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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천인지 김병우 선생님의 생활역학에 있는 글들을 모은 겁니다.
순서는 변경하였고 글을 이해하기 쉽게 역학에 관한 한자는 변환하였습니다.)
1.남과 여
2.男女의 차이
3.남녀의 만남에 대하여
4.남녀의 사랑
5.여자의 사랑법
6.여자의 사랑에 대하여
7.여자의 사랑에 대하여(2)
8.여자의 권리와 의무
9.남자의 사랑
10.가을에 남자가 바람이 나는 이유는?
11.남자의 넌센스
12.아내의 조건
13.남편의 조건
14.음양 배우자 찾기
15.왜 바람을 피울까?
16.바람피는 사주의 특징
* 번외 : 바람의 전설. 바람은 왜 피우나?? 일간별 변명을 들어보자!
17.바람끼에 대하여
18.도화살에 대하여
19.애교와 매력에 대하여
20.사랑 받을 수 없는 사주
21.욕구(欲求) 욕망(慾望) 요구(要求)란?
22.미성년자 관람불가
23.자녀양육과 팔자에 대하여
24.부부가 원하는 것
25.남녀 부부관계를 상담하며
26.남녀 부부관계를 상담하며(2)
27.부부관계의 상생상극
28.만남과 이별에 대하여
29.부부관계의 가해자와 피해자
24. 부부가 원하는 것
부부생활이 원만하려면 아내는 남편을 이해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이해해야 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가슴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남녀관계이고 애증의 세월을 보내며 쌓아간 뒤 상호간에 건강한 공통분모를 만들어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여명이 병오년생 갑오일주가 편관이 있을때 천간에 병화는 식신으로 남편을 원하는 것이나 오화는 상관으로 애인을 원하고 애인 대하듯 한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이 보기에는 남편을 대하듯 당연시하나 속사정은 애인같은 남편을 원하니 애인 대하듯 합니다.
식신은 남편을 원한다는 것은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어 주기를 원합니다. 상관은 애인을 원한다는 것은 언제든 변화될 수 있으니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레이다 망에서 벗어나면 안절부절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합니다.
식신의 아내는 정관인 남편을 좋아합니다. 만약 식신의 아내가 편관인 애인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상관은 애인같은 남편인 편관을 좋아하고 만약 남편 노릇만 하려는 고리타분한 정관은 좋아라하지 않습니다. 식신은 편관인 애인도 남편대하듯 합니다.
상관은 애인같이 대해주는 편관을 좋아하나 정관이든 편관이든 애인같이 대하고자 하는데 남편인 정관은 아내처럼 대하니 불만일수 있습니다. 식신은 정관의 남편을 원하는데 남편인 편관이 애인을 원하고 애인처럼 대하니 불만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식신으로 정관의 남편을 좋아하는데 편관이 있으면 남편은 늘 새롭게 더 업그래이드된 애인같은 아내를 원하는데 아내는 기대치나 요구사항이 많아 불편하다 합니다. 아내가 식신 상관이 다 있으면 남편도 원하고 애인같은 남편을 좋아합니다.
남편이 정관과 편관이 다 있으면 아내를 좋아하고 애인같은 아내를 좋아합니다. 식상과 관살은 상하관계의 거래이고 협력하는 것인데 오행관계는 극이 되나 음양관계는 합이 되는 식정관합이나 상관+편관합은 좋아하나 식신과 편관은 불편합니다.
상관정관의 관계도 오행과 음양 모두 상극이니 불편합니다. 극이라는 것은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의존합니다. 서로가 38선을 그어 놓고 필요한 경우 남북회담을 가지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을 침범하면 이것은 침략이라 사생활 침해입니다.
부부관계가 남북관계로 비유될 수는 없지만 서로 멀어져서도 가까워져도 불편하니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자는 의미입니다. 식신상관이 교집되어 있다는 것은 남편도 원하고 애인같은 남편을 좋아한다는 것이니 남편노릇을 잘해야 원만한 부부관계입니다.
25. 남녀 부부관계를 상담하며
남녀 부부관계가 다투지 않고 불협화음이 없이 평생을 지속하는 것은 성인(聖人)도 못하는 일입니다. 남녀 부부관계는 평소 좋은 날이 더 많은 법인데도 불구하고, 살다보면 서로가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서로가 이성을 잃고 치고 받고 싸우고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가는 날도 있을 수 있는데 우려스러운 것은 불편한 것을 전체로 싸잡아 확대하려는 생각과 감정을 경계선에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살다 보면 한두 번 또는 자주 다투고 싸우게 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투고 싸우게 되는 원인과 갈등의 문제를 찾아 개선하지 않고 가슴깊이 상처를 묻어두고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크게 잘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대개의 사람은 대부분 화가 나서 감정이 조절되지 않았을 때 오고 가는 곱지 않은 말이나 폭언에 대해 가식과 진실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성과 감성을 잘 구분하여 듣고 말할 수 있는 현명함이 있다면 이미 싸울 일도 없고 다툴 일도 없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그러하지 못한 데서 감정의 주름살은 깊어져 갑니다.
분명한 것은 상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해서가 원인이고, 서로 소통하는데 익숙하지 못해서가 과정인데 문제의 원인을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생각을 마음길로 감정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정당화하고 있으면서도 생각과 언어로 자신을 허술하게 포장하고 합리화하며 응어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자신의 눈귀를 의심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연습이 되어 있지 않아 화가 나고 감정이 오르면 자신의 오감은 이미 사리에 분별력을 잃고 있으니 이미 불쾌한 마음이 치고 들어와 들려지지가 않고 잘못 보면서 애써 불쾌한 감정을 감추고 아닌 척 꽁하고, 상처를 받고 나만 참고 또 참고 살아간다 억울해 합니다.
물론 한 개인의 감정표현이 "나니까 참는다"하고 "나나 되니까 이러한 어려운 고난도 극복한다고 대견스러워 하는 이도 있지만 대단히 객관적인 말인 듯 하나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이보다 주관적인 말도 없을 것입니다. 서로 더불어 함께하며 소통하는 방법론이 익숙하지 못해 생겨지는 자신의 문제이지 결코 상대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녀 부부관계는 음양으로 유별(別)한 것입니다. 서로 공존하고 대립하면서 상생하는 원인과 과정만이 연습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음양이 하나로 결합되기가 쉽지가 않으니 육체적으로도 하나로 결합되기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서로에 대한 존재감에 대한 존경스러움에서 부터 출발해야지 결코 기울거나 불신하거나 무례해서는 하나가 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음(陰)은 보통 내(內)에서 물질적으로 공간과 형태 모양을 잘 유지하는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양(陽)은 외(外)에서 정신적으로 시공(時空)을 활용할 줄 아는 힘을 키워가는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서로 고유의 영역을 존중하고 존재감을 인정해주는 가운데 대립과 공존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 상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부터 그러한 범주를 지켜가지 못하는 데서 우(愚)를 범하고 있습니다.
겨울생 수(水)의 이데아는 철저히 나 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상대를 대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은 상대에게 불쌍하게 동정심을 유발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그러한 적이 절대 없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상대가 나를 성가시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본디 혼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잘하고 있는데 자꾸 상대가 나에게 귀찮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것에 많은 부분 양보되어 지기만 하고 있고 그것에 비하여 상대는 조금도 도움이 되고 있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상대의 방식대로 듣고 보는 것은 어찌 그리 쉽게도 묵살하고 무시하고 사시는지 그의 권능함은 천상천하 유아독존과도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해서 자신의 편리함에 맞춰 달라고 하시는지 이러한 남편 아내를 두고 계시고 사는 분들 이러한 글을 보면 속이 후련하시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이라고 한다면 한 번쯤 자신의 자화상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그러하면 상대도 그러하듯 상대의 자율적인 행동을 자신의 입장에서 자제와 통제하려는 눈빛이 째비시고 있고, 화가 나면 당연하다 싶은 요구가 상대의 입장에서는 답답해서 숨이 막힐 지경일 수도 있습니다.
겨울생 수는 세상속에서 이정표와 같고 묵묵히 우뚝 서 있는 망부석과 같습니다. 철저히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하고, 꼭 역할이 필요할 때 약방에 감초처럼 자신의 존재가 상대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되어질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상대가 무엇이 필요하다, 무엇을 원하는지, 사전적인 의미와 네비게이션처럼 정확한 안내자로서 존재되길 원합니다.
요즘 프로야구에서 절대자인 심판관이 잣은 오심으로 이슈가 되어 곤혹을 치루고 있는 현실은 아마도 계절이 하절인 화나라에 있어서 그러한 모양입니다. 심판관이 아웃이라면 아웃인 것입니다. 심판관이 세입이면 세입인 것입니다. 한번 판정을 내린 것에는 번복하지 않는 낙장불입에 대한 근성이 바로 겨울생이고 수의 절대권한과도 같은 것입니다.
물론 가정적으로 남녀 부부관계에서 겨울생은 요지부동한 절대자로서 냉정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한 심판이라면 불만이 없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양보되어 진다면 다툴 일도 싸울 일도 없겠지만 겨울생 수의 권능한 자기애에 대한 권리에 도전하고자 한다면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동영상 화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동영상, 음성녹음, 이러한 과학적인 장비도 겨울생의 정확한 앎의 철학과 정보, 사전과 같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념앞에서는 타협하기 싫은, 아니 타협할 수 없는, 타협되기 싫은 한낱 도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심(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확실한 증거보다 물증보다 앞서는 것은 결국 사람의 존재감과 건강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겨울생 수의 통찰력은 상선약수와 같아 물처럼 잘도 스며드니 상대를 잘잘못을 파악하는 오감은 귀신과 같고, 어디든 가지 못할 곳도 없어 눈을 감고도 천리길도 흘러가고자 하니 그의 예리한 관찰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낱 개인적 사유로 보고 듣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사람은 양손을 뻗어도 2미터도 안되고 위아래도 2미터도 안된다는 것을 인간으로서의 한계점을 정확히 인식되고 자각되어 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물며 사람의 생각과 감정또한 결국 자기식대로 재해석하는 방법이 철저히 나 중심적이라는 것에 대해 상대의 의중을 포옹하지 못하는 옹심도 이해되어 졌으면 합니다.
물론 이러한 겨울생 수의 근성과 성질머리가 시대에 공자, 맹자와 같은 역사속에 성인을 만들어 내는 사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다루고 살았지 결코 상대나 배우자를 통제하고 자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또 다시 한번 상기하셨으면 합니다.
답은 이렇듯 알고 보면 너무도 쉬운데 이러한 생각과 감정이 문득문득 순간순간 드는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자제하고 통제하는가가 숙제이고 연습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은 영원히 너희들과 섞이지 않고, 섞일 수도 없고, 섞여 져서도 안 되는 존재로서 나일 뿐이니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존중되어 지길 원합니다.
그러하니 상대는 나를 대할 때는 최소한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봐야 합니다. 최소한 인격적으로 존중되어 지는 정중한 언어로 요구해야 합니다. 여름생은 최대한? 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만 겨울생 수는 최소한? 이라는 한계 마지노선을 자처하여 겸손하게도 정하였으니 그가 사는 법과 그가 사유하는 법칙을 이해하고 알아가며 존중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겨울의 서릿발같은 냉정함과 차가움을 녹이는 것은 무한 사랑, 무한 긍정, 무한적인 애(愛)가 최고입니다. 온도와 습도가 맞아야 싹을 트이듯, 시골 담장밑에 호박은 잘도 자라는데 베란다 화분속에 호박이 잘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조급함과 성급함입니다.
여름생 화는 방치하거나 그냥 두지 못하고, 어떻게든 잘 키우고 함께하려고 하려는 성급함입니다. 겨울생 수는 망부석처럼 기다림의 미학으로 살아가는 분들이니 제풀에 제가 꺽여지 듯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위로받고 위안받고 해결되는 것은 봄 여름 가을생 중에 여름에 가까운 것이지 겨울생은 스스로의 자가 치료적인 시간과 자생력을 기다려 주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온도는 설레임이고, 습도는 분위기와 같아 이러한 것을 잘 맞추어지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집안에서 호박을 키우는 정성과 생존률 10%로의 확률을 보고 키우는 것은 호박이 예뻐서가 아니라 첫째는 내가 성장하는 것이고 둘째가 호박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남의 말이라 쉽게도 말을 전합니다. 그렇게 불편한 것을 무엇하러 하고 있냐고...차라리 90%의 생존률을 갖춘 허브를 키우지...
운명은 연습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겨울생이 스스로 잘못된 생각과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할 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텅 비워낼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사람은 집요하게 치밀하게 생각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고 상대의 실수를 자복받으려 훌륭한 변호사를 만나려고 하니 남녀 부부관계는 이혼법정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입니다.
남녀 부부관계는 과유불급이 늘 존재하나 이것을 따져 묻는 것은 정당한 방법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거름이 되어주려는 건강한 생활을 지켜주고자 하는 것이 아름다움인데 자신의 성질대로 바꾸려하고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서로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서로 조율하고 조정하는 시간과 인내와 기다림이 우선합니다. 겨울생 수가 활동은 느긋하신데 운전을 하면 과격한 폭주족이 되는 것은 그분의 가슴속에는 여름생 보다 앞서는 뜨거운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와 화는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속도, 스피드는 화가 당연히 빠르지만 수라는 거대한 몸집이 타이타닉과 같으니 얼마나 뜨끈뜨끈하게 열이 받칠까 상상을 해보셨으면 합니다. 남녀 부부관계에 대해 당분간 글을 써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쉽지 않네요. 틈틈히 서로의 입장에 대해 가능한 자세하게 설명되어졌으면 좋겠고 이해되어 졌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26. 남녀 부부관계를 상담하며(2)
남녀 부부관계는 상대적인 음양이 수평관계로 만나는 것이라 유별(有別)한 것이고, 더하여 수직관계로 자식을 생산하며 유친(有親)한 가족구성을 하며 성장합니다. 남녀 부부관계는 유별(有別)하니 내외(內外)를 구분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하는 일이 다른 것이 시초이고 원인입니다.
남녀 부부관계는 서로의 고유영역을 도와주고 지켜주며 기대어 서는 것이 상생(相生)하는 것으로 유별(有別)한 것입니다. 서로가 고유영역을 넘어서거나 묵살하며 외면해 버리는 것은 상극(相剋)하는 것으로 이는 유별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조절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생산하며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좌우상하로 결속된다 해도 개인으로서 고유의 존재감을 지켜주는 것이 상생의 첫걸음입니다. 가족 단위로서 상생하는 두 번째 걸음도 학습되어 지고 연습이 필요한 것이 인간관계의 출발선이고 시초입니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식이라는 이유로 상생하는 법을 모르거나 익숙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상생을 모르고 익숙하지 않으면 이러한 일차적 이차적인 관계는 이별이라는 상극을 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관심과 간섭을 분별하지 못하고, 공존과 구속을 분별하지 못한 분별력이 부족한 생각과 감정이 원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누구나 선(善)하고 이성적이라는 맹자님의 성선설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남녀 부부관계로 음양이 만나는 출발점부터 접촉하는 방법론, 소통하는 방법론이 미숙하여 순자님의 성악설을 논하신다면 고개를 가로 젖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양이 만나는 남녀 부부관계가 서로 각자의 본성은 선(善)한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함께하는 방법론이 성급하고 조급하여 악(惡)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이를 본중말(本中末)로 비유하면 근본은 선(善)한데 끝이 악(惡)해지는 중(中)간과정인 경계선에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선악(善惡)의 싸움이고 논쟁입니다.
퇴계선생님과 율곡선생님의 학파논쟁과 조선선비의 사단칠정논쟁이 따지고 보면 간단하기 짝이 없는 시종(始終)의 논쟁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시종(始終)에서 중(中)간과정인 경계선에서 의욕이 앞서는 생각과 감정을 선(善)한 이성으로 조율하고 조정해보려는 방법론으로 학습과 앎을 통하여 이겨내고자 했던 것이 조선선비의 철학이고 역사적인 흔적으로서 건강한 논쟁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분명 시대를 변화시키고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감정은 남녀와 부부를 뜨거운 사랑으로 발전시키기도 퇴화시키기도 하고, 만나게 하기도 이별하게 만드는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건강한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고 조율하는 기준은 선(善)한 본성과 이성에서 비롯되어 질 때 더욱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학습하고 앎을 통하여 상생하는 것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경계선?에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은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당연시하는 것으로 건강하지 못한 생각과 감정은 서로에게 영광의 상처만을 선물할 준비만 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조금만 어렵고 힘들면 그만두고 포기하는 것이 최선인 줄 아는 것은 무지(無智)한 것입니다. 물론 어려운 시험문제를 대할 때의 마음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문제라는 것은 늘 생활속에 시간속에서 제시되어 다가오는 생활의 연속되는 과정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숙제이고 문제이며 과정인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든, 쉬운 문제든, 정작 문제 다가오는 것이 호환마마처럼 무서운 것이 결코 아니라 문제에 당면했을 때 생각과 감정이 극한 상황이나 포기라는 단어를 우선시 떠올리는 것이 더욱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善)한 이성과의 경계에서 생각과 마음을 조절하는 연습이 필요하고 안되면 전문가에게 문의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팔자를 궁리하다 보니 사람은 누구에게나 해결 가능한 문제만 제시되어 지지 감당하기 버거운 문제는 없게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급하게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러한 문제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모두가 욕이 앞서는 욕심입니다.
이성적인 선(善)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초심만 가진다면 무슨 문제들 해결되어질 수 있는데 첫째는 개개인의 성급함과 조급한 생각과 감정조절이 부족한데서 엉뚱한 방향으로 상황을 치달리며 상황을 악화시켜가는 것이 문제이고, 둘째는 주변에 인물들로 전후사정 자초지종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저 한 쪽편만 들며 자신의 입장에서 위안하고 위로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이 난 상황에 힘을 싣어 기름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문 상담소나 심리학 상담, 명리학 상담과 같이 학(學)을 자처하는 학인의 입장에서도 열심히 답을 찾아 보려고 애쓰지 않고 이것은 안되는 거야, 어쩔 수 없어, 남의 일이라 손쉽게 말하고 마음을 담지 않는데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미국사회나 한국사회의 문화가 이러한 개인의 문제와 가정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상으로 동의하고 있는 정책이 합법적인 이별과 이혼정책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남녀 부부관계에서 부터 출발하여 넓게는 사회적인 인간관계로 성장하는 것이고 인간관계의 접목과 실천이 문화의식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별과 이혼이라는 것을 국가에서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시대에 마치 저 혼자만이 이혼은 무지하고 부족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는 늬앙스로 표현되어 질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현상과 국가도 어쩔 도리 없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급변하는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변화과정이고, 저는 남녀 부부관계로 인한 자식이 관련된 가족이 사회적인 발전이 우선하느냐 인간적인 행복이 우선하느냐의 문제로 양면화될 수 있습니다.
여튼 우쨋든 남녀 부부관계의 원만한 가정생활에 대해 명리학적인 해석을 처음부터 겨울생 수왕절을 기준으로 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개인으로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생각과 감정이 타인과 접촉되어 지는 가운에 차이점을 명확히 알고 이해할 때 한 개인과 가정은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춥고 배고픈 겨울생이 나 자신을 지켜가기 위한 외로운 인생의 여정이 무엇이든 자기 필요에 의해 선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을 존중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멋대로 듣고 멋대로 보고 하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 겨울생의 소심함을 이해하시고 내가 말하는 대로 듣고 내가 보여주는데로 보게 만들어야 하는 경직되어 있는 사고의 틀을 이해하고 자각하며 건강해지자는 생각입니다.
사주팔자는 운명이고 운명은 주어진 업보이고 업장입니다. 업장은 지켜가는 것은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나이 30에 이립으로 사회적인 뜻을 세우는 것으로는 가하나 개개인으로서 인간관계는 업장 소멸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인 천도라는 것입니다.
"나"는 사회적인 현상속에 뜻을 세우고 사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과 개인이 만나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우리로서 "나"를 살피는 2인칭적인 "나"인데 생각과 감정이 자꾸 자꾸 자궁회귀 본능으로 본성적인 1인칭적인 나로 돌아가려는 데서 오르고 성장하기는 어려워도 내려가고 떨어지는 것은 날개가 없나 봅니다.
명리를 하는 놈이 그저 명리적인 논리나 세우고 분별해야 하는데 어설픈 개인적인 사견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글 속에 상생이 있고 상극이 있습니다. 물론 제화도 있고 상화도 표현 되어진 곳도 있습니다. 겨울생하면 봄 여름 가을이라는 단서에서 사분의 일의 경우 수로 겨울생인 것입니다.
겨울생은 100세에 가까운 부모와 같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와 같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효의 근본은 불가분의 원칙과 같고, 자식을 돌보는 근본은 애(愛)로 천륜과도 같은 것입니다. 시작이기도 끝이기도 한 겨울생의 외로운 운명이라는 심지(心地)를 관여하며 보고 배워야 할것은 무엇이고, 생각과 감정의 흐름에 대해 계속 써 내려가 보겠습니다.
첫댓글 선우선생님~🥰 남녀 및 부부관계 대한 김병우선생님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하게 읽으며, 생각하게 됩니다. 마지막 단락의 겨울생 이야기- 부모에 대한 '효'와 자식에 대한 '애' 내용에 좀 더 많이 공감되었습니다! 좋은 씨리즈 글 올려주심에 다시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단식판단이겠으나
겨울생이 유독 어린애와 같이
징징대고 나 좀 봐라봐! 나 이쁘지!
이래서 좀 바라보면 쩍 달라붙고 ᆢ
그랬네요
몸은 노인이고
행동은 어린애와 같았어요
제 주변인물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