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밴마철 2023. 9. 25. 21:56
중국 불교의 분화과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또 선종도 매우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중심이 되는 축이 그것이 묵조선이라는 것과 간화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것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묵묵히 자기 자신을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고요함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본래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흔히 선종이라고 하면 면벽좌선이 연상됩니다. 책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벽을 마주하면서 자기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썼던 글 해오-증오 -철오에서 증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파를 조동종이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가장 성행한 것입니다. 도겐이란 일본 승려가 송나라에 와 배워갔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지관타좌(只管打坐)를 종지로 삼아 수행의 모범 답으로 삼았습니다. 지관타좌는 "오직 앉아라" 라는 뜻입니다. 좌선의 자세로 앉으면 마음이 들뜬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일본 하면 단순 정갈 깔금 이런 것들이 연상되는데 이것은 일본의 조동종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이폰 하면 역시 단순 정갈 깔끔 이런 것이 연상되는데 스티브 잡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조동종 절에 다니면서 이런 기본 콘셉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간화선은 이런 묵조선과 대비되는 것으로 마조도일 -임제의현의 계통을 계승한 대혜종고라는 사람이 창시한 새로운 수행방법입니다. 그것은 마조도일의 평상심이 도이다는 것에 근거가 있는 것이데 마조도일의 일화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남악 회양 화상이 하루는 마조 대사가 열심히 좌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어느 날 남악회양 화상이 기왓장을 가지고 좌선하고 있는 마조 대사 앞에 와서 소리를 내며 갈고 있었다. 마조 대사가 그것을 보고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기왓장을 간들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대가 좌선만 한들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좌선을 하여 부처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소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만약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소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마조 대사가 이 말을 듣고 곧 말이 끝나자마자 귀결처를 알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좌선으로는 불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는 인간의 마음을 뜻합니다. 마음을 고요함에 두는 것이 아니라 소처럼 간다는 활동성에 중심을 둔 것입니다. 이런 뜻이 무엇인지 좀 더 알아 보기 위해서 마조도일의 재가 제자 방거사라는 분의 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은 차별이 없다.오직 내 스스로 짝하고 어울릴 일이다.하는 일마다 취하거나 버리지 아니하고가는 곳마다 베풀고 어긋나지 아니하는데높은 벼슬을 누가 귀하다고 하겠는가?저 산도 한 점의 티끌에 불과한 것을.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은 물 긷고 땔나무 해올 줄 아는 것일세.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일용사무별 유오자우해 두두비취사 처처물장괴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神通竝妙用 運水及搬柴 주자수위호 구산절점애 신통병묘용 운수급반시.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 불성이다는 말은 많이들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시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만약에 불성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 불성은 끊임없이 언제 어디서나 외부로 발산할 것이다. 나무하고 물 긷는 그런 사소한 일상생활에도 그 불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좌선을 통해서 불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있다는 불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불성이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 불성을 좌선 같은 것을 통해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불성이 끊임없이 신통하고 묘한 작용으로 외부로 드러나고 있는 곳에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작용시성(作用是性)이라고 합니다. 작용하여 끊임없이 외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불성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이 마조도일이 말한
평심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말한 것의 뜻입니다. 이것은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 그대로가 바로 부처), ‘시심즉불(是心卽佛, 이 마음이 곧 부처)’, ‘시심시불(是心是佛, 이 마음 이것이 바로 부처)’ 이라고도 합니다. 왕양명의 심즉리가 연상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오 증오 철오의 공식에서 철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넘어가자면 불교 경전 공부는 해오, 좌선을 통한 수행은 증오, 평상심의 발현은 철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종이라는 것은 경전공부를 거부하면서 오는 것이지요. 그 선종을 크게 나누면 이제 좌선 같은 것을 통해 고요함 속에서 불성을 찾는 묵조선과 일상생활에서 발현되고 있는 불성을 찾는 마조도일 계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초기에는 이런 묵조선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대혜종고라는 사람인데 그는 마조도일의 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간화선이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이 대혜종고의 문제의식은 묵조선에 비판에서 시작합니다. 우선 벽을 보고 앉아 좌선하는 면벽좌선은 행하는 수행승은 실제로 꾸벅꾸벅 졸면서 잠만 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런 좌선을 통해 무언가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시끄럽고 술집 여자와 같이 유혹이 많은 시장바닥에 나가면 마음이 요동치며 얻었던 고요함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그런 선은 삿된 선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제대로 수행이 되려면 그것이 일상생활에서도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흔들림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하면 그 고요히 해야 한다는 그 생각이 하나의 잡념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왕양명이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비유와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흔들리는 배에서 고요함을 찾으려고 가만히 있어 보면 그 배는 계속해서 출렁거리며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를 가게 하게 하면서 키를 잘 붙잡으면 오히려 그 속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잡념을 없애려면 어떤 커다란 잡념 그 자체에 몰두하면 다른 생각이 없어지면서 그 속에서 고요함을 찾을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위를 피하려고만 하면 더 덥습니다. 차라리 더위에 맞서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해버리면 그 더위를 잊을 수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간화선(看話禪)에서 '간(看)'이란 잘 살펴본다는 의미이며, '화(話)'란 화두(話頭)를 말합니다. 화두라는 것은 의단이라 하는 데 의단이라는 의심덩어리라는 뜻입니다. 어떤 의심 덩어리에 열중하다가 보다면 어느덧 다른 잡념이 다 사라지는 평정의 상태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자 화두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주스님이 어떤 때는 개에 불성이 있다고 하였고 어떤 때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은 것을 큰 의심덩어리로 삼아 거기에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왕양명의 치양지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는 끊임없는 걱정 우환이 있습니다. 걱정 우환을 도피하기보다는 그 자체에 몰두하여 걱정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 장모님이 저희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식은 너희들의 윤리 선생님이다. 자식 키우기가 어려운데 어려움 속에서 자식을 키우다 보면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식이 목에 걸린 가시라고 생각합니다. 뺏지도 못하고 삼키지 못하고 목에 딱 걸려 있습니다. 이것 해결하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 해보아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 하나의 수련이 되고 그것을 통해 인생의 의미가 절실해 질 때가 있습니다. 왕양명에서 와서 화두는 바로 일상생활의 어려움 걱정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헤쳐나가면 저절로 수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화두가 가지는 이런 뜻은 보왕삼매경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되나니 ,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서 원림을 삼으라」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저「앙굴마라」와 「제비달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스런 짓을 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하게 하셨으니, 어찌 저의 거슬리는 것이 나를 순종함이 아니며 제가 방해한 것이 나를 성취하게 함이 아니리요.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맹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그의 힘줄과 뼈를 피곤에 지치게 하고,그의 육신과 살갗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하고,그의 몸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끔 한다. 그리고는 그가 행하는 일마다 그가 원하던 바와는완전히 다르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곤 하는데,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고그 사람의 성질을 참고 견디게 하여,예전에는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게해 주기 위해서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어떤 어려운 역경이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뜻입니다. 화두 의심덩어리는 수행하기 위하여 일부러 만든 일종의 역경입니다. 억지로라도 정신적 역경인 의심 덩어리를 만들어 그것을 돌파하려는 것 그것이 간화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동문선 제105권 / 변(辨)
불씨가 작용을 성이라고 하는 변[佛氏作用是性之辨] / 정도전(鄭道傳)
나는 상고하건대 불씨의 설은 작용을 가지고 성(性)이라 하고, 방거사(龐居士)는 말하기를, “물을 길어 나르고 땔나무를 하는 것이 묘용(妙用)이 아닌 것이 없다.”함은 곧 성이 작용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곧 성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난 이치이요, 작용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난 기운이다. 기가 엉겨서 모인 것이 형질(形質)이 되고 신기(神氣)가 되었으니, 심의 정상(精爽)과 이목의 총명과, 손으로 잡고 발로 가는 지각 운동(知覺運動)을 하는 것이 모두 기(氣)이다. 그러므로, “형체가 이미 생겨나고 정신이 발동하여 지각을 알게 된다.” 하였다. 사람이 이미 이 형기가 부여되면, 이 이치가 형기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는지라, 심에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과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정이 되고, 머리 자세에 있어서는 곧음이 되고, 눈매에 있어서는 단정함이 되고, 입모습에 있어서는 꼭 다묾이 되는 따위의 무릇 당연한 법칙이 되어, 바뀔 수 없는 것은 이 이치이다.
주(周)나라 사람 유강공(劉康公)은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서 태어났으니 이른바 명(命)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동작 위의(動作威儀)의 법칙이 있어 명을 정한다.” 하였으니, 천지의 중이란 것이 곧 이치를 이름이요, 위의의 법칙이란 것은 곧 이치가 작용하여 발한다 하였다. 주자는 또한 말하기를, “만약 작용을 성이라 한다면, 사람이 요란하게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성(性)이라 할 것인가. 또 이치는 형이상(形而上)이요 기운은 형이하(形而下)인데, 불씨는 스스로 고묘 무상(高妙無上)하다고 하면서, 도리어 형이하인 것으로 말을 하니 우스운 일이다. 학자는 반드시 우리 유가의 이른바 위의의 법칙을 가지고, 불씨의 이른바 작용 시성(作用是性)이란 것으로 더불어 안으로 신심을 살피고 밖으로 사물에 증험해 보면 스스로 그 시비를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주-D001] 방거사(龐居士) : 당(唐)나라 헌종(憲宗) 때 사람으로 이름은 온(薀)인데 그의 재산을 모두 강에 넣어 버리고 마조대사(馬祖大師)에게 선학을 배워서 통달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재연 (역) | 1969
.....................
三峯集卷之九 奉化鄭道傳著 / 佛氏雜辨
佛氏作用是性之辨
愚按佛氏之說。以作用爲性。龐居士曰。運水搬柴。無非妙用。是也。按龐居士偈曰。日用事無別。唯吾自偶諧。頭頭須取舍。處處勿張乖。神通幷妙用。運水及搬柴。 蓋性者。人所得於天以生之理也。作用者。人所得於天以生之氣也。氣之凝聚者爲形質爲神氣。若心之精爽。耳目之聰明。手之執足之奔。凡所以知覺運動者。皆氣也。故曰。形旣生矣。神發知矣。人旣有是形氣。則是理具於形氣之中。在心爲仁義禮智之性。惻隱羞惡辭讓是非之情。在頭容爲直。在目容爲端。在口容爲止之類。凡所以爲當然之則而不可易者是理也。劉康公曰。人受天地之中以生。所謂命也。故有動作威儀之則。以定命也。其曰。天地之中者。卽理之謂也。其曰。威儀之則者。卽理之發於作用者也。朱子亦曰。若以作用爲性。則人胡亂執刀殺人。敢道性歟。且理。形而上者也。氣。形而下者也。佛氏自以爲高妙無上。而反以形而下者爲說。可笑也已。學者須將吾儒所謂威儀之則與佛氏所謂作用是性者。內以體之於身心。外以驗之於事物。則自當有所得矣。
삼봉집 제5권 /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 작용이 성이라는 변[佛氏作用是性之辨]
나는 살피건대, 불씨(佛氏)의 설에서는 작용(作用)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하는데,
방거사(龐居士)의 이른바 ‘먹을 물과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이 모두 묘용(妙用) 아닌 것이 없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안】 방거사의 게송(偈頌)에 “날마다 하는 일이 별 다름이 없으니, 내 스스로가 할 일을 하는 것뿐이네. 취할 것 취하고 버릴 것 버리고 과장하지도 말고 어긋나게 하지도 말 것. 신통(神通)에다 묘용(妙用)을 겸한 그것이 바로 먹을 물과 땔나무를 운반하는 것일세.” 하였다.
대개 성(性)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태어난 이(理)이고, 작용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태어난 기(氣)이다. 기가 엉기어 모인 것이 형질(形質)이 되고 신기(神氣)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정상(精爽)함이나 이목(耳目)의 총명함이나 손으로 잡음이나 발로 달림과 같은 모든 지각(知覺)이나 운동을 하는 것은 모두 기(氣)이다. 그러므로, ‘형(形)이 이미 생기면 신(神)이 지(知)를 발(發)한다.’ 하나니, 사람에게 이미 형기(形氣)가 있으면 이(理)가 그 형기 가운데에 갖추어진다. 마음에 있어서는 인ㆍ의ㆍ예ㆍ지(仁義禮智)의 성(性)과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정(情)이 되고, 머리 모양에 있어서는 직(直)이 되고, 눈 모양에 있어서는 단(端)이 되고, 입 모양에 있어서는 지(止)가 되니, 이런 등속의 것은 모두가 당연한 법칙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理)이다.
유강공(劉康公)은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 태어났으니 이른바 명(命)이다. 그러므로 동작(動作)ㆍ위의(威儀)의 법칙을 두어 명(命)을 정(定)한다.”
하였다. 그가 말하는 ‘천지의 중(中)이다.’고 한 것은 곧 이(理)를 말함이요, ‘위의의 법칙이다.’고 한 것은 곧 이(理)가 작용에 발(發)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도 말하기를,
“만일 작용을 가지고 성(性)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칼을 잡고 함부로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감히 성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또 이(理)는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것인데, 불씨는 스스로 고묘무상(高妙無上)하다 하면서 도리어 형이하의 것을 가지고 말하니 가소로울 뿐이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우리 유가의 이른바 ‘위의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과, 불씨의 이른바 ‘작용이 성’이라고 하는 것을 놓고서, 안으로는 심신(心身)의 체험에 비추어 보고 밖으로는 사물(事物)의 증험(證驗)에 비추어 본다면 마땅히 저절로 얻는 바가 있으리라.
ⓒ 한국고전번역원 | 조준하 (역) | 1977
.....................
성재집 제17권 / 왕복잡고〔往復雜稿〕 / 홍사백에게 답함 임진년(1892, 고종29) 〔答洪思伯 壬辰〕
박(朴) 선비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요즘 같은 더위에 존체께서 잘 지내고 계신다는 것을 삼가 알고서 깊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중교는 더위를 먹어 죽을락 말락 하여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편지 속에서 거듭 말씀하신 두 가지 일 모두에서 당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였으며, 별지로 보낸 긴 편지에서 부지런히 일깨워 주시고자 하는 뜻을 거듭 받았으니, 그 감격스러움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마땅히 마음을 씻고 정독하고 오래도록 공부하여 깨달은 바가 있을 때마다 인편을 찾아 알려드리겠습니다.
듣기로, 아드님께서 올해 아홉 살인데 비범하게 똑똑하다고 하니 몹시 기쁘고도 기쁩니다. 중암 선생의 혈맥을 전할 사람은 오직 이 아이 뿐이니, 예뻐하고 아끼는 마음이 더욱 심상하지 않습니다. 진현(眞玄) 하나를 제 마음대로 태정(胎呈)하니 아드님께 주어 공부하는 데 쓰게 하십시오. 숨이 가빠 이조차도 간신히 썼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천고에 마음을 말하는 것은 위대한 순 임금의 ‘위미정일(危微精一)’이라는 열여섯 글자에서 처음 시작되었는데, 리와 기, 마음과 성의 지위와 명분은 이미 여기에서 큰 틀이 정해졌습니다. 공부를 하며 노력하는 규모와 절도도 또한 이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께서 나아가 해석하시며 공력을 극히 썼는데, 대개 ‘인(人)’과 ‘도(道)’라는 두 글자로 형기(形氣)와 성명(性命)을 나누어 양쪽으로 맞세웠으니 리와 기의 큰 분별은 다시 바뀔 수 없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이지만, 혹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혹 성명의 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하니, 지각하게 되는 근원은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리와 기가 합하여 아직 구별되지 않았을 때의 칭호이며, 다만 그것이 주(主)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 리인가 기인가에 따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위태로움과 은미함의 차이가 있게 될 뿐입니다. ‘정(精)’은 두 가지 사이를 살피는 것이니, 곧 한 마음에 나아가 리와 기를 가려내는 노력이고, ‘일(一)’은 그 본래 마음의 바름을 지키는 것이니, 곧 가려낸 리를 견지하여 지키는 노력입니다. 성문(聖門)의 심학은 단지 이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저의 심설이 비록 조리는 없을지라도 그 큰 뜻은 모두 이것을 근본이 되는 바탕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자의 〈답주장유서(答注長孺書)〉에서 말하기를 “신령(神靈)이라는 두 글자는 성(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자의 ‘타고난 것이 성이다.〔生之謂性〕’라는 말과 요즘 불교인들이 말하는 ‘작용이 성이다.〔作用是性〕’라는 말은 그 잘못이 바로 여기에 떨어지는 것이니, 깊이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답진재경서(答陳才卿書)〉에서 말하기를, “학자들이 ‘성’과 ‘지각’이라는 글자의 뜻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맹자가 성에 대해 말한 허다한 곳에서 비로소 막힘이 없게 되고, 고자의 ‘타고난 것이 성이다’라는 말이 그릇된 까닭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살펴보면 주자는 ‘신령과 지각을 가려내어 구별하지 않은 것’을 하나같이 고자가 말한 ‘타고난 것’이나 불교인들이 말하는 ‘작용’으로 단정하였으며, 학자들이 깊이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계하였습니다. 제가 매번 신명, 허령, 지각 등의 개념을 말할 때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전전긍긍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또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D001] 중암 …… 뿐이니 : 사백 홍재구가 김평묵의 사위이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이다.[주-D002] 진현(眞玄) : 참먹으로서 품질이 아주 좋은 먹을 말한다.[주-D003] 태정(胎呈) : 동봉(同封)과 같은 말로, 편지 봉투에 같이 넣어 보내는 것을 말한다.[주-D004] 순 임금의 …… 글자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에게 천하를 양위할 때 남긴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의 열여섯 글자를 말한다.[주-D005] 작용이 성이다 :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홍주종(洪州宗)에서 내세운 말이다. ‘마음에는 변하지 않는 실체나 본성이 없으며, 마음의 작용이 바로 마음의 본성이다.’라는 말로서 초기 불교에서부터 면면하게 이어진 불교의 반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박해당 김정기 이상돈 (공역)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