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 姜民瞻
#高麗史94卷-列傳7-姜民瞻-001
○姜民瞻晉州晉康人穆宗朝登第
강민첨은 진주 진강(晉州-晉康) 사람이다. 목종(穆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顯宗時東女眞寇淸河迎日長鬐縣民瞻與文演李仁澤曹子奇爲都部署往督州郡兵擊走之
현종(顯宗) 때에 동여진(東女眞)이 청하(淸河), 영일(迎日), 장기현 등 여러 고을을 침공하였으므로 강민첨이 문연(文演), 이인택(李仁澤), 조자기(曹子奇) 등과 더불어 도부서(총지휘부)를 구성하고 각 주, 군으로 가서 그 고을들의 군대를 독려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拜內史舍人又以大將軍副姜邯贊大破契丹蕭遜寧於興化鎭遜寧引兵直趍京都民瞻追及於慈州來口山又大敗之
그 후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임명되고 다시 대장군으로서 강감찬(姜邯贊) 의 부 원수로 되어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의 군대를 흥화진(興化鎭)에서 크게 격파하자 소손녕이 부대를 거느리고 곧바로 수도로 진격하므로 강민첨이 그것을 추격하여 자주 내구산에서 또 여지없이 격파하였다.
擢鷹揚上將軍柱國轉右散騎常侍賜推誠致理翊戴功臣號. 明年知中樞事兵部尙書
그 공으로 응양 상장군(鷹揚上將)으로 선발되고 주국 훈위를 받았으며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전직되었으며 추성 치리 익대 공신 칭호(推誠致理翊戴功臣號)를 받았다. 이듬해에 지 중추사 병부상서로 있다가
十二年卒輟朝三日贈太子太傅. 民瞻起自書生射御非其所長然志氣剛果屢立戰功遂顯達後下敎錄功加其子旦祿資.
현종 12년(1010년)에 죽으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멈추고 태자 태부(太子太傅)를 추증하였다. 강민첨은 서생(書生) 출신이므로 비록 무술은 그의 능사가 아니었으나 의지가 굳고 과감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워 드디어 현달하였다. 후에 왕의 교시에 의하여 공을 기록하고 그의 아들 강단(旦)에게 녹과 직위를 올려 주었다.
文宗卽位制曰: "大中祥符十一年契丹 入兵部尙書知中樞院事姜民瞻奮擊大捷於盤嶺之野契丹奔北投戈委甲行路隘塞 斬萬級追念其功合行褒奬可圖形功臣閣以勸後來."
문종(文宗)이 즉위(卽位)하자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현종 9년(1018)에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병부상서 지 중추 원사(兵部尙書知中樞院事) 강민첨이 적군을 맹렬히 공격하여 반령(盤嶺)벌에서 대승전을 거두니 거란이 북으로 도망가면서 창과 갑옷을 버린 것이 길에 가득 찼으며 포로와 살해된 적병의 수가 만 명이나 되었다. 그의 공을 추억하면 표창함이 합당하니 공신각에 초상을 붙이어 후대들을 권장하게 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