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선아 다음주 일요일엔 온가족이 에버랜드 가자"
와~~아 신나"하는 막내와는 달리 큰딸은 이미 컷다고 시큰둥한다.
"아빠 난 알바가야하니깐 아빠,엄마와 희선이만 다녀와"
"야! 온 가족 행산데 니가 빠지면 재미 없잖아, 같이가자"
조르고, 타일러도 본다만 큰아인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우리 세사람은 에버랜드가 아닌 서울랜드로 행선지를
바꾸어서 놀이기구를 유난히 싫어하는 아내를 대신해
아이와 둘이 신나서 해적선도 타고, 청용열차와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온갓 탈것과 볼거리를 고성을 질러가며 다닐때도 아내는
차분하게 사진만 잘 찍고 있다.
먹거리도 널려있어 아이가 좋아하는 위주로 맛나게 먹으며
행복해 하는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보자니, 나 또한 행복해 진다.
그러고보니 내가 우리 아이만 했을때 부터 커서도 단 한번도
가족여행을 다녔던 기억이 없다.
일찍 결혼하셔서 고향인 오송에선 더 이상 살 수 없어 무작정
아버지의 육촌형님이 계시는 미아리를 찾은 것은 내가 5살때 였고,
우리는 당장 추운 그 겨울을 보내야 했고, 여유가 없었기에
아저씨네와 한방에서 얼키고, 설키며 11명의 대가족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육촌아저씨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지팡이와 밥상을 만들면 아무런 기술없이
농사만 져오던 아버지는 그걸 매고, 들곤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떤 날은 지팡이와 상도 팔았지만, 가지고 나간 물건을 그대로 들고 오시기도 했다.
그렇게 파는 것이 많아질 수록 아버지는 웃으셨고, 오는 여름엔 아저씨의 큰방을 벗어나
"ㄷ"자로된 그집의 문옆으로 짐을 옮기고 부모님과 형과 나, 여동생의 질기고도
기나긴 서울살이가 시작 되었다.
우린 그곳에서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아버지의 다른 사촌의 도움으로
요리사일을 시작하셨고, 눈썰미가 좋고 잘 생기신 아버지는 열심히 잘 하셔서
자격증도 따시면서 다섯가족은 제2의 고향인 김포공항 정문에서 멀지않고,
인천을 가는 똥골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서 그곳에서 27년을 넘게 살았다.
그 안은 참으로 열악했다.
살이가 나아지진 않았으니, "ㄱ"자 형태의 그집은 다섯개의 방이 있었으나
방과방 사이는 쪽문이 있어 통할 수 있었으나, 막아서 통과는 못하고
텔레비젼이나 라디오도 거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울 여유도 없어서
아침일찍 일어나 각자의 일터로 떠나고, 단, 하나뿐인 화장실은 전쟁이였고,
가득 차면, 돌아가면서 화장실을 비워야했다. 이땐, 그래도 집을 나와 조금 걸으면
논과 밭이 많아서 그곳에다 밤에 몰래 퍼다 나르곤 했다.
그 집에서 막내 여동생은 태어났고, 그 동생이 벌써 40대 중반이다.
어머님이 병원에 갈때면, 꼭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때도 어머님이 걱정하시고, 약간은 두려워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나 병원에서
나오실때면 기운이 하나도 없으셔서, 내손을 꼭 잡고 의지하셨고, 집에 오시면 한동안은
누워 계셨다. 이 일은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건 낙태수술이였다.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성실하신 아버님 덕에 우린 배는 골치는 않았으나,
좁은 마루 한켠에 늘 자리를 차지한 곰이 그려져 있는 밀가루를 중학교에 가서야 보지 않았다.
그러니 국민학교를 다니던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은 육성회비라는
누런봉투는 두려움에 대상 이였고, 단 한번도 일년치를 못내서 도장을
한개, 혹은 많아야 세개정도 가 끝이였다.
6학년때는 점심시간이 제일 싫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난 운동장으로 나와 수돗가에서 물로 배를 채우는 날도
여럿되었고, 혼자서 그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말 싫었다.
하루는 나가려는 나를 선생님이 붙잡고, 아이들에게 일러 도시락 뚜껑에 한숱가락씩을
퍼담은 뚜껑밥을 내밀어서 여러번 그 많은 밥도 먹었으며, 친구 태희의 "난 밥이 많아" 하며
자기가 싸온 도시락의 절반을 덜어서 같이 먹자고해 같이 먹기도 했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이 강제로 먹으라 해서 먹는 것도 아닌,
혼자서 수돗가와 그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는게 싫었다가 정답일 것이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나와 같은 아이들이 점심시간엔 도대체 뭘하며 놀고,
뭘 먹고, 선생님의 배달 받은 자장면의 맛난 냄새와 함께,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런 와중에도 소풍날은 일년에 두번은 돌아왔고, 그때마다 밤잠을 설치고,
"우리학교는 학교가 생길때 수위아저씨가 하늘을 나르는용이 될 이무기를
삽으로 죽여서 학교에서 행하는 행사에는 매번 비가온다"는 전설도
내일만은 비켜나가길 바랬다.
"용섭아 오늘 소풍은 가지 마라"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울면서 "갈거야"
하고 맨 몸으로 나서기도 하면, 답답한 어머님에게 얻어 맞기도 하고,
더는 말리지 못하기에 도시락에 맨밥을 싸주기도 하셨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숨어서 그 밥을 먹지만, 어린 난 김밥이 너무도 먹고 싶었다.
김밥에 들어간 소세지나 햄을 넣은 것이 그렇게 먹고 싶었다.
삶아서 한가득 가져온 계란도 먹고 싶었고, 파란 유리병에 거품도 나는
칠성사이다도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즐거운 소풍의 하루는 끝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성실하고, 재밋게 학교를 다녔고,
아버지의 요리실력이 나아지면서 직장을 옮기고, 집도 사서 이사도 했으며
그때부턴 소풍날엔 김밥에 소세지와 계란지단도 넣고, 시금치도 넣은 것을,
기름에 두른 후라이판에 살짝 구워서 먹기 좋게 썰어준 엄마표 김밥을
원없이 먹었고, 사이다는 물론 알콜 음료도 마시며 키득키득거렸다.
자라면서 온가족이 단 한번도 소풍을 가지 못해서 결혼하고, 아내와 아이들 손을 잡고,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강화도를 도시락을 싸서 가기도 하고,
먹을 것을 잔뜩 싸서, 부모님을 모시고 1박2일의 원없는 소풍놀이를 한다.
일 또한 여행업이여서 고객과 세계 곳곳을 누비며 소풍을 다녀오지만,
난 우리 가족과 함께하는 소풍이 제일 소중하며, 고맙고, 감사하고,
온가족이 함께한 제주도에서의 2박3일은 사는동안 날 행복하게 한다.
첫댓글 이것도 방송에 보내라
그럴려고 쓴거야.ㅎㅎㅎ.
형아 짱.. 글솜씨에 감탄하고 있어. ㅎㅎ. 난 한국어 나날이 띄어쓰기 다.틀리고. 어려운 말은 잊어버리고 있어..대신 영어 듣기가 훨 쉬워지고 있어. ㅋㅋ
아직도 훌륭해. 난 반대로 영어가 안들린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