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장. 유기합성에 있어서의 붕소와 인
1979년도 노벨화학상의 헌사에는 "유기합성의 중요한 시약인 붕소화합물 및 인화합물의 개 발에 대하여 각각 인디아나 주 웨스트 라피예트의 허버트 C. 브라운 교수와 하이델베라크대 학의 게오르그 비티히 교수에게 반반씩을 ..." 이와 같이 쓰여 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경 력을 가진 이 두사람은 과학계에 대한 기여도가 비슷하다해서 노벨상을 나누어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이 수상에 이르는 과정도 세렌디피티의 은혜를 나누어 받았다. 수소붕소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두 살 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젊은 시절 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보내면서 교육을 받았다. 1935년에 라이트 전문대학을 제1기생 으로 졸업하고, 1936년에 시카고대학의 2년 과정을 1년만에 수료하고 졸업했다. 세렌디피티 와 초름 조우했을 떄 브라운 자신은 전혀 몰랐었다. 졸업 축하로 그의 여자 친구(나중에 아 내가 됨)가 '붕소와 규소의 수소화물'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이 책은 허버트 브라운이 전문 가로서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가 이 책을 선 택한 것은 책방에 있는 화학책 중에서 가장 값이 쌌으며 아직 대공황의 와중이었기 때문이 기도 했다. 미래의 브라운 부인은 이 선물에 '나의 장래 노벨상 수상자에게'라고 적어 놓았 다고 한다. 브라운은 자신의 이름에 H.C.B.(원소기소인 수소, 탄소, 붕소)라는 이니셜이 선택 된 것은 부모님의 훌륭한 선견지명 때문이라 술회했다. 브라운은 붕소의 화학에 대한 강한 흥미를 발전시켜 시카고대학의 슐레징거 교수 밑에서 대학원 과정으로 이 분야를 연구하여 1938년에 학위를 받았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국방 총성의 원조를 받아 박사 연구원으로 슐레징거 교수 밑에서 붕소와 우라늄의 화합물 연구를 계속했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수소화붕소의 르튬과 나트륨의 새로운 실용적인 합성법을 개 발했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웨인주립대학의 교수로 4년간 제임한 후, 브라운은 무기화학 교수로서 퍼듀대학에 부임하였으며, 거기에서도 붕소의 화합물에 대한 흥미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수 소화붕소나트륨의 연구는 전쟁 중에 정부와의 계약하에 계속되었으며, 그 연구 결과는 기밀 이었기 때문에 전후에도 수년간 발표할 수가 없었다. 한편 수소화알루미늄리튬은 전후까지 연구가 계속되었으며, 이와 같은 제약은 받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 발표되자 화학계의 커다 란 관심을 끌게 되었다. 브라운은 수소화알루미늄리튬이 먼저 알려져 버렸기 때문에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소홀히 여 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950년대에 퍼듀대학에서 이 화합물의 환원력에 미치는 용매, 치환기, 금속 이온 등의 영향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계획에 착수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은 염 화알루미늄에 의해서 촉매되고(반응속도가 빨라진다) 안식향산에틸이라든가 스테아린산에틸 과 같은 '에스텔'이라고 알려져 있는 화합물군의 탄소-산소 이중결합을 환원시킨다(수소 가 첨가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 두 가지 에스텔은 모두 같은 양의 수소화붕소나트륨으로부터 정확하게 두 가지 수소원자 를 받는 데에 대하여 올레인산에틸에 관해서 같은 실험을 해보았더니 이 에스텔에 의해서 소비되는 수소화붕소나트륨의 양은 수소원자 두 개분보다 상당히 많았다. 브라운 교수와 함께 이 실험을 하고 있던 수버 라오 박사는 브라운 교수의 지도하에 1955 년 퍼듀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계속하여 공동연구자로서 유임했었다. 브라운이 올레 인산에틸의 이상한 거동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올레인산에틸의 실험재료 중의 불순물 탓이 라고 생각했었다. 브라운은 올레인산에틸의 실험재료를 주의깊게 정제하여 순수한 재료를 사용해서 다시 한번 실험 중의 불순물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실험을 주의깊게 반복해 보면 스테아린산에틸 은 2개 분량의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하는 데 대하여 올레인산에틸은 실제로는 3개의 분 량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브라운은 이것이 올레인산염 에틸분자와 스테아린산에틸 에 공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탄소-산소의 이중결합 이외의 부분이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았다. 올레인산에틸과 스테아린산에틸의 차이는 전자에 존재하는 탄소-탄소의 2중결합이 후자에는 없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이 결합이 여분의 수소 화붕소나트륨의 반응상대라고 인식했으나 그것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다음 단계는 탄소-탄소의 2중결합을 가지고 있는 분자와 가지고 있지 않는 분자(단순 알 켄)가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의 혼합물과 반응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하는 것이었 다. 실제로 반응이 일어났는데 이 반응은 그 이전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연 구자로서 정확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결론을 내려야 했다. 브라운은 이 반응이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에서 생긴 다이보레인(diborane)을 중간체로 함유하고 있으며, 이 다이보레인이 2중결합에 더해져서 유기수소화붕 소(organoborane)라는 생성물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알켄에 다이보레인을 첨가하는 것 은 임 알려져 있었다. 이 반응은 어떤 분자에 대한 수소와 붕소의 첨가를 포함함으로써 수 소붕소화(hydroboration)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로는 수소붕소화는 대단히 엄격한 실험 조건에서만, 더구나 비실용적인 정도의 진행이었다. 온화한 조건에서 좋은 수율로 수 소붕소화를 진행하는 데 성공한 것은 염화알루니늄의 촉매작용 때문일 것이라고 브라운은 생각했다. 브라운과 수버 라오는 에테르용액(그들이 사용한 에테르는 마취제가 되는 디에 칠 에테르가 아니고 휘발성이 없는 시판하는 용매의 일종이었다) 속에서 온화한 조건하에서 수소화붕소나트륨과 염화알루미늄에서 다이보레인을 생성하여 그것이 단순한 알켄이 더해지 는 것을 확인했다. 브라운은 이 새로운 실용적인 수소붕소화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이 성공은 염화 알루미늄의 촉매작용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므로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실험을 하기고 했다. 즉 에테르용액 중 다이보레인과 알켄에서 염화알루미늄을 빼고 반응시키는 실험이었다. 놀랍게도 수소붕소화는 염화알루미늄 없이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다. 그 후의 실험 결과 수소붕소화의 성공의 비밀은 우연히 사용했던 그 에테르 용매에 있 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브라운 교수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 수소붕소화를 신속, 간편하고 일반적인 유기붕소화 합물의 합성법으로 계속 발전시켰다. 일단 유기붕소화합물을 용이하게 합성할 수 있게 되자 이것들은 수많은 귀중한 유기화합물(그 대부분은 붕소를 이미 함유하고 있지는 않지만)의 합성중간체로서 매우 유용한 것이 되었다. 수소붕소화의 유용성은 브라운이 받은 노밸상에 의해서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운이 '거대한 미지의 대륙'이라고 하는 수소붕소화의 세계를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의해서 해택을 받은 세계의 화학자들의 서적, 총설, 연구 논문 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브라운의 발견은 복잡한 유기분자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는 쉽게 만들 수 없는 지극히 간단한 분자의 합성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어떤 약국에서든지 볼 수 있는 소독용 알콜 의 주성분인 이소프로필알콜(2-프로파놀)은 석유를 기초로한 출발원료인 프로필렌에서 간단 하게 또한 염가로 제조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성체인 노르멀프로필알콜(1-프로파놀)은 마르코프니코프의 법칙에 의한 원리 때문에 간편한 방법으로는 만들 수 없다. 그런데 브라 운의 수소붕소화법을 사용하면 이 노르멀 프로필알콜은 프로필렌으로부터 '역 마르코프니코 프'라는 단계를 포함한 방법에 의해서 만들 수 있으며, 이 방법은 현재 어떤 기초 유기화 학의 교과서에도 쓰여져 있다. (해설) 브라운은 수소화붕소나트륨에 관해서 또 하나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보고했다. 제2 차세계대전 중 미국 육군통신대는 야외에서의 실용적인 수소가스 발생원을 찾고 있었다. 슐 레징거와 브라운이 수소화붕소나트륨에서 수소가스를 만드는 방범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그들은 순수한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제조하는 방법을 개발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목 적의 실험 중에 브라운은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정제하는 방법으로 지극히 보통의 용매인 아 세톤에 의한 추출을 시도했다. 수소화붕소나트륨은 발열하면서 아세톤을 녹였는데 그 용액 을 조사해 보니 아세톤이 이소프로필알콜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해서 알데히드와 케톤(아세톤은 케톤의 일종이다)을 수소화붕소나트륨과 반응시켜서 알콜로 바꾸는 매우 유 용하고 일반적인 방법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자 수소화붕소나트륨을 야외에서 사용하여 수소를 발생시키 는 방법은 개발되지 않았으나 알데히드나 케톤과 같은 기능기관을 수소화붕소나트륨으로 환 원하는 반응의 발견은 종래 유기화학자가 이와 같은 목적에 사용해 온 방법에 혁명을 가져 왔으며, 이 화합물은 전쟁 중 연구 명령의 급선무하에 개발되어 나중에는 제약 공업의 주된 응용의 장을 차지하게 된 셈이다. 알켄 합성. 1979년도의 노벨상을 브라운과 나누어 수상한 게오르그 비티히는 1897년에 베를 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그는 과학과 음악 양쪽에 흥미를 가지고 재능을 발휘했다. 마 찬가지로 과학과 음악 사이에서 고민한 인물로서 러시아의 화학자이자 작곡자이기도 했던 알렉산더 보로딘이 유명하다. 보로딘은 많은 사람들에게 러시아 음악의 최초의 작곡가로 알 려져 있어서, 그가 화학과 의학의 선생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다. 비티히가 음악을 직 업으로 선택했다면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 주었을까는 알 수 없겠지만, 유기와 무 기화학 양 분야에 있어서 그의 귀중한 공헌 덕을 입은 다수의 화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의 주된 관심이 음악이 아니었다는 점에 감사해도 될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비티히의 세 번째 취미는 등산이었다. 다행히도 그것을 취미로 즐겼는데, 그의 등산과 화학연구가 귀하고 높은 영역의 추구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비티히의 연구자로서의 경력은 1916년 튀빙겐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 병역 으로 학업이 중단되었으나, 마르부르크대학에서 학부의 졸업연구를 마치고 이어서 192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2년까지 마르부르크에서 교편을 잡고 그 후 브라운슈바이크공업대학 으로 갔으며 이어서 프라이부르크대학 그리고 1944년에 튀빙겐대학의 정교수 겸 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학과장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1956년에 명 예교수가 되었으며, 1979년에는 브라운과 노벨상을 나누어 수상하였다. 1987년 8월, 비티히 는 90세로 사망했다. 그가 튀빙겐에 재직했었던 1953년에 노벨상으로의 첫걸음이 된 세렌디피티와 우연히 만났 다. 비티히와 그의 제자 게오르그 가이슬러는 인원자 한 개가 다른 원자 5개와 결합한 듯한 화합물 즉, 5개의 인 화합물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어떤 실험에서 그들은 유기 인 화합 물이 탄소-산소의 2중결합(알데히드와 케톤이라고 하는 중요한 종류의 화합물군에 특징적인 단위 구조)을 가진 화합물과 반응하여 탄소-산소의 2중결합이 탄소-탄소의 2중결함으로 치 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이슬러와 공저인 최초의 연구논문 중에서 비티히는 "이 유기 인 화합물인 벤조페논(탄소-산소의 2중결합을 갖는 케톤)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라고 썼 다. 비록 이것은 그의 연구 논문 중 작은 한 부분이고, 분명히 예상 밖의 결과였으나 비티히가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다른 연구생 올리히 셸코프와의 공저에 의한 두 번 째의 논문「올레핀 생성시약으로서의 트리페닐포스핀메틸렌」이 뒤이어 곧 발표된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분명하다. 이 논문 중에서는 우연히 발견된 이 반응이 온화한 조건으로 진 행되어 다른 방법으로는 만들기가 쉽지 않는 다수의 '올레핀' 합성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을 밝혔다. 비티히 반응ㅇ의 중요성은 어떤 분자 속의 특정한 장소에 탄소-탄소의 2중결 합을 가진 올레핀을 자유롭게 합성할 수 있다는 점에 있으며, 1953년 당시(현재도 마찬가지 지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비티히 반응의 또 하나의 장점은 온화한 반응조건에서도 고온이나 강력한 시약에 민감한 물질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곧, 뒤이어 다른 논문이 비티히의 연구소와 전세게의 화학연구실에서 연달아 발표되었다. 이들 연구보고는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으나, 최근의 참고도서에 의하면 이 반응에 관한 단행본이 2권, 총설이 25권 있다고 한다. 노벨상 이외에 이 발견의 중요성의 증거로서 는 비티히 반응에 의해서 비타민A가 톤 단위로 제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티히의 음악에 대한 애정은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국제심포지엄에서의 그의 강연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953년에 발견되고 후에 자기 이름을 붙이게 된 이 합성법의 역사 를 '슈타유딩거의 주제에 의한 변주'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자기가 우연히 접한 이 반응이 헤르만 슈타우딩거가 30년이나 전에 보고한 것과 비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슈타 우딩거의 주제'에 의한 그의 화학적 '변주'와 이를테면 브람스(Brahms)의 '파가니니'의 주 제에 대한 변주곡처럼 클레식 음악의 작곡가가 선배 작곡가의 작품에 입각하여 작곡하는 것 과 같은 유사성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티히의 유기 인 화합물과 사용한 실용적 합성법은 옛 방법의 개량이 아닌 혁명적 인 발견이며, 실제로 비티히는 그의 세렌디피적 발견 후에 문헌을 찾아볼 때까지 슈타우딩 거의 일을 전혀 몰랐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노벨상에 의해서 인정된 브라운과 비티히의 공헌의 유사성은 그들의 방법이 분자구조의 명 확한 유기화합물의 합성법으로써 탄소 이외의 원소를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 있 었다. 어떤 발견도 행운스러운 우연과 그 우연을 멋지고 훌륭하게 발전시킨 브라운과 비티 히의 충분히 준비된 마음에서 얻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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