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32]
12.12 프로필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전두환은 수사국장 이학봉을 대동하고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보안상 중간단계를 거칠 수 없었다. 10.26이후 대통령 최규하에게 시국수습에 대한 중요한 보고를 해온 사람은 오로지 전두환뿐이었고, 최규하는 전두환을 신뢰하고 의지했다. 매우 중요한 정보이고 중대한 사안이기에 전두환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보안사 수사팀에게 무조건 오후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 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 재가할 것을 고집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전두환은 평소 군에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 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한편 명령을 받은 허삼수와 우경윤 등은 4명의 보안사 서빙고 수사관들을 태우고 7시 05분에 정승화 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대령들의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되어 그의 부하들과 범죄수사대 우경윤 대령이 평생 불구로 지내야만 했던 중상을 입었다. 정승화는 한 때 보안부대장을 지냈다. 그래서 그는 저항해봐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호기를 부리다가 여러 부하들에게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중상들을 입히고 말았다. 박 수사관은, 그의 직속상관인 우경윤 대령이 정승화 아들이 2층 계단에서 내려다보고 쏜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큰대자로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악에 비쳤다. 그는 곧장 응접실 대형 유리창을 M16 개머리판으로 깨고 들어가 “ 이 새끼” 하면서 정승화의 가슴에 총구를 댔다. 얼굴이 사색이 된 정승화는 그제야 풀이 죽어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국방장관 노재현은 대통령이 빨리 와서 결재하라는 호출 명령을 받고도 이리저리 피해 다녔고,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에 모인 장군들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9명의 장군들 중 5명이 밤 9시 30분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정승화 군벌의 군사적 난동으로 인해 군과 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찰나에 있으니, 서둘러 재가를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장관 오면 해줄게" 하고 여유를 부렸다. 평생 외교관으로만 지내온 최규하는 그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것이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참모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고 전차와 포와 병력을 남산 밑 아스토리아호텔 앞으로 집결하고, 30단과 보안사를 향해 포병 사격명령을 내리고, 자기 예하부대 대령들이 전두환에 충성하니 그들을 보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려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전두환은 점조직으로 병력을 동원해 이들 모두를 체포했다. 이로써 군과 군 사이에 충돌하는 일촉즉발의 내전이 극적으로 정지됐다.
담을 타넘어 다니기도 하고, 부하 집에 숨으려 하기도 하고, 8군으로 도망하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대통령 호출에 불응한 국방장관 노재현은 새벽 1시, 제1공수여단과 국방부 옥상에 배치됐던 수경사 병력 사이에 발생한 총소리에 겁을 먹고 또다시 숨었다. 국방부 건물 지하 1층 어두운 계단에 전속부관과 함께 숨은 것이다.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대통령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운 신현확 총리는 참다못해 자기가 나서서 노재현을 찾아오겠다며 국방부로 향했다. 이에 공수대원들이 국방부 건물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새벽 3시50분! 드디어 국방부 건물 1층 계단 밑에 숨은 장관과 그 전속부관을 발견했다.
노재현과 그 부관에 총구를 겨눴던 병사들은 “나 장관이다”하는 말에 경례를 한 후 그를 장관실로 모셔왔다. 신현확 총리는 노재현 장관, 이희성 중정부장, 국방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달려갔다. 가는 도중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려 대통령 재가문서에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얻었다. 4시 30분에서 05시 10분 사이였다. 최규하는 서명란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최규하, 실로 답답한 꽁생원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형편없는 노재현은 누구인가? 1926년 생으로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장관 모두를 거친 당대의 인물이었다.
12.12의 밤, 장태완은 국방부 옥상에 배치된 수경사 발칸 포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다. “국방부에 제1공수여단이 올 것이니 주저 말고 발사하라.” 박희도 장군이 이끄는 공수1여단이 국방부에 진입하자 옥상에서 장태완의 명령을 받은 발칸포a가 불을 뿜었다. 여기에서 교전이 발생했다. 이 교전 소리를 듣고 국방장관 노재현이 차마 가서는 안 될 계단 및 먼지 쌓인 공간에 몸을 숨긴 것이다.
노재현이 장관실을 팽개치고 도주 행각을 벌이고 있던 시간, 국방부라는 지휘부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김용휴 차관이었다. 공수부대와 수경사 장태완이 지휘하는 국방부 옥상에 배치된 벌칸포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순간, 국방장관 노재현은 국방부 건물 1층 계단 밑에 숨었지만, 국방차관 김용휴는 차관실에서 의연히 자리를 지켰다. 그에겐들 왜 총소리에 의한 공포감이 없었겠는가. 장관이 계단 밑에 숨어 있는 동안 그는 1공수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1공수 장병들이 국방차관실 문을 발로 박차고 문을 열어 제치며 M16소총 총구를 겨눴을 때, 김용휴는 그야말로 장군 출신답게 태연했다.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다 들어주겠다. 어서 말해라” 장병들은 그에게 정중히 거수경례를 하고 나갔다.
노재현 1926년, 이희성 1924년
김용후 1926년, 최규하 1919년,
신현확 1920년, 전두환 1931년
사실이 이러함에도 1996-97년에 진행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는 전두환이 죄 없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윤성민-장태완이 정승화를 풀어주라는 명령에 전두환이 불복하면서 5명의 장군을 보내 대통령을 협박하고, 공관 주변을 경계하는 집총 병사들로 하여금 대통령에 겁을 주게 하여 대통령 재가를 강요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1996.7.1. 제18회 재판정에 나온 신현확 전 총리는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건의를 한 후 돌아갔으며, 대통령과 하룻밤을 새우는 동안 공관 경비병을 의식한 적은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12.12. 이후 전두환에는 대통령 말고도 두 사람의 직속상관이 더 탄생했다. 꼬장꼬장의 상징 이희성 계엄사령관, 그리고 노재현의 뒤를 이은 손금 없다는 공군 출신 주영복 국방장관이었다.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주영복은 손을 잘 비벼서 손금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널리 돌았다.
전두환은 이런 층층시하에서 9개월 이상 복무하다가 대통령 최규하를 포함한 수많은 선배장군들의 추대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2022.8.26. 지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