 때, 그는 그전에 홍주로 잡혀가 처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병인박해 당시 서문 밖에 살던 이주필과 서문 밖에서 가까운 오동에 살던 한동범 및 여러 전문 증언자들이 1935년에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 처형 상황을 증언한 『해미 순교자 약사』의 내용과 박해 시기에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에 관한 현전하는 자료들을 두
루 살펴보았지만, 서문 밖에서는 교수 처형만 집행되었다. 그리고 박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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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13쪽.
47)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위의 책, 9쪽.
48)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6, 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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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중에서도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 이후와 그 여파가 미친 1867년에만 악독한 토포 병방 박영완의 주도로 한시적으로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만 이루어졌다. 물론 『해미 순교자 약사』에 틀을 만들어서 큰 기둥 사이에 사람을 한 20명씩 쌓고 내리눌러 머리가 다 깨어져 죽게
하는 처형 등이 언급되어 있지만,49) 그것은 해미의 사례가 아니라 전국적 인 상황을 밝힌 것이다.
요컨대 서문 밖 ‘순교현양비’ 뒷면에서 윤종관 신부가 밝히거나 현 성지 홈페이지 ‘성지 소개’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 밖의 여러 처형 방식들 가운데 서문 밖 돌다리에 천주교도를 자리개질해 죽였다는 방식만 구전을 통해 확인되고 나머지 방식은 현전하는 기록이나 구체적인 구전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과 자리개질 처형 외에 다른 처형은 집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현전 하는 기록에 서문 밖에서 자리개질 처형으로 순교한 사례가 한 건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서문 밖에서 천주교도를 자리개질해 처형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례는 빈번하지 않고 매우 드물었다고 생각된다.
4. 숲정이 참수 터와 시신 유기·매장지
1) 참수 터
[표 5]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박해 시기에 해미에서 참수당해 순교한 천주교도는 모두 6명이다. 이들 중 김경오·김여흥·김여집·이순백·이선경 5명은 1866년에 순교했다. 그들은 모두 공주 진밭에서 해미로 이주하여 살던 중 체포되었는데, 김여흥과 김여집은 형제간이고 김경오는 김여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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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위의 책,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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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며, 이순백과 이선경은 숙질간이다. 나머지 1명 박화규(다미아노)도 병인박해 때 순교했으나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평안도 박천 출신인 그는 대원군 시절에 박해를 피해 강원도를 거쳐 충청도 당진에 가서 살다가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했다.50)
그러면 이들 6명이 참수당해 순교한 곳은 어디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존 연구에서는 모두 서문 밖을 참수 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추정에 그치고 만 것은 그곳이 처형장으로 적합한 서쪽이고, 교수 처형 등이 서문 밖에서 이루어진 정황 등 외에는 서문 밖을 참수 터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참수 터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서문 밖은 순교터로서의 적합한 입지적 조건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참수형은 서울의 서소문 밖 네거리 만초천 변 형장, 당고개 만초천 변 형장, 새남터 한강 변 형장, 양화진(절두산) 한강 변 형장, 경기도 양평의 한강 변 형장, 양주의 유양천 변 형장, 충남 공주의 제민천 변 황새바위 형장, 홍주의 북문 월계천 변 형장, 보령 갈매못 해변 형장, 전북 전주의 전주천 변 숲정이 형장, 여산 강경천 변 숲정이 형장 등의 사례로 보아 알 수 있듯이, 대부분 관아에서 가까운 냇가나 강가나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집행되었다.
그러나 해미 서문 밖에는 모래밭을 갖추고 있는 천이 없다. 서문 밖 돌다리가 놓인 개울은 비가 올 때 읍성 안의 빗물이 흘러내리는 도랑이었다.
또한 아래의 1919년에 조선총부에서 발행한 『조선오만분일지형도』에 실려 있는 「해미(남양팔호)(1819.3.30. 발행)」 지도에서 보듯이, 오동에서 흘러내리는 반양천은 오른쪽 산자락을 따라 반양리 쪽으로 흐르다가 도당천과 합류하여 해미천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이었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으로 볼 때 서문 밖은 참수 터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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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경훈 신부 정리, 「순교자 박화규 다미아노 순교 사적」. 2022. 이 자료는 경기도 양주 신암리 공소 출신인 서울대교구 이경훈(바로톨로메오) 신부가 외가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순교한 외고조부 박화규(다미아노)의 행적을 어머니 박정순(헬레나, 박화규의 증손녀)에 듣고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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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해미의 참수 터는 어디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곳은 생매장터가 있는 여숫골이다. 원래 숲정이로 불린 이곳은 서쪽에 해당하는데다, 위의 [그림 1]에서 보듯이, 해미읍성에서 서문을 나가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조산리로 가는 길을 따라 해미천을 건너 숲정이와 조산리에 이르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읍성에서 숲정이까지는 2리, 즉 800m 로 그리 멀지 않았다.51) 또한 가야산 산수리 쪽과 황락리 쪽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합류하여 흘러내리는 읍천(邑川),52) 즉 해미천은 큰 내로 모래밭이 형성되기에 적합했다. 그러므로 숲정이 해미천 변은 참수형을 집행하기에 적합한 입지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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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조산리는 관아에서 2리이다.”라고 했고(김우철 역주, 『여지도서 충청도』 Ⅴ, 「해미현」 ‘방리’ 조, 디자인 흐름, 2009, 248쪽), 규장각 소장 『1872년 지방지도』, 「해미현지도」에 “‘읍수(邑藪)’, 즉 고을 숲인 숲정이는 관아에서 서쪽으로 2리이다.”라고 했다.
52) 『여지도서』에 “읍천은 가야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해 양림 포구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했다 (김우철 역주, 앞의 책, 「해미현」 ‘산천’ 조, 2009, 2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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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참수 터로서의 입지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던 숲정이는 조산리와 접해 있었는데, ‘조산리’라는 마을 이름은 ‘조산(造山, 인공적으로 쌓아 만든 산)’에서 유래되었고, 이 ‘조산’은 ‘숲정이’의 다른 이름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숲정이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숲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인공적으로 조성한 조산, 즉 숲정이는 아래 『1872년지방지도』의 「해미현지도」에 표시된 ‘읍수(邑藪)’, 즉 ‘고을 숲’으로 보이는데, 이 읍수는 관아에서 2리 떨어져 있고, 그규모는 둘레가 3,800보, 길이가 500보, 폭이 300보로 기록되어 있다. 1보는 주척(周尺)으로 6자 되는 거리이고, 1자는 23.1㎝이므로, 둘레는 5,266.8m, 길이는 693m, 폭은 415.8m였다.
위의 「해미현지도」에는 이 읍수가 해미천 북쪽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병인박해 당시에는 해미천 남쪽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미 순교자 약사』에 “어떤 날 저녁때쯤 하여 사령들이 사람 수십 명을 길게 엮어서 끌고 조그마한 길로 바다를 향하여 가니 저게 웬일일까…어떤 이씨 하나와 박승익이라는 17세 된 아이와 이주필이 따라가서 보니, 들을 지나 바다 쪽으로 가다가 내를 건너니, 이 내는 산에서 나오기에 비 올 때는 물이 많고 세서 무서운 내이다. 이 내를 건너면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데, 기기에 구덩이를 몇 개 파고서 끌고 온 사람들을 묻어 죽이려는 것이다.”라고 서술된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53) 그러므로 이 읍수는 1868년 당시 해미천과 조산리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4)
이와 같이 「해미현지도」에 ‘읍수(고을 숲)’로 표시된 점으로 볼 때, 숲정이는 해미 관아에서 조성한 숲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 「해미현」 ‘방리’ 조에 조산리가 나오는 점55)으로 볼 때, 숲정이는 18세기 중엽 이전에 조성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해미 관아에서 숲정이를 조성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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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9~10쪽. 이렇게 1868년 당시 해미천 남쪽에 있던 읍수(숲정이)가 1872년 해미현 지도에 해미천 북쪽에 그려진 까닭은 무엇일까. 병오년(1906) 큰 물에 생매장한 무덤의 봉분이 다 없어져서 1935년 당시 무덤의 형적이 보이지 않았던 점(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위의 책, 12쪽), 해방 다음 해에 해미 일대에 엄청난 큰물이 져 남석교(현 해미교) 조금 위쪽에서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한 갈래는 조산리쪽을 통해 생매장 일대를 휩쓸고, 다른 한 갈래는 지금 하천으로 내려갔다는 사실, 1960년경 비가 엄청 많이 내려 큰물이 지금 성지 중앙(성당 자리)에 살고 있던 석기남 씨의 집 앞뒤 양쪽으로 흘렀으며, 이런 상태로 1963년까지 내려오다가 해미천 제방을 축조하면서 원 하천을 중심으로 제방 둑을 쌓지 않고 더 큰 읍내리 쪽 물줄기를 중심으로 제방 둑을 쌓았다고 한다(류인협 요한, 『꿈결 같은 80년 인생살이』, 2020, 203쪽). 그러므로 1868~1872년 사이에 큰물이 져 물길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고, 또한 읍수를 강조하기 위하여 해미천 남쪽에 있던 읍수를 해미천 북쪽에 그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54) 현재 생매장터가 있는 해미 여숫골 성지는 대부분 읍내리 구역에 속해 있지만, 원래는 조산 리와 해미천 사이에 조성되어 있던 숲정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 「해미현」, ‘방리’ 조에 보면, 남문 밖에서부터 해미천 사이에는 마을이 없고, 해미천 건너편에 조산리가 있고, 그 아래 해미천 북쪽에 전천리가 있었다(김우철 역주, 앞의 책, 247~248쪽). 일제강점기에 남석교(현 해미교) 위쪽에 제방을 쌓으면서부터 남문 밖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1914년에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노상리·노하리·성내리·서문리· 천변리 일부를 병합해 읍내리라 했다(한글학회 편, 『한국지명총람』 4(충남편) 하, 한글학회, 1974, 87쪽). 이후 1935년 당시에는 남문 밖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읍성 서문 안과 남문 안에 있던 장이 남문 앞으로 이전했다(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11쪽). 이렇게 남문 밖에 거주지가 조성되면서 읍내리가 점차 확장되어 나갔으며, 숲정이도 1950년대 후반부터 점차 밭과 논으로 개간되어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읍내리에 편입되어 오늘날 읍내리와 조산 리의 경계선이 설정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55) 김우철 역주, 앞의 책, 2009,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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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천수만을 앞둔 곳에 숲정이가 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숲정이는 천수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줄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겨울에 부는 찬바람도 막을 수 있어야 하므로, 일반적으로 방풍림을 소나무로 조성하듯이, 숲정이의 숲도 원래는 소나무로 조성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숲정이(여숫골)에 옛날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도 드문드문 있었다는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56)
이렇게 볼 때 미루나무, 오리나무, 버드나무 등이 우거진 1868년 당시와 1935년 당시 숲정이의 모습57)은 1872년 당시 폭이 415.8m, 길이가 693m에 달하는 숲정이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 물가에서 잘 자라는 미루나무, 버드나무 등이 우거진 해미천에서 가까운 쪽 숲정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숲정이 중에서도 물가에서 잘 자라는 미루나무, 버드나무 등이 우거진 해미천에서 가까운 쪽에 생매장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숲정이는 1950년대 후반부터 개인에게 불하되어 밭으로 개간 되고,58) 1962년에 산수 저수지가 준공되면서 논으로 다시 개간되었다.59)
이렇게 밭으로 논으로 거듭 개간하는 과정에서 수직으로 박혀 있는 정강이뼈 두 개를 발견한 류인협은 그의 부친 유순봉에게 “이 근처가 생매장한 곳이라 했는데, 이 뼈가 순교자의 뼈가 아닐까요?”라고 하자, 그의 부친이 “나도 발굴할 때 같이 발굴했는데, 다 파간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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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이러한 내용은 2022년 11월 10일 조산리 283-2에 거주하는 석문길 씨가 필자에게 증언해 준 것이다. 아울러 현재 해미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은 유병일 작가의 견해에 의하면, 1872년 해미현 지도에 그려진 읍수의 그림은 단순히 나무가 우거진 숲을 표시한 것이므로, 그 그림만으로는 그 숲이 소나무 숲인지 활엽수 숲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57) 「해미치명자유해(2)」, 『경향잡지』 제29권 제816호(1935.10.23.), 632쪽 및 경성교구 서산천 주교회 편, 앞의 책, 3쪽과 에 실린 ‘×표 3처에서 묻어 죽인 치명자의 유해를 발굴’ 사진 참조.
58) 정병배 편, 앞의 책, 1987, 296쪽.
59) 이경훈 정리, 앞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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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둘이서 어떻게 판단한단 말이냐. 그리고 일반 죄인들도 여기서 죽였다는 말도 들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60)
이러한 두 사람의 대화 중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류순봉이 “일반 죄인들도 여기서, 즉 숲정이에서 죽였다는 말도 들었다.”라고 밝힌 부분이다. 이러한 류순봉의 전문 증언은 숲정이 해미천 모래밭에서 천주교도뿐 아니라 일반 죄인도 참수형으로 처형되었음을 뒷받침해 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해미 참수 터의 규명과 관련하여 병인박해 때 해미에서 순교한 박화규(다미아노)에 관한 그 후손들의 증언도 참고 된다. 그 후손들 집안에 대대로 전승된 박화규의 순교 행적을 그 외고손 이경훈 신부(서울대교구 소속)가 어머니 박정순(헬레나)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박화규는 당진에 살다가 해미 포졸에게 붙잡혀 해미 관아에서 심문받았다.
이때 그를 비롯하여 옥에 갇혀 있던 12명의 교우 모두 순교했는데, 박화규는 참수당해 순교했다. 당시 박화규의 아내 한학자(마리아)는 시누이와 함께 초승달이 떠 있을 때 소나무 숲에서 남편이 참수당해 순교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망나니들이 철수한 뒤 한학자는 우선 남편의 머리를 치마폭에 싸서 근처 소나무 아래 땅을 파고 묻은 다음, 그다음 날 시신을 찾아가 라는 연락을 받고 가서 남편의 목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목이 묻혀 있는 소나무 아래에 함께 묻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어 놓았다. 이후 그의 후손인 고 박복선(파비아노, 1918년생, 신암리 공소 회장 33년간 역임)이 젊은 시절까지 해마다 박화규의 묘소를 찾아가 벌초하며 보살폈다. 그러다가 1960년 대 후반 즈음에 찾아갔더니, 그 산소 자리에 비슷한 산소들이 들어서고, 그 묘소가 그 묘소 같아서 그 묘소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61)
그러면 박화규가 참수당하여 순교한 곳은 어디였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문 밖은 참수형을 집행할 만한 입지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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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류인협 요한, 앞의 책, 2020, 77쪽.
61) 이경훈 신부 정리, 앞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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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고, 참수 터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 반면에 숲정이 해미천 변은 참수형을 집행할 만한 입지적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고, 숲정이는 원래 천수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소나무로 조성한 방풍림인데다, 전주 전주천 변 숲정이 형장과 여산 강경천 변 숲정이 형장 등과 같이 천변이 있는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집행한 사례가 있고, 해미 숲정이에서 일반 죄인도 죽였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있다. 이러한 여러 사항을 고려할 때 박학규 등 6명이 병인박해 때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곳은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밭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박화규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한 곳은 어디일까. 그의 부인이 처음에 그의 시신 전체를 수습해 매장하지 못하고 목만 우선 치마폭에싸서 근처 소나무 아래에 매장했다가 그다음 날 목 아랫부분을 수습해 매장한 점과 숲정이는 큰물이 지면 물이 휩쓸고 지나가 장지로 적합하지 않은 점62) 등으로 보아,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곳은 숲정이 주변이 아니라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오학리는 숲정이에서 멀고 관아에서 가깝다는 점에서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숲정이에서 가까운 조산리에 있던 솔밭은 그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기에 적합하다. 그중 우선 용암리1리 장대말이 주목된다. 장대말은 공동묘지로 가는 오른쪽 작은 동네로, 옛날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마치 교수형에 처하듯 장대에 목을 매어 사형시킨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63)
그러나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를 처형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면 장대말이 천주교도의 순
교지로 전해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숲정이에서 참수당해 순교한 천주교도의 시신이 안장된 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박화규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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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병오년(1906) 큰물에 생매장한 무덤의 봉분이 다 없어져서 1935년 당시 무덤의 형적이 보이지 않았다(경성교구 서산천주교회 편, 앞의 책, 12쪽).
63) 고북면지 발간추진위원회 편, 『고북면지』, 청오인쇄·출판사, 2009,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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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 박복선(1918년 생)이 해마다 그의 묘소를 찾아가 벌초하고 보살폈으므로, 그의 묘는 마을 사람들에게 순교한 천주교 신자의 묘로 알려졌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시신은 장대말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숲정이 남쪽에 있던 토롱 터도 박화규의 시신이 매장된 장소일 가능성이 있다. 류인협의 증언에 의하면, 조산리 공소로 사용되었던 조산리 228-1번지 류기업(바오로)의 집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 있었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좋은 산소 자리를 구할 때까지 이 산에 죽은 시신을 임시로 매장한 토롱(土壟) 터였다고 한다.64)
이러한 사실과 아울러 후대에 묘소가 많아져 그의 묘소를 찾을 수 없게 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곳은 옛날에 사람들이 죽은 시신을 임시로 매장했던 토롱 터가 있던 산일 가능성도 있다.
2) 순교자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
옥에서 교수당하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한 순교자들의 시신, 읍성 안 서문 쪽 장터에서 매 맞아 죽은 순교자들의 시신, 서문 밖에서 교수당한 순교자들의 시신,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밭에서 참수당한 순교자들의 시신 등은 남은 가족들이나 교우들이 거두어 매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미 순교자들 가운데에 남은 가족들이나 교우들에 의해 시신이 수습되어 안장된 순교자는 이보현, 김정옥, 이군명, 김순장, 김선양, 염지량, 박화규 등 6명에 불과하다.
정사박해 때인 1899년에 해미 남문 안 장터에서 매 맞아 순교한 이보현의 시신은 여러 날 후에 사람들이 수습해 안장했다.65)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866년 11월 20일 여미리 이문안과 점촌에서 함께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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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이러한 내용은 2022년 11월 10일 류인협 씨가 필자에게 증언해 준 것이다.
65) 앙투안 다블뤼 저, 유소연 번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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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서문 밖에서 교수당해 순교한 김정옥·이군명·김순장의 시신은 김정옥의 장자 김 요한 세례자가 자기 부친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그곳에 함께 있던 이군명과 김순장의 시신도 아울러 거두어 해미 장사마골에 안장했다.
그리고 해미 역말에 살던 중 1866년 봄 박해 때 잡혔다가 배교하지 않고 풀려난 뒤 안우리로 이주하여 살다가 10월 1일 다시 해미 포졸에게 잡혀 서문 밖에서 교수당해 순교한 김선양의 시신은 그의 아내와 아들이 수습하여 안장했다.66) 또한 홍산 구신에서 입교한 후 해미 강당리에 가
서 살던 중 1866년 10월에 해미 포졸에게 잡혀 해미에서 순교한 염지량(에벤시오)의 시신은 그 아들이 거두어 안장했다.67)
아울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병인박해 때 당진에서 살던 중 해미 포졸에게 잡혀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밭에서 참수당해 순교한 박화규의 시신은 그의 아내 한학자가 거두어 근처 소나무 밑에 안장했다.
그러면 남은 가족들이나 교우들이 거두지 못한 해미 순교자들 대부분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조선시대에는 옥에서 교수당해 죽거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한 죄수들의 시신, 형장에서 참수당해 죽은 죄수들의 시신, 그리고 전염병이나 굶주림으로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 등을 거두어 내다 버리고 묻어 주던 곳이 있었다.
서울의 경우는 『예기』 월령(月令)에 “들판에 드러난 해골과 시체를 거두어 묻어 준다.”라고 한 가르침에 따라 남부·중부·동부의 포도청이나 형조의 전옥이나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고 묻어 주었고, 서부· 북부의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과 서소문 밖 네거리 만초천 변 형장에서 참수당해 죽은 죄수들의 시신은 서소문 밖 대현이나 당고개에 내
다 버리고 묻어 주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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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1, 599쪽; 『치명일기』 707번.
67)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병인치명사적』 5, 501, 503쪽.
68) 서종태, 「박해 시기 순교자 시신의 유기 및 매장과 광희문 밖」, 『광희문 밖 794위 순교자들』, 천주교 서울대교구 광희문성지 순교자현양관, 2019, 36~37, 56~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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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해미의 옥과 서문 밖 형장 및 숲정이 해미천 변 형장에서 죽거나 처형된 죄수들의 시신도 내다 버리거나 묻어주던 곳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해미의 옥이나 여러 형장에서 죽거나 처형된 죄수들의 시신, 그리고 전염병이나 굶주림으로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 등을 내다 버리거나 묻어 주던 곳은 어디였을까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되는 점은 파헤쳐진 묘에서 드러난 시신을 먹기 위해 여우가 공동묘지에 자주 출몰하듯이 원래 숲정이에 여우들이 살면서 민가 주변에 출몰하여 그곳을 여숫골(여우골)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69) 그러면 깊은 산골도 아닌 들판의 숲정이에 여우들이 살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숲정이는 여우에게 먹이가 풍부한 곳, 즉 해미의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죄인들의 시신, 그리고 전염병이나 굶주림으로 길거리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 등을 내다 버리거나 묻어 준 곳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덕산의 가야산 자락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행이 도굴한 사건으로 박해가 격화된 1868년에 해미 숲정이에서 천주교도들을 생매장으로 처형하게 된 사실이 다. 이와 같이 숲정이에서 생매장으로 처형하게 된 것은 아래의 [표 4]에서 보듯이 현전하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가 1868년에 무려 100명에 달할 정도로 대단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숫자를 옥이나 서문 밖 형장에서 교수하여 처형하게 되면, 그 시신들을 내다 버리고 묻어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만약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죄수들의 시신을 내다버리고 매장해 주는 곳으로 천주교도들을 끌고 가서 구덩이를 파고 그 구 덩이에 그들을 생매장하게 되면, 그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묻어 주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1868년에 수십 명의 천주교도를 숲정이로 끌고 가 생매장한 것으로 판단 된다. 그렇다면 숲정이는 해미의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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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류인협 요한, 앞의 책, 2020,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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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4] 해미 순교자의 체포 시기별 분류
박해 시기 | 유명 순교자 | 무명 순교자 | 합계 | |
정사뱍해~기해박해 | 정사박해 | 2 | 2 | |
신유박해~기해박해 | 9 | 9 | ||
병인박해 | 1866 | 27 | 30(홍주신리신자) | 57 |
1867 | 5 | 5 | ||
1868 | 83 | 17(면천농비위점 신자) | 100 | |
시기불명 | 11 | 11 | ||
합계 | 137 | 47 | 184 |
아울러 주목되는 점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행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으로 박해가 격화된 1868년에 홍주에서 천주교도들을 생매장한 ‘숲거리’, 즉 ‘숲정이’가 옥에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하거나 교수당한 죄인들의 시신과 북문 밖 형장에서 참수당한 죄인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곳일 뿐만 아니라 1894년에 홍주에서 희생된 동학군과 1906년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홍주 의병들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해 준 곳이라는 사실이다.70) 이러한 홍주의 ‘숲거리’, 즉 ‘숲정이’의 사례로 볼 때, 1868년에 천주교도들을 생매장한 해미의 숲정이도 해미의 여러 형장 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곳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수골, 즉 숲정이는 생매장 순교 터로서의 의미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수 터로서의 의미와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과 전염병이나 굶주림으로 길거리에서 죽인 사람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터로서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수골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큰 역사적 의미가 배어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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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차기진, 「홍성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홍성·해미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2006,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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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5] 박해 시기 해미 순교자 일람표(1797~1868)
성명·세례명 | 출생지 | 거주지 | 순교방식 | 순교장소 | 체포 시기 | 순교시기 | 나이 | 비고 |
인언민 마르티노 | 덕산 주래 | 주래→공주 | 장사 | 장터 | 1799.12. 15 | 63 | 양반 | |
이보현 프란체스코 | 덕산 황모실 | 황모실→연산 | 장사 | 장터 | 1799.12. 15 | 27 | 양인 | |
김진후 비오 | 면천 솔뫼 | 솔뫼 | 옥사 | 옥 | 1814.10. 20 | 76 | 양반 | |
민첨지 베드로 | 목천 쇠악골→ 덕산 배나다리 | 옥사 | 옥 | 1817.1 | 1817년 말경 | 60세이상 | 굶주림으로 사망 | |
안나 민첨지형수 | 덕산 배나다리 | 옥사 | 옥 | 1817.1 | 1817년 말경 | 60세이상 | 과부 | |
송첨지 요셉 | 덕산 배나다리 | 옥사 | 옥 | 1817.1 | 하인, 송춘화 필립보 삼촌 | |||
손연욱 요셉 | 홍성 | 덕산 배나다리 | 병사 | 옥근처 | 1817.1 | 1834 | 김 데레사 성녀 남편. 가석방되어 옥근처 집에서 곧 순교 | |
손여심 | 덕산 배나다리 | 병사 | 집 | 1817.1 | 1827 | 손연욱 부친. 위독해석방되어 곧 순교 | ||
하바르바라 | 당진 진목 | 면천→아산 반디 | 병사 | 집 | 1825.3 | 1825년경 | 석방, 매달 1·15일 출두, 곧 병으로 순교 | |
조흥운 안드레아 | 1838.8. 20 | |||||||
조화서 베드로 부친 | 수원 도미지 | 충청도 | 옥사 | 옥 | 1838 | 1839(?) | 부자가해미포교에게 잡혀부친은 들어가 옥에서 순교 | |
김선양바오로 | 해미 역말→해미 안우리 | 교수 | 서문밖 | 1866. 10.1 | 1866.10. 11(10) | 57 | 행세하는 집 사람. 봄에 잡혔다 석방 | |
박춘정 (박춘경) | 영동 | 영동→해미 역촌 점촌 | 교수 | 서문밖 | 1866.10 (1867.4) | 1866.10. 20 | 56 | 공소집 주인, 봄에체포·석방, 우병방처형 |
염지량 예빈시오 | 홍산 구신리 | 구신리→해미 강당리 | 1866. 1 | 1866.1 | 함께 잡힌 아들은 풀려남 | |||
이군명 바오로 | 공주청장이→해미여미점촌 | 교수(?) | 옥(?) | 1866 | 1866.11. 10 | 대개33 | 김순장과 함께 잡혀 순교 | |
김순장 | 해미 여미 점촌 | 교수(?) | 서문밖(?) | 1866 | 1866.11. 10 | 50여 | 이군명과 함께 잡혀순교 | |
방영창 안토니오 | 경기 파주 | 파주→예산 양촌(덕산황무실) | 자리 개질 | 서문 밖(?) | 1866 | 1866.11. 12.(11월경) | 56 | 아내는 집에서 홍역으로 동사 |
김정옥 파비아노 | 해미 이문 | 교수 | 서문 밖(?) | 1866. 11.11 | 1866.11. 20. (22) | 첨지, 얼굴 불로 지짐. 성명 불명 2명함께 순교 | ||
방명서 | 홍주 | 교수 | 옥(?) | 1866. 11 | 1866.11 | 28 | 방순기형.조모입교 후 온 가족입교 | |
정정심 가브리엘 | 홍즈 신리 | 교수 | 옥(?) | 1866 | 1866.11 | 21 | 옥중 조만과 통경, 22명 권화 | |
박 요한 | 홍주 | 진천→홍주 | 교수 | 옥(?) | 1866 | 1866.12. 29 | 40 | 홍주 순교자 박 사도요한 차남 |
박 바오로 | 홍주 | 진천→홍주 | 교수 | 옥(?) | 1866 | 1866.12. 29 | 36 | 홍주 순교자 박사도요한 삼남 |
김 스테파노 | 해미 강당리 | 교수 | 옥(?) | 1866 | 1866체포 한달후순교 | 28 | 공주에서 순교한 김진식프란치스코동생 | |
김 프란치스코 | 해미 원벌 | 1866 | 1866 | 최마리아남편 | ||||
최마리아 | 해미 원벌 | 1866 | 1866 | 김프란치스코아내 | ||||
김경오 | 공주 진밭→해미 | 참수 | 1866 | 1866 | 김여흥아들 | |||
김여흥 | 공주 진밭→해미 | 참수 | 1866 | 1866 | 김경오부친 | |||
김여집 | 공주 진밭→해미 | 참수 | 1866 | 1866 | 김여흥동생 | |||
이순백 | 공주 진밭→해미 | 참수 | 1866 | 1866 | 김여흥 등과 함께 순교 | |||
이선경 | 공주 진밭→해미 | 참수 | 1866 | 1866 | 이순백 조카 | |||
김백선 | 면천 원마루 | 1866 | 1866 | |||||
유치릴로 | 덕산 | 신창 | 교수 | 옥(?) | 1866 | 1866 | 34 | 내외가 많은 교우와 순교 |
유치릴로 아내 | 신창 | 교수 | 옥(?) | 1866 | 1866 | 내외가 많은 교우와 순교 | ||
이마태오 | 순흥 곰직이→홍주(?) | 교수 | 옥(?) | 1866 | 1866 | 1839년 대구 순교자 이재행 손자 | ||
손사중 | 홍주 신리 | 홍주신리 | 교수 | 옥(?) | 1866 | 1866 | 종형제 등 30여 명 함께 교수 | |
홍주 신리 30여 명 이상 무명 순교자 | 홍주신리 | 교수 | 옥(?) | 1866 | 1866 | 손사중 종형제들과 같이 잡혀 30여 명함께 교수 | ||
최야고보 | 수원 갓등이 | 갓등이→해미 삼진리 | 교수 | 서문밖 | 1866. 11 | 1867.1 | 옥에 3달 갇혀 있다 교수 | |
김여횡 | 공주 진밭 | 진밭→해미 | 교수(?) | 옥(?) | 1866 | 1867.3 | 55 | 진밭에서 리델 신부6년 모심 |
김여횡아들 | 공주 진밭 | 진밭→해미 | 교수(?) | 옥(?) | 1866 | 1866.7.3 | 바로 내어 부친과 처형됨 | |
유군심치릴로 | 양성 고초골 | 고초골→해미(?)→홍주 대전골 | 1867.5 | 1867.5 | 39 | 병인 2월 체포·석방 | ||
유군심아내 | 고초골→해미(?)→홍주 대전골 | 1867.5 | 1867.5 |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 | ||||
유군심제수 | 고초골→해미(?) →홍주 대전골 | 1867.5 | 1867.5 | 32 | 유군심 부부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 | |||
유군심제수딸 | 고초골→해미(?)→홍주 대전골 | 1867.5 | 1867.5 | 유군심 부부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 | ||||
표안드레아 | 덕산 황무실 | 덕산황무실 | 교수 | 서문밖(?) | 1867.9 | 1867.10~11 | 36 | 교수할 때 덜미를 매질함. 죽인 후 얼굴 불로 지짐 |
김성연 | 교수(?) | 옥(?) | 1868.4 | 하옥 3일 만에 김윤집 일가와 순교 | ||||
김윤집 | 전라도 | 전라도→면천 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 | 1868.4 | 51 | 아내와 어린 두 자식 석방 |
김윤집장남 | 전라도 | 전라도→면천 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 | 1868.4 | 부친과 함께 순교 | |
김윤집 맏며느리 | 면천농바위점 | 교수(?) | 옥(?) | 1868 | 1868.4 | 시부·남편과 함께순교 | ||
김춘겸 | 면천농바위점 | 교수(?) | 옥(?) | 1868.4 | 45 | 가족 6명 체포, 4명순교, 2명 나감 | ||
조 조이 베로니카 | 연풍 | 연풍→면천 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4 | 1868윤4 | 18 | 1867년 공주 순교자 조 아우구스티노 누이. 공충도사학성책 |
조유진 | 홍주 서면 | 서면→신창 창말→면천 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 | 1868.4 | 21 | 함께 잡힌 20여명이 한날 순교 |
방순기 | 홍주 | 홍주→면천 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4 | 1868윤4 | 19 | 순교자 박명서 아우. |
방순기 아내 | 면천 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4 | 1868윤4 | 18 | 남편과 함께 순교 | |
면천 농바위 점.17명 무명 순교자 | 면천농바위 점 | 교수(?) | 옥(?) | 1868 | 1868.4 | 남녀 26명이 해미 포교에게 잡힘. 해미에서 같은 날순교 | ||
이군박 | 공주 진밭 | 진밭→덕산 가야산 | 1868 | 1868.4 | 55 | 진밭에서 몇해공소주인 | ||
홍 시몬 | 천안 소풀리 | 1868년 봄 | 1868년 봄경 | 대개 30 | 1867년 신창에서 순교한 홍 이냐시오 차남 | |||
최조이 | 해미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초동 | 해미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연산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금득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지선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성화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장순득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재득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치련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인득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영명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박금득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세달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이봉의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정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최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강종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방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황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정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방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송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조이 | 면천 | 1868.4 | 1868윤4 | 공충도사학성책 | ||||
유기상 | 홍주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인 | 홍주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홍주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조이 | 홍주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송경복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인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유아업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염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유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이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임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신복실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봉학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원겸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박팔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한도원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한조이 | 덕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인갑 | 서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오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백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박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고인장 | 신창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면천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김조이 | 예산 | 1868윤4 | 1868.5 | 공충도사학성책 | ||||
문조이 마리아 | 홍주원머리(?) | 생매장 | 숲정이 | 1868윤4 | 1868.5. 23 | 61 | 사위 박요한과 한구 덩이에 생매장. 공충도사학성책 | |
박치운 요한 | 홍주 원머리 | 홍주 원머리 | 생매장 | 숲정이 | 1868윤4 | 1868.5.23 | 42 | 장모와한구덩이에 생매장.공충도사학성책 |
방조이 마리아 | 덕산 신프런 | 신프런→덕산 황무실 | 생매장 | 숲정이 | 1868윤4. 망간 | 1868.5. 23 | 35 | 박 바르바라의 며느리. 세 자식과 함께 잡힘.공충도사학성책 |
박 바르바라 | 덕산황무실(?) | 병사 | 길 | 1868 | 1868.5 | 74 | 방 마리아 시모. 죽으려 하자 석방. 귀가 도중 순교 | |
박유감 | 덕산 | 1868.5 | 1868.6 | 공충도사학성책 | ||||
신 막달레나 | 강원도 | 해미(?) | 교수 | 옥(?) | 1868 | 1868 | 18 | 하옥 15일 만에교수 |
이 에메렌시아 | 면천 | 면천(?) | 교수 | 옥(?) | 1868 | 1868 | 34 | 시동생 내외와 함께 순교 |
이 에메렌시아 .시동생 | 면천(?) | 교수 | 옥(?) | 1868 | 1868 | 이 에메렌시아와순교 | ||
이에메렌시아 시동생 아내 | 면천(?) | 교수 | 1868 | 1868 | 이 에메렌시아와순교 | |||
김 라우렌시오 | 해미 강당리 | 옥사 | 옥 | 대개 40 | 1866년 공주 순교자 김 요한 동생 | |||
김진식 프란치스코 | 덕산 | 1867년 공주 순교자 김 베드로(김대건 신 부 사촌) 동생 | ||||||
손복록 | 홍주 | 교수 | 옥(?) | 18 | 홍주 순교자 손자진 재당질 | |||
손치황 요한 | 홍주 신리 | 교수 | 옥(?) | 60 | 공주 순교자 손자선 부친, 하옥 1달 남짓 만에 순교 | |||
장 마티아 모친 | 공주 순교자 장 안드레아 아내 | |||||||
장마티아 아들 | 장 안드레아 아들 | |||||||
김 데레사 | 장 마티아 며느리 | |||||||
장 마티아 증손자 | 김 데레사 손자 | |||||||
신 베드로 | 덕산 황무실 | 덕산 황무실→예산 | 교수 | 옥(?) | 85 | 강성삼 신부 외조부. | ||
신 아우구스티노 | 예산 | 23 | 신 베드로 차남 | |||||
박화규 다미아노 | 평안도 박천 | 강원도→당진 | 참수 | ? | 병인박해 때 | 병인박해 때 | ? | 서울교구 이경훈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외고조부 |
5. 맺음말
교회 측 자료와 관변 측 자료 등을 두루 활용하여 해미읍성 안의 여러 순교 터와 서문 밖 순교 터, 그리고 숲정이 참수 터와 여러 순교 터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터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함으로써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해미에서 순교한 유명 순교자 137명 중 순교 터를 알 수 있는 천주교도는 모두 56명이다. 이 56명 중 옥에서 순교한 자는 정사박해부터 병인박해 때까지 모두 33명으로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그러므로 옥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중요한 순교 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옥은 함께 갇힌 교우들이 통경하며 순교할 마음을 다지기도 하고 마음이 약해지거나 배교한 신자들을 격려하여 다시 순교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정사박해 때인 1799년 12월 15일 이보현과 인언민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5일에 서는 남문 안 장터였다. 또한 1817년에 체포되어 오래 옥살이하던 손연욱이 1824년에 가석방되어 곧 순교한 옥 근처 집 밖의 샘옆 주변도 순교 터로 기억해야 한다.
바로 신부가 1935년에 병인박해 당시 목격 증인과 전문 증인을 두루찾아 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의 처형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한 『해미 순교자 약사』의 내용과 박해 시기에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에 관한 현전하는 자료들, 그리고 구체적인 구전 자
료로 볼 때, 서문 밖에서는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 이후와 그 여파가 미친 1867년에만 한시적으로 서문 밖에서 교수 처형과 자리개질 처형만 이루어졌다.
참수 처형 터로 서문 밖은 입지적 조건이 적합하지 않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반면에 해미천 변 숲정이는 입지적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고, 일반 죄인도 죽였다는 구체적인 증언과 박화규가 참수 처형된 곳이 숲정이로 볼 수 있는 점에서 병인박해 때 6명이 참수당해 순교한 곳은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밭으로 판단된다.
또한 포도청이 있는 서울과 진영이 있는 고을에 처형된 시신을 내다 버리고 묻어 주는 터가 있었던 점, 숲정이는 여우가 살아 여숫골(여우골)이라 불린 점,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에서 생매장하면 수고를 덜 수 있는 점, 홍주의 숲거리 생매장터가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시신들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해미 숲정이도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곳으로 볼 수 있다
.
이와 같이 여수골, 즉 숲정이는 생매장 순교 터로서의 의미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수 터로서의 의미와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터로서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수골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큰 역사적 의미가 배어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투고일: 2022. 11. 14. 심사 시작일: 11. 25. 심사 완료일: 12. 12.
해미의 순교 터와 시신을 유기·매장한 터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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