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8월 21일(수) 이사야 20:1-6 찬송 455장
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5.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6.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개역 개정)
- 애굽과 구스의 수치 당함에 대한 예언 -
어제 말씀의 여호와 신앙에 의한 애굽의 회복 예언은
이사야 당시를 기점으로 할 때 실로 멀고 먼 시대에 성취될 일이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먼저 애굽에 대한 심판이 있어야 하는 바
이사야는 19:1-17에 이어 계속해서 이사야 당시로부터 머지않은 때에 있을,
앗수르에 의해 애굽 또는 구스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수치를 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1-4절은 이사야가 3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면서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어 수치를 당할 것을 예언한 내용을
5, 6절은 애굽과 구스의 멸망으로 그들을 의지하던
유다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예언이 선포되던 시기는 앗수르 왕 사르곤(B.C.722-705년)이
블레셋 성읍 아스돗을 정복하기 위해 그의 군대 장관 타르탄을 파견했던 B.C.713년이다.
이때 애굽은 구스인이 통치하는 제25왕조 시대였기 때문에
여기서 애굽은 구스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본 예언이 완전 성취된 것은 B.C.670년 앗수르 왕 에살핫돈에 의해서이다.
물론 그 이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B.C.701년 예루살렘 침공 직후
엘테케 대전투에서 애굽 장수 디르하가를 물리치고
크게 승리한 바도 있다.(왕하19:9; 사37:9)
한편 친앗수르 정책을 펴다가 오히려 큰 낭패를 보았던 아하스 왕 이후
히스기야는 강력한 반(反)앗수르 정책을 펴면서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애굽을 마음 든든한 우방으로 생각했었다.
이런 우방 애굽이 블레셋 성읍 아스돗과 같이
앗수르에게 비참한 패배를 당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 이외에 의지하는 세상 것들은
실로 허망할 뿐임을 살깊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자신도 지존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절대 보장해 줄 것으로 믿고 의지하는
허망한 세상 것들은 없는가를 돌아볼 일이다.(시49:6-7; 사2:22; 딤전6:17)
2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벗은 몸과 발로 행할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3절에 의하면 이사야는 무려 3년간이나
이와 같이 벗은 몸과 발로 행하였음을 말씀한다.
이 행위 예언은 장차 애굽이 앗수르에게 멸망하여
그 백성들이 벌거벗긴 채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앗수르로 인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앗수르에 패망할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러한 행위 예언을 하기 위하여,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감수해야 했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이사야는 평범한 일반 백성 출신의 선지자가 아니다.
그는 왕족이었다.
그러한 그가 무려 3년간이나 벌거벗은 몸으로 다녔다.
물론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것이 완전 알몸이 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포로라도 알몸으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여기서 벌거벗었다는 것은 속옷만 입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속옷만 입은 것은
완전히 벌거벗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수치스럽게 여겨졌다.
삼하10장을 보면 암몬 왕 나하스의 조문 사절로 보낸 다윗의 신하들이
나하스의 계승자 하눈에 의해 그 겉옷의 중등 볼기까지 잘려져 보내졌을 때
그들은 그 일을 더할 나위없는 수치로 생각하였다.(1-5절)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에는 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까지 발발하게 되었다.
그러니 겉옷과 신발까지 완전히 벗고 3년간이나 행한 이사야는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또 그 정신적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일반 평민이 그리해도 수치스러운 일이겠거늘 왕족이자 선지자인 사람이
그와같이 행하였으니 그 수치와 고통은 실로 대단하였을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예언 운운하더니 결국은 미쳤다고 하였을 것이다.
또는 귀신에 들렸다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제정신을 갖고는 그와 같이 행하기 어렵다.
즉, 이사야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사야의 위대함이 있다.
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적극적으로 그 부르심에 응하였을 뿐만 아니라(6:8)
하나님의 선지자요 종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수치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일까지도 마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이사야의 정신과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매달려
죄수와 같이 죽으시는 수치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셨다.
사도 바울도 이방인의 사도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수많은 수치와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죄수가 되기를 자처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 수치와 고통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그분의 신실하심을 굳건히 신뢰할 때 가능하며
또 그처럼 행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더 온전하게 이루어드릴 수 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