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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감사를 향하여(1)
2015년 10월 18일 / 욥기 42:1-17
이번 주일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정해서 지키는 주일입니다. 일년 365일, 아니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거늘, 특별히 한 주간을 감사주일로 지킨다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늘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쏘이고 살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은커녕, 내가 공기를 마신다는 것, 햇볕을 받으며 산다는 것, 그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 속에 싸여서 살면서도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일 년 중에 한 주간을 정해서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조용한 힘입니다. 햇볕은 하루 종일 아무 소리 없이 그 열을 발하지만 그 속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지구의 인력도 역시 소리없는 힘으로 모든 질서를 잡고 있습니다. 이슬은 사람들이 잠을 자는 밤에 아무소리 없이 내리지만 모든 식물에 새로운 생기와 아름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 무엇보다도 조용하면서도 깨질 수 없는 위대한 힘이 있는데 이는 바로 신앙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힘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몸에 익혔습니다. 내게 힘을 주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빌 4:11-13).”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다. 참으로 강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정말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부자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삶이 감사가 넘쳐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보면 감사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기계문명의 발달로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환경은 안락해졌어도, 인간의 심성은 메마르고 감사의 기쁨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이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문둥병자 중 아홉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드리지 않았던 것과 같지는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아무리 감사를 잃어버렸으며, 감사에 대해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들만이라도 감사의 생활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삶의 원칙입니다. 그 이유는 감사의 생활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섭리이며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렸던 감사를 되찾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되찾아야 할 감사의 모습들은 어떠한 것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8을 보면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모습들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바울로 변화된 뒤부터, 그는 늘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감사
먼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바울의 감사를 봅니다. 참 바울은 감사할 조건이 많았음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에게도 감사의 꺼리가 많기를 축원합니다.
롬 1:8 /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어디를 가나 여러분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롬 6:17 / 비록 여러분이 한때는 죄의 노예가 되는 쪽을 택하였으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가르친 것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롬 7:15-8:2 / 나는 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짓, 내가 미워하는 짓만 저지르고 있습니다. 16) 나는 내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가 어기고 있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이러는 나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런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나보다 더 힘이 센 죄입니다. 18) 나는 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되지가 않습니다. 19)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20) 이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죄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2)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하면서도 23)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24)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25)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죄받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2)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죄와 죽음의 악순환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살후 2:13-14 /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택해 주시고, 또한 성령의 역사와 진리를 굳게 믿게 하시고 여러분을 성결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14)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려고 여러분을 초청하셨습니다.
딤전 1:12-13 / [자비에 대한 감사]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어떻게 다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선택하셨을뿐 아니라 충실하게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13) 과거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비방하며 다녔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며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께서는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삶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그리 감사드릴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가정도 없는 떠돌이이며, 높은 학식과 집안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옥에 갇히며, 매를 맞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도로 일할 수 있게 하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에 아름다운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 시편 136편에 감사를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매절마다 ‘주께 감사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감사는 감사를 발견하고, 고백하고, 훈련해야 됩니다. 감사가 습관이 될 때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삶은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감사를 깨닫는 것
이스라엘은 원망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136편에서 감사하라는 말을 계속하면서 ‘키֙(’כ)’라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를 계속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 .” 이라고 계속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의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이유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 1988년 7월 서울 올림픽을 며칠 앞둔 때에 47세의 젊은 목사가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어 의식이 사라지고 얼굴이 한쪽으로 돌아가고 의사는 얼굴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목사는 너무나 절망스러워 “하나님 죽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가 중풍에 걸려서야.”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하나님, 내일 눈 뜨기 전에 나를 데려가 주세요,” 눈을 뜨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죽게 해 주세요,”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 듣지 않으셨고, 교회에서는 24시간 목사님의 회복을 위해 릴레이기도를 하고, 장로님들은 조를 짜서 병원 당번으로 봉사하셨습니다. 장로님들이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켰습니다. 목사님은 물리 치료를 거부합니다. “나는 죽을 건데 물리치료는 무슨...” 그러나 장로님이 “평소에는 같이 걷지 못했으니 병원에서라도 한번 같이 걸어 보십시다.” 하면서 목사님을 일으켜 세웁니다. 목사님이 그 일그러진 얼굴과 반쪽 몸으로 혈기를 부리면 얼마나 무서운지 장로님이 돌아서서 눈물을 닦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장로님들이 거의 강제로 걷기를 시키고, 걸음마 연습을 하고, 드디어 30m 걸었을 때, 장로님들이 “우리 목사님 만세, 만세”를 외쳤고, 어느 날 목사님이 “기도합시다,” 말문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장로님들이 “할렐루야!” 하면서 박수하였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기도한 후에 일어서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야 이놈아, 너는 왜 감사할 줄 모르냐?” 그때 목사님이 “이 몸으로 감사는 무슨 감사.. ” 하는데 “아직 몸이 반쪽이 성하지 않으냐?” 그때, 감사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몸을 반쪽이나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는 원망이나 불평은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생명 다해 일하겠습니다.”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리면서 17년간 더 살면서 서울 강북제일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며, 성전을 크게 건축하고 돌아가신 윤덕수 목사입니다. 윤 목사는 1988년 7월 27일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3년 동안 강단에 서지 못했습니다. 기적적으로 회복한 뒤 강단에 섰으나 한 발로 지탱하고 서서 설교하고 한 팔로 축도했다고 합니다.
2.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기억하시면서, 깨달으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가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히브리서 11:3에서 믿음의 극치를 강조하였듯이,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압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이러한 믿음을 욥으로 하여금 가지도록 직접 나타셔서 가르쳐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귀하심, 창조의 놀라운 섭리,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함께 하심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삶에 대한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모든 삶 속에서 축복과 영광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질 때에 감사를 범사에 이룰 것입니다.
3. 미래의 하나님의 약속에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십시다.
현재 주어지지 않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됩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해 두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 감사는 환경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에 감사는 Thank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Think에서 왔습니다. 생각을 바로 하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면서도 감사하였습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전 재산을 잃고 열 남매를 한꺼번에 잃고도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오래참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역경 중에서도 감사함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는 자궁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다니엘은 무서운 역경 중에서도 맏음을 지키며 감사함으로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을 구원하며 보호했습니다. 이러한 감사는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밀톤은 소경이 된 것을 감사했고,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러한 감사 때문에 밀톤은 실낙원을 쓸 수 있었고 에디슨은 유명한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48년 10월 21일 사랑하는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공산 폭도들에게 총살을 당하였을 때, 그들의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 두 아들 미국 유학 갈려다가 더 좋은 천국으로 데려가 주셨으니 감사, 감사합니다.”
3. 감사의 네 가지 태도
사람들의 감사는 대략 네 가지 태도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분명히 감사해야할 상황인데도, 오히려 몰염치한 태도를 갖는 태도입니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엔진을 틀어 놓은 차에서 잠에 들었다가 배기가스가 차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는 일산화탄소 (CO) 가스 등이 있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일산화가스 중독으로 실신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신고로 911 응급구조대가 왔습니다. 그들은 차 유리창을 깨고 이 커플을 구조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응급구조대 사무실에 전날에 구조되었던 그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응급구조대가 깨뜨린 차의 창문을 고치고 그 청구서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응급 구조대에게 자기 차의 유리 창문을 새로 해 넣은 값을 청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한국 속담으로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라고 합니다.
2. 분명히 감사할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 있는 한 촌에 들어가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들을 만났습니다(눅 17:11-19 참조).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보자 멀리 서서 외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자마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열 사람 모두 제사장들에게 달려갑니다. 어느 정도 갔는지는 모르나 서로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발견합니다. 열 명 모두가 다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아홉 명은 계속해서 제사장들에게로 뛰어 갑니다. 그들의 안중에는 예수님께 감사를 하기보다는 자기의 나은 몸이 더 소중했습니다. 당연한 아니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사람들은 먼저 감사할 일이 있는데도 감사하지 않았거나 또는 감사를 나중으로 미루다가 결국 해야할 감사를 하지 않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설령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고 완치되었다는 판정을 받는 것이 중요했다면 과연 그 아홉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돌아오지는 않았다 해도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이웃사람에게도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았겠느냐고 하겠지만 이들이 그렇게라도 했다면 예수님이 앞으로 있는 상황을 아시고 섭섭해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아홉 명의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 핑계 거리는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여 주라고 했으니 난 그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돌아와서 감사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었어!”
■ 미국 중동부에 있는 명문대학 하면 흔히 노스웨스턴 대학을 듭니다. 그리고 이 대학에 자랑하는 동문하면 에드워드 스펜서를 듭니다. 스펜서는 1860년 9월 무서운 폭풍우가 미시간 호를 덮칠 때 여객선에 타고 있던 287명이 익사하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이 때 수영선수였던 스펜서는 육지에서 800여 미터나 떨어진 침몰현장을 16차례나 헤엄쳐가며 17명을 구조해낸 영웅입니다. 스펜서는 17명이나 되는 사람을 구해냈지만 그 자신은 탈진해 쓰러진 뒤 제대로 회복하지 못한 채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고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은 스펜서가 사망하기 1년 전인 80세 생일에 기자가 그를 찾아가 인터뷰하였습니다. “그 비극적인 밤 이후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구해 준 17명 가운데 훗날 나를 찾아오거나 내게 감사를 표한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고 술회하더란다. 그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몸이 입은 타격보다 더욱 컸습니다.
3.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병을 치료받고 돌아와 사례한 사람의 감사와도 같은 감사를 드리는 태도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다 함께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명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돌이켜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는 오늘 도중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며 돌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시어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이제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몸의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지경까지 나은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감사의 믿음이었습니다.
4. 감사할 만한 일이 없는 데도 하는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욥이나 하박국 선지자 같은 사람의 감사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려고 하는 욥이나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감사를 드렸고, 없는 가운데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합 3:17-19 / 무화과나무는 싹도 내지 않고 포도 덩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올리브나무의 소출은 실망뿐이고 논밭의 곡식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목장의 양 떼들은 모두 다 사라졌고 외양간에는 소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 그렇더라도 나는 여호와때문에 기뻐 뛰겠습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나는 즐거워하겠습니다. 19)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두 발을 암사슴의 다리와 같게 하시고 모든 산들의 위에서 안전하게 달리도록 힘을 주십니다.
4. 더 큰 감사를 향하여(1)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닫게 되는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만큼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서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고 감사하니까 행복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욥의 감사를 생각하며 우리들의 감사를 더 큰 감사를 향하여 업그레이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욥기에는 직접 표현된 ‘감사’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지난 날 누렸던 복과 현재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편에서 극복해 나가며 감사를 잃지 않으려고 씨름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욥은 어떤 사람입니까? 욥기 1장1절에 4절까지를 보면 욥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욥은 우스 땅에 살고 있었는데 1절에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자녀가 아들 일곱에 딸 셋이 있었습니다. 또 3절에는 욥이 가진 소유물을 말씀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 낙타가 삼천 마리, 소가 오백겨리, 암나귀가 오백 마리,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3절 말씀 끝에 보면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람에 대하여 칭찬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욥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욥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와서 욥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욥을 자세히 지켜보았는데 욥이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복을 주시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를 쳐보세요.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내가 아는 욥은 그렇지 않다. 내가 욥의 소유물을 다 너에게 맡길 테니 욥이 소유물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어디 한번 시험해봐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욥에게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욥의 사환이 급하게 달려와서 스바 사람이 욥의 소와 나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버렸다고 합니다. 이 말이 또 떨어지기 전에 이번에는 갈대아 사람이 와서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뿐입니까? 큰 바람이 불어서 집이 무너졌고 욥의 자녀들이 다 깔려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욥은 하루아침에 그 많은 소유를 잃었습니다. 목숨과 같은 자녀들을 다 잃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욥에게 찾아왔습니다.
이 크고 무서운 시련 앞에서 욥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만일 나에게 욥과 같은 시련이 찾아온다면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시련 앞에서 욥은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욥 1:21-22 /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뱃속에서 빈몸으로 나온 이 몸 다시 빈몸으로 돌아갈지라. 여호와께서 주셨으니 가져가지는 분도 여호와시라. 오직 여호와만이 찬양받으실지라.” 22)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욥은 그릇된 일을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원망에는 원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원망은 무엇으로 합니까? 말로 하는 것입니다. 말로 온갖 더러운 것을, 저주를, 불평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은 그냥 하는 것입니까? 말에는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람은 입술로 자기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입만 열면 하나님을 이야기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마음에 감사가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의 감사가 얼마나 충만했는지 말입니다. 욥에게 부딪쳐 온 2번째 무서운 시련입니다.
시험 받을수록 굳어지는 믿음은 욥의 신앙 / 어느 날 또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모여 있는데 그들 가운데는 사단도 끼여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래, 어디를 다녀왔느냐?”, “예, 땅을 여기저기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하고 사단이 대답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내 종 욥도 유심히 보고 왔느냐? 온 땅을 살펴보아도 욥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건실하고 올곧은 사람은 없다. 그는 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이라 못된 짓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야. 네가 욥이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모시며 사느냐고 하기에 그를 내리쳐 보라고 하였다만, 그래, 어떻더냐? 욥은 여전히 건실히 믿음을 지켜 가며 살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씀하시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였습니다. “가죽은 가죽으로 바꾼다는 옛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본시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는 법이지요. 어디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욥의 뼈와 살을 내리쳐 보십시오. 그의 몸을 해쳐 보시란 말씀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찬양을 할까요? 아마도 욕을 해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네 마음대로 해보려무나. 하지만 그의 목숨까지 건드려서는 안 된다.”(욥 2:1-6)
사단은 하나님 앞을 물러 나오자 곧 욥을 내리쳐 그의 몸에 심한 종기가 나게 하였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말할 수 없이 심하게 번졌습니다.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도자기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말하였습니다. “그래,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음을 지키고 있단 말이에요. 참, 속 터지는 양반 다 보겠네. 차라리 하나님에게 욕이나 퍼붓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어요?” 욥이 대답하였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요. 당신조차도 어리석은 여자같이 말하는구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을 때 우리가 얼마나 좋아했소. 그런데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어찌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겠소.” 욥은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말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욥 2:7-10)
욥은 몹쓸 병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당시 욥의 병은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악창이 났고 몸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잠시도 앉아 있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손으로 긁다가 나중에는 기와 장으로 긁습니다. 곳곳에 피가 터졌고 열이 오릅니다.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 몸에 더러운 벌레가 득실거립니다. 살에 고름이 배어 나왔고 점점 검은 색으로 변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기야 뼈까지 쑤시는 고통에 처합니다. 차마 볼 수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도 탄식했고 친구도 일주일동안 울기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욥의 아내는 그를 향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가만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반문하면서 변론을 시작합니다.
피와 땀으로 평생 모은 재물이 없어지고, 사랑스런 자녀들이 졸지에 죽고, 자기 몸은 갈기갈기 찢겨져 만신창이가 된 욥, 이보다 더 극한 상황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환경은 바뀝니다.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나쁘다가 좋아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연속입니다.
그럴지라도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계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경외하고 사탄은 대적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물질은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변질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대적하고 사탄을 경외하게 됩니다. 사람을 이용하고 물질은 사랑하게 되는 잘못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질을 이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물질에 얽매여 있습니까?
지금 한국교회가 무너지고 욕을 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은 기복신앙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이 무엇입니까? 복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을 우리가 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복신앙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복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신이 얻고 싶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에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짜는 불의 연단 앞에 다 타버립니다. 가짜는 고난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러시는 것입니까?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 것입니까?” 따지게 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온전한 믿음이 오기까지는 많은 실수와 잘못도 저지르게 됩니다만 그래도 원망은 하지 않도록 발버둥을 쳐야 합니다. 욥의 위대함이 무엇입니까? 욥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욥처럼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욥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체험하는 것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때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선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선하심의 극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못 박아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롬 8:32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주셨으니 무엇인들 아깝다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이유없이 고난과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지금 망하는 것 같고 죽을 것만 같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 주시려고 축복을 고난이라는 가면 뒤에 감추셨음을 믿으십시오.
롬 8:36-37 /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당하며 살아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복이 목적이 될 때 변질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선하심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 복만 보이고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고 신앙이 변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이 되도록 우리들을 징계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혹시 지금 고난을 겪고 있으십니까? 어려운 풍랑을 지나고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든 후에 복을 주시려고 잠시 연단시키는 과정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2:3을 보면 욥은 자기가 당한 고난을 ‘까닭 없는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욥은 지금 받는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지켰습니다.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증명했습니다.
원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사탄의 목표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다가온 고난은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 범죄한 대표적인 죄가 바로 원망이었습니다. 이 원망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어떤 때는 환경이나 사건을 보고 원망했습니다.
민 14:1-4 /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이 말을 듣고는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저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소리가 점차 드높아 갔다. “우리가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는 것이 더 나을 뻔하지 않았소? 아니, 어쩌면 여기 광야에서 죽었더라도 더 좋았겠소. 3)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어쩐 일로 우리를 그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끌고 가 그들 칼에 쓰러져 죽게 하려 하신단 말이오? 우리의 처자식들이 다 사로잡힐 것 아니오? 아예 여기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나을듯하오.” 하고 대들면서 4) 자기들끼리 이렇게 떠들어댔다. “자, 그러지들 말고 우리가 지도자를 한사람 뽑읍시다. 그래서 다같이 애굽으로 돌아갑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계산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귀에 들린 대로”의 법칙을 적용하셨습니다.
민 14:11-12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대체 언제까지 이 무리가 나를 믿지 못하고 거스르려느냐?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적을 베풀었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고 저 모양들이냐? 12) 차라리 내가 전염병을 퍼뜨려 이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야겠다 그런 다음 네 후손을 통해서 훨씬 더 큰 민족을 세우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욥이 당했던 고난에 비하면 매우 가벼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입술로서도, 마음으로부터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함을 더 표현했습니다. 욥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성정이 같은 사람임에도 욥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으로 일관해야 하는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오면 원망만 하거나 남의 탓만 할 것인지? 아니면 고난 속에서도 욥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더욱 감사를 향하여 나아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