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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열두 음탕마녀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여전히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나는… 소대천의 독약을 먹었다네.” 그 말을 들은 비류신은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길 없어서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 악랄하고 교활한 인간이 다 있나… 당신은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오. 내가 당장 소대천을 쫓아가서 해독약을 가져 오겠소.” 그는 곧 몸을 돌려 눈 깜짝할 사이에 일 장 밖에까지 날아갔다. 청룡백호는 다급히 그를 쫓아가다 말고 황망히 외쳤다. “비류신, 잠깐 멈추게. 내 물어볼 일이 있네!” 비류신은 홱 돌아서서 큰 소리로 물었다. “노 선배님께서는 무슨 하교(下敎)가 있으십니까?” 청룡백호는 눈꺼풀 한 번 움직이지 않은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소대천은 나를 해칠 계획으로 독약을 먹였거늘 어찌 호락호락 해독약을 주겠는가? 그는 누구든지 일단 죽이려고 작정하면 기어이 뜻을 이루고 마는 독종이라네. 따라서 한 번 그에게 지목되면 도저히 그의 살수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나는 이미 극독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만성 독약을 복용했을 뿐 아니라,그는 독특한 점혈폐맥수법(點穴閉脈手法)을 사용하여 내 신체상의 요혈을 모두 찔러버렸기 때문에 설사 해독약을 구하여 극독을 해소시킨다 하여도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네. 그러니까 나는 먼동이 트기 전에 피를 토하며 처참한 꼴로 죽어가고 말 것이네. 아! 내가 죽는 것쯤은 별로 애석하지 않지만, 아직도 한 가지 밝혀내지 못한 사건이 있어서 죽어도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돌연 엉뚱한 질문을 했다. “비류신, 자네 부모는 모두 건존해 계신가?” 이렇게 물으면서 청룡백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비류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였다. 청룡백호의 짤막한 질문은 비류신의 괴로운 심정을 찌르는 예리한 칼날과 같았다. 비류신은 심장의 피가 온통 거꾸로 흐르는 듯 격노하며 파르르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의 부모님은 아주 처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자네 부친은 혹시… 총림와호(叢林臥虎) 비영웅(飛英雄)이 아닌가?” 비류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망히 캐물었다. “노 선배님은 어떻게 가친의 성함을 알고 계십니까?” 이때 청룡백호의 창백한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 너는 바로 내 조카였구나. 네가 웅 동생의 아들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돌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대성통곡을 하였다. 비류신은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캐물었다. “노 선배님은 가친과 어떤 관계 십니까? 옛 부터 친한 사이입니까?” “물론이다. 너의 아버지와 나는 이 세상에서 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의형제간이다.” 비류신은 짙은 의혹이 생겼으나 오십이 넘은 노인이 그처럼 격렬하게 대성통곡까지 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비류신은 어렸을 적부터 청룡백호라는 아저씨를 본 적 없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무림의 친구들과 왕래가 잦지 않은 줄 알기 때문에 좀처럼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청룡백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얘야… 이 세상에는 너의 부모에 대한 피맺힌 원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명예가 더럽혀지는 희생도 무릅쓰고 암암리에 온갖 난관을 겪어가며, 부평초처럼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심기를 발휘하고 음모와 계략을 구사하여 당사자들을 이간시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비류신은 격렬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다급히 외쳤다. “노 선배님은 바로 나의 아저씨… …” 청룡백호는 한바탕 통곡하고 나서 다소 마음이 가라앉는 듯 눈물을 거두고 비류신을 주시하더니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십팔 년이나 지났구나.… 십팔 년 동안이나 너의 부모들을 못 보았는데 오늘 이렇게 너를 대하고 보니 실로 감개무량하고, 마치 너의 부모를 만난 것 같구나.” 비류신은 비로소 그가 바로 자기 아버지의 의형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청룡 아저씨, 제가 알아 뵙지를 못하여 무례한 언동을 한 죄,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청룡백호는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얘야… 이 못된 아저씨를 탓하지나 않는다면 다행으로 여기겠다. 날더러 용서해 달라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어젯밤 내가 잔금섭혼신편을 빼앗으려 한 것은 너의 부모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한 계략이었다.” “아저씨… 저는 아저씨를 추호도 원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저씨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저는… 이 기쁨을 어떻게 주체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혈혈단신인 저에게 아저씨 같은 친인이 계시리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청룡백호도 크게 감격하여 천천히 고개를 쳐들더니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하늘의 보살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웅 동생에게 이렇듯 훌륭한 아들이 있을 줄이야… 음… 나는 이토록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기에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걸세. 이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네.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걸세.” 비류신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이 칼날같이 험한 세상에 친인이라고는 오로지 아저씨 한 분 뿐이거늘 아저씨마저 저를 두고 세상을 하직하신다면 저는 누굴 믿고 살란 말씀입니까?” 청룡백호는 서서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애달프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다… 너에게는 또 한 분 친인이 계시다. 무공이 매우 뛰어난… …” 비류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망히 말을 가로챘다. “아저씨,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에게는 어른 한 분이 또 계시다고 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어서 분명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분은 바로 너의 어머니시다. 너의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시지 않느냐?” 비류신은 격렬한 슬픔을 참지 못하여 울먹이면서 외쳤다. “… 아저씨, 어머니는… 벌써 자결을 하셨습니다.” 청룡백호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뭐라고, 너의 어머니가 자결을 했어?” 청룡백호는 비류신이 간악한 자의 흉계에 빠져 음약(淫藥)을 복용하여 모자지간에 불륜의 관계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비류신의 부친인 비영웅의 사인을 규명하기에만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비류신은 그처럼 엄청난 비밀을 혼자 간직한 채 고민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목놓아 하소연을 했다. “청 아저씨! 저는 세상을 살아갈 염치가 없습니다.… 저… 저는…” 청룡백호는 비류신이 무엇 때문에 그처럼 애통해하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매우 엄청난 사연이 숨어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어 간곡한 어조로 타일렀다. “얘야… 여하한 일이 있어도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비가(飛家)에서 대를 이을 사람은 오로지 너 혼자 뿐이다.” “아저씨, 아저씨… 제가 어떻게 감히 똑바로 하늘을 쳐다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 아… 그 몸서리나는 원한… 그렇게 악랄한 인간이 또 있을까요?” “애야… 진정하고 어서 자초지종을 차분히 얘기해 보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아저씨… …” 그는 격렬한 슬픔을 억제할 길 없어 계속 눈물을 펑펑 쏟으며 청룡백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비류신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 싫은 그 괴로운 사건의 자초지종을 모두 털어 놓았다.특히 자기 어머니가 불륜이라는 자책감 때문에 자결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아 대성통곡을 하면서 발버둥 쳤다. 그의 말을 듣고 난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짓고 비통한 음성으로 탄식을 늘어놓았다. “가련한 녀석, 가련한 녀석, 아! 그런 사연이 있었기에 그녀는 끝내 진상을 털어놓지 않았구나.… …” 비류신은 극렬한 슬픔을 애써 억제하고 침착하게 물었다. “아저씨는 조금 전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거짓말입니까?” 그 질문에 청룡백호는 섬뜩 놀랐다. ‘만약 자기 어머니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다면, 성격이 곧은 이애는 세상을 살아갈 체면이 없다하여 필시 자결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두 사람이 모두 죽는 결과가 될 것이다.’ 비류신은 청룡백호가 대답하지 않자 성급하게 다시 캐물었다. “아저씨, 왜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까?” 청룡백호는 의식적으로 어조를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얘야, 우선 내가 한 가지 묻겠다. 만약 너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시다면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류신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다그쳐 물었다. “어머님… 어머님이 정말 아직도 살아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청룡백호는 이렇게 반문하는 비류신의 표정을 보고 이미 짐작한 바 있어서 섬뜩 놀라며 대답하였다. “너의 어머니는 이미 별세하셨다.” 그러나 비류신은 청룡백호의 내심을 알아차린 터라 흐느껴 울면서 다그쳐 물었다. “아저씨,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어머님은 분명히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청룡백호는 안심이 되지 않아 부드럽게 타일렀다. “얘야, 다시 한 번 신신당부하지만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너는 결코 죽어선 안 된다.” 비류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을 억제하지 못하여 처절하게 외쳤다. “아저씨! 절더러 어떻게 살아가란 말씀입니까?” 청룡백호는 돌연 정색을 하고 꾸짖는 투로 말하였다. “얘야, 너의 어머니가 당부한 대로 너는 그 비통한 일을 잊어버리도록 노력하여라. 그런 사건을 획책한 자는 비가의 후손을 완전히 끊어버리기 위하여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거늘 경솔하게 네가 자결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만일 네가 죽는다면 구천지하에 계신 너의 부친은 결코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비류신은 애통한 울음을 그치고 간절하게 캐물었다. “아저씨, 지금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어머니는 왜 저를 찾아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얘야, 넌 그런 걸 물을 필요 없다. 나는 다만 너의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을 보았을 뿐인데, 그녀가 바로 너의 어머니인지 나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어쨌든 지금 너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자결하지 않겠노라고 내 앞에서 맹세해라.” 이렇게 말한 직후 그의 온몸은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문 채 극렬한 고통을 참느라고 애를 섰다. “아저씨, 몸이 불편하십니까?” 비류신은 깜작 놀라서 이렇게 물으며 그를 부축하여 땅위에 주저앉혔다. 청룡백호는 극렬한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억지로 웃어 보이며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무래도 나는 내일 아침까지도 살지 못할 것 같구나.” “아저씨, 소대천이 어떤 혈도를 찔렀는지 말씀해 보세요. 혹시 저에게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말씀해 보세요.” “아니다… 그의 수단이 너무도 악랄하여 구해내기란 쉽지 않음은 물론, 설사 혈도를 푼다 하여도 독약에 의한 중독을 해독할 수 없다.”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골똘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돌연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현재 내 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지신도 소대천을 제외하고 단 한 사람이 있다. 하나 나는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별로 한스러울 게 없다.” 비류신은 다급히 캐물었다. “아저씨, 그분이 누굽니까? 제가 아저씨를 모시고 가서 치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바로 흑룡강의 남의소녀이다.” “좋습니다. 아직 초경이니까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아저씨를 모시고 지금 즉시 그녀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필요 없다. 공연히 헛수고할 필요 없어. 그녀는 절대로 치료해주지 않을 것이다.” “왜 그녀가 치료해 주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십니까?” 청룡백호는 남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지 않을 비류신임을 알기 때문에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남의소녀가 순순히 응낙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비류신은 청룡백호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더욱더 안타까워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설사 그녀가 응낙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최선을 다하여 치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쨌든 아저씨는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저의 부탁을 들어줄 것입니다.” 비류신은 기구한 운명 때문에 양친 부모를 모두 잃고 외롭게 지내던 터에 우연히 친인을 만났으니,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그를 살려야 한다는 각오가 단단했다. 그도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항상 한탄해 왔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 났기에 어쩔 도리 없다는 체념도 가끔 해보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히 주어진 운명을 타개해 나가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났다. 지금 난관을 극복하고라도 기어이 청룡백호의 목숨을 살려야겠다는 그의 의지 또한 매우 굳은 것이었다. 우연히 만난 청룡백호의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자기가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잔금섭혼신편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이 그의 상처를 치료해야 된다고 결심을 굳혔다. 비류신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청룡백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아저씨를 업고 장원에 가서 그녀를 찾아 치료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청룡백호는 내심 크게 감동하였다. 그는 비류신이 매우 냉정한 인간이라고만 여겨 왔었다. 청룡백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얘야… 나는 아직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도 못했기에… 사실은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다만… …” “아저씨, 이제 그만 얘기하십시오.” 이때 청룡백호는 소대천이 남기고간 조그만 약병이 땅바닥 위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얘야, 너는 혹시 진작 중독된 게 아니냐?” 비류신은 섬뜩 놀랐으나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 “이 아저씨 앞에서 추호도 숨길 필요 없다. 사람이란 뭐니 뭐니 해도 자기 목숨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친 자학은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설사 이로운 일이 있더라도 부모의 원수를 갚기도 전에 스스로 죽으려 한다면 그 이상의 불효가 없느니라.” 비류신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나는 정말로 소대천의 극독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사실 그는 중독되었는지 여부조차 확실히 알 수 없어서 솔직히 고백하였다. “아저씨, 지금 저는 중독되었는지 안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룡백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단호히 말했다. “좋다… 우리는 함께 서둘러서 그 남의소녀를 찾아가 치료를 받도록 하자.” 비류신은 더 이상 꾸물대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서 청룡백호를 등에 업고 발길을 재촉하였다. 그들이 얼마 멀리 가기도 전, 돌연 일진의 요염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 웃음소리에는 일종의 음탕한 마력이 서려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비류신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서 두 눈을 들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살폈다. 일순 비류신의 시야에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붉은 망사로 지은 옷을 걸친 아름다운 여자 두 명의 요염한 자태가 들어왔다. “호호홋!” 등 뒤에서도 또 한 차례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비류신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려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호홋!”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앞뒤에서 뿐만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들려왔고, 처음 발견했던 두 여자와 똑같은 차림새의 여자들은 이미 비류신과 청룡백호의 주위를 완전히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의 넋을 빼앗아 갈듯 계속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달빛을 받아 더욱 요염해 보이는 미모의 여자 열두 명에게 포위되다시피 한 비류신과 청룡 백호는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들을 만난 기분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도저히 만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교태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들 앞에서 선정적인 충동을 느끼기 전, 비류신은 경각심부터 생겨 나직이 경악의 탄성을 질렀다. “열두 명의 음탕마녀… …” 그는 홍부용과 함께 지령보의 밀실에 들어갔을 때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달콤한 꿈에 취해있던 열두 나부(裸婦)를 목격했던 일을 상기하고 잔뜩 경계심을 가졌던 것이다. 청룡백호는 비류신의 입에서 열두 음탕마녀라는 외마디 탄성이 흘러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들을 주시하였다. 본래 인간의 욕정이란 가장 본능적인 생태이기 때문에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군침을 흘리듯 아름다운 여색 앞에서는 자연히 냉정한 이성을 잃기 마련이다. 청룡백호는 오십이 넘은 늙은 몸이지만 황홀한 마녀들의 교태 앞에서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동을 억제할 길 없었다. 그 열두 마녀들이 몸에 걸친 망사는 망사 중에서도 가장 엷은 것이었기 때문에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라고 하지만, 내공이 심후한 고수들은 모든 경물(景物)을 관찰하는 안력이 고명한 까닭에 대낮이나 다름없이 조금도 장애를 느끼지 않고 상대방을 면밀히 살필 수 있었다. 마치 노련한 조각가가 온갖 심혈을 기울여 옥으로 다듬어 놓은 듯한 여체들은 수양버들 가지처럼 가느다란 허리며 쭉 뻗은 매끈한 다리가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세상 남자들을 가장 매혹시키는 여자의 자태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신이 아니다. 보일 듯 말듯 절반쯤 가려진 풍만한 몸매는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비류신과 청룡백호의 목전에서 풍만한 육체를 과시한 채 요염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열두 음탕마녀들은 명목상 분명히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입지 않은 것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의 얇은 잠자리의 날개 같은 망사였기 때문에 알몸 그대로나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알몸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입으나마나한 망사 속옷을 걸침으로 해서 신비한 여체의 매력이 더욱 돋보였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녀들이 걸친 망사 속옷은 가볍게 펄럭이며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빼앗아갈 듯 짙은 향기를 풍겨 왔다. “호호호홋… …” 돌연 간드러지는 교소(嬌笑)가 다시 울려 퍼지더니 열두 명의 음탕마녀들은 비류신과 청룡백호를 향해 일제히 접근해 왔다. 손으로 만지면 은가루가 묻어날 듯 희고 고운 두 팔을 벌린 채 매끈한 다리를 움직여 사뿐사뿐 걸어오는 현란한 교태, 약간 홍조를 띤 두 볼에는 일종의 신비한 마력이 서려 있었다. 비류신은 그토록 요염한 아름다운 마녀들이 접근하자 마치 징그러운 독사를 만난 듯 경계심을 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물러가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는 지금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뒷걸음칠 수도 없어서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열두 마녀들은 비류신과 청룡백호를 향해 일 장 가까이 접근하였다. 비류신은 더 이상 꾸물대고 있을 수 없어서 매서운 눈초리로 마녀들을 쏘아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멈춰라!” 벽력같은 외마디 호통소리가 떨어지자 음탕마녀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일순 열두 음탕마녀들의 입언저리에 더욱 요염한 교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심장이 무쇠 같고 목석같은 사나이라도 요염한 교태 앞에서는 결코 냉정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비류신 역시 순간적으로 그런 충동에 사로잡혔으나 이미 그녀들의 정체를 파악한 후였다. 그는 절대로 마녀들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어금니를 악문 채 냉철한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숨이 막힐 듯한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흘렀다. 열두 음탕마녀들은 돌연 섬섬옥수를 움직이더니 망사 속옷의 치맛자락을 확 제쳤다. 일순 비류신은 재빨리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청룡백호도 넋을 잃은 듯 멍한 눈으로 마녀들을 바라보다 말고 따라서 눈을 감아 버렸다. 그녀들이 입은 망사 속옷은 비록 입으나마나 할 정도로 얇았지만, 하체 부분은 여러 겹으로 가렸기 때문에 형체만 보일 뿐 뚜렷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치맛자락을 제치는 바람에 여자로서 최후의 치부를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어찌 차마 눈 뜨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 비류신은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서 기겁을 하며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그들이 눈을 감고 있을 때, 열두 음탕마녀들은 일제히 괴상한 교성을 지르면서 매끄러운 팔을 뻗쳐 비류신의 몸을 휘감아 왔다. 청룡백호를 업고 있던 비류신은 마녀들이 일제히 덤벼들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고 외마디 함성을 지르며 잔금섭혼신편을 휘둘러 댔다. 그가 빙 돌아가면서 한바탕 채찍을 휘둘러대자 열두 마녀들은 저마다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물러났다. 그 신법이 어찌나 날렵하고 신속하던지 비류신과 청룡백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비류신이 잔금섭혼신편을 휘두르는 기세는 매우 신속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일류고수라도 쉽사리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눈 깜작할 사이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일제히 후퇴하였던 것이다. 일단 후퇴한 열두 음탕마녀들은 약간 놀란 기색을 나타냈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다시 애당초의 그 요염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매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어서 마녀들은 서서히 팔을 움직이더니 잠자리의 날개 같은 엷은 망사 속옷마저 벗어버리고 완전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노출시켰다. 그 선정적인 자태 앞에서 냉정한 이성을 잃지 않을 남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을 것이다. 비류신과 청룡백호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해도 상대방이 전격적으로 덤벼들 염려가 다분하여 그럴 수도 없는 처지이고, 그렇다고 해서 멀쩡히 눈을 뜨고 있자니 생리적인 본능 때문에 도저히 끝까지 자제할 수 없어서 그야말로 진퇴유곡이었다. 음탕마녀들은 여전히 교소를 지은 채 비류신과 청룡백호가 야수로 변하기만을 기다리는 듯하였다. 비류신은 아무래도 음탕마녀들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황망히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청룡백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불길처럼 치솟아 오르는 성욕을 억제하기 위하여 눈을 감아버린 것을 본 음탕마녀들은 또 맹렬한 기세로 비류신에게 덮쳐오면서 섬섬옥수로 그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열두 음탕마녀들의 동작은 이전같이 완만하지 않고 매우 신속하여 눈 깜작할 사이에 비류신의 면전에 이르렀다. 비류신은 외마디 노성을 지르며 몸을 도사리더니 그 역시 이전보다 훨씬 사납고 날카로운 기세로 신속하게 잔금섭혼신편을 쳐갔다. 쌩… 쌩… 눈부신 금광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일순 열두 음탕마녀들은 일제히 날렵한 동작으로 물러섰고, 어떻게 된 노릇인지 비류신과 청룡백호는 마치 썩은 고목처럼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알고 보니 음탕마녀들은 비류신과 청룡백호에게 접근하였을 때 일제히 뾰족한 손톱으로 그들의 피부를 찔렀고, 그로 인하여 그들 두 사나이는 정신이 혼미하여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호호호홋… …” 음탕마녀들은 입을 모아 요염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일제히 앞으로 걸어 나가 두 패로 나뉘어 비류신과 청룡백호를 번쩍 들어 안았다. 비류신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된 터라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던 잔금섭혼신편마저 그대로 떨어뜨린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음탕마녀 한 명이 비류신의 잔금섭혼신편을 주워들더니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열두 음탕마녀들은 비류신과 청룡백호를 데리고 어디론지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음탕마녀들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잔금섭혼신편 역시 마녀들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까스로 몽롱한 의식에서 깨어난 비류신은 돌연 아랫도리가 쭈뼛해짐을 느끼고 숨을 죽인 채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