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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딤전5:17 벧전5:1-5 심방하는 목회자인 장로
서론; 권징이 사라진 한국교회의 문제점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대형화 되어 가는 교회가 마치 대기업과 다를 바 없다는 우려들이 있고, 내용적으로는 너무 현세 지향적이고 기복적 신앙을 설교하고 가르친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다 보니 교회도 세속화되어 기득권화되고 보수화되어 낮은 곳을 아우르는 복음의 참된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교회에 대한 본질적 우려 중에 하나가 교회에 참된 치리인 권징이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내에 잘못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쉬쉬 한다는 것입니다. 총회장을 지냈던 목사가 제 7계명을 범하여 현장에서 피하여 베란다 에어컨에 메달려 죽은 것을 가리려다 드러난 사건이 한국 교회의 현실을 말해줍니다. 잘못할 수도 있는데 가리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잘못을 책망하고 도려내고 교회를 순결하게 만들지 않고 타협합니다. 이는 교인은 고객과 같아서 고객들이 발길을 돌릴 것이 무서워 죄를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권징이 없어진 교회의 모습은 참 교회다운 모습을 상실해 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죄로부터 구원을 얻은 무리들의 모임이기에 교회 안에 있는 잘못된 죄를 계속해서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 교회가 스스로 주의하게 됩니다.
권징을 시행하는 기관이 당회입니다. 장로와 목사로 구성된 장로회의 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는 오히려 권징이 잘 시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올수록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세속화나 물질적이고 대형화의 영향도 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권징을 시행하는 당회가 권위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회의 권위는 영적인 권위입니다. 이는 주님이 주신 것이지만 성도들로부터 합당하게 인정되기 위해서 성도들을 섬기는 다스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심방함으로 성도들의 형편을 잘 이해하게 되고 양떼의 고충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권면하고 고치도록 하고 심하면 권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심방하는 장로님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표현이 되어버렸습니다. 심방은 부목사나 여전도사 등을 두어서 전문적으로 심방하게 합니다. 물론 현대 사회가 바빠서 장로들이 심방하기 어려운 사회 여건이 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교회의 본질을 허무는 여우가 휘저은 결과와 같습니다.
심방은 하지 않으면서 장로들이 당회로 모입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당회는 행정적인 일만을 처리하게 됩니다. 성도들을 영적으로 돌아본 결과를 의논하고 기도하는 자리가 되기 보다는 행정적이고 재정적인 일을 결정하고 처리합니다. 굉장히 권위가 있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빵점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기업이나 국가 기관에서 돈의 사용을 결정하는 것이 실세입니다. 그래서 당회도 제직회가 결정하여야 할 재정 사용을 쉽게 결정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돈의 힘보다 영적인 권위를 더 존중히 여깁니다. 한 영혼의 영적인 삶이 모든 다른 어떤 것보다 귀하고 권위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회는 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학습과 세례 혹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심방하고 권징함으로 교회의 순결과 영적인 일에 무엇보다 관심을 가지도록 헌법이 규정합니다.
심방을 하지 않고 당회에 모여 앉아서 성도들의 잘못이 있다고 권징을 하기에는 너무 무능력한 교회와 당회가 됩니다. 실제로 성도를 찾아가서 권면하고 달래고 고치라고 노력을 하지 않고 권징의 결정만 하는 당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노력들이 선행된 후에 그래도 듣지 않는 성도들에 대해서 사랑의 채찍으로서 권징이 의미 있습니다. 바빠서 심방을 못할 정도면 장로의 부름에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 좋고 안정된 직장이나 사업체를 가졌다는 것이 장로의 자격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아도 성도들을 돌아보고 심방하는 일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삶을 희생할 수 없는 성도가 장로의 부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바로 심방하지 않는 장로들이 당회에 앉아서 영적인 다스림이 아닌 행정적인 다스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이 심방을 하지 않음에는 장로들의 문제와 목사의 문제가 공존합니다. 또한 목사만을 목회자로 인정하는 성도들의 인식도 문제인데 이는 목사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독점하려는 잘못된 목회관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 다음은 장로들 스스로 장로의 권위의 핵심인 돌아보는 심방의 기능을 이런 저런 이유로 포기하는 것도 둘째 이유입니다.
교회가 지난 주간부터 정기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격년으로 정기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가정에 주의 이름으로 목사와 교구를 담당하는 장로님과 함께 찾아가서 교제를 나누고 권면을 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심방이라고 하면 성도들의 가정에 찾아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심방은 교회를 영적으로 다스리는 장로님들이 성도들을 다스리는 구체적인 행위들입니다.
교회에서 다스린다는 말을 쓰는 것이 성도들의 귀에 거슬릴지 모르겠습니다. 다스린다는 말은 세상에서 항상 군림한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혹은 성경에서 다스린다는 말은 섬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높고자 하거나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다스리는 직분을 받은 장로님들이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방식이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여서 영적인 섬김과 돌봄을 가지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대화와 교제도 포함되지만 영적으로 건강하게 지내는지를 확인하고 격려하고 혹은 잘못된 삶의 방식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심방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삶은 성경에 항상 근거를 둡니다. 심방을 장로님들이 하시는 것도 교회적인 결정이나 전통이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한국 장로교회의 본문 이해와 이에 대한 교정
본문 딤전5:17 말씀에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배나 존경해야 하는 이유로서 말씀과 가르침으로 수고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장로들의 역할이 분명히 제시됩니다. 장로들은 다스리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를 다스립니다. 이러한 다스림의 구체적인 방식이 바로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바로 목자들입니다.
벧전5:1-3절입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들의 역할은 목자로서 양무리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돌봄으로서의 다스림은 세상적인 통치로서 다스림과 차이가 납니다. 세상에서는 권력이 있는 자가 아래 사람들에게 자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다스리는 방식은 목자로서 다스리는 장로는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목자입니다. 양무리를 치고 먹이는 목회자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여러분들은 조금 의문스러운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장로가 목회자라 하면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입니다. 목사만이 목회자가 아닌가라고 대부분 알고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목회자는 목사지 장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로는 평신도의 대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직자로서 목회자인 목사를 돕는 역할이 장로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 교회에서의 장로와 목사를 구별하는 이해는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들이 진정한 목회자입니다. 양떼를 치는 목회자입니다. 이 말은 목사도 장로라는 것입니다. 목사도 장로입니다. 영어로 목사를 부르는 칭호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Pastor라는 칭호는 바로 목자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 목사라는 단어가 엡4:11절에 목사와 교사로 딱 한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목사도 목자라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목사라는 단어는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대신에 장로라는 단어는 많이 나옵니다. 장로는 감독으로 불리우기도 합니다. 감독이나 장로는 같은 개념으로 다스리는 자입니다.
목사는 원래 장로입니다. 목사는 없어도 교회로 설수 있지만 장로가 없으면 원칙적으로 교회로 설수 없습니다. 감독이나 다스리는 직분이 없이는 교회가 제대로 설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장로 중에 설교와 가르침을 위해서 역할을 더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장로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 읽은 본문을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설명하는 본문으로 사용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로 존경하라는 말은 일반적인 장로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가르치는 장로 즉 목사로 구별합니다. 그래서 장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현실적 이해를 할 수는 있지만 본문에 의지할 근거가 없습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구별을 하는 이유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하고 뒤에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문장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해야 하는 이유가 뒤에 나온 것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리기에 배나 존경을 해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더할 것이니라는 표현은 원래는 "특히" “더욱이”라는 부사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하는데 특히 그들은 말씀과 가르침으로 수고하기 때문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왜 배로 존경합니까? 이것은 일반적인 세상 질서에서 성도들은 상전이나 국가의 위정자를 존경하도록 권면합니다. 본문의 가장 가까운 문맥인 딤전6:1에서 종들은 상전을 존경해야 한다고 사도는 가르칩니다. 그러나 잘 다스리는 장로에게는 배나 존경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세상의 경험이나 지식 학력 그리고 처세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리고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실제로 딤전 5:15절의 뒷 문장을 받는 관계대명사는 앞의 장로들과 동일한 사람입니다. 두 종류의 장로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한 장로를 말합니다. 장로들은 다스리는데 무엇으로 다스립니까? 권력과 투표에서 당선된 민의의 힘으로 다스립니까? 그것이 아니고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립니다. 말씀과 교리를 가지고 장로의 다스림을 시행하고 실제로는 양떼들인
성도들을 말씀과 교리로서 먹이고 가르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자인 장로입니다.
장로들은 장로들의 회를 통해서 말씀과 가르침을 가지고 잘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거기서 말씀과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사로 구별합니다. 성경을 설교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훈련을 받도록 한 다음 목사로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같은 이민 교회는 다른 교회가 길러 논 목회자를 청빙함으로 그런 짐을 덜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회가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마땅히 감사를 표현할 필요도 있습니다. 교회는 혼자 있지 않습니다.
목사는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치기에 합당하게 양육을 받은 사람일 뿐입니다. 목사가 성직자로서 일반 성도들과 다르고 장로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사가 말씀과 가르침으로 설교하지만 장로들도 동일한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림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의 경험과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리고 섬기고 권면하고 조언을 해야합니다. 세상의 체세술을 조언하는 것이 장로의 역할이 아닙니다. 말씀과 가르침으로 심방하고 권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을 세상의 어떤 학자의 말보다 어떤 스승의 말보다 배나 존경하고 따라서 순종해야 합니다.
2. 종교개혁의 의의와 관련해서 본문의 의미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리는 장로들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 개혁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로부터 개혁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중세 교회 즉 로마 교회는 카톨릭 교회를 말합니다. 카톨릭 교회는 사제와 평신도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 전에 중세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시여하는 일은 사제의 몫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은 성경도 가지지 못하였고, 설교나 예배의 언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에 알아 듣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성당에 있는 성상이나 그림이나 미사의 의식을 통해서 깨닫는 정도입니다.
사제와 평신도는 엄격히 구별이 되었습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개신교의 용어가 아닙니다. 구교의 용어입니다. 이것은 거룩과 세속이라는 구별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의 표현입니다. 거룩한 영역에 있는 사제들이 세속에 있는 평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시여하고 나누어줍니다. 미사의 성체를 나누어 줍니다. 또한 고해성사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어 줍니다. 고해 성사는 사제가 성도들에게 사죄를 주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는 말씀이 닫혀있고 사제들이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은혜를 얻는 방편이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밝힌 사건입니다. 오직 은혜는 오직 말씀 즉 성경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오직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을 때 효력이 있지 사제가 미사의 성체를 주었기 때문이거나 고해성사에서 사죄를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길을 사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이제 누구나 직접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성경번역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위클립이 번역을 하였고, 독일에서는 루터가 자국어로 번역을 함으로 은혜의 원천인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직접 주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 구원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제의 손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만인 제사장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은혜를 얻는 일에 제사장과 같이 중세의 사제와 같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을 불렀던 것이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손에 주어졌고 거기에서 은혜를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과 세속의 구별을 철폐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 교회에는 다스리는 역할과 섬기는 역할을 하는 직분자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그들을 부르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직분자는 중세의 사제와 다릅니다. 신분적인 분리를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세속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섬기는 다스리는 장로와 섬기는 집사를 부른 것입니다. 장로와 집사가 세상의 권세와 돈으로 다스리고 섬기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리고 섬기도록 부름 받은 직분입니다.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부름을 받은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다스리고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세운 것이 바로 직분자들입니다. 장로들은 세속의 현장에서 거룩을 실천하도록 부름을 받고 특히나 성도들을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농사의 현장에서 공장의 일터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또한 부도를 매꾸기에 급급하여 자금을 찾아 헤매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성도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직분자들입니다. 그들의 현장을 말씀과 가르침으로 극복한 그 능력을 믿음으로 증거하며서 성도들을 섬기는 자들이 교회의 직분자들입니다.
단지 설교를 할 만큼 성경과 성경 언어를 잘 익히지 못하기에 장로들 중에 말씀에 전념할 사람을 구별하여 세운 것이 목사입니다.
종교개혁은 성속의 구별 즉 사제와 평신도의 구별을 깨뜨리고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성도들 중에 성도들을 질서있게 잘 다스리도록 장로와 집사로 부른 것입니다.
오늘 장로들은 평신도의 대표가 아닙니다. 말씀과 가르침으로 다스리는 감독이자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목자로서 성도들을 심방하는 것이 주된 일 중에 하나입니다. 성속이 분리된 카톨릭 교회는 일반적으로 세속에 있는 성도들이 거룩한 신부에게로 찾아와서 고해 성사를 함으로 사죄의 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세속의 한 가운데서 사는 목사나 장로가 세속의 삶에 고통하는 성도에게로 말씀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그것이 심방입니다. 그의 죄의 고통과 영적이 아픔들을 돌보면서 말씀으로 치료하고 세우는 것이 바로 심방입니다.
3. 목사와 장로의 관계에 대한 현실적 적응
이제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더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말씀과 가르침으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말했습니다. 그 중에서 설교와 예배의 인도 그리고 성례의 인도를 위해서 또한 상근적으로 어려운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위해서 말씀의 사역자로서 목사를 세웠습니다. 목사는 성직자이고 장로는 평신도라는 구별은 틀린 것입니다. 목사도 성도입니다. 목사는 직분일 뿐입니다.
목사가 설교준비를 위해서 혹은 가르침을 위해서 전업으로 목사의 직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교회적 전통이지 성경적인 원칙은 아닙니다. 목사가 직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가 직장과 교회의 말씀의 봉사를 겸할수 있어서, 만약에 가정을 영위할만큼 소득이 있다면 그는 교회에서 사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장로가 교회를 봉사한다고 사례를 받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목사는 의례 전업이어야 하고 사례를 교회에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사는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아닙니다. 이해를 위한 극단적인 예를 든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생각의 전환을 하게 합니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절대적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목사는 말씀의 훈련을 더 잘 받았기에 모든 회에서 의장이 되어서 회를 성경에 근거하여 질서있게 인도하는 역할을 일반적으로 헌법에서 부여받지만 그러나 그것이 절대이거나 권력은 아닙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면서 장로님들의 심방에 대해서 정리를 하겠습니다.
심방은 거룩한 성직자들이 세속에 헤매고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늘의 소망을 받은 성도들 중에 부름을 받고 세워진 장로들이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들고 성도들을 찾아가서 양떼들의 형편을 살피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년 전에 장로님들과 제가 심방을 함께 했습니다. 구역장이나 집사님들이 심방을 함께 가지 않았고 지금도 가지 않는 것은 이 심방은 다스림으로서 돌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로님들이 올해도 경험을 하시고 나면 내년 쯤에는 장로님들이 스스로 심방을 하는 기간을 정할 까 합니다. 심방은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다스리는 통치행위이기에 증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항상 둘이서 하도록 합니다. 심방은 상담과 유사하지만 상담시간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항상 같이 합니다. 장로님들끼리 심방을 하시게 되면 두 분이 함께 한 가정에 가시게 됩니다. 개인적 교제는 늘상 이루어지고 개인적인 만남이 가능하지만 영적인 다스림이자 돌봄인 심방은 2명이 장로가 함께 합니다. 말씀과 가르침으로 권면하는 다스림과 봉사에 대한 증인이자 그 권면을 받아들이는지의 증인입니다.
이것은 장로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장로들은 수십년을 같은 교회에 있었기에 애증이 교차합니다. 항상 목사를 의지해서 관계를 맺어가려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당회원들 스스로 관계를 잘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장로들의 돌보는 목자의 심방의 사역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으로 가정과 삶을 누리는 결과들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교단마다 법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법은 하나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전은 바로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장로의 심방, 우리 교회 목사님께서는 별로 내켜하시질 않아서 별로 신경을 못썼는데 말씀을 통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원리적인 가르침이 한국교회에서는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설까요? 저도 어제 대구의 한 교회에서 직분에 대한 특강을 했습니다만, "원리는 원리고, 현실은 현실"이란 것이 실상에 대한 재 확인 결과입니다.
문제는...장로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고..그로 인해 형편과 여건이 가능해도 심방에 함께 하지 않지요. 높은분(?) 모시고 다니기가 여간 신경쓰이지 않거든요.(동역자 의식의 결여로 인해 상하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아직도 많습니다.어떤 목사님은 장로를 높은분으로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함께 다닌다면 성도들의 형편을 살피며 그들이 말씀대로 사는지 감독하고 위로하는 일뿐 아니라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을 감지해서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교회를 바르게 세워나가는데 유익하다고 봅니다..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keeper77카페독서실로 스크랩해 갈께요^^
어찌 되었던 우리 교회도 춘계대심방이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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