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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글다운 글을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오늘이 야오 밍의 생일인만큼 야오을 주제로 하려는데... 제가 갖고 있는 사진이 별로라서 포샵을 시도했는데 구린것 같군요... 꾹 참고 한번만 봐주세용^^:
아시아를 넘어 NBA의 특급센터로
1980년 9월12일밤 7시를 좀 넘어서, 상해(샹하이)제6인민병원 산부인과에서 보기드문 우량아가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전에 예견된 일. 일년전에 결혼한 당시 중국 최장신 커플 농구선수출신의 야오 즈위안(2.08m)과 팡펑띠(1.88m)사이에서 태여난 아기였던것. 출생시 몸무게가 무려 5kg에 달하였던것이다. 이 아이의 키높이는 그들부부친구들인 농구운동선수들도 수없이 예측을 했것만 나중의 결과는 역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되였다. 병원측에서도 이렇게 긴 다리에 네모평평한 아긴 처음 보았을것이다. 손발크기만 봐서는 3살먹은 아이와 비슷했기때문. 체중도 5kg로서 웬만한 아이의 2배에 달했다. 그 아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야오 밍.
야오 밍의 앞길은 태여날적부터 이미 정해져있었다. 누가 봐도 아빠 엄마의 뒤를 따라 농구선수가 될거라고. 하지만 그의 부모님들도 키높이에서만 우세를 가졌을 뿐이지 장차 중국농구의 새시대를 이끌어갈 선수로는 꿈에서조차도 상상을 하지 못했었다. 더우기는 아메리카대륙을 흔들것이라는것을.
중국운동선수들은 전 소련의 배양체제를 도입하여 운동기질이 있는 아이들은 체육전문학교로 보내지기 일쑤. 그의 부모들도 그러한 체재속에서 배양된 선수였었다.야오의 엄마는 힘겨운 선수생활로 가심해진 허리부상으로 79년에 은퇴를 하여야 했었고 아빠는 전기부품작업직장을 다녔었으나 78년 엄청난 키높이로 상해농구팀에 입단하게 되였었던것이다.그러한 농구선수생활로 두사람은 인연을 맺었고 결혼하여 1년뒤 야오 밍을 가졌다.
결혼초 그들의 부부내외의 월소득은 80위안에 불과(그 시절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될지는 몰라도 엄청 적어보임). 그것으로는 엄청나게 빨리 커가는 어린 야오 밍까지 먹어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하여 그들 부부는 반 정도 허기진 배를 달래며 걸탐스럽게 먹여주는 아들자식을 보는것은 일상생활중 하나. 어둠이 깃드는 부근 작은 남새시장에서 낡은 작업복차림의 야오 엄마가 늘 고기파는 매점이나 쌀가게에서 낮은 소리로 흥정하였다고들 이웃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고들 했었다.
그들 부부의 수입 대부분이 야오 밍의 먹는 음식값으로 지출되였다. 그 덕분인지 4살때의 야오 밍은 1m를 훌쩍 넘겼고 체중도 27kg에 달했다. 그러고 4년뒤에는 1.70m까지 이르렀다. 그의 농구선수소질은 웬만한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수있었다.
야오 밍 엄마의 친구 쉬 웨이리는 공교롭게도 그들이 사는 구역 소년체육학교의 당 조직 고급간부로서 어려서부터 야오 밍이 커가는것을 지켜볼수 있었다. 그는 어린 야오 밍이 하루 빨리 체육학교에 들어와 체계적인 훈련을 받길 원했다. 그러나 지식의 한계로 고생한 그들 부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어린 야오가 일반 학교에 진입하여 보다 많은 지식을 배울것을 원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야오 밍이 체육학교에 진입하게 되면 적어도 충분한 영양을 흡수할수 있도록 음식을 제공할수 있다는 설득임에 빈곤에서 허덕이던 부부는 항복하고 말았다.
야오 밍은 행운스럽게도 개혁개방이 시작하던 시대에 태여나 부모님들이 접할수 없었던 신생사물들을 배울수가 있었고 어릴적부터 아름다운 희망을 갖고 있었다. “ 어릴적 꿈은 고고학자가 되여서 세계를 돌면서 사냥하고 모험을 해보는 것이였다. 물론 지금의 체구로썬 비좁은 동굴속을 기여들어가는것은 무리였을것이다.”야오 밍이 기억을 되새기며 하는 말이였다.
9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부모가 그를 체육학교에 보내려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그는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는 부모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순둥이였기 때문. 매일 오후 방과후에는 얌전히 교문앞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로 그를 체육학교로 데려가기만을 기다렸다. 매주 훈련시간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섯날, 야오 밍은 농구에 눈꼽만치도 흥미가 없었지만 그는 거의 청가를 요구하지 않았었다. 그의 부모님이 하라고 한 일이기 때문에.
갓 입교했을때 그의 커다란 덩치와 둔한 몸놀림으로 그는 갖가지 조롱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조롱따위는 혹독한 훈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기본기훈련은 간단하지만 단조로운것. 어린 아이들에게 농구라는 스포츠에 흥미를 느끼게 한다는건 쉬운 일이 아니였다. 매번 야오 밍이 기가 죽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근처의 야외에 손수 만들어 박은 농구링에 데려다 슈팅연습을 시키군 하였다. 야오 밍이 일정한 수의 슛을 성공할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자그마한 선물을 선사하군 하였다. 야오가 큰 후에도 늘쌍 농담삼아 하는 말:” 농구는 아버지의 선물유혹에 넘어가 배운것” 야오 밍이 9살되던 날 어머나가 어디선가 묘기농구팀 할렘 글로브트로터스(Harlem Globetrotters)의 퍼포먼스 티켓 두장 구해와 야오 밍와 함께 구경함으로써 야오 밍에게 농구가 얼마나 흥미로운가를 처음 느끼게 하였다.
비록 아들에게 농구에 대해 취미를 느끼게 하였지만 어머니로서는 종일 야오의 앞날을 위해 걱정하군 하였다. 그는 오직 농구가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으로 야오 밍에게 하라고 하였지만 자식이 더욱 많은 지식을 배우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야오 밍한테 전업적인 스포츠와 거리를 멀리 하게끔 부추겼었다. 오로지 학업에만 몰두하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바람은 초라한 아들의 성적으로 물거품이 되였다. 야오 밍은 비록 역사와 지리과목을 즐겨하였지만 기타 과목은 일반적인 애들을 따라가기에도 버거웠다. 1992년 야오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에 친구 쉬씨의 끈질긴 권유에 어머니는 야오를 쉬씨가 있는 지역소년체육전문학교에 진입하게 되였다. 수년후 야오밍의 한 친구가 말하기를 농구를 위해 학업을 포기한것은 야오 밍이 가장 후회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2년후 13살이 갓 넘은 야오의 신장은 이미
한동안 야오 밍의 어머니는 야오의 신발사이즈로 고민을 했어야 하였다. 크나큰 상해시에서 야오의 사이즈에 걸맞는 농구화를 구입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하는수 없이 그는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친구의 남자친구를 통하여 92달러를 지불하고 Nike Air 한컬레를 구입하게 되였다. 공교로운것은 후날 제일 먼저 야오 밍과 신발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회사가 바로 나이키였고 신을 구입해준 짱 밍지란 사람이 야오의 에이전트팀 책임자로 된것이다.
그것을 계기로 야오의 어머니는 아들이 미국에 가서 농구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출국의 첫걸음의 발판이 된 회사가 바로 나이키 회사였다. 1996년 한떼거리의 나이키 회사 고위급 직원과 관리인원들이 처음으로 2.18m로 자라난 야오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자리로 야오의 모든 스포츠장비들을 후원해줄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나이키 청소년농구캠프에 참가해줄것을 부탁하였다. 야오는 그 캠프에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98년 인디애나 폴리스캠프에도 참가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후날 그가 국제무대에 빠르게 적응할수 있는 디딤돌이 되였다.
거인에게도 사랑은 찾아오는 법. 18살의 야오 밍은 같은 상해시의 여자청년농구팀의 예리라고 하는 여자애를 짝사랑하게 되였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야오 밍은 고백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다가 식음전폐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꼴을 도저히 볼수 없었던 친구들이 어떤 말을 해줘도 소용없었고 한 친구는 당시 여자배구팀 얼짱이라고 불리우던 쪼오루이루이까지 찾아가서 야오와의 소개팅을 주선했다고들 했었다. 쪼오도 생각이 있었던지 만난보겠다고 했지만 야오 밍은 일편단심 예리뿐. 결국 소문은 예리본인의 귀까지 들려갔고 예리가 만나보자고 했었다는 말씀. 그 소리를 듣고 펄쩍 뛰여난 야오 밍, 한걸음에 달려가 몇년동안 마음속에 오래도록 저장했던 말들을 모두 털어놓았다는 하였다. 휴스턴에서 11번을 선택한것도 예리의 국대등번호와 같기 때문이라는 말들이 자자했었다. 당시 야오 밍의 집안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던 예씨 집 부모들은 강렬히 반대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반대할수록 더 사랑하는건 필연인가봐. 둘은 예쁜 사랑을 키워갔고 예씨 집 부모들은 야오가 미국에 가 큰 돈을 벌자 입이 귀에 걸려서 오히려 앞장서서 두사람이 잘되기를 바랬다고 하였다.
2002년 21살의 야오 밍은 소속팀 상해 삭스팀을 이끌고 국내 리그 우승을 따내고 NBA입성이 시기에 도달했음을 느꼈다. 소속팀도 우승을 한 다음날 야오 밍의 NBA진출을 동의한다고 통고하였다. 왕즈즈의 국대차출거부로 중국농구협회와 마찰을 겪는것을 지켜본 야오의 어머니는 야오 밍이 혼자서는 왕즈즈의 전철을 밟을것을 우려해 아예 오직 야오를 위한 에이전트 팀을 구성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짱 밍지가 책임자로 나선 이 팀은 법률, 사무, 광고 등 여러분야로 책임진 8명의 에이전트로 야오가 NBA에서 성공할수 있는 든든한 바침목이 되였고 후에 이젠렌의 NBA진출의 본보기로 된다.
그해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휴스턴 로켓츠에 지명된 야오 밍은NBA에 정식 입성하기도전에 아시안 게임에서 고배를 마시게 된다. 왕즈즈가 빠진 중국팀은 경기마다 40점이상의 막강한 전력으로 결승에 진출했지만 이상민의 극적인 3점 버저슛으로 결승에 올라온 한국팀에게 막판 60여초동안 9점의 리드를 지키내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2점차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그치면서 코리아 쇼타임의 매운 맛을 보게 된다.4쿼터 마지막 덩크를 하였으나 이미 타임아웃! 이 패배로 왕즈즈와 비교되면서 야오의 NBA성공여부가 불투명하게 되였다.
인디애나와의NBA데뷔전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인드래프트 1순위가 오직 중국시장을 겨냥한 마케팅전략이라는 의심을 야기시켰고 급기야는 대 선배 찰스 바클리의 조롱까지 받게 되였다. 그러나 야오 밍은 아시아농구와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레이커스전의 20득점에 이어 댈러스전에서는 슈퍼스타급적인30점, 16리바운드까지 퍼부으면서 역대 베스트50에 선정된 찰스경을 당나귀엉덩이에 키스하는 장면까지 연출시켰다. 무서운 속도로 정규시즌에 적응해 나가면서 동양인도 NBA에서 성공할수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데뷔이래 팀 멤버들이 하나하나 바뀌였지만 야오 밍은 확고부동하게 팀내 주전 센터자리를 지키면서 샥 오닐의 아성을 위협하는 등의 선전을 보여줬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풀옵 1라운드를 넘지 못하는 징크스에 매달리고 있다. 07-08시즌에는 아예 부상으로 55경기만에 시즌아웃되는 악재를 겪기도 하였다.
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대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부상으로 인한 원인일까? 골밑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외곽슛을 여러번 시도하는것으로 보아 다가오는 시즌에는 새로운 공격루트를 보여줄지 궁금이 된다. 진정한 특급센터로 되는 단 한가지, 바로 우승! 우리 휴덕후들은 우승을 간절히 바라고있다!!
Ps: 생일축하: 부상을 이겨내고 파이널 우승까지 가기를 기원합니다! 야서방~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저의 글을 감상평가만 하시고 의문점이나 틀린군데가 있으면 바로잡아 주시길 바랄뿐 펌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아직은 미완성이고 주어들은 것들을 모은 글이라서 신빙성이 차할것입니다...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굽신~굽신;;
프,.
첫댓글 좋은 글 잘봤습니다~~제발 부상만 안당했으면....
생각나는대로 적은 글인데 잘 보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님 말씀대로 되였으면 참으로 좋겠네요~^-^
오! 잘봤습니다...^^
어이쿠,Yao!!님, 금쪽같은 추석휴가에 시간을 내주어 초라한 글을 보셔준것만으로 감사한데 칭찬까지 해주시다니... 감동 무한대~ 님은 역시 아이디 그대로 야오를 좋아하시는것 같군요@@@
잘봤습니다.