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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오대산의(五대山) 선황(先皇) "아니, 아니야. 태의를 부르지 말게. 나는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걸 세. 저 두 사람...... 저 두사람의 시체는...... 움직이지 말게. 내 마 음이 무척 번거롭고 떠드는 것이 싫으니. 황제, 그대는...... 그대는 모두에게 빨리 돌아가라고 하게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매우 미약해서 아랫말이 윗말에 이어지지 를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강희는 무척 걱정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또 태후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 었다. 본래 그는 태감과 궁녀가 어떻게 하여 서로 싸우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하여 태후로 하여금 그토록 화를 내게 하였는가를 알아보고 싶 었지만 두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별도리가 없었다. 물론 이와 같은 큰 죄를 짓게 되었을 때는 그들 가족을 불러 따질 수도 있었으나 태후의 말을 듣고 보니 일을 더 벌이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ㅇ는게 분명하며, 시체마저도옮기지 않도록 하라고 하지 않는가. 이에 강희는 태후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녕궁에서 물러나오고 말았다. 위소보는 그야말로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셈이라 두 다리에 여전히 맥 이 빠져 손으로 담장을 짚어가며 걸음을 옮겨야 했다. 강희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이 생각했다. 오늘밤 자녕궁에서 일어난 일은 너무나 느닷없이 일어난 것이라 이 가 운데는 반드시 어떤 은밀한 사연이 있으리라고 느껴졌다. 그러나 태후의 의사는 분명히 자기에게 아랑곳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 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이 생각에 잠겨 한동안 걸음을 옮겨 놓은 이후에야 고개를 쳐들었다. 그제서야 위소보가 뒤에 따르는 것을 보고 는 물었다. "태후께서는 그대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는데 그대는 어째서 나를 따라 왔는가?" 위소보는 어쨌든 날이 밝기만 하면 자기는 궁에서 도망칠 형편이니 아 무렇게난 말해 두자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태후께서는 마음이 번거롭다고 말씀하시며 태감을 보기만 하면 화가 나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소신은 태후의 몸이 편찮으신 것 을 보고 역시 태후를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읍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건청궁 침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를 시중드는 뭇태감들을 물리친 이후 말했다. "소계자, 그대는 남아 있게." 위소보는 대답했다. "네." 강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서성거리며 왔다갔 다 하더니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그 태감과 궁녀는 어째서 서로 싸우다가 죽게 되었다고 보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거야 저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지요. 궁 안의 많은 궁녀들과 태감들 은 성질이 매우 나쁘답니다. 그리하여 걸핏하면 언쟁을 벌이게 되고 때 로는 몰래 싸움을 하기도 하죠. 다만 감히 태후나 황상에게 알리지 못 할 뿐이랍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가서 모두들에게 이 일을 다시 들먹이지 않도록 하라고 이르게. 태후께서 더 화가 나시지 않도록 하자는 것일세." 위소보는 말했다. "네." 강희는 말했다. "가 보게나." 위소보는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떠나면 영원히 너를 만나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강희를 한번 바라보았다. 강희 역시 그 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미소를 띄우더니 말했다. "이리 오게나." 위소보는 몸을 돌려 다가갔다. 강희는 침대 머리맡의 금빛 상자를 들고서 뚜껑을 열더니 두 조각의 간 식용 음식을 꺼내서는 웃으며 말했다. "반 나절 동안 쫓아다니느라고 지쳤을 것이고 또 배도 고플거야." 그러면서 그 간식용 음식을 그에게 디밀었다. 위소보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태후는 사람됨이 악랄하고 음흉할 뿐 아니라 침궁에 몰래 남자를 숨기 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언젠가는 황상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런데도 황상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지 않는가. 황제는 자기에 대해서 그야말로 친구나 형제처럼 여기고 있는데 자기가 만약 이 사실을 황제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가 황제가 태후에게 해침 을 받아 죽게 된다면 그 자신은 너무나 의리가 없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게 되자 눈앞에 강희의 전신이 뼈마디가 잘라져서 는 시체가 되어 가로 ㄴ혀져 있는 참상이 눈에 선하여 떠오르는 것이었 다. 그만 가슴이 쓰라려 그는 참을 수 없어 눈물을 왈칵 쏟았다. 강희는 미소했다. "왜 그러는가" 그리고 그는 손을 뻗쳐서 그의 어깻 죽지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따르고 싶은거지? 그거야 쉬운 노릇이 아닌가. 며칠 후 태후께서 몸이 낫게 되었을 때 내가 다시 태후에게 말씀을 드리지. 솔 직이 말해서 나 역시 그대와 떨어져 있기는 싫은거야." 위소보는 마음이 감동되어 생각했다. (도궁아는 내가 만약 사실을 털어놓으면 황제는 나를 죽여 입을 봉할 것이라고 했다. 영웅호걸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도 의리만은 지 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내 대장부가 죽었으면 죽었지 알고도 모르는 척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두 조각의 간식용 음식을 탁자 위에 놓고는 강희의 손을 잡고 떨 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현자, 다시 한번 그대를 소현자라고 불러도 되겠소?"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 되지. 내가 이미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없을 때 우리들은 옛날처 럼 지내도록 하자구. 그대는 또 나와 한번 무공시합을 가져 보겠다는 것이겠지? 자, 덤벼 보라구."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뒤집더니 되려 그의 두 손을 잡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무공시합은 서둘것이 없읍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밀대사를 나의 절친 한 친구인 소현자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결코 저의 주군인 만세야 (萬歲爺)에게 말씀을 드릴 수는 없읍니다. 황상께서는 들은 이후 나의 머리를 자르려고 할지 모르겠읍니다만 소현자는 나를 친구로 알고 있으 니, 어쩌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요." 강희는 사태가 심각한 것을 모르고 아직도 소년의 심정으로 제미있다고 만 느끼는 듯했다. 재빨리 위소보를 잡아 끌어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침대가에 걸터앉더니 말했다. "빨리 말해보게. 빨리 말해 봐." 위소보는 말했다. "지금 그대는 소현자이지 황제가 아니죠." 강희는 미소했다. "맞아, 나는 지금 그대의 절친한 친구인 소현자이지 황제가 아니야. 밤 낮없이 황제 노릇을 해야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없으니까 별 재미 가 없어." 위소보는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내 그대에게 들려 드리지요. 그대가 나의 머리를 자른다 하더라도 방법이 없습니다." 강희는 미소했다. "내가 어째서 그대를 죽인단 말인가? 절친한 친구가 어찌 절친한 친구 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위소보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나는 진짜 소계자가 아니며 태감도 아닙니다. 진짜 소계자는 이미 나 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강희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구?" 위소보는 자기의 출신내력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그가 어떻게 하다가 궁 안으로 사로잡혀 들어오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해대부의 두 눈을 멀게 했으며 또 어떻게 하여 소계자로 사칭하게 되었고 해대부 가 또 어떻게 무공을 가르치게 되었는가 등의 사정을 일일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강희는 거기까지 듣더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기랄, 너는 먼저 바지를 내리고 나에게 보여 줘." 위소보는 황제가 똑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큰 일에 대해서는 친히 눈 으로 확인을 하지 않으면 덮어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바지를 내렸다. 강희는 그가 정말 정신을 한 태감이 아닌 것을 보고는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원래 너는 태감이 아니었구나. 소태감, 소계자를 죽이는 것쯤은 대단 한 일이 못 된다. 그렇지만 이제 궁안에서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그 렇지 않을 때 나는 그대를 어전 시위 총관으로 삼든가 해야 한다. 다륭 이라는 이 녀석은 무공은 괜찮지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멍청하 기 이를 데 없거든." 위소보는 바지를 올려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말했다. "그 점은 감사합니다만 아마 안 될 것 같읍니다. 저는 태후와 관계있는 몇 가지의 큰 비밀을 알고 있읍니다." 강희는 말했다. "태후와 관계가 있다구? 그게 뭔데?" 그 말을 묻게 되었을 때 그는 속으로 은연중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짐작한 듯했다. 위소보는 입술을 깨물며 그날 밤 자녕궁에서 태후와 해대부가 주고받은 말을 이야기했다. 강희는 부황(父皇)순치황제가 붕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오대산 청량 사로 출가했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기뻐했다.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위소보의 두 손을 잡 고서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건...... 그건 정말이지? 나의 부와...... 부왕께서는 아직도 이세 상에 살아 계시는 것이 확실하지?"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 태후와 해대부 두 사람이 그와 같이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었 답니다." 강희는 몸을 일으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 참...... 그것 참 잘 되었다. 잘 되었어. 소계자, 날이 밝으면 우리들은 즉시 오대산으로 부황을 만나러 가자꾸나. 그리고 그 어른신 을 모시고 궁안으로 되돌아 오자꾸나." 강희는 천하에 군림하게 되고 모든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으나 한평생 가장 유일하게 유감으로 삼는 것은 부모가 일찌기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다. 때로 야밤에 꿈에서 깨어나 부모님을 생각핼 때 그만 참을 수 없어 눈 물을 흘리곤 했던 기억이 몇 번이었던가. 이때 위소보의 그와 같은 말 을 듣게 되자 여전히 반신반의한 생각이 드는 것을 면할 수 없었지만 그야말로 미칠 것 처럼 기뻤다. 위소보는 말했다. "아마도 태후께서는 좋아하지시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줄곧 그대를 속 이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 가운데는 중대한 연고가 있을 것입니 다." 강희는 말했다. "맞아, 그게 어떤 연고(緣故)일까?" 그는 부친이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뻐하는 마음이 가슴 가득 히 차게 되어 사태를 바로 보는 지각력이 약간 느슨해졌다고 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나 무수한 의문이 즉시 떠오르는 것을 금 치 못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궁중의 대사에 대해서는 저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읍니다. 다만 태 후와 해대부가 주고받은 말을 솔직이 들려 드리는 것이죠." 강희는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빨리 말하게. 빨리 말하게." 그러다가 위소보가 단경황후와 효강황후가 어떻게 하여 남에게 해침을 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대목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강희는 펄쩍 뛸듯이 놀 라며 부르짖었다. "그대는...... 그대는 효강황후가 남에게 해침을 당해 돌아가셨다는 말 인가?" 위소보는 그의 안색이 크게 변하고 두 눈이 둥그렇게 떠졌을 뿐만 아니 라 얼굴의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고 그만 놀람을 금할 수 없 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저는 모릅니다. 다만 해대부가 태후에게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강희는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말했지? 그대는...... 그대는 다시 한번 이야기 하게." 위소보는 기억력이 무척 좋았다. 다시 그날 밤 태후와 해대부가 주고받 은 말을 두 사람의 음성까지 흉내 내어서는 매우 그럴싸하게 옮겨 놓았 다. 강희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더니 중얼거렸다. "나의 친어머니가...... 나의 친어머니가 남의 해침을 받아 돌아가셨다 고?" 위소보는 말했다. "효강황후께서...... 바로...... 그대의 어머님이신가요"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계속하게. 한 마디도 빠뜨려서는 안 돼." 그리고 그는 속으로 쓰라림을 느낀 듯 눈물을 흘렸다. 위소보는 곧이어 흉수가 화골면장으로 먼저 단경황후의 아들 영친왕을 해쳐 죽인 이후 다시 단경황후와 정비를 해져 죽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순치황제가 출가를 한 이후에 태후는 다시 효강황후를 해쳐 죽 였는데 단경황후와 정비의 시체를 수렴한 염시군이 어떻게 하여 해대부 의 명을 받고 오대산으로 달려가 순치황제에게 보고를 하게 되었으며 순치황제가 어떻게 하여 해대부를 궁으로 되돌려 보내 철저한 조사를 하도록 했으며 그리고 태후와 해대부가 서로 싸우게 된 대목까지 이야 기했다. 위소보는 물론 해대부를 감히 자기가 죽였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저 그의 눈이 멀어서는 태후를 이기지 못해 태후에게 죽음을 당했다 고만 말했다. 강희는 정신을 가다듬더니 자세히 그날 밤 정경을 물었다. 그리고 그가 들은 말에 대해서 꼬치꼬치 되풀이 해서 캐물었다. 그런 연후에 위소보가 결코 그 일을 날조할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서자 고개를 쳐들고 생각해 보더니 물었다. "그대는 어째서 오늘에 이르러서야 나에게 이야기하지?" 위소보는 말했다. "이 일은 너무나 큰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겠읍니 까. 그러나 내일 저는 궁에서 도망칠 것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입니다. 그대 홀로 궁에서 매우 위험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더 속 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죠." 강희는 물었다. "그대는 왜 궁에서 떠나려고 하는가? 태후가 그대를 해칠까봐 두려워하 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내 그대에게 이야기하지만 오늘 밤 자녕궁에서 죽은 그 궁녀는 남자이 며 태후의 사형이기도 합니다." 태후궁의 궁녀가 남자라는 사실은 물론 불가사의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강희는 이날 밤 자기의 이미 죽은 부황이 돌아가시지 않았고 어머니 역 시 항상 단정하고 인자한 태후에게 몰래 해침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사 실을 들은 터라, 다시 남자가 한 궁녀로 가장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 을 때에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눈앞의 소태감만 하더라도 가짜가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물었다. "그대는 또 어떻게 알았지?" 위소보는 말했다. "그날 밤 제가 태후와 해대부가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된 이후 태후는 줄 곧 저를 죽여 입을 봉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태후가 어떻게 서동과 유연, 그리고 뭇태감들을 차례로 보 내 자기에게 해를 입히려고 했던가 하는 사정을 일일이 설명했다. 그리 고 자녕궁에서 한 남자와 태후가 서로 주고받는 말을 듣게 되었고 두 사람이 언쟁 끝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결과 궁녀로 가장했던 남 자는 태후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태후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사 실을 이야기했다. 물론 이 말은 곧이 곧대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위소보는 도궁아를 들먹이지도 않았고 자기가 서동과 유연을 죽였으며 사십 이 장경을 훔친 데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강희는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 사람이 태후의 사형이라고? 그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태후는 달리 또 다른 사람의 협박을 받고 있는 듯한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설 마.... 설마 그 사람은 태후의 침전에 가짜 궁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위소보는 그의 말이 태후의 간통사건까지 언급되는지라 감히 그말을 받 을 수 없어서 그저 고개만을 가로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입을 열 고 말했다. "저로서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다륭을 불러라." 위소보는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께서는 태후와 얼굴을 붉히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다륭으 로 하여금 늙은 갈보를 잡아 목을 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도대 체 이곳에서 빨리 빠져 나가야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남아서 그를 도와 야 하는 것인가?) 다륭은 그렇지 않아도 근심걱정이 태산 같았다. 궁 안에서 잇따라 사고 가 생겼으니 자기의 목 위에 달려 있는 머리통이 설사 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리 위의 모자나 모자 위의 정자(頂子)가 아무래도 온전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러한 때 황제의 부르심을 받게 되자 재빨리 건청궁으로 달려 들어왔 다. 강희는 분부했다. "자녕궁에는 별일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즉시 자녕궁 밖의 모든 시위 들을 철수시키도록 해라. 태후께서는 시위들이 집밖에 서 있는 기척을 듣고서 또 매우 번거롭다고 하셨다." 다륭은 황상의 얼굴이 퍽이나 이상야릇했으나 한 마디의 꾸지람의 말씀 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크게 기뻐서 재빨리 큰절을 하고는 나가 명을 전했다. 강희는 다시 마음속의 여러 가지 의문을 자세히 위소보에게 물었다. 한 참 후 뭇시위들이 이미 철수했으리라고 짐작이 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소계자, 나는 그대와 함께 오늘밤 자녕궁을 염탐해 보려고 한다." 위소보는 물었다. "친히 염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첫째로 사태가 너무 중대한지라 단지 소태감으로 가장한 한 소년의 말 만 믿고 자기를 키워 준 태후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수 없기 때문이었 다. 그리고 둘째로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염탐을 한다는 것은 무공을 익힌 사람으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회가 생기게 되었으니 어찌 가볍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강희 자신으로 말하면 황제였다. 황제이니 궁을 나가서 솜씨를 시험해 볼 수는 없었 다. 그러나 궁 안에서 한번쯤 야행인(夜行人)이 되어 보는 것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다만 자녕궁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을 모조리 철수시킨 이후에 자기가 다시 야행인이 되어 염탐을 하게 된다 는 것은 무림의 고수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태후께서는 이미 사형을 죽였으니 지금쯤은 편안히 주무시며 조섭을 하고 있을 터이니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강희는 말했다. "염탐을 해보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알아낼 수 있고 없고를 어찌 알 수 있겠나." 그리고 그는 즉시 가벼운 옷차림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발에는 엷 은 바닥의 간편한 신발로 바꾸어 신었다. 이 옷차림은 바로 과거 위소보와 무공을 겨루던 때의 옷차림이기도 했 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서 한 자루의 칼을 꺼내 허리에 차더니 건청 문의 옆문으로 걸어 나갔다. 뭇시위와 태감들은 정히 건청궁 밖에서 겹겹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 가 황제를 보고는 황망히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강희는 호통을 내 질렀다. "모두들 서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라." 이것은 황제의 성지이니 그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이백여 명이 나 되는 시위와 태감들은 그저 뻣뻣하게 그 자리에 서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강희는 위소보를 데리고 자녕궁 화원으로 갔다. 조용하니 아무도 없었 다. 강희는 태후의 침전 창문 아래에 살며시 다가가서는 귀를 기울이고 엿 들었다. 이때 태후는 연신 기침을 했다. 삽시간에 그는 오만가지 생각 이 다 떠올랐다. 슬프기도 하고 마음이 번거롭기도 했다. 태후의 기침 소리를 듣자 달려가 그녀를 얼싸안고 통곡을 하고 싶기도 했고 또한 그 녀의 목을 누르며 날카로운 어조로 다그쳐 도대체 부황(父皇)과 자기의 친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그는 일시 소계자가 말하는 것이 전부 거짓말이기를 바라기도 했고 또한 그가 말하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몸을 떨었으며 솜털을 모조리 고두세웠고 온몸에서는 그 야말로 찬바람이 엄습해 와 뼈마디가 에이는 것 같은 찬기운을 느껴야 했다. 태후의 방안에는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빛이 갑자기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하면서 창호지를 비추어 주고 있었다. 한참 후 궁녀의 음성이 들렸다. "태후, 다 기웠습니다." 태후는 음 하더니 말했다. "그 궁녀...... 궁녀의 시체를 푸대에...... 푸대에 담아라." 그 궁녀는 물었다. "네, 헌데 이 태감의 시체는 어떻게 하죠?" 태후는 노해 물었다. "나는 그저 너에게 그 궁녀만을 담으라고 했는데 너는...... 너는 또 무슨 태감을 상관하느냐?" 궁녀는 재빨리 말했다. "네." 그리고 곧이어 물건을 땅바닥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강희는 참을 수 없어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태 후의 창문에 있는 모든 빈틈은 모조리 기름찌꺼기로 가득 채워져 있어 서 조그만 틈바구니 하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는 과거 위소보로부터 강호 야행인들이 일을 처리하는 요령과 금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위소보가 모십팔에게 양주로부터 북겨 에 오게 되었을 때 들은 말을 전해 준 것이기도 했다. 이때 창문에 빈틈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손가락을 뻗쳐서는 침을 묻혀 창호지에 갖다 비볐다. 그리고 힘을 살짝 주자 창호지에는 조그만 구멍이 뚫리게 되었는데 조 금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그 구멍에 눈을 가져갔다. 그리고 보니 태후 침대 위엔 비단 모기 장이 나직이 드리워져 있었고 한 명의 나이 젊은 궁녀가 땅바닥에서 한 구의 시체를 커다란 푸대자루 안에 넣고 있었다. 그런데 시체가 입고 있는 것은 궁녀의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머리 위는 민숭민숭하여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 궁녀는 시체를 푸대자루 안에 넣더니 땅바닥의 가발을 들어 잠시 망 설이다가 역시 푸대자루에 넣고 나직이 말했다. "태후, 담...... 담았습니다." 태후는 말했다. "바깥의 시위들은 모두 철수했겠지? 나는 마치 그 누구의 소리를 들은 것 같구나." 궁녀는 문가로 가서 바깥을 살피더니 말했다. "사람이 모두 물러갔습니다." 태후는 말했다. "너는 그 푸대자루를 연꽃 물가로 가지고 가서 푸대자루 안에 다시 네 개의 커다란 돌멩이를 넣어서는 밧줄로...... 밧줄로...... 엣취...... 엣취...... 푸대자루를 잘 싸매고서는...... 그리고는...... 엣 취...... 엣취...... 푸대자루를 연못 안에 밀어넣어라." 그 궁녀는 말했다. "네." 그런데 그 음성이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 두려운 것 같았다. 태 후는 말했다. "푸대자루를 연못 속으로 밀어넣은 이후 흙을 좀더 긁어 모아서 그 위 에다 뿌려 다른 사람이 발견할 수 없도록 해라." 그 궁녀는 다시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푸대자루를 끌고서 방을 나와 화원으로 갔다.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소계자는 그 궁녀가 남자라고 했는데 십중팔구 맞는 말이로구나. 만약 커다란 사정이 없었다면 태후가 어찌하여 시체를 연못속에 빠뜨려 흔적 을 없애려고 하는가 말이다.) 그러다가 위소보가 자기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쳐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상대방의 손바닥에서 끈끈하고 찬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 후 첨벙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를 담은 푸대자루가 연못속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흙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시체를 담은 푸대자루가 연못속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그 궁녀는 궁전 안으로 돌아왔다. 위소보는 그녀의 음성을 벌써 알고 있었는데 바로 소궁녀 예초였다. 태후는 물었다. "모두 잘 처리했느냐?" 예초는 말했다. "네, 모두 처리했습니다." 태후는 말했다. "'이곳에 본래 두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다른 한 구는 어째서 보이지 않지?' 하고 내일 누가 묻게 되었을 때 너는 어떻게 대답하려느냐?" 예초는 말했다. "쇤네는.... 쇤네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태후는 말했다. "너는 여기에서 나를 시중들고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이냐?" 예초는 말했다. "네, 네." 태후는 노래 부르짖었다. "뭐가 네, 네냐?" 예초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쇤네는 그 죽은 궁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원래 그녀는 상처만 입었지 죽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천처히 걸어 나 갔습니다. 그때...... 그때 태후께서는 편안히 잠이 드시어서 쇤네는 감히 태후를 깨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궁녀가 자녕궁에서 걸어나 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습니 다." 태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원래 그랬었구나. 아미타불, 그녀가 죽지 않고 스스로 떠나다니 그것 참 잘되었구나." 강희와 위소보는 잠시 한동안을 기다렸다. 태후의 방에서는 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이미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살그머니 그곳을 떠나 건청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뭇시위들과 태감들은 여전히 뻣뻣이 선 채 꼼작하지 않고 있었다. 강희는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하거라." 그는 웃으면서 말했으나 그 웃음소리와 음성은 매우 메말라 있었다. 침궁으로 돌아와서 그는 위소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원래 태후...... 태후......" 위소보 역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강희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두 손을 들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두 명의 시위가 침전 입구로 다가왔다. 강희는 나직이 말했다. "한 가지 은밀한 일을 너희들에게 시키고자 한다. 그러니 절대 누설해 서는 안 된다. 자녕궁 화원의 연못 안에는 커다란 푸대자루가 있으니 너희 두 사람은 떠메고 오너라. 태후께서는 막 잠이 드셨는데 너희들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어서 태후를 깨우게 된다면 너희 자신 의 머리통을 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허리를 굽히며 대답하더니 그 자리에서 떠났다. 강희는 침대 위에 앉아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되풀이해서 생각하 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두 명의 시위는 물에 젖은 커다란 푸대자루를 떠메고서 침전문 밖에 이르렀다. 강희는 물었다. "태후를 혹시 깨우지 않았느냐?" 두 명의 시위는 말했다. "소신은 감히 깨우지 못했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고 들어 오너라." 두 명의 시위는 대답하더니 푸대를 들고 들어왔다. 강희는 말했다. "나가거라." 위소보는 두 명의 시위가 침전에서 물러가자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그리고는 푸대자루의 밧줄을 풀고서 시체를 끌어냈다. 시체의 얼굴에 난 수염은 모조리 깨끗하게 깍았으나 수염이 자랐던 자리는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복숭아뼈가 나와 있었고 가슴팍은 편편한 것이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이 사람의 몸은 모두 근육질이었으며 제법 울퉁불퉁했고 손가락의 뼈마 디도 툭툭 불거져 있어서 순전히 오랫 동안 무공을 연마한 모습임을 단 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보기에 이 사람이 궁녀로 가장하고 궁중에 잠복하게 된 것은 최근에 있 었던 일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모습으로는 남자 노릇하기에 도 너무나 추악한 편인데 어찌 궁녀로 가장하고서도 발견되지 않았겠는 가. 강희는 허리에 찬 칼을 뽑더니 그 사람의 바지를 찢었다. 그리고 잠시 살펴보더니 극도로 분노가 치미는 듯 잇따라 몇 번 칼질을 했다. 위소보는 말했다. "태후....." 강희는 노해 부르짖었다. "뭐가 태후냐. 그 계집은 부황을 몰아내고 나의 친어머니를 해쳐 죽게 만들었으며 궁정을 문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불의의 일을 많이 저질 렀다. 나는.... 나는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며 그 계집의 온 집안은 멸족하고 말 것이다." 위소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뜸 마음을 놓았다. (황상께서 그녀를 태후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늙은 갈보가 마구 저지 른 못된 짓을 내가 알게 된다 하더라도 강희는 나를 죽여 입을 봉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희는 칼을 들고 다시 시체를 몇 번이나 마구 찔렀으나 일시 끓어오르 는 화와 분노를 참을 길 없었다. 그리하여 시위를 불러서 태후를 압송 해 심문하고자 했으나 다시 생각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황께서 아직 돌아가시지 않고 오대산에서 출가하셨다는 일은 얼마나 큰 일인가? 만약 누설이 된다면 천하의 관민이 모조리 마음이 어지럽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절대 경솔하게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는 말했다. "소계자, 내일 아침 일찌기 나는 그대와 함께 오대산으로 가서 진상을 살펴야겠다." 위소보는 대답했다. "네." 그리고는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황제와 함께 동행을 하게 된다면 오대 산으로 한번 갔다오는 것이 북경성 안에 갇혀서 답답하게 세월을 보내 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강희는 위소보 보다 견식이 넓었고 생각하는 것이 치밀했다. 그 는 황제인 자기가 천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핀다고 나서게 된 다면 매우 거창한 일이 될 것이고 적어도 몇 개월간 단단히 준비를 해 야만이 연도의 백관들이 어가를 마중나오고 전송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는 등 크게 일을 치루어야지 결코 떠난다고 해서 훌쩍 떠날 수 없 는 입장임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기가 아직도 나이가 어리고 친히 정사를 돌본 지 얼마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조정의 왕공대신들이 완전히 그를 옹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태후가 자기가 서울을 나선 기회에 정권을 찬탈하여 자기를 해(害)하게 되고 따로이 군주를 세우게 된다면 그야말로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부황이 기실 이미 죽었거나 혹은 이 세상에 살아 있다 하더 라도 오대산에 계시지 않는다면 자기가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산위로 올라갔다가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후세에 웃음거리로 남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해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군. 나는 함부로 서울을 떠날 수 없다. 소계자, 그대가 나 대 신 갔다 오려무나." 위소보는 퍽이나 실망해서는 말했다. "저 혼자 갑니까?" 강희는 말했다. "그대 혼자 가는 것이다. 모든 사실을 알아보고 부황이 확실히 오대산 위에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내가 이 서울에서 다시 그 계집년을 상 대할 방법을 마련해 놓고서 우리 두 사람이 재차 함께 산위로 올라가 만전을 기하자는 것이다." 위소보는 황제가 태후를 상대하기로 결정했다면 자기가 오대산으로 가 서 알아본다는 것도 사양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제가 오대산으로 가 보지요." 강희는 말했다. "우리 대청나라의 규칙은 나를 따라간다면 모르되 태감은 서울에서 빠 져나가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행히 그대는 본래가 태감이 아 니었다. 소계자, 그대는 이후 태감 노릇을 하지 말고 역시 시위가 되도 록 해라. 하지만 궁 안이나 조정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대를 알고 있으 니 그대가 갑자기 태감 노릇을 하지 않게 된다면 모두들 매우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음, 그러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오배를 잡기 위해서 그대가 나의 명을 받들어 태감으로 가장했으나 이제 원흉을 제거했으니 언제까지나 가장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선포를 하 지. 소계자, 그런데 앞으로 그대는 책을 좀 읽어야겠다. 그래야 내가 그대를 큰 벼슬자리에 세울 수 있을 것이 아니냐." 위소보는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책을 들기만 하면 골치가 아픕니다. 제가 책을 조금 덜 볼 터이니 황상께서 저에게 봉하실 벼슬도 좀 적은 것으로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강희는 탁자 앞에 앉아서는 붓을 들어 부황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가 불효하여 지금에서야 부황이 아직도 세상에 살아계시다 는 것을 알게 되어 황송하기 그지없으며 또한 마음속으로 기쁘기 한이 없어, 이 길로 산위로 올라가 부황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와 만민을 다 시 다스리시도록 하고 싶은 심정을 표명했다. 그리고 아들인 자기로서도 부황의 얼굴을 다시 대하게 되어..... 그는 이와 같이 몇 줄을 썼으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편지가 만약에 다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큰일이 나지 않는가. 소계자가 만약에 다른 사람에게 사로잡히게 되거나 혹은 죽음 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편지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 다.) 그는 근 반 장이나 쓴 그 종이를 촛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붓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칙령 - 어전시위 부총관이며 황제께서 직접 내리셔서 황마괘(黃馬괘) 를 입게 된 위소보는 공무로 오대산 일대에 가게 되니 각 성의 문무관 원들은 그의 명령과 지휘를 받도록 할 것을 명하노라.' 다 쓰고 나자 그는 황제의 도장인 어보(御寶)를 찍어 위소보에게 내밀 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너에게 벼슬을 내렸다. 어떤 벼슬인지 보게나." 위소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보니 자기의 이름자 를 알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다섯 오 자와 한 일 자, 그리고 글월 문 자 이렇게 석 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 자와 보 자도 가운데 소 자가 있으니까 아래위로 합해서 겨 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지 만약에 따로 떼어 놓았다면 역시 알아볼 수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무슨 벼슬인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께서 친히 임명하신 것이니 조그만 벼슬은 아니겠지요?" 강희는 웃으면서 그 칙령을 읽었다. 위소보는 혀를 내밀며 말했다. "어전시위 부총관이라구요? 대단하군요. 거기다가 황제께서 내리시는 황마괘를 입다니요." 강희는 미소했다. "다륭은 총관이지만 황마괘를 입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이 일 을 잘 해결지어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다시 그대의 벼슬을 올려 주 겠다. 하지만 그대의 나이가 너무 어리니 벼슬이 너무 커도 그럴싸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니 우리 천천히 보기로 하자꾸나." 위소보는 말했다. "벼슬이 크고 작은 것은 저는 결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종 황상 과 얼굴을 맞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강희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느끼며 말했다. "그대는 이번 길을 갈때 모든 일에 있어서 조심을 하게나.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반드시 매우 은밀하게 처리해야 하네. 그리고 이 칙령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도록 하게. 이제 가 보게나." 위소보는 강희에게 작별을 고했다. 어느덧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 왔다. 그는 자기의 처소로 돌아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이는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대는 돌아왔군요." 위소보는 말했다. "만사는 대길이오. 우리는 이제 궁을 나가도록 합시다." 목검병은 흐릿하게 잠에 떨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말했다. "사저는 매우 걱정하고 있었어요. 혹시 그대가 위험한 일에 부딪히지 않았나 하고 두려워했다구요." 위소보는 웃으며 물었다. "그대는?" 목검병은 말했다. "저도 물론 걱정을 했죠. 별일은 없죠?" 위소보는 말했다. "별일없소. 별일없어." 이때 종소리가 울려퍼시면서 궁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되면 문무백관이 잇따라 들어와 조정의 정사를 돌보기 마련이었 다. 위소보는 탁자 위의 촛불에 불을 켜고는 두 사람의 옷차림에 어떤 빈틈이 있는가를 살폈다. 그러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들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생겼으니 얼굴에다가 흙을 좀 문질러 두 는 것이 좋겠소이다." 목검병은 약간 싫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방이가 손을 뻗쳐 땅바닥의 흙 먼지를 묻혀서는 얼굴에 바르는 것을 보자 역시 따라서 했다. 위소보는 태후의 침대 아래에서 훔쳐온 세 권의 경서마저 보따리에 싸서는 그 은 비녀를 꺼내서 방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바로 이 은비녀가 아니오?" 방이는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손을 뻗쳐 받으며 말했다. "그대가 커다란 위험을 무릅쓴 것은 알고보니 저를 위해 이 은비녀를 가지러간 것이었군요?" 그만 마음이 쓰라린듯 그녀는 눈가를 붉히며 머리를 저쪽으로 돌렸다. 위소보는 웃으면서 말했다. "별 위험도 없었소." 그러나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마음에 좋은 보답이 있는 것이다. 그 은비녀를 가 지러 가지 않았더라면 황마괘를 얻지 못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황궁의 뒷문격인 신무궁으로 나왔다. 이때는 아 직 날이 밝기 전이라 문을 지키던 시위들은 계공공이 두명의 소태감을 데리고 궁에서 나서는 것을 보자 그저 비위를 맞추기 바빴는지 한 마디 묻는 말도 없었다. 방이는 궁에서 십여 장쯤 걸어 나온 뒤 고개를 돌려 궁문 쪽을 바라보 았다. 그야말로 백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듯했으며 다시 이 세상에 태 어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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