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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련다(1)
마태복음 5-7장
한 생명이 엄마의 모태에서 잉태되어 10개월동안 자라 태어난다. 출산과 성장은 과정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영적인 출산과 성장을 이야기한다.
갈 4:19 / 오, 나의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여러분은 모를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를 기다리면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산모의 해산의 고통을 다시 한 번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성장해 가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태어나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성장의 과정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태어남은 회심 사건이라면 성장은 변화되어 가는 성화(성결)의 과정이다. 영적 성장은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영적 성장은 기쁨을 준다.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삶은 풍성해진다. 신자로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먼저 영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녀들이 성장할 때까지는 직업을 가지라고 하지 않는다. 성장하기도 전에 일을 먼저 배운 사람은 얼마 못 가서 중단한다. 그러면 성장도 없고 사역도 포기한다. 그러나 먼저 성장을 경험하고 계속 성장해 가는 사람은 사역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성장으로 인해 감당할 능력이 주어진 것이다.
거듭난 신자(성도)는 영적 성장을 원한다. 더 많이 알기 원하고 더 많이 변화되기 원한다. 성장에 대한 갈망이 중요하다. 연초가 되면 영적 성장을 위한 기대와 목표를 세운다.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은 성장의지이다. 성장을 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생명체는 그 안에 성장의지를 가지고 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더 높은 비전을 가지고 부단한 노력을 한다. 영적 세계에서 자기만족은 자신의 상태를 모를 때 일어나는 미성숙에서 일어난다. 영적 성장의 갈망이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불어 넣어 주시는 은혜이다.
♬ 찬송가 453장 ➊ 예수 더 알기 원하네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후렴> 내 평생의 소원 내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➋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➌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 맘에 교훈되도다
➍ 예수가 계신 보좌는 영광에 둘려 있도다 평화의 왕이 오시니 그 나라 왕성하도다
참고 / 작사 : 엘리자 히윗(Eliza Edmunds Hewitt, 1851-1920) 여사는 1851년 6월 28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1920년 4월 24일에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육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자는 학교 교사가 되어 열심히 가르쳤으나 척추에 병이 생겨 수술을 한 후 교육계를 떠나 평생 독신으로 칼빈장로교회에 출석하며 주일학교 어린이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녀가 작사한 6곡이 찬송가에 실려 있다.
217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313장 내 임금 예수 내 주여,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작곡 / 작곡자는 존 스웨니(John Robson Sweney, 1837~1899)로서 미국인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 소년 시절에 이미 공립학교와 주일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칠 정도였다. 19살에 독일의 유명한 바우에르(Bauer) 교수에게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그리고 찬양대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22살에 교사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남북전쟁이 났다. 그는 제3 딜라웨어연대(3rd Delaware Regiment)의 군악대 지휘자로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 펜실베이니아 군악학교 교수가 되어 25년 동안 일하였다. 거기서 음악학사와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000곡이 넘는 찬송을 작곡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이 크로스비여사 작사곡들이다. 친구들과 공저로 많은 찬송가를 펴내었다.
♬ 찬송가 463장 / ➊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후렴>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➋ 사랑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➌ 거룩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거룩하기 원합니다
➍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아멘
작사 작곡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흑인들의 영가임을 알 수 있다. 노예들의 삶을 그린 영화나 소설을 보면 쉽게 느낄 수 있듯이 그들의 삶은 잠을 잘 자유도 없고,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일해야 할 광활한 농장과 짐승과 같이 취급받으며 하루 종일 일하였다. 더욱 비참한 것은 물건처럼 사고 팔리는 그런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목숨과 모든 생각과 자유는 모두 주인의 것이였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살아갔던 이유는, 사람으로 존재하였던 이유는 한 줄기 빛과 소망이 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천국을 향한 그들의 소망이었다. 모든 삶을 박탈당했지만 그들의 소망만은 주인이 박탈할 수 없었기에 노예들은 오로지 하늘을 바라보며 괴로운 인생길을 달랬다. 그들의 가슴으로부터 토해낸 천국의 소망을 담은 노래가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이다. 저들의 노래는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닌 가슴으로 부르는 영혼의 노래였다.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참으로 힘든 일들과 상처가 되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이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히 11:6)라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루하루 진실한 신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우리 영혼이 소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라. 어떤 분들은 야곱을 가리켜 사기꾼이라고 비난을 하지만 야곱처럼 영적인 복에 집착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 리브가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은 서로 다투었다(창 25:22). 야곱의 집념은 성장하면서 줄어들지 않고 더 강렬해졌다. 이 이야기는 유년주일학교 때부터 들어온 말씀이지만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권면하시는 말씀들이기에 깊이 묵상해야 한다.
창세기 25:29-34 / 어느 날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마침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에서는 너무나 배가 고파 30) 죽을 끓이고 있는 야곱에게 말을 건넸다. `야곱아, 내가 지금 무척 배가 고프다. 네가 지금 끓이고 있는 붉은 죽을 나한테 좀 줄래? 먹고 싶어 죽을 지경이다.' 이 때문에 에서의 별명이 `붉다'라는 뜻의 에돔이 되었다. 31) `지금 형의 장자권을 나한테 팔아. 그러면 내가 이 죽을 줄께'하고 야곱이 대답하였다. 32) `그래,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 데 내가 가지고 있는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좋아 내 장자권을 네가 가져' 하고 에서가 말하였다. 33) `그럼, 지금 나한테 맹세를 해줘. 나에게 장자권을 주겠다고 말야' 하고 야곱이 말하였다. 에서는 야곱이 말한 대로 맹세를 하고 그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주었다. 34) 그러자 야곱이 떡 몇 개와 자기가 쑨 팥죽을 에서에게 주자 에서는 그것을 먹고는 일어나 나갔다. 에서는 이렇게 장자의 권한을 별것 아닌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였다.
야곱은 장자권을 탈취한 후에 아버지로부터 축복까지 받았다. 그러나 생애는 파란만장하였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8장에 직접 나타나셔서 새로운 약속을 해 주셨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마음에 품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어려운 문제와 곤경에 처했을 때도 그것들이 가져다 줄 좋은 결과를 생각하며 기뻐하며 7년이라는 세월을 그저 며칠 지나가는 것처럼 금방 흘러 갔듯이 매사에 선한 뜻을 잃지 않고 마음에 품고 기쁨과 쉬지않고 기도하면서 살아갔다(창 29:20). 오히려 야곱에게 닥치는 시련을 인내를 배우게 되었고, 강인함을 길러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반석과 같은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야곱처럼 성도는 영혼이 소원하는 것을 따라가게 된다. 갈망하는 것이 인생이다. 영혼의 상태가 중요하다. 성장이란 영혼의 성장이다. 영혼의 성장은 일평생 해야 할 과제이다. 영혼의 성장은 멈추면 안된다. 이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마음에 부딪혀 온다.
빌 3:12-16 / [목표를 향한 달음질] 내가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께서 왜 나를 구원해 주셨는가를 깨달아 그리스도께서 내게 바라는 사람이 될 그날을 향해서 계속 노력할 뿐입니다. 13)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아직 나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는 데 내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거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14) 목적지까지 달려서 상을 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상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일을 바탕으로 하여 내리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상을 주시려고 나를 하늘로 부르고 계십니다. 15) 나는 여러분이 모두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이 생각을 달리하는 점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16)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됐든지간에 이제는 같은 원칙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삶이 무너지는 것은 에서처럼 영혼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찾아온다. 성장하지 않는 결과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평생 사는 것과 같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영적인 꼽추의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몸은 자랐는데 영혼이 자라지 않으면 삶은 힘들다. 육체는 풀과 같다. 남는 것은 영혼이다. 영혼의 질이 중요하다. 영혼의 힘이 인생을 다르게 살게 한다.
히 6:1 / 이제는 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를 배우느라 같은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맴도는 일은 그만두고 더 깊은 진리를 배우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또한 이해력을 키워서 건장한 교인의 품격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착한 일을 해서 구원 얻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필요성만 가지고 떠드는 일에 더 이상 귀기울이지 마십시오.
사회적으로 신분은 갖추었지만 영혼이 자라지 않으면 삶은 초라해진다. 성장은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1. 성경 말씀은 성도가 지켜할 말씀들이다.
본문은 산상수훈 말씀의 결론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과 가르침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을 비교하시면서 이들을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표현하셨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니다. 구구절절 직접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말씀들이다.
딤후 3:16-17 /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쓰여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줍니다. 17)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십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과거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것을 거울로 삼으라고 이렇게 권고하였다.
고전 10:1-12 /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보내어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나타내셔서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이 마신 물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능력 있는 바위로서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들은 바로 그 바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마시고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서 모조리 쓸어 버리셨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우리는 그들처럼 악한 일을 하거나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 또 주께서 얼마나 참아 주시는가를 시험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자들은 다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하시는 일에 불만을 늘어놓아서도 안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들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났던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됨으로써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하십시오. 누가 언제 같은 죄를 범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고전 10:13-15 / 여러분에게 파고드는 악한 욕망은 새로운 것도 별다른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많은 사람들도 여러분보다 앞서 같은 문제에 부딪쳐 싸워 왔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유혹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물리칠 수 없을 만큼 강한 유혹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약속해 주셨고 또 그분은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십니다. 유혹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믿고 여러분은 인내로써 그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조심하여 우상숭배를 피하십시오. 15) 여러분은 총명한 사람들이니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해서 판단해 보십시오.
2.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온전해지기를 소원하신다.
공사장에는 멋진 조감도를 세워 놓는다. 언젠가 지어질 완성도를 볼 때 기대가 된다. 작업을 하다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그 조감도를 보면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예수님은 성도 개개인의 완성도(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하셨듯이 그리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심과 같이 성령의 권능을 입혀주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려는 계획) 즉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마 5:48 / 그러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
온전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말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신자의 영적 수준을 매우 높게 끌어 올리셨다. 피조물인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 하셨다.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쓴 책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하시며, 이해를 도웁기 위해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마태복음 5장에서는 간음하지 말라(27-30), 이혼하지 말라(31-32), 맹세하지 말라(33-36), 보복하지 말라(38-42), 마지막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라‘(43-38)고 하셨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자선데 대한 가르침(1-4), 기도에 대한 가르침(5-6)을 주시며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까지 하셨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으로 마태복음 7:23까지 말씀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13-16에서 ’주 안에서 완전히 성숙한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로 완전히 충만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며 … 언제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권면하였다.
자! 이러한 말씀에 어떠한 토도 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우리가 성도라면 삼아야 할 기준은 높다. 예수님은 신자가 욕먹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그(J.X)에게까지 자랄지라’,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대단한 목표다.
▶ 예수님은 완전무결하고 죄를 짓지 않는 상태의 완전함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본래의 형상대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망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다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저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사실 영광을 받고자 원하시는 것은 곧 저들이 완전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자식에게 효도를 받고자 원하는 것은 곧 자식이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탕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민수기 20장에서 많은 날 동안 모세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는데 정말 얘를 많이 썼다. 그런데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만 패역한 무리(반항하는 무리)라고 하면서 분노를 폭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다’고 책망하셨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대로 폐역한 무리일지라도 사랑하셔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선지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민 20:7-13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계약궤 앞에 둔 지팡이를 들고 네 형 아론과 함께 온 백성을 불러모아라. 그런 다음 그들이 보고 있는 데에서 바위를 향하여 물이 터지라고 명령하여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 물을 너희 온 무리와 가축까지도 마시도록 하여라.' 9)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세가 가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10) 모세와 아론은 바위 앞에 온 공동체를 모아 놓았다. 모세가 입을 열었다. `이 반항하는 무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내가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11) 그가 지팡이를 든 손을 쳐들어 바위를 두 번 내리치자 물이 콸콸 솟구쳐 나왔다. 온 무리와 가축들이 바위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셨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나를 굳건히 믿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거룩한 힘을 드러내지 못하였구나. 그러므로 너희는 이 무리를 내가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13)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불평을 하였기 때문에 `불평하다'라는 뜻으로 므리바라고 불렀지만 여호와께서는 물이 터져 나오게 함으로써 당신이 거룩하시고 힘이 있으신 분임을 드러내신 곳이기도 하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대변하는 말씀이 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과 70년간의 포로 생활에 관한 예언을 하신 이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한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70년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에 관한 예언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사 49:14-16 /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을 때에, 시온이 이렇게 탄식하였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셨으며 불쌍히 남아 있는 우리들까지 완전히 잊어버리셨다!' 15)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연 어머니가 젖먹는 자식을 잊어버릴 수 있느냐? 자기 태에서 나온 자식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어머니가 세상에 있느냐? 만일 세상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하여도 나만은 너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16) 예루살렘아,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 네 무너진 성벽들이 항상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너는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언제나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구나.
특히 에스겔 36:16-28을 보면 ‘너희는 영원히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28절).’라는 말씀이 감동을 준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셨으며 ㄱ들을 통해 얼마나 영광을 받고자 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소원의 말씀이다.
겔 36:16-28 /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까닭]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17) `너 사람아,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옛날 고국에 살면서 온갖 흉악한 행실로 그 땅을 더럽혀 놓았다. 그들의 행실이 얼마나 더럽고 부정한지, 내가 보기에는 마치 월경하는 여인처럼 부정해 보였다. 18) 그들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그 땅을 더럽히고, 온갖 우상들을 만들어 놓고 섬김으로써 그 땅을 욕되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무서운 분노를 쏟아 부었다. 19)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어 세계 만민 속에 헤쳐 놓고 세상의 모든 나라에 흩어져 살게 만들었다. 그들이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 나도 형벌을 내렸던 것이다. 20) 그러자 그들은 세계 만민 속에 흩어져 살며 가는 곳마다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어디에서나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지만 저들이 나라를 빼앗길 때에도 여호와는 막아주지 못하였다!' 하고 흉을 보게 만들었다. 21) 이처럼 내 백성이 어디를 가든지 나만 더욱더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므로 나는 더 이상 내 거룩한 이름이 수치스럽게 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내 거룩한 이름때문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다시 고국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은 너희들의 행동이 옳아서가 아니다. 너희가 어디를 가나 더럽혀 놓은 나의 거룩한 이름 때문이다. 23) 세계 만민이 나의 위대한 이름을 다시 존숭(尊崇)하도록 내가 내 이름을 거룩하게 하겠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일을 보고 내가 여호와인 줄을 세계 만민이 깨닫게 만들겠다. 24) 이제 나는 너희를 세계 만민 속에서 데리고 나오겠다.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다가 다시 옛 고향으로 데리고 들어가겠다. 25) 그런 다음에 너희 몸에 정한 물을 뿌려 그동안 온갖 우상을 섬기면서 더러워진 오물을 깨끗이 씻어 주고 26) 너희 속에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넣어 주겠다. 너희 가슴속에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들어 내고 나의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내가 이렇게 내 영으로 너희를 가득 채워 놓아 너희가 내 뜻에 따라 생활하고 내가 준 모든 계명을 지키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게 만들겠다. 28) 그렇게 되면 내가 옛날에 너희 조상들에게 주었던 땅에서 다시는 쫓겨나는 일 없이 너희는 영원히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이렇게까지 표현하셨다.
눅 15:7, 10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명보다 길을 잃었던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한다. 10)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기뻐할 것이다.
이어서 탕자의 비유가 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본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뒤로 하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빨리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보석 반지를 끼워 주고 신을 신겨라.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잔치를 열고 기쁨을 나눠야겠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그를 잃었다가 찾은 것이다.’라고 하시며 잔치를 열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의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이렇게 격려하고 있다.
히 12:9-10 / 비록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우리를 꾸짖고 야단 치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0)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우리의 앞날을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우리를 훈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누어 주려고 언제나 바르게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3.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의미와 가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 교훈해주신 보배와 같은 말씀이다. 마태복음 5-7장, 누가복음 6:20-49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산에서 베풀어진 말씀’이라고 해서 ‘산상수훈’ 또는 ‘산에서 가르쳐진 보배와 같은 말씀’이라고 해서 ‘산상보훈’이라고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등등.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는 내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삶 속에서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폭풍이 휘몰아쳤을 때의 경우와 마지막 심판날에 어떻게 될 것을 비교 설명해 주셨다. 정말 주옥같고 보물같은 말씀들이다.
그런데 정말 지키기 힘들고 부담스러운 말씀으로 다가온다. 어떤 의미에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의 율법보다 더 무겁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주신 신약의 율법인가?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산상수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오버랩되는 성경의 한 장면을 이해해야 한다.
구약에도 하나님께서 따르는 자들을 산으로 불러서 살아갈 규칙을 말씀해주시는 장면이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이다.
➊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이 빽빽한 구름과 연기와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 가운데 임하셨다. 특별히 빽빽한 구름은 구약에서 종종 나타나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가만히 서서 구경하듯 볼 수가 없어 다 죽은 듯 엎드렸다고 했다. 산상수훈 장면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따로 빽빽한 구름이 필요없다. 희한한 것은 사람들이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실체를 폄하하는 반면 하나님 임재의 배경이 된 빽빽한 구름과 번개과 천둥은 더 신비롭게 생각한다.
➋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와 말씀대로 사는 제자를 삼으셨다.
➌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겠다며 율법을 주시자 저들은 그 율법을 지키겠다는 언약을 맺었다. 우리가 보기엔 지켜야 하는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지금 여기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대의 언약을 맺는 형식이다. 이 부분이 산상수훈 이해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언약의 당사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고대 사회에서 군대에 가고, 세금을 내고, 계약을 맺고, 그대로 사는 책임은 자유 시민에게만 주어진 의무였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은 자유시민으로서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대접을 처음으로 받은 것이다. 내가 행위능력이 있고, 내가 책임능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부담스러운 내용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짓는다고 했을 때, 나중에 모세가 그만 가져오라고 할 정도로 자기의 소유들을 가져왔다. 오랜 기간 노예로서 개인소유가 없이 살다가 자기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보통 더 집착하는 것이 당연한 데 말이다. 그들에게는 자유시민으로서 책임을 지고 부담을 지는 것이 더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헌신하고 그렇게 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산에서 사도와 제자들에게 하신 산상수훈이 이런 의미이다. 이 산상수훈을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들아 다 들어라, 다 이렇게 살아라’ 하신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 곧 사도와 제자들로 국한하셨다.
분명히 하나 하나의 내용은 우리가 그대로 살기에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하지만 왜 예수님이 이 부담스러운 내용을 우리에게 일부러 구별하여 주셨는가 그 의미를 알면 부담의 성격이 좀 달라지게 된다. 우리 모두는 예전에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 계획대로, 내 욕심대로 살려고 애썼다. 그런데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때는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사슬에 매여 죄의 꼭두각시로 살았던 것이고, 실상은 영적으로 고통과 비참함 속에서 살았던 삶인 것을 깨닫게 되면 산상수훈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산상수훈을 율법처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가르쳐야 한다. 산상수훈을 잘 배우게 되면 부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정해 주시는구나,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겨주시는구나’라고 감격하게 된다. 이어서 ‘부담스러워도 책임을 져야지, 감당해야지, 내게 이런 기대를 해주시는데 감사하며 살아봐야지.’의 수준이 된다.
산상수훈을 내용 하나 하나를 살피며 이건 이렇게 지키는 것이 옳고, 저건 저렇게 지키는 것이 옳다고 따지기 시작하면 보배로와야 할 말씀이 구약의 율법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 되는 율법이 된다.
산상수훈을 지킴으로 산상수훈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별하여 산상수훈을 주셨다는 데 산상수훈의 가치와 무게가 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해를 당하기도 하고 고생하기도 했지만, 남의 짐을 지기도 하고 우리의 것을 주께 드리기도 했지만 기쁨으로 이 신앙을 지키고 전수해 온 것이다. ‘내게 요구하시는 내용’보다 내게 ‘왜 이런 걸 요구하시느냐?’가 산상수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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