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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기독교의 일반적인 상식 1.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의 유래
'기독교'의 '기독'(基督)은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의 중국어 음역인 '기리사독'(基利斯督)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도 라는 헬라어(그리스어)로 구세주(救世主)란 뜻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Messiah)라고 부르는데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예수교’라고도 부른다.
2. 기독교라는 명칭의 잘못된 사용
기독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라는 뜻이기 때문에 3위일체를 믿는 종교는 다 기독교가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범주(範疇) 안에는 천주교(로만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개신교(루터, 감리, 장로, 침례, 성결 등등의 여러 종파들)이 속하게 되므로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무식함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 된다.
3 기독교의 기본적 믿음(교리)
요점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1)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원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2) 그런데 자비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전지전능(全知全能)하므로- 타락한 인간의 원죄를 청산하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로서 예수를 이미 그 때 같이 창조를 한다.(예수와 같이 창조를 했다고도 하고...) * 예수와 같이 창조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 하나님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는 셈이니 논리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비논리적인 삼위일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고 무조건적으로 믿을 것을 강조하게 된다.(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확정) 3) 그래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구세주를 유대민족에게 보냈으나 유대민족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부활하게 되고 다시 구원하러 재림(再臨)을 하도록 한다.
4)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재림하러 오는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맞이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지옥으로 가게 된다. 5) 살아생전에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 이전에 죽은 사람은 지옥을 갈 수밖에 없으며 지리적 시간적 장애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다. 6)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죽은 사람도 재림 때에는 예수를 맞이하여야 하기 때문에 무덤에서 부활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부활하기 쉽게 성당 아래나 마당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인간조상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 원죄가 유전되며 그 죄를 청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야만 가능하므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천국)에 이르게 된다. 이다. Ⅱ 가톨릭(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 7 성사 출생, 성장, 굶주림, 병고, 혼인, 소명, 죽음 아래는 관심있는 분들(기독교인이거나 종교에 관심이 있는 분, 그리고 유럽이나 남미에 여행을 가려는 분은 꼭 보시길)이 읽어 보시길.... 사전과 본인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기독교 대강(大綱)을 알 수 있게 정리한 것임...
Ⅲ 기독교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에는 예수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형성과 전파,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들과 여러 교파로 나뉘어 있는 교회의 역사 등이 포함된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되어 시리아,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소아시아, 요르단, 이집트와 같은 근동 지방으로 퍼져나갔으며, 4세기 무렵에는 여러 국가의 국교로 자리 잡았다. 아르메니아의 아르사시드 왕조에서는 301년에, 캅카스 이베리아는 319년에, 악숨왕국은 325년에,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에는 테오도세우스 칙령을 반포하여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그 후 391년에 이교적 행위를 전면 금지, 392년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대항해 시대 이후 기독교는 유럽과 근동을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1. 초기 기독교(AD30~1054)
예수가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예수의 죽음 이후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동서 교회의 분열 이전인 11세기까지
(1) 초대(初代)교회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하는데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충격이었고 따라서 죽음 이후에 흩어졌다가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다시 모이게 된다. 초기 기독교는 특정한 조직이나, 교리, 건물 등이 없이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니면서 일치된 신학이 없고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서 선교를 하였다.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곧바로 예수가 재림을 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재림할 것이라고 약속함) 말씀이나 조직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하고 재림이 일어나지 않게 되자 말씀을 정리할 필요가 생기게 되면서 기록하게 되었는데, 이 기록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공관복음서들이고, 선교를 하면서 신도들에게 주고받은 서신들이 사도 행전이나 서신들인 다른 복음서들이다.
2. 고대 후기의 기독교
로마 제국의 공인(共認)과 국교(國敎)로 확정 초대 기독교는 로마에서 많은 박해를 당하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여 단성설(單性說)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나타시우수파(삼위일체)의 주장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기독교 기본 교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정해지게 되고 이 때부터 기독교는 로마제국으로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한다. 3.중세의 기독교 (1) 중세초기의 동서교회
1) 기독교의 서유럽 전파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다른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기독교도 같이 전파되었고, 오늘날의 영국은 600년경에 전파되었다.
2) 기독교의 북유럽 전파 820년대에서 830년대에 현재 독일에 있던 주교들의 선교활동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기원 후 1,000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3) 기독교의 동유럽 전파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으로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동방정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불라리아 제국과 대모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 때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의 내용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문자가 현재 소련에서 사용하고 있는 키릴 문자의 기원이다.
4) 수도원 개혁운동 이 후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세속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노동하며 묵상하는 수도원들이 유럽 곳곳에 들어서게 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305년에 안토니우스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서유럽에서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530년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만든 이후 많은 수도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은 봉건제에 편입되어 그 자체로 영지를 가진 권력 기구로 변해가게 되었는데, 각국의 국왕들은 수도원에 봉지를 하사하는 대신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행사하여 교회를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였다. 그러자 910년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을 만들고 이를 베네딕도회의 엄한 계율을 따르는 교황 직속의 수도원으로 삼고 수도원장을 국왕이 아닌 자율 선거에 의해 추대하면서 다른 수도원에서도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2) 동서 교회의 분열 로마 제국 말기 서쪽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쪽의 동방정교회는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원래는 로마의 대주교일 뿐이었던 교황들은 자신이 베드로의 후임으로서 모든 주교들에 대해 수좌(首座)로서의 권리를 갖는다고 천명하게 된다. 5세기 무렵 기독교는 대주교들이 이끄는 교구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는 주교들의 대표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이러한 주장에 당연히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교황 레오 1세는 이 땅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대표이기 때문에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로서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고 선언하고 자신의 관할 하에 있던 서유럽과 북유럽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직접 주교를 임명하였다. 동서 교회는 이때부터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분할되었고, 이전의 교황들이 명목상 명칭에 불과하였던 것과는 달리 레오 1세는 최초의 실질적인 교황이 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교회 조직과 지역으로 나뉘게 된 동서 교회는 점차 서로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고 기독교이 핵심교리인 3위일체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867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의 섭정이던 바르다스가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블의 대주교로 임명하였지만 로마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동서교회의 분열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 되었고 그 뒤로 동서 교회는 사실상 별개의 교회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1054년 동서 교회는 서로를 상호 파문하는데까지 관계가 악화 된다.
(3) 황제와 교황간의 권력투쟁 황제와 교황간의 권력투쟁은 서임(敍任)권 투쟁으로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성직임명권을 놓고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로마 가톨릭의 성직은 교황이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중세 초기부터 서유럽의 국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하여왔다. 주교와 수도원장은 대성당이나 수도원에 따르는 봉지(封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임과 동시에 군주의 봉신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그레고리오 개혁을 발표하고, 세속인의 교회 고위직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며 교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세속의 군주로부터 되찾아 올 것을 천명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의 개혁에 반대하는 의미로 자신의 가신을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격분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선제후(選帝侯)가 추대한 독일의 군주에 대해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축성(祝聖)하여 대관식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파문은 사실상 하인리히 4세의 지위에 대한 부정과 같은 의미가 된다. 신성로마제국 내의 선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라고 주장하며 하인리히에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1077년 겨울, 하인리히는 알프스의 카노사에서 회개의 뜻으로 거친 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리며 선처를 구하여 간신히 파문을 철회 받게 된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성직의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 확고하게 되었고,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반기를 든 선제후들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내전에 빠지게 된다.
1084년 하인리히 4세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대립(對立)교황을 세워 그로부터 황제권을 인정받은 뒤 로마를 점령하고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켜 설욕하게 되지만 카노사의 굴욕 이후 200여 년간 로마 가톨릭의 교황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로서 군림하여,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가 보름스 협약을 채결하여 서임권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국왕은 주교에게 지팡이와 반지를 수여하는 종교적 의식을 포기하는 대신 주교가 통치하는 지역에 대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홀을 하사하기로 한 것이다.
(4) 십자군 전쟁(1095~1456) 이슬람의 등장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커스(다멕섹)를 수도로 삼는 한편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고, 우마이야 왕조 이후에도 아바스 왕조와 파티마 왕조가 아랍 세계의 맹주로서 자리를 잡았다. 한편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로마 가톨릭은 동방정교회를 해체하여 흡수하고자 하였고, 당시 이슬람교가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취하며 성지 순례를 허용하고 있었음에도 성지 탈환을 명목으로 십자군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는 명분일 뿐 실재 십자군 전쟁은 참여 세력 간의 주도권 확보, 동방 교회에 대한 정복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다. 제4차 십자군은 목표였던 이집트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여 1204년 라틴(로마니아) 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십자군에 참여한 소년병사들을 이슬람 상인들에게 노예로 파는 등 파렴치한 짓들도 서슴치 않았다.
1095년부터 1456년까지 10차에 걸쳐 전쟁을 하여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으나 이슬람제국의 살라딘에게 패퇴를 당하면서 실패를 하게 되고 그 결과 기사계급들이 몰락을 하고 교권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유럽은 봉건주의 왕국이 성장하기 시작한다.
(5)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동방교회의 변화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 십자군 국가는 하나 둘 멸망하였으며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운 라틴 제국 역시 티노폴리스 인근에서만 영향력을 유지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14세기에 들어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고 위기를 느낀 동로마 제국은 로마 가톨릭과 서부 유럽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은 동방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개명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으면서 돌로마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메흐메트 2세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이스탄불에 동방정교회 신도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 신자도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고 동방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의 동방 교회와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분리된 러시아정교회로 분화가 된다. (6) 르네상스 시기의 기독교
1)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사건 교황청은 세속의 군주에 대해 교권이 우위를 갖는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칙령을 통해 서유럽 각국의 정치에 개입하였다.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로부터 성직자의 임명권이 교황에게 있음을 확인받은 일은 교황의 위상을 확인한 사건이었다.(카놋사의 굴욕사건) 십자군 전쟁 기간 중에 교황청은 점차 서유럽의 정치·외교에 깊숙하게 관여하게 되었고 교황이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파문하여 영주를 축출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교황의 권위는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황의 권위 역시 실추되기 시작하였다.
1294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1세가 전쟁을 하면서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발표하였고 두 군주는 모두 교황의 칙령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게 되었다. 필리프 4세는 1302년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를 열고 교황의 주장에 반대하여 자국의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였다.
프랑스의 삼부회 이후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고 필리프 4세는 1303년 자신의 부하들과 일부 신학자를 교황에게 보내 교황의 이단 혐의와 성직 매매에 대한 공의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였고, 보니파시오 8세가 이를 거절하자 구금하고 폭행하게 된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일로 사망하였고, 추기경들은 보르도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머무르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은 이후 1377년까지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아비뇽 교황청 시기를 맞게 되며 왕권이 교권에 우위에 놓이게 된다.
2) 서방 교회의 분열(3교황의 출현)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아비뇽 유수기가 종료되었다.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善終)하자 로마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이는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제네바 출신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대립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로마와 아비뇽 양 쪽에서 교황이 존재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1418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교회의 분열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1409년 피사 공의회를 열어 아비뇽과 로마 양쪽 교황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제3의 교황을 세웠으나, 아비뇽과 로마 양측이 모두 피사 공의회를 부정하여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어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하여 서방 교회의 분열은 끝나게 되는데 교황의 권위는 결국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3)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종교개혁의 시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고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민중에게 성서의 내용을 직접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화체설(化體說 성찬식 때 먹는 빵과 포도주가 순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학설)을 반대하고,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으며 후에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 프리하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4) 인문주의의 등장 초기 르네상스 시기 교황청은 사실상 독자적인 영토를 지닌 세속 국가이면서 동시에 다른 군주들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위였다. 게다가 실재 교회의 운영은 성직의 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교황이 자신의 사생아를 조카라 부르며 요직에 앉히는 네포티즘(족벌주의 또는 연고주의)이 횡횡하는 등 부패가 만연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기의 학자들은 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였는데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과 같은 저술을 통해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였고, 존 위클리프는 성서의 참 뜻을 대중이 알아야 한다고 여겨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게 된다. 로마 가톨릭은 인문주의 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탄압하였지만 이들의 사상은 큰 호응을 얻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4. 프로테스탄트의 대두(擡頭)
(1) 종교 개혁
16세기에 들어 로마 가톨릭이 신봉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여러 개신교들이 세워지는 종교 개혁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세운 이유는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랐지만, 로마 가톨릭이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1)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로 그는 평소 다섯 솔라(Five Solas)인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에 의지하여 오직 성경과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 수사들을 유럽 전역에 보냈고 기금의 대가로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사실상 조세나 다름없는 건축 기금에 대해 유럽의 군주들은 불쾌해 하고 있었고, 국왕의 통치력이 강하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면죄부 발부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탁발 수사들의 활동은 주로 독일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지역에서도 면죄부 발급에 따른 부작용이 심해지자 작센 공국의 프리드리히는 자국에서 면죄부 발부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도미니크 수도회의 탁발 수사 테첼은 작센의 국경인 비텐베르크에서 “동전통이 딸랑 거리는 순간 당신의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한다”며 면죄부를 팔았고 주민들은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에게 면죄부의 가치를 검증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에 루터는 1515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게재하여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고 이후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된다.
이에 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주님, 일어나소서 (Exsurge Domine)’라는 교황의 칙서를 통해 루터의 주장을 41개 항목으로 조목조목 반박하였고 신학자 요한 에크를 교황 대사로 임명하여 이 회칙을 독일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칙서 ‘로마 교황의 선언 (Decet Romanum Pontificem)’을 뒤이어 반포하여 루터를 공식적으로 파문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에게 이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였다.
파문을 당한 마르틴 루터는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당시 이미 정치, 경제적으로 로마 교황청에 불만이 가득했던 독일의 선제후들은 루터를 보호하였으며, 특히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Friedrich)는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루터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성(Wartburg Castle) 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조치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1521년부터 2년 동안 저술에 정진하여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일반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하여 발간하게 된다. 이로써 신도들이 성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에 다가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면죄부 매매는 결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부패와 위선이라 확신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1440년 독일 중부 마인쯔에서 구텐베르그가 개발한 금속활자가 그 동안 필사(筆寫)에 의존하던 성경책을 저가로 대량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봉건제 아래에 피지배 계급인 독일의 농민들은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을 억압에 대한 '정당한 저항' 이라는 이념적 기반으로 여기게 되었고 농민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현재 카톨릭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함이지 폭력혁명을 통한 기존교회의 전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농민 전쟁에 반대하였고, 오히려 영주들에게 농민들을 진압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루터의 이러한 행적은 자신의 주장이 당시 카톨릭과 교황청의 모순을 개선하려 하였던 성직자로서 활동이지 새로운 종파를 만들 의도는 없었지만, 루터 사후에 루터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들은 루터교 라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 종교의 탄생을 알리게 되고 종교개혁이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2) 츠빙글리 쥬리히의 츠빙글리에 의한 스위스 종교개혁은 1519년 1월 1일로 시작된다. 쯔빙글리는 성경을 영감(靈鑑)된 하나님의 말씀(the inspired word of God)으로 받아들이고, 믿는자 들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가르침을(taught by God through the Spirit) 받을 때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 츠빙글리는 복음서들(canonical gospels) 안에는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영감(靈鑑)론과 함께 인간적 요소가 있음 인정하였으며 이 사상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게 되고 칼뱅주의의 정통신학이 된다.
3) 장 칼뱅 장 칼뱅은 프랑스 피카르디 출신의 신학자이자 라틴어 교사로 쯔빙글리 이론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1533년 새로운 방식의 신앙체계를 확립하고 사실상 로마 가톨릭 신도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1536년 3월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고 이중예정설(하나님이 구원으로 선택할 자와 버려질 자는 이미 예정되어진다는 주장)과 같은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 1536년 5월 무렵 제네바를 들렸던 칼뱅은 파렐의 권유로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였으며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칼뱅이 제네바에서 활동을 시작한 1530년대 말 무렵, 서유럽과 북유럽에는 이미 루터가 불씨를 당긴 종교 개혁이 한창인 시기로 제네바 역시 다양한 새로운 신학 사조가 들어왔고 칼뱅은 이들과 논전(論戰)을 벌여야 하였다. 칼뱅은 재세례파(유아세례는 무효이므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등과 논전을 벌이면서 제네바 교회를 칼뱅주의를 따르는 개혁교회로 이끌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보다 다양한 교회를 인정하는 조례를 재정하였고 이에 반대하던 칼뱅은 1538년 추방당하게 된다. 그 후 1541년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의 교회 제도 개혁안을 모두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칼뱅을 다시 초빙하였고 이후 칼뱅은 죽을 때까지 제네바 개혁 교회의 목사이자 칼뱅주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541년 이후 칼뱅이 활동한 시기 제네바는 일종의 신정일치(神政一致) 사회였고, 교회법을 어긴 자는 처벌을 받았다. 삼위일체를 부정하여 화형을 당하거나 간음죄를 이유로도 사형을 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오류:De Trinitatis erroribus libri vii’라는 책을 출간한 스페인 출신의 인문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차이를 토론을 통하지도 않고 화형에 처허기도 했다. 먼 훗날인 1903년 세르베투스가 처형당한 자리에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속죄비를 세웠다고 한다.
칼뱅주의는 루터교와 함께 종교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 공동체나 교파로는 위그노, 청교도, 장로교 등이 있으며 그 후 무수한 종파로 분화를 하게 된다.
4) 잉글랜드의 수장령(首長令)과 성공회(聖公會)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하게 되는데 이는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서임법과 함께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 한 것이었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잉글랜드 왕국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헨리 8세는 형수가 되어야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아내가 된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혼을 원했고 교황청과 오랫동안 이에 대해 협상을 벌였다. 골육상잔(骨肉相殘)이었던 장미 전쟁 끝에 세워진 튜더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아들을 원했고 로마 가톨릭은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했기에 당시의 파혼 관례대로 로마 교황청에 결혼 무효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스페인의 국왕이기도 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혼 불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결심하고 수장령을 발표하면서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게 된다.
수장령 이후 잉글랜드 왕국과 그 뒤를 이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성공회를 국교로 삼았고 국교도가 아닌 사람은 공직에 진출할 수 없도록 차별하였다. 페널 법이라 불린 이 차별 제도는 1661년 협력법이 통과된 이후 영국 내의 로마 가톨릭과 청교도를 비롯한 기타 개신교 교파를 억압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 때 평소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유토비아’의 저자로 알려진 인문학자인 토머스 모어는 ‘본인은 왕의 충신이지만 그 전에 하느님의 종’이라며 헨리 8세의 수장령에 반대하여 대법관 직을 사퇴하였고 결국에는 1535년 7월 6일 처형되었다.
(2) 반(反)종교 개혁 종교 개혁의 열풍이 거세어지자 로마 가톨릭 내에서도 이에 대항하여 그간의 타락에 대한 자성과 교회 혁신을 주장하는 요청이 커졌다. 반종교 개혁으로 불리는 종교 개혁에 맞선 로마 가톨릭의 대응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개혁과 여러 청렴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트리엔트(오늘날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 교황 바오로 3세 주관으로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로마 교회의 교의(敎義)적·도덕적·행정적 개혁을 논의하여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로마 가톨릭 신앙의 기초로 재확인하고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선언하게 된다. 그리하여 성서만을 따른다는 개신교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면서 교회가 성서 해석의 유일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하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 행위에서 생겨난다는 것과, 개신교가 부정하는 고해성사를 포함한 7개의 성사의 당위성, 성찬의 체화설(transubstantiation)의 교리를 고수하였으며, 교회를 개혁하여 교직과 세속 직위의 겸임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개신교와의 차이가 분명한 현재의 성서 목록을 정하하면서(구약 46권. 개신교는 구약이 39권), 마르틴 루터가 구약성경 가운데 15편을 외경으로 구분하여 정경에서 제외한 것에 대해 로마 가톨릭은 루터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표방하였다.
이러한 결정에서 보이듯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 개혁에 대한 반격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기존의 교회법을 옹호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파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교회 내부의 문제점들에 대한 개선을 강구하여 그 동한 비난의 원인이 되었던 타락한 성직자를 징계하기로 하는 조치도 함께 취하였다. (3) 종교 전쟁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극심한 대립은 결국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종교 개혁 이후 유럽 내에서는 종교 갈등에 따른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끊이지 않게 되었으며 결국은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위그노 전쟁 칼뱅주의는 소명(召命)설로 현세의 직업이 하느님이 주신 것이며 그를 통해 얻는 재화가 하느님의 은총이라 하였고, 이는 프랑스 내에서 신장하고 있던 상공인 등 부르주아에게 그야말로 “복음” 이었다. 그리하여 종교개혁과 함께 위그노라 불렸던 프랑스 내 칼뱅주의 개신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게 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로마 가톨릭 이외의 믿음을 갖는 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고 로마 가톨릭 측은 공공연히 위그노의 생명을 위협하였으며 가톨릭에 의해 벌어진 바시 학살과 같은 몇 차례의 학살이 있고나서 양측은 결국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1562년부터 1563까지 벌어진 전쟁은 프랑스 왕가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당시 위그노 신도이자 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된 나바라 왕국(스페인)의 군주 앙리가 결혼하기로 하여 휴전하였으나, 결혼식 전날 로마 가톨릭 측이 결혼 축하를 위해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를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벌어지면서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앙리 4세는 휴전과 평화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위그노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전쟁을 끝내게 된다.
2) 30년 전쟁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있었던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종교 전쟁이자, 신성 로마 제국을 이루는 여러 선제후들과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교황청 등의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성격의 국제전이기도 하였다. 30년 전쟁의 결과 독일 지역은 초토화 되면서 독일은 제후국으로 분할되고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은 사양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나고 각 제후와 국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 내에서 로마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개혁교회 가운데 하나를 국가의 종교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이 더 이상 국가 내의 종교에 대해 참견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내에서 발생한 이 30년 전쟁은 유럽의 전쟁뿐만 아니라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기장 많은 전쟁이었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신을 믿는 형식과 내용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 이렇게 엄청난 전쟁과 죽음이라는 비극적 교훈을 주게 되었다. (4) 제국주의와 기독교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유럽인들이 선박을 이용하여 세계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하게 되는 대항해 시대가 오면서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였던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만들어 막대한 은을 자국으로 가져왔고,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국가도 제국주의 정책으로 해외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이 때 로마 가톨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토 분쟁 조짐이 보이자 토르데시야스 조약(서경 43.37을 기준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하기로 한 조약으로 남미에서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이유이다)을 통해서 중재하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있었고 종교 개혁이후에도 계속하여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였다. 로마 가톨릭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아메리카 식민지 지역에 보내 유럽에서 열세에 놓인 자신의 입지를 만회하고자 하였고 해당 국가들의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직접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곳에는 천주교가 내리게 되었고 거의 천주교가 국교가 되다 시피 하였으며 남미 대부분의 나라들과 필리핀 등이 천주교가 국교가 된 배경이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끝난 뒤 유럽의 각국은 전 세계를 자국의 식민지로 삼는 식민지 경쟁을 벌이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 뿐만 아니라 개신교 역시 교파를 막론하고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하면서 식민지와 선교를 병행하게 되었다. 남아메리카와 달리 북아메리카는 처음부터 개신교도들이 이민을 하고 정착하여 만든 나라이므로 개신교가 정착을 하게 되었다. 1) 기독교의 아시아 선교 예수회 소속의 사제 마테오 리치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명나라에 대한 포교를 시작하면서 아시아에 본격적인 포교가 시작되었다. 1601년 베이징에 도착하여 만력제를 만나 선무문(宣武門) 안에 천주당을 세워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1605년 완공하였다. ‘천주실의’등을 저술하여 기독교를 중국 대륙에 전파하였고,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조선, 일본 등지에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5. 계몽주의 시기 종교 개혁과 맞물린 오랜 전쟁 끝에 유럽의 각국은 민족 국가의 성격이 강한 중앙집권제 국가로 변화하게 된다. 한편 사회 역시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부르주아가 주요한 계급으로 부상하고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철학과 과학, 경제학과 같은 학문 역시 근대적인 체계를 갖추어 이성과 과학적 방법과 같은 합리적 과정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계몽주의라 불리는 이 시기의 이러한 움직임은 기독교의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1) 과학 혁명과 기독교
12세기에 그려지고 14세기에 필사된 둥근 지구를 설명하는 삽화. 중세인들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에서는 학문의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앞세운 과학 혁명이 있었다. 과학 혁명은 기적(奇蹟)이나 초자연적 현상을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그 동안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인식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된다.
중세인들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교회 역시 지구가 평탄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성서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다 과학을 배제 한 것은 아니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기반을 이루던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과 대학은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전수되는 중요한 장소였다. 19세기에 유전법칙을 발견한 그레고어 멘델 역시 로마 가톨릭의 수사(修士)였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후대에 지어진 이야기일 뿐이고, 갈릴레이가 당시 교회에 의해 지지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을 부정하고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교회로부터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다는 이야기 역시 후대에 과장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학 혁명 이후 과학의 새로운 발견은 종종 기독교와 충돌을 일으켰는데 교회가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여러 과학적 발견에 대해 부정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발간되자 개신교는 즉각 반발하였으며, 로마 가톨릭도 1616년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 올렸다가 1758년 해제하였다.
과학 혁명 이후 과학과 기독교가 가장 격렬하였던 충돌 사례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이후에 일어난 진화에 대한 논쟁이다. 지금도 가장 격렬한 논쟁중의 하나이다.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과 같이 기존의 창조론에 등장하는 창조 신화의 다양한 내용을 진화 이론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신이 "진화의 목적"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유신진화론(有神進化論)과, 다른 한편에서는 창세기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며 생물학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화는 거짓이라고 주장 들이다.
(2) 정치 혁명과 기독교 근대에 있었던 여러 정치 혁명들과 기독교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잉글랜드 내전에서 양측은 의회파와 왕당파로 불렸지만 성공회와 청교도 사이의 갈등 역시 내전의 큰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의 과정에서 독립선언서를 채택한 미국인들은 대부분 청교도와 같은 개신교 신자였으며, 미국 독립 선언서에서 말하는 천부인권은 개개인이 신에게서 받은 것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존 로크와 같은 영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은 종교와 정치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은 미국 헌법 제1조에 “의회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삼을 수 없다”고 명문화 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는 쉽게 분리되지 않았고, 미국 독립 이후 흔히 WASP라 불리는 백인·엥글로섹슨계·개신교도는 미국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이념을 제공한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영국과 미국보다 더욱 급진적이었다. 이들은 혁명을 통해 “기독교”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이성과 자유, 진보”로 대체하고자 하였고, 무신론과 유물론을 부각시켰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까닭은 앙시앵 레짐(구체제) 안에서 로마 가톨릭 자체가 거대한 지배 계급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는 가톨릭과 무엇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를 놓고 대립하였다.
한편,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의 대부분의 혁명지도자들이 가톨릭 성직자나 독립을 했어도 국민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다. (3) 개신교의 분화
종교 혁명과 종교 개혁을 거친 후, 유럽에서는 새로운 신학을 내세운 교파들이 속속 출현하게 된다. 그중에 중요한 교파들
1) 재세례파 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개신교 종파를 가리킨다. 그 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현대의 교파들로는 아미시파,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재세례파에는 여러 분파가 있으나, 16세기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던 교파는 로마 가톨릭과 기타 개신교에서 받은 유아 세례는 효력이 없으며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1534년 2월부터 1535년 6월 까지 18개월 동안 독일의 뮌스터를 점령하고 신정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진압 당하였다.
2) 침례교 침례교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완전한 성인이 침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 16세기 재세례파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으나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신도가 급증할 때 까지 소수 종파로 남아있었다.
3) 퀘이커
17세기에 조지 폭스로부터 시작된 퀘이커는 악에 대한 무저항이 참된 평화라고 보았고 특정한 교단과 전례(典例), 성직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또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너(영어: thee)라고 부르며 국왕 앞에서조차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기존의 교회를 부정하는 이러한 입장으로 퀘이커 교도들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퀘이커에 대한 박해는 1652년 중지되었다.
4) 감리교 감리교는 18세기 영국의 성공회 성직자였고 신학자 존 웨슬리가 세운 개신교 교파이다. 감리교는 전통적인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신자 개개인이 성령에 의해 감화되는 성화를 중요시 하였다. 웨슬리 스스로는 감리교가 성공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흥 운동이라 여겼으나, 웨슬리가 죽은 뒤 성공회와 결별하게 된다.
6. 현대의 기독교
(1) 1차 세계 대전과 기독교
현대의 시작은 관점마다 다를 수 있으나, 오늘날 세계의 역사와 특히 기독교의 역사를 고려한다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를 현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이지만,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 서로가 기독교 국가임을 자부하였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역사상 유래 없는 대량 학살을 벌였고, 각국의 교회는 자국의 승리를 신에게 갈구하였다. 훗날 장로교 신학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도무지 기독교답지 않은 메시지를 전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교회가 일종의 징병사무소 노릇을 한 것은 죄악이었노라고 하였다고...
(2) 가톨릭의 현대화 운동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로마 가톨릭의 제반 사항을 결정한 공의회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敎令) 그리고 3개의 선언을 채택하였다.
교황 요한 23세가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요청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지 100년만에 열리는 것으로,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식에서 교황은 “교회의 가르침이란 박물관의 보물처럼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과, 이전까지 라틴어로 진행되던 미사를 각 지역 언어로 진행하도록 하여 로마 가톨릭을 현지화하고, 신자의 사도직을 확인하고, 신앙의 자유를 확인하는 등 가톨릭 현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개신교의 부흥 운동
19세기 동안 미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부흥운동이 있었다. 대각성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부흥운동은 D.L. 무디, R.A. 토레이, J.W. 체프만 등의 부흥운동가들에 의해 일어나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초교파적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4) 회복주의 표방 운동
근대 이후 기존의 기독교에 대해 초기 기독교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며 스스로를 회복된 기독교라 여기는 교파들이 생겨나게 된다.
1)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은 1870년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에 의해 미국에서 성서 연구 모임이 조직되면서부터 시작된 신흥 종교이며, 1872년에 펜실베이니아주(州) 피츠버그에 국제성서연구자협회(International Bible Students Association)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어느 나라에 있던지, 성서의 법과 원칙을 똑같이 고수한다고 말하며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병역을 거부하고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신념때문에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등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2)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회복된 기독교를 표방하며 1830년 뉴욕 주에서 조지프 스미스 2세와 6명의 설립등기인이 설립한 신흥 종교이다. 이 교회는 일부다처제 등과 같은 사안으로 미국 내에서 여러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이를 엄금하고 있다.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본부가 있다.
3) 오순절교회
오순절교회는 1914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시작된 신흥 종교로서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신에게서 직접 영감을 받는 “방언의 은사”와 같은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중요시한다. 미국 내에서는 흑인 신자가 많은 교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순복음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5) 현대 기독교의 동향
1) 신학의 변화 이성(理性)을 중시하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19세기에 정점을 이룬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예수를 중시하였고, 기적(奇跡)은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건의 상징이라고 해석하였다.(과학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는 기적들은 상징적 의미로 해석)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진보적인 신학운동이며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부 독재와 빈부 격차와 같은 현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19세기 말 이후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면서 주창한 기독교 신학사조로 현대적 근본주의는 1970년대 이후 형성되었다. 이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하며, 성서의 서술에 반하는 진화 이론이나, 여성주의 등을 반대하며, 정치적으로는 우파를 지지한다. 그들은 주장은 ① 성경의 무오(無誤) ②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④ 육체의 부활 ⑤ 그리스도의 재림 등이다
2) 에큐메니컬 운동(교회 일치화 운동) 에큐메니컬 운동은 기독교의 각 교파들간의 다양성 존중과 일치를 주장하는 진보적 기독교 신학운동이다. 기독교가 신교 구교로 갈라지고 수많은 분파로 분화하면서 이단과 정통의 논쟁을 통해서 반목이 끊이지 않고 지금도 계속 분열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거나 방지하기 위한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는 위키백과를 기본으로 하여 정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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