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전승기공고 지족원운지
그대의 신기(神奇)한 책략(策略)은 하늘의 이치(理致)를 다했고,
오묘(奧妙)한 계획(計劃)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戰爭)에 이겨서 그 공(功) 이미 높으니,
만족(滿足)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 고구려 영양왕 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은 한시.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 이 시의 제작 경위가 기록되어 있으며,
제목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므로 ‘여수장우중문(與隋將于仲文)’
또는 ‘유수장우중문(遺隋將于仲文)’이라고도 한다.
※ 살수대첩
612년(영양왕 23) 고구려가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침공을 격퇴하고 대승리를 거둔 싸움으로
수(隋)나라가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있을 때,
고구려는 통일된 중국의 세력이
반드시 동쪽으로 신장(伸長)해 올 것을 예견하여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영양왕은 598년 말갈족(靺鞨族)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요서(遼西)지방을 공격하였는데,
이것은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략상의 요지를 선점(先占)하기 위한 작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당시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려다가 갑작스러운 천변지이(天變地異)로 이를 중지하였다.
☆☆☆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 때
고구려는 수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금의 몽골지방에 있던 돌궐(突厥)과 상통(相通)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수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였다.
수양제는 612년 1월
113만 3,8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 중의 수군(水軍)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大同江)으로 쳐들어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대패(大敗)하였다.
한편 양제가 친히 거느린 육군의 1개 부대는
고구려의 요동성(遼東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초조한 수군(隋軍)은 별동대(別動隊) 30만 5,000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평양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압록강 ·살수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깊숙이 쳐들어왔다.
고구려의 을지문덕은
수군에게 거짓 항복하여 적진(敵陣)에 들어가
그들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고 돌아온 뒤
그의 유도작전에 걸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침입한 수군의 대장인 우중문(于仲文)에게
1편의 시(詩 : 與隋將于仲文詩)를 지어 보내
그의 어리석음을 비꼬았다.
수군은 고구려에게 속은 줄 알고
황급히 다시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수군이
살수를 반쯤 건널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감행하였다.
살수싸움에서 수군이 크게 패하여
살아 돌아간 자는 몇천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한다.
수양제는 중국의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많은 물자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이점만을 믿었으나,
거리가 멀어
군량(軍糧) 공급이 곤란할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또 고구려의 장병(將兵)이
모두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강병(强兵)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모든 요새가 험고(險固)하여
쉽사리 공취(攻取)할 수 없음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
수양제는 수륙(水陸) 양면에서 모두 패전했으므로 부득이 철군했는데,
이듬해에도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저항은 여전히 견고하여
그 중의 요동성(遼東城)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가 왔으므로 서둘러 철퇴하였다.
수양제는 반란을 평정하고 제3차 고구려원정 길에 나섰다가
다시 실패하여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