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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와 40년
2026년 8월 30일 / 삼하 5장 1-10절
< 호크마 주석 / 1~4쪽 중간 >
삼하 5:1 /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 1, 2절은 이스라엘 온 지파가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장면이며, 3절은 그 결과 이스라엘을 대표한 장로들이 다윗을 공식적으로 왕으로 삼는 장면이다.
‘왕의 골육’ : 직역하면 '당신의 뼈 그리고 당신의 살'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상호 간의 혈육 관계를 나타내는 관용어이다(창 2:23 ; 29:14 ; 37:27 ; 삿 9:2).따라서 이는 결국 다윗에 대하여 백성들이 전적인 신뢰를 표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삼하 5:2 /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출입하게 한 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나오고 들어감’을 의미하나, 주로 이 용어는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출입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삼상 29:6 ; 왕상 3:7 ; 대하 23:7 ; 수 14:11). 따라서 여기서는 사울 휘하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잘 이끌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다윗의 지도력(삼상 18:6, 7)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주권자가 되리라’ : 여기서 '목자'란 백성들에 대한 봉사의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신정 왕국(神政 王國)의 왕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그분의 뜻대로 백성들을 인도하며 보호하고 먹일 의무가 있다. 반면 ‘주권자’란 백성들에 대하여 강한 지도력, 통치권을 행사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왕은 비상시에 군 최고의 통수권자(統帥權者)로서 백성을 효율적으로 관리, 적의 위협을 분쇄해야 할 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능률적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근거하여 국정(國政)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삼하 5:3 /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언약을 세우매 : 왕위 즉위식 이전에 행하는 공식적인 행사였던 이 언약은 양쪽의 합의한 언약이 아니라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다윗 왕이 ...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라는 본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본 구절의 주어는 ‘저희’가 아니고 ‘다윗’이다. 따라서 언약의 주체는 이스라엘 지파가 아니었고 다윗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이 언약이 쌍방적인 성격이 아니라 일방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삼상 13:14 ; 15:23, 26, 28)과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며 왕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언약은 다윗이나 기타 모든 백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결정하신 일방적인 언약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서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군주와 국민 간의 어떠한 이해관계를 따져 협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다윗을 왕으로 삼겠다고 맹세하므로, 그 나라에 큰 복을 베푸시겠다고 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의 내용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이 아니었고 그 반대로 백성들이 다윗 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이었다. 따라서 이 언약을 통해 본 신정 국가의 국가관은, 군주와 국민의 계약 관계를 국가 성립의 근본으로 본 근대의 국가관과는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신정 국가의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독재자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뜻할 뿐이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 다윗이 사무엘 당시(삼상 16:13), 그리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움 받을 당시(2:4)에 이어 마지막 세 번째로 기름 부음을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용을 기록한 역대상 11:3에는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라는 말이 덧붙여 있다. 이와같이 다윗의 세 번째의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다윗과 맺으신 그 언약(삼상 16:1)을 어김없이 이루신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 이로써 이제 유다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다시금 사울 통치 때와 마찬가지로 한 왕 아래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 아래에서 최초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었다는 의의를 지닌다.
삼하 5:4 / 다윗이 나이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다스렸으되
삼십세 :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다윗왕의 나이인 30세는 성경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공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였다. 즉, 이 나이는 레위인이 성전에서 봉사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으며(민 4:3 ; 대상 23:3),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나이였으며(창 41:46),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였다(눅 3:21-23). 이와 같은 사실은 적어도 성도는 이 나이가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암시적 메시지(message)를 제공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나이와 학력 등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의 사람을 적재 적시(適材 適時)에 들어 쓰신다(삼상 17:41-54). 그러나 인격적 성숙은 나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음도 사실이다.
삼하 5:5 /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헤브론에서 ... 예루살렘에서 ... 다스렸더라 :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시점에서 그의 통치 연대를 개괄(槪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성경 기자들이 왕조(王朝)의 역사를 기술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서술 양식 중 하나이다(왕상 15:9, 10 ; 16:29 ; 왕하 3:1 ; 12:1 ; 13:1 ; 14:2, 23; 15:27).
삼하 5:6 / 왕과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주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그들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예루살렘 : 다윗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천도(遷都)하려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지형적, 종교적인 이점들 때문이었다. ❶ 헤브론(Hebron)은 유다에서 볼 때는 중심 지역이었지만 온 이스라엘로 볼 때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Jerusalem)은 온 이스라엘을 치리하기에 아주 좋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❷ 예루살렘은 주위가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었고 성읍 자체가 고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天惠)의 방어 요새였다. ❸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에는 기혼 샘(the spring of Gihon)이 있어 충분한 수원(水源)을 확보하고 있었다. ❹ 예루살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였다(수 15:7-8 ; 18:6). 따라서 예루살렘은 두 지파 간의 심각한 갈등을 없애며, 더 나아가 온 나라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적합한 도읍지였다. ❺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의 중심부로서 중앙 성소를 짓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 건축의 최적소로 예루살렘을 지목하였다.
여부스 사람 : 여부스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 지역에 계속 정주(定住)해 왔던 족속이다(민 13:29 ; 수 15:8 ; 18:16).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일시적으로 패주하기도 했으나(수 10:23, 26) 완전히 정복당하지는 않았다. 그 후 사사 시대에 이르러 유다 및(삿 1:8) 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삿 1:21)도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하므로 그들은 점차 세력을 확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그들의 방어 기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 다윗에 의해서야 비로소 완전히 정복당하였다(7-9절).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 여부스 족속이 쳐들어오는 다윗에게 큰소리치는 장면이다. 지리적으로 여부스 족속이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독립한 나라로서 이처럼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까닭은 예루살렘의 지형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❶ 예루살렘은 당시 가나안을 남북으로 연결시켜주던 주요 도로인 '왕의 대로'(King's Highway, 민 20:17 ; 21:22 ; 신 2:27)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❷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언덕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❸ 예루살렘 주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는 기드론, 힌놈, 두로베온과 같은 깊은 골짜기가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천혜의 방어 기지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만만하게 다윗을 향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라고 큰소리를 쳤던 것이다.
삼하 5:7 /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시온 산성 : 시온은 ‘요새’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구릉(丘陵)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the city of David)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시온’은 광의적으로 예루살렘 전체를 묘사하는 말로 곧잘 사용되었는데(왕하 19:21 ; 사 3:16 ; 슥 2:10),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었다(사 24:23 ; 옵 1:17).
삼하 5:8 / 그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수구로 올라가서 : 다윗이 천혜의 요새 시온 산성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었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수구'는 ‘하수도’, ‘배수로’, ‘지하 통로’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곧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기혼 샘에서 남쪽 저수지로 흘러 들어온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수직으로 파놓은 갱도(坑道)를 의미한다. 이 갱도는 성안에서 성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예루살렘 성안으로 군사들이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다윗이 이곳을 통해 적진지에 들어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푸짐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하자 요압과 그 군사들이 이에 응하였던 것이다(대상 11:6).
한편 이 수갱(水坑)은 1886년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1967년 워렌(Charles Warren)이 재차 발견하여 현재 ‘워렌 수갱’이라 불리고 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이 수갱이 B.C 2,000년 경에 예루살렘 거민들에 의해 건설되었음도 밝혀내었다.
절뚝발이와 소경 : 여기서는 다윗이 당시 지형적인 이점을 의지하고 교만하게 말했던 여부스 사람들(6절)을 비꼬는 말이다. 즉 저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지만 이제 다윗의 공격 앞에 꼼짝 못 하고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절뚝발이와 소경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는 훗날 속담이 되어 '미운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여부스인들처럼 자기의 힘만 믿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사게 된다.
삼하 5:9 /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밀로 : ‘채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이 ‘밀로’(Millo)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체로 학자들은 이것이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성채(城砦)를 의미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다. 이 성채는 아마도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장 취약 지구인 북방의 방어를 위해 북동쪽이나 북서쪽 한쪽 모퉁이에 세워 놓았던 것일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이 밀로를 기점으로 하여 예루살렘에 성벽을 둘러쌓음으로써 외세 확장의 기틀과 여호와 종교를 위한 중앙 성소의 기초(대하 3:1)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솔로몬과 히스기야는 이 밀로를 증축 또는 수축한 바 있다(왕상 11:27 ; 대하 32:5).
삼하 5:10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 이에 해당하는 '야웨 엘로헤 체바오트'는 '천군 천사(天軍 天使)의 하나님 여호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거느리시는 수많은 하늘 군대인 천사들(욥 33:23 ; 느 9:6 ; 시 103:21 ; 마 10:27 ; 히 12:22)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하심의 결과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 군대를 인솔하시어 다윗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니(6-9, 17-25절) 그의 왕국이 안으로는 물론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될 정도로(11절) 강성해진 것이다.
< 설 교 >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지도자상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다윗을 통해 생각해 보자.
영국의 저널리스트로 역사를 연구하는 가트 린(Garth Lean)이 ‘하나님의 정치(God's Politician)’, 부제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투쟁(William Willberforce's Struggle)'이라는 책을 썼다. 가트 린은 1787년 27살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이 된 윌버포스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인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윌버포스는 당시 영국 수입의 1/3을 차지하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무려 150번이나 되는 의회 연설로 영국 사람들의 양심과 신앙에 호소했고, 죽기 삼 일 전인 56년 만에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복권 시스템을 폐지하기 위해 20년간 투쟁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병들었을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정부 예산으로 설립하게 했다. 문맹 퇴치 운동과 더불어 야만적인 형벌 시스템을 개조했고, 벌보다는 갱생 시스템을 통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돌아오게 했다. 상류사회 남자들이 서로 결투를 벌이는 제도를 폐지했으며, 호화 파티만 일삼던 상류층 부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여가를 사회봉사에 쏟도록 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 당시 영국인들에게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었지만,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영국의 양심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의 위치를 확인하며 삶의 현장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부터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사람 말이다. 조금만 은혜받으면 신학을 해서 무조건 목사로 헌신하려는 분위기에서나 아니면 반대로 세상과 쉽게 타협해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독특함과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만연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도자가 정말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정치와 경제와 사회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가 지닌 영향을 가지고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았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은 사울이었고, 사울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세상 기준을 따라가다 변질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다음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소년, 양들과 함께 묻혀 지내며 살던 목동 다윗을 발견해내고 그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꿈을 심게 하였다.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바로 사무엘과 같은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숨겨져 있어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가능성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내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심어주며, 그가 어느 삶의 영역으로 보내지던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도 역시 세상에 파송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구세주로 모심으로써 구체적으로 우리는 가정과 직장,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 땅의 역사와 우리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 하나님 나라는커녕 어둠의 나라로 어두워져 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처한 각각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며,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다윗의 삶을 통해서 우리 삶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4-5절 /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은 17세에 사무엘로부터 ‘너는 이 땅의 왕이 될 것이다’하는 기름부음을 받았다. 다윗이 궁에 들어갔을 때 사무엘을 통해 받은 비전과 꿈이 이뤄지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때부터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은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나서 하나님의 때를 정하신다. 하나님이 때를 정하실 때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❶ 세상에서 의지할 만한 분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분명한 믿음을 갖게 하시는 때이다. ❷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일을 맡기실 때 감당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고자 훈련하시는 목적이 있다.
17살에 부르심을 받아서 30살이 될 때까지 13년 동안 파란만장한 인생의 다윗이었다. 먼저 골리앗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그의 인생에 닥쳐오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배웠다. 그리고 막내였기 때문에 의존적이었을 지도 모르는 다윗은 자기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장인 사울 왕으로부터 집요하게 추적당하며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철저하게 배웠다. 사람은 신뢰할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과 사랑하는 아내 미갈과의 아픈 헤어짐을 경험했다. 인생 중에 함께 영원히 가고 싶은 사람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사의 모든 세파를 다윗은 경험했다. 그는 외로움과 고독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광야 동굴 속을 전전긍긍하며 죽음의 그림자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헤쳐 나갈 때에 문득 산을 바라보며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을 것이다. 고독과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시(詩)를 알지 못한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외로움이 묻어있으면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13년을 지냈기에 그는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지만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희미해져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훈련을 받고 난 사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환경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배웠던 것이 무엇일까? 그는 목동으로서 양 떼를 돌보면서 어떻게 하면 양을 보호하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양 떼를 인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고민과 의문을 가지고 양들을 인도해 갔다. 양을 풍성하게 먹였다. 그가 쫓겨 다니며 광야에 숨어다닐 때 자기를 따라다니던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 400여 명을 먹이고 굶기지 아니하는 훈련을 바로 양 떼를 돌보며 받게 되었다. 왕이 되었을 때도 자기에게 맡겨준 백성을 굶주리게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책임감에 대해 배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리고 왕으로서 그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지키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 기간에 훈련받았다. 13년이 지난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요셉은 30살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형제에게 팔려 가기도 하고, 모함받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총리대신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도 25년을 기다려야 했으며, 모세는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꿈을 품고 있으면서도 40년을 기다려야 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의 쓰라린 맛을 보게 하면서까지 기다리게 하실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신분을 얻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주어졌으면서도 왜 우리는 왕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환경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뢰가 있으며 그 신뢰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가 하나님의 시기와 때이다.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제사장 사무엘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나머지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스스로 드렸다.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가 되었다. 그는 기다리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다는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임의로 해석하여 아내 사라와 논의한 후에 사라의 몸종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날, 약속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존재로 남게 되었다. 이 두 아들의 분쟁이 지금까지 중동의 문제이다.
요셉이 3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의 내면은 훈련되었겠지만, 감옥에서 3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30살이 될 때까지 애굽의 관리로 등용될 수 없는 사회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가 감옥에 있을 동안 하나님은 요셉의 내면세계를 변화시키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애굽의 다른 많은 관리들의 생각에 히브리 족속의 노예라는 생각 대신 자기들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인식하도록 바꾸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이다.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힐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이 100사람이라면 번영의 시절에 잘 처신하는 사람은 1명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없을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간구한다. 그러나 얻고 나면 돌변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을 얻어서 누릴 줄은 알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사람은 적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쓰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가 평안할 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반드시 훈련하신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람이 없어서 이만큼 빈곤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받은 은혜대로 삶의 현장에서 섬기며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시대가 어두워져 가는 것이다.
현시대의 흐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스도인이 없어서 그럴까?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남다른 축복을 받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책임져야 한다. ‘하나님, 내가 축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축복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라고 하나님께 질문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하신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오십육 년간을 기다리면서 영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윌버포스를 인격적으로 또한 내면적으로 다듬어 가시면서 그로 하여금 영국의 다른 문제들도 기억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하지 못하겠다는 유혹도 받았다. 그러나 비전과 꿈을 심어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사람으로 살게 하셨다.
지금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분이 있는가?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고난과 괴로움이 많은가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라. 인위적으로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하나님의 때에 그 결과는 가장 큰 고통으로 나타날 것이다. 인내하며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프로그램 앞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라. 가만히 기다리는 기다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는 지금 또 다른 하나님의 때를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릴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어려운 때를 당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다윗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통일한 일에 쓰임 받았다.
2.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회개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인생은 오십까지는 아름다운 인생이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며 외로울 때 하나님께 의지하는 풍요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50세에 뜻하지 않은 죄를 범하게 된다. 이 일은 다윗의 운명을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다윗을 더욱 사랑하셨고, 그의 인생을 끝까지 붙들어 주셨고, 그의 지도력을 회복시켜주셨고, 그의 구원의 즐거움을 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셨고, 그의 삶을 영화롭게 하셨다. 무엇 때문에 그러셨을까? 바로 다윗의 회개하는 모습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정확하게 범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함으로 밧세바와의 아들인 솔로몬을 주셨고, 메시아가 오실 조상으로까지 삼으셨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실패와 실수까지도 사용하셨다. 하나님 역사에 동참하는 기회를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회개라고 하면 기독교 용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회개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병에 걸렸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다. 넘어졌다고 다 주저앉는 것은 아니다. 죽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병에 걸렸어도 회복하고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아는 사람은 살아난다.
인생이 실패와 낙심과 죄 가운데 주저앉은 것과 같이 있어도 다시 일어서는 방법이 회개이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생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다윗은 알았다.
시편 51편, 다윗의 회개를 보면서 어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다윗의 회개는 진실한 회개였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핑계하거나, 방어적이지 않았고 시인했다. 여기에서도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나이 들어 몸이 차가워졌을 때 신하들이 그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처녀를 그 방에 들였다. 그때 다윗은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했다. 철저하게 돌이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죄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므로 철저한 겸손과 진지함이 있었다. 나아가 철저하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으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회개의 바른 모습이다.
우리 중에 완벽한 리더가 누가 있을까? 이 자리에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영역을 본다면 온전히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완벽한 사람이 있을까?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죄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일까?
다윗은 바로 그 죄와 실패 속에서 주저앉지 않고 그 실패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갈 방법을 알았다. 바로 그것은 회개의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계속해서 쓰셨다.
누구나 넘어지게 되어 있다. 인생은 번영과 안락함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죄가 싹트고 어느 날 그 죄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죄가 드러나는 과정이다. 이 죄 때문에 다시금 일어서지 못하는 인생도 많다. 반면에 실패와 죄에서 회복된 인생도 많다.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을 용서하시는 분, 회복시키시는 분, 다시 쓰시는 분을 알았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었다.
인생이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시편 51편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다윗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주옥같은 시편 51편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회개하는 자의 회개하는 모습까지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 젊은 시절 미국 교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목회자요 설교자요 학자였던 고든 맥도날드가 있다. 그의 강의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잘했고, 설교를 듣는 사람은 곧 구세주를 영접하게 되는 능변가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인 잘못으로 교계에서도 잊혀가고 사람들에게도 잊혀갔다. 한때 장래가 촉망되었던 그는 돌아가야 할 자리를 알았다.
회개하고 나서 쓴 책이 ‘내면세계의 성장과 영적 성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미국의 신학생들이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면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서 제시되는 책이다. 자기의 연약함과 실패를 토대로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은 회복의 길을 나눠주고 있다. 사울과 다윗의 삶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업적 중심의 사울이 아니라 다윗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보다도 더 교활하고 나쁜 죄질의 사람이며 인격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이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 자기 양심으로 돌아갔다. 유다의 양심은 그를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돌아갈 길을 알지 못했다. 반면 베드로는 그가 죄를 범했을 때 돌아갈 길을 알았다. 주님 앞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통곡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다.
우리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실패와 좌절에서 죽을 수도 있고 일어날 수도 있다.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찾아라. 진심으로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인생을 다시 사용하시고 존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믿어라. 이런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3.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섬김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 말하는 이 제사장과 장로들을 보라. 이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사울과 함께 있으면서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 때문에 다윗은 13년 동안 쫓겨 다녀야 했고 아내를 빼앗겨야 했다. 우리에게 뼈아픈 아픔을 준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용서하지 못해 … ….’ 그러나 다윗은 이런 사람들을 품었다. 믿음의 여유에서 나오는 넉넉함이다. 그는 계속해서 섬기는 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사울의 손자이며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왕의 밥상에서 밥을 먹게 하였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애도하며 금식하기까지 섬기는 삶을 살았다.
❚ 밥 얀디안이라는 사람이 쓴 책 ‘다윗 섬기는 리더십’에서 시편 31편을 분석하면서 다윗의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❶ 다윗은 교만을 철저하게 배제한 사람이었다. 교만한 사람은 지나치게 질투심이 강하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도 않고 타인의 장점을 무시한다. 그에 비해 다윗은 겸손하게 남의 장점을 인정했다. 남에게 인정을 베풀었다. 부족한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해주며 책임은 자기가 지고,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 돌렸다. 그가 목마르다고 했을 때 병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물을 가지고 왔을 때 그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만큼 섬김에 대한 삶이었다.
❷ 다윗은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불안하면 신뢰를 깨뜨릴 수 있다. 바로 다윗은 자신의 정서적인 면을 다스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자기의 삶을 잘 조절했던 사람이다.
❸ 다윗은 조상들이 남긴 유산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찾던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로부터 배웠고 조상으로부터 배웠고 적으로부터도 배웠다. 이것이 바로 섬기는 자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좀 더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서기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쉽게 말해서 내 말이 잘 먹히는 그런 자리에 앉기를 원한다.
성경은 진정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섬기는 자리에 서라고 말한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사람의 삶의 자세는 바로 끝까지 섬기는 모습에 있다.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셨으며 죄인 된 인간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시어, 예수 그리스도로 이름 앞에 모든 권세를 무릎 꿇게 만드신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얼마나 살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우리를 가정에도 두셨고, 직장에도 두셨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준 것 가지고 누리며 잘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실까? 주님은 심판하시면서 반드시 물으신다고 하신다. 내게 주신 삶의 현장, 내게 주신 귀한 달란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56년을 기다리며 갈등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서기 위해 몸부림쳤던 윌버포스, 그가 이 땅을 떠나기 3일 전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은 그의 삶을 온전히 받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며 살아가자. 가정, 교회, 직장 그리고 민족과 나라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영적 지도자로 우뚝 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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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이 기다리면서 무엇을 했는지 시편에 잘 나타나 있다.
시 26:1-2 /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62:1-2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5절)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6-7절)
시 40:1, 5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다윗의 마음은 순수하지만 더욱 성숙하여져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훈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훈련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금은보화를 주면 그것으로 타락한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주면 그것으로 사울과 같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한 정치를 한다.
❚ 지도자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실력을 쌓아가야 한다. 문제 해결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악성이라 일컬어지는 베토벤 생가를 방문해 보면 누구나 놀라게 된다. 그가 치던 피아노 건반이 움푹 패어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피아노를 쳤기에 저렇게 건반이 패어있을까? 베토벤이 한 번은 귀가 먹은 상태에서 오케스트라 지휘하게 되었다. 지휘자가 참석을 못 하게 됐는데 그 곡을 다 외우고 있는 사람이 베토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꾸준한 노력이 사람을 정상의 자리에 있게 하고 또 그 자리를 지켜갈 수 있게 한다. 좋은 지도자는 이렇게 꾸준하게 노력하고 기능적 능력을 유지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수리아 아람으로 이스라엘의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보내신 사랑이며, 그 사랑은 둘째 수리아 군대장관 나아만의 자존심과 체면과 오만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주신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셋째 나아만을 문둥병에서 치료하시고 그를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고 바로 그곳에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되게 하신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할 것은 가나안의 개처럼 또는 아람의 나환자처럼 그저 주님 앞에 나아와서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접고 명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라고 하면 물에 들어가고 먼 곳으로 가라고 하면 갈 수 있는 순종과 믿음이다.
❚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은퇴하고 난 이후, 고향에 돌아가 소일하면서 조용히 살았다. 어느 날 트루먼 기념 도서관에 갔을 때, 학교 선생님과 함께 여러 아이가 몰려왔다. 그중 한 아이가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제 나이만 했을 적에 인기가 대단하셨고, 반장도 하셨겠지요?” 트루먼이 대답했다. “정반대야, 눈이 나빠 안경 없이는 맹인과 같았고, 재주도 없었고, 운동도 못했고, 겁쟁이란 말을 들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어요?”라고 아이가 물어보자 트루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애야 나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성경 말씀을 믿었단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계시단다.”
❚ 피겨 스케이팅으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스콧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분은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라는 책을 썼다. 생후 6개월 만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두 살 때부터 괴질에 걸려 병원을 전전했다. 1997년 고환암 3기 진단받았다. 2004년 뇌종양과 뇌하수체 암에 걸렸다. 2010년 또 뇌종양에 걸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갔다.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1984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81년부터 1984년까지 4회 연속 전미 선수권 대회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세 번이나 암을 이겨내고 현재 암 환자를 돕는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8가지 행복의 비결 중에 ‘전능한 코치를 믿으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그는 전능한 코치라고 한다. ‘성공의 비결은 내가 얼음판 위에서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나의 신앙심은 혼자라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경지까지 나를 항상 끌어주셨다.’
❚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신 웨슬리 목사님은 1790년 3월 2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목사님은 천국에 가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나는 내가 숨 쉬는 동안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라는 찬송가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이렇게 두 번을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이 말이 웨슬리 목사님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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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와 섭리 / 중국 내륙선교회를 설립한 허드슨 테일러 목사님은 1975년 봄 몇 군데 회의에 참석하고 런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러시아의 공작이 인사를 했다. “테일러 목사님, 어디 가십니까?”, “런던에 갑니다.”, “그러면 저하고 함께 앉으실까요?” 객차 속에 나란히 앉았다. 바브린스키 공작이 지갑을 꺼내더니 무엇인가를 테일러 목사님께 건네주었다. “이거 적은 돈이지만 중국 선교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테일러 목사님은 수표의 금액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거 오십 파운드 아니야. 무슨 실수라도 했겠지?’ 당시 50파운드는 지금 미화로 몇만 불의 큰 금액이었다. “혹시 저에게 5파운드를 주시려고 한 것은 아닙니까? 이건 50파운드군요.”, “천만에요 제가 도로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선교사님, 실상 저는 5파운드를 드리려고 한 것인데 50파운드라고 쓰고 말았군요. 이건 하나님의 뜻입니다.” 테일러 목사님이 선교본부에 와보니 기도회가 진행 중이었다. 중국 내륙선교회에 송금해야 하겠는데 49파운드 11실링이 부족했다. 이 부족액을 채우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바로 그 시간에 테일러 목사님이 호주머니에서 50파운드 수표를 꺼내 사무실 책상 위에다 가만히 올려놓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
❚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 존슨은 나무가 빽빽한 숲속으로 가족들과 하이킹을 나갔다가 5살 난 개구쟁이 아들 존을 잃어버렸다. 존슨과 그의 아내는 밤이 깊을 때까지 순찰 대원들과 함께 존을 열심히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더 이상의 수색 작업을 할 수가 없어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다시 찾기로 하고 철수했다. 존슨 가족들은 존의 안전을 기도하며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침 일찍, 존슨은 밤새 온 눈길을 푸석푸석 밟으며 어제 가족들이 식사했던 장소로 올라갔다. 존슨이 어제의 기억을 되살려, 아들 존이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나무 뒤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동굴에서 존이 하품하고 나오면서 외쳤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찾았다고요.’ 누가 누구를 찾았단 말인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백지장 한 장의 힘이나 될까?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찾아오신 것이다.
❚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소! / 하루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조셉 하이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되었다. 그때 하이든은 병이 들어 몹시도 힘든 상태였지만 힘을 내어서 그 연주회에 참석했다. 그날 공연은 대단히 훌륭했다. 연주가 끝났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어나서 일제히 지휘자와 악단을 향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지휘자는 뒤로 돌아서서 청중들의 박수에 답례하다가 문득 그곳에 있는 하이든을 보게 되었다. 지휘자는 박수를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하이든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바로 저분입니다. 저분이 이토록 훌륭한 곡을 만드신 장본인이십니다.” 그 말에 청중들은 하이든을 보면서 또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이든은 황급히 사람들의 박수를 중단시켰다. 그러더니 그는 조용히 자기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저분이 하신 것입니다. 제가 얻은 모든 영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시온(Zion) / 시온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을 부르던 말이다. 시온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사막’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렇게도 사모한 수도 예루살렘에 왜 하필 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사막의 노래’라고 불리는 이사야 35장이 해답을 준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사막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는 것’으로 노래하고 있다. 환난과 죽음의 사막에 물이 솟아서 생명의 샘이 되듯, 시온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막과 같이 황량한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로 바꾸는 비결은 무엇인가? 부패하고 어두워지는 사회를 밝게 바꾸는 비결이 누구에게 있는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시온의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그들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